소설리스트

27화 (27/148)
  • * * *

    보름간의 항해 끝에 성 상티모니아의 성지(聖地), 성도 살리바에 도착했다. 정박을 위해 선원들이 부산히 움직였다.

    일찌감치 갑판에 나와 초조하게 상륙을 기다리던 유진은 당장이라도 뛰쳐나가고 싶은 얼굴이었다. 모처럼 생기 도는 얼굴이 반가워 아리아드네가 빙글 웃으며 다가섰다.

    “봐, 내가 안 죽고 무사히 도착할 거라고 했잖아. 축하해.”

    아리아드네가 악수를 위해 내민 손을 멀뚱히 보던 남자가 피식 웃으며 손을 맞잡았다.

    “죽기를 바라기라도 한 것 같은 말투네. 아쉽게도.”

    유진은 어깨를 으쓱하며 눈썹을 치켜들었다. 바다 위에서 그렇게 절절맨 건 조금도 기억하지 못하는 투였다. 마주 보며 웃음을 터트린 아리아드네가 장난스레 대꾸했다.

    “안 돼. 나 파혼할 때까지는 무사히 살아 있어 줘야 해.”

    “아아, 아직 쓸모가 남았다?”

    배에서 내릴 생각으로 가득한 유진은 평소보다도 훨씬 너그러웠다. 다른 때였다면 짧게 대답하고 말았을 실없는 소리에도 곧잘 맞장구를 쳐 주었다.

    “아직 제대로 써먹지도 못했는…… 알았어. 그럼 나중에 봐.”

    대화를 이어 가던 아리아드네가 다가온 메르디에스 기사와 함께 자리를 떠났다. 유진의 시선이 자연히 멀어지는 아리아드네에게 닿았다.

    훌쩍 멀어진 여자는 순식간에 사람들에게 둘러싸였다. 아리아드네 주위를 둘러싼 여자들이 고칠 것 없이 완벽해 보이는 의복과 머리를 쉼 없이 매만졌다. 시녀들과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아리아드네가 빙그르르 한 바퀴를 돌자 주위에서 왁자지껄 웃음이 터졌다.

    한바탕 웃음을 터트린 아리아드네가 웃음기를 싹 지운 얼굴로 메르디에스 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선착장에 내려섰다. 아리아드네가 마지막 발판에서 내려와 바닥에 발을 디디던 순간이었다.

    아, 유진은 저도 모르게 낮은 소리를 흘렸다.

    잠시 발을 삐끗했는지 아리아드네가 작게 휘청였지만 그가 활약할 기회는 없었다. 아리아드네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싱긋 웃으며 도열한 성기사들 사이를 빠져나갔다.

    정말 한시도 눈을 뗄 수 없는 여자였다. 유진이 성큼 걸어 아리아드네에게 다가갔다.

    “어? 어어! 방문자님…….”

    유진과 함께 내리려고 준비 중이던 안테로가 다급한 목소리로 그의 뒤를 쫓았다. 어수선해진 소란에 아리아드네가 뒤를 힐끗 살피다가 어느새 옆에서 걷고 있는 유진을 보며 물었다.

    “어? 내가 듣기론 당신이 행렬 중앙에서 걸을 거랬는데?”

    “그랬다간 언제 도착할 줄 알고. 됐어.”

    유진이 귀찮다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하긴 하얀 사제복을 뒤집어쓴 사제들 사이에서 느릿하게 걷는 유진이라니. 좀처럼 상상하기 힘든 광경이었다.

    아리아드네는 준비된 마차에 올랐다. 순백의 말을 탄 성기사의 호위를 받으며 이동한 마차는 곧 살리바 대신전에 도착했다.

    교황의 거처이자 성 상티모니아의 심장인 살리바 대신전.

    새하얀 대리석으로 지은 뾰족한 건물들이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 있었다. 흰 대리석 위를 뒤덮은 황금이 빛을 받아 찬란하게 빛났다.

    ‘돈으로 믿음을 사나. 아니, 믿음으로 돈을 번 건가.’

    아리아드네가 살리바 대신전을 보며 그런 감상에 빠져 있을 때였다.

    도열한 성기사와 사제들이 차례대로 무릎을 꿇었다. 하얀 옷을 입은 사람들이 연이어 무릎 꿇는 광경은 마치 도미노 게임처럼 보이기도 했다.

    상아로 만든 골패(骨牌)를 툭 친 것처럼 줄줄이 무릎 꿇은 사람들이 이윽고 아리아드네 앞까지 당도했을 때, 그녀의 앞으로 한 여자와 여자를 뒤따르는 남자가 나타났다.

    “순례의 길이 평안했는지 모르겠군요. 성 상티모니아의 축복 속에 평안하시길.”

    여자의 새카만 머리카락은 바닥에 끌릴 정도로 길었고, 눈동자는 마치 피처럼 붉은색이었다.

    그녀가 바로 피의 학살자, 살리바의 마녀, 정결한 정염(情炎)이라 불리는 성 상티모니아의 교황 아그네스였다.

    * * *

    “메르디에스의 딸과 그 수행원이 방문자님과 함께 도착했다고 합니다.”

    사제의 말에 아그네스는 고개를 짧게 끄덕였다.

    “예상보다 일찍 도착했군.”

    아그네스의 손에는 위스키가 담긴 잔이 들려 있었다. 투명한 유리잔을 가득 채운 황금빛 액체가 일렁이는 것처럼 흔들렸다.

    그녀가 살리바 대신전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살리바 대신전은 황금으로 만든 성이라는 칭호에 걸맞게 외벽은 물론이거니와 내부 장식도 황금빛으로 가득했다.

    아치형 천장에는 농도를 달리한 황금빛이 기하학적인 무늬를 그리고 있었고, 천장에서 쏟아지는 햇빛은 어지럽게 반사되어 그 자체로 또 하나의 금빛을 이루었다.

    “방문자께서 제법 거물을 데리고 귀환하시는군요.”

    랭스턴 공국의 주인이자 성 상티모니아의 의결 기구인 멘술라의 한 축인 랭스턴 공작, 시몬 랭스턴이 다리를 반쯤 꼰 채로 손가락을 까딱이며 말했다.

    “메르디에스 공작도 아닌 공작 후계가 무에 그리 대단해서.”

    아그네스가 잔을 흔들자 잔 안에 담긴 얼음이 부딪혀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넓은 공간에 울려 퍼졌다.

    “그리 말할 것은 아니지요. 이미 한참 기운 페렌트의 왕좌를 단박에 뒤집은 자가 아닙니까.”

    “페렌트의 왕좌에 관심이 많구나, 시몬.”

    앞으로 몸을 쭉 내민 시몬의 얼굴을 얼음 잔으로 밀어낸 아그네스가 얼굴 가득 조소를 머금었다.

    “그럴 리가요, 누님. 저는 언제까지고 누님의 신실한 종이라니까요.”

    시몬이 과장된 표정과 몸짓을 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무릎을 꿇었다. 아그네스는 제 발치에 엎드린 이복동생을 향해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시몬, 주인을 몰라보는 개는 언젠가 가죽이 벗겨지는 법이다.”

    고개를 치켜든 시몬이 녹음처럼 짙은 녹색 눈동자를 번득이며 말했다. 시몬과 아그네스의 생부이자 전대 교황 테오도로를 쏙 빼닮은 눈이었다.

    “누님, 혼자 다 드시면 체합니다. 지나친 욕심은 화근이 되지요.”

    아그네스는 반쯤 얼음이 녹은 위스키를 천천히 들이켰다. 독한 알코올이 혀를 지나 목구멍을 타고 내려갔다.

    피처럼 붉은 그녀의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아그네스는 이복동생의 행태가 퍽 흥미롭다는 듯 턱을 괴었다.

    “성 상티모니아의 발길이 닿은 곳이라면, 모두가 내 것인데 구태여 내가 욕심을 낼 필요가 있느냐.”

    “뭐, 좋습니다. 누님이 엘바에만 손대지 않는다면 저는 언제까지나 누님 편입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시몬이 먼지 하나 묻지 않은 옷을 툭툭 털며 장난스레 말했다. 그때, 베아트리스가 활짝 갠 하늘처럼 웃으며 달려왔다.

    “어머니, 들으셨어요? 유진이 지금 도착했대요.”

    “그래.”

    느릿하게 몸을 일으킨 아그네스가 바닥에 발을 디뎠다. 그녀가 시몬을 돌아보며 한쪽 입꼬리를 비죽 끌어당겼다.

    “말하지 않았더냐. 성 상티모니아의 발길이 닿은 곳은 모두 내 것이라고.”

    아그네스는 오만한 얼굴로 시몬을 내려다보다 몸을 돌렸다. 그녀의 걸음마다 치렁치렁한 검은 머리카락이 길게 끌렸다. 멀어지는 아그네스를 보는 시몬의 얼굴에서는 미소가 씻은 듯이 사라졌다.

    교황이 도열한 성 상티모니아 성도들 사이를 천천히 걸으면 그녀의 걸음에 맞춰 사람들이 줄줄이 무릎을 꿇었다. 천천히 걸어 반대편에 도착한 아그네스가 멈춰 섰다.

    찬란한 빛처럼 밝은 금발과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처럼 새파란 눈동자를 가진 여자가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아그네스와 눈을 마주쳤다.

    그녀가 바로 황금의 수호자, 풍요의 성주, 녹색 평원의 주인이라 불리는 메르디에스의 후계 아리아드네 메르디에스였다.

    “순례의 길이 평안했는지 모르겠군요. 성 상티모니아의 축복 속에 평안하시길.”

    먼저 인사를 건넨 것은 호스트라 할 수 있는 교황 아그네스였다.

    바닥까지 끌릴 정도로 치렁치렁한 까만 머리카락과 피처럼 새빨간 눈동자. 어디를 보아도 자애로움을 최고 미덕으로 삼는 종교 지도자에 어울리는 외양은 아니었다.

    교황은 그 자체로 성 상티모니아의 가장 훌륭한 선전판이었다. 그래서 속이야 어떻든 사람들이 홀릴 만한 외양으로 꾸미는 것이 보통이었다.

    아그네스는 제 머리색을 바꾸지도, 붉은 눈을 가리지도 않았다. 치렁치렁한 검은 머리카락을 늘어트리고 마치 상복 같은 장식 없는 검은 옷을 고수했다.

    어릴 적 동화책에서 본, 사람을 홀려 잡아먹는다는 마녀의 삽화가 꼭 이랬다. 실제로 아그네스를 반대하는 자들은 그렇게 말하곤 했다.

    교황의 탈을 쓴 마녀.

    아이러니하게도 이교도를 이끄는 마녀의 모습을 한 아그네스가 교황이 된 지금, 성 상티모니아는 유사 이래 가장 드높은 교세를 떨치고 있었다.

    같은 선대 교황의 사생아라 하나, 아그네스와 랭스턴 공작은 그 출발부터가 달랐다.

    성 상티모니아의 한 축인 랭스턴 공작가와 이름 없는 수습 사제. 모계의 신분만 해도 엄청난 차이지만 새로울 것 없는 귀부인의 불륜과 달리 수습 사제의 변절은 큰 흠이었다.

    아그네스는 그 존재 자체가 수습 사제의 변절을 알리는 증거였다. 그것도 모자라 스스로 아비를 밝힐 수 없는 자식을 낳았다.

    그 많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 모든 논란을 자신의 지배 수단으로 삼은 역대 가장 강력한 교황. 그것이 어떻게 가능하나 궁금했는데 만나 보니 그 답을 알 것 같았다.

    교황이 직접 다스리는 성도 살리바는 면적으로만 보면 메르디에스 영지의 사분의 일에 불과했다.

    그리고 메르디에스는 금력으로 단연 첫손가락에 꼽히는 가문이었다. 오죽하면 프레모의 모든 황금이 메르디에스를 통해 들고 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까.

    그런 메르디에스의 유일한 후계에게 마치 제 신도를 대하듯 ‘순례’가 평안했느냐 물을 배포는 있어야겠지. 싱긋 웃은 아리아드네가 담담한 목소리로 답했다.

    “덕분에 여행길이 평안했습니다, 교황 성하.”

    하지만 아리아드네 역시 아그네스의 비위를 맞춰야 할 위치는 아니었다.

    “성물 유기스를 안치하러 왔다죠? 메르디에스의 깊은 믿음이 부디 보답받아야 할 텐데요. 이 땅에 깃든 모든 성물의 수호자로서 응당 그러기를 바라지만요.”

    원하는 대로 엘바를 수색하려면 교황인 제 도움이 필요하지 않느냐는 함의가 담긴 말이었다.

    “성물 유기스의 자리는 메르디에스가 아닌 엘바였던 모양입니다. 있어야 할 자리를 찾아가는 것은 세상의 순리가 아니겠습니까?”

    엘바에서 사라진 생사조차 알 수 없는 실종자들, 그들이 메르디에스로 돌아오는 것은 마땅한 일이었다.

    “그것이 하늘의 뜻이라면.”

    아그네스가 붉은 눈동자를 접으며 말했다. 그것으로 할 말은 끝이라는 듯 아그네스는 몸을 돌려 사라졌다.

    “유진!”

    그때, 누군가 유진을 부르며 다가왔다. 마치 황금을 녹인 듯한 머리카락에 그와 같은 눈동자를 지닌 여자였다.

    아그네스에게 가려 있던 여자가 달려와 유진의 품에 와락 안겨 들며 말했다.

    “기다렸어, 나 진짜 많이 기다렸어.”

    황금빛 눈동자에는 그렁그렁 눈물이 가득했다. 유진이 제 품에 안긴 여자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래, 베아트리스.”

    성물 카푸트의 참된 주인이 이 땅에 나타나리라 예언한 성 상티모니아 유일의 성녀, 베아트리스 상티모니아의 등장이었다.

    * * *

    “내 생전 살리바 대신전에서 머무르는 날이 다 있을 줄이야.”

    뾰족하게 솟은 건물들을 휘휘 둘러보던 레이먼드가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는 투로 말했다.

    “그러게.”

    호들갑인 그와는 달리 더없이 침착한 그의 사촌 누이는 시종 심드렁한 태도였다. 아리아드네는 무표정한 얼굴로 테이블 위에 놓인 찻잔을 유심히 바라볼 뿐이었다.

    “어제 본 교황 말이야. 위압감 장난 아니더라. 너 고생 좀 하겠던데.”

    눈치를 보듯 주위를 둘러보던 레이먼드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그러니까.”

    아리아드네에게서는 여지없이 간결한 대답이 돌아왔다. 아무래도 이상하다 싶었는지 레이먼드가 고개를 기울여 아리아드네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아리아드네, 오늘 기분이 별로야?”

    그제야 아리아드네가 눈을 마주쳐 왔다.

    “아니, 왜?”

    그렇게 말하는 담담한 낯에는 불쾌한 어떤 기미도 없었다.

    “아니, 아니면 됐어.”

    하긴 머리가 복잡할 만도 하지. 레이먼드는 머리를 갸웃하며 남은 의구심을 털어 냈다.

    “실없긴.”

    피식, 가벼운 웃음을 지은 아리아드네가 찻잔을 들어 천천히 차를 삼켰다. 적당히 따뜻한 찻물의 온도도, 깔끔한 맛도, 달콤한 향도 전부 마음에 들었다.

    “아, 방문자님.”

    그때, 레이먼드가 다가오는 인영을 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건넸다.

    ‘아, 찻잔이 수색과 안 맞네.’

    아리아드네는 기어이 마음에 안 드는 구석을 발견하고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내 불편하던 마음에 적당한 이유를 붙여 준 것이 그럭저럭 흡족했다.

    오늘따라 유난히도 말이 없는 아리아드네가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하던 레이먼드가 대화를 이어 나갔다.

    “……어, 덕분에 특별한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성도에 돌아와서 기쁘시지요?”

    레이먼드가 어색하게 웃으며 유진에게 이런저런 화제를 던져 보았지만 상대는 묵묵부답이었다. 아무 말 없이 아리아드네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던 유진이 의자를 끌어당겨 자리에 앉았다.

    그제야 느릿하게 고개를 든 아리아드네가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선명한 푸른 눈동자가 눈꺼풀 사이로 사라졌다 나타났다.

    “어쩐 일이야?”

    아리아드네가 물으면.

    “전해 줄 말이 있어서.”

    그제야 유진이 입을 열었다. 아리아드네는 아무런 대꾸 없이 뒷말을 기다렸다.

    “사흘 뒤 정찬에 초대한다고.”

    “사흘 뒤 정찬이라……. 벌써 머리가 지끈거리네.”

    한숨을 내쉰 아리아드네가 눈가를 살짝 찌푸리면 레이먼드가 안쓰럽다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정찬의 목적은 식사도 친교도 아닐 터. 엘바에 들어갈 명분은 얻었다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사흘 뒤 정찬에서 엘바에서 자유로이 운신할 수 있는 권한을 얻지 못한다면 성물만 빼앗긴 꼴이 된다.

    “넌 잘 해낼 거야.”

    “레이, 난 머리가 아프댔지 자신 없다고는 안 했어.”

    아리아드네가 자신을 위로하는 레이먼드를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

    “당신도 참석해?”

    “아마도.”

    유진의 대답을 들은 아리아드네는 제 앞에 놓인 찻잔을 들었다.

    천천히 찻물을 삼킨 아리아드네가 작게 인상을 찌푸렸다. 그사이 식어 버린 차에서는 떫은맛이 났다. 불편한 마음에 붙여 줄 이유가 그새 하나 더 늘어났다.

    아리아드네는 찻잔 테두리를 손가락으로 훑어 내리며 여상한 어조로 물었다.

    “전령으로 부리기엔 너무 고급 인력인데. 그 말을 하러 온 거야?”

    “…….”

    유진은 미묘한 위화감에 표정을 굳혔다. 자신이 온 것을 알고도 한참 후에야 얼굴을 마주한 것도, 어쩐지 단답으로 끊어지는 대화도 전부 낯설었다.

    그렇다고 일일이 따져 묻기엔 둘은 어떤 사이도 아니지 않은가. 마찬가지로 저 물음이 어떤 책망처럼 들리는 건 제 오해가 분명했다.

    “할 말이 끝났으니 이만―”

    그렇게 유진이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순간이었다.

    “뭐야, 여기 있었어? 한참 찾았잖아.”

    황금을 녹인 듯한 녹진한 금색이 종종거리며 유진을 향해 다가왔다.

    “오늘은 나랑 놀아 주기로 했잖아.”

    유진의 팔에 매달린 베아트리스가 아리아드네를 슬쩍 훑고 지나갔다. 황금빛 눈동자에는 경계가 가득했다. 숨길 생각 따윈 조금도 하지 않는 순수한 경계였다.

    ‘아, 이거 정말 지나치게…….’

    손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올린 아리아드네가 자리에서 일어나 베아트리스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베아트리스 성녀님. 저는 메르디에스의 아리아드네입니다.”

    아리아드네가 먼저 건넨 인사에 베아트리스는 답도 않고 유진의 뒤로 숨어 버렸다.

    “베아트리스?”

    유진의 재촉에 입술을 앙다문 베아트리스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베아트리스 상티모니아예요.”

    상티모니아는 성 상티모니아의 교황에게만 허락된 성이었다. 역대 교황들에게 사생아가 몇이든, 그 사생아의 모계―혹은 부계―신분이 어떻든 교황의 자식이라 하여 상티모니아 성을 받은 전례는 없었다.

    베아트리스는 교황의 자식임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최초의 사례였다.

    “성 상티모니아의 축복 속에 평안하시길. 저는 브래들리 백작가의 레이먼드라고 합니다.”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레이먼드가 유들유들한 태도로 베아트리스에게 인사를 건넸다.

    “아, 반가워요. 브래들리 영식.”

    베아트리스는 아리아드네가 인사를 건넸을 때보다는 좀 누그러진 태도로 인사를 받았다가.

    “아리아드네와는 사촌 간입니다.”

    이어진 말에는 다시금 몸을 잔뜩 굳힌 채로 경계의 눈빛을 보냈다. 유순한 눈동자를 부러 치뜨고 저보다 두 배는 됨직한 남자 뒤에 숨어서 이쪽을 노려보는 것이 꼭…….

    “이렇게 만나기도 쉽지 않은데…….”

    털을 바짝 세운 새끼 고양이 같았다.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경계하니 그 기대에 부응해 줘야 할 것 같잖아.’

    베아트리스에게 가까이 다가간 아리아드네가 가녀린 손목을 덥석 잡았다.

    “그, 그런데요?”

    화들짝 놀란 베아트리스가 기세에 밀리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며 고개를 쳐들었다.

    “베아트리스 성녀님, 성녀님의 오늘을 저에게 주세요.”

    새파란 눈동자가 휘어지며 붉은 입술 끝이 보기 좋게 올라갔다. 베아트리스는 잠시 넋을 잃고 멍하니 아리아드네를 바라보았다가 화들짝 놀라 머리를 흔들었다.

    “나? 나 말이에요? 유진이 아니라?”

    아리아드네가 싱긋 웃으며 잡은 손목을 끌어당겼다.

    “절대 후회하지 않으실 거예요.”

    단호한 어조에 베아트리스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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