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화 (26/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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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왕도를 가장 들썩이게 한 것은 1왕자와 메르디에스 공녀의 약혼이 깨질지도 모른다는 소문이었다.

    “정말 파혼을 받아들이실 겁니까?”

    그것이 근거 없는 소문이 아님을 아는 카이엔의 오른팔 레비에 후작은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물었다.

    “글쎄……. 약혼이 가능했던 것부터가 메르디에스의 덕이지 않았나.”

    하지만 그에 비해 카이엔의 태도는 지나치리만큼 담담했다.

    “더구나 저쪽에서는 감히 이견을 꺼내기도 어려운 증인을 손에 넣었고.”

    “이계의 방문자가 정말 그런 일에 나서 주겠습니까?”

    “나서든 나서지 않든 달라질 건 없지.”

    레비에 후작이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며 동의를 표했다.

    “하기야 어떻든 어려운 싸움이지요. 상대가 메르디에스이니.”

    카이엔의 갈색 눈동자가 가늘어지며 입을 달싹이려던 그때였다.

    “전하, 제프리입니다.”

    소리 없이 다가온 제프리가 카이엔의 귀에 대고 무엇이라 속삭였다. 몹시 기쁜 소식인 듯 카이엔이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실례하지.”

    “다녀오십시오.”

    제프리와 함께 접견실을 빠져나가려던 카이엔이 순간 멈칫하며 레비에 후작을 돌아보았다.

    “아, 조금 전 내가 한 달라지지 않을 거란 말은 그 뜻이 아니었네.”

    “…….”

    “어떤 과정을 치르든 내가 페렌트의 왕이 될 거란 결과는 달라질 게 없단 뜻이지. 그렇지 않나?”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눈동자를 보며 레비에 후작은 불안하던 마음이 수그러들었다.

    “네, 물론입니다.”

    고개를 숙인 그는 제가 잡은 줄이 잘못되지는 않은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곧 돌아오지.”

    접견실에서 빠져나온 카이엔의 얼굴이 싸늘하게 변했다.

    “그러니까 일레체로 오라는 내 서신에는 끝내 답도 하지 않고, 엘바로 갔단 말이지.”

    목덜미에 칼날을 들이민 것처럼 섬뜩한 어조였다. 제프리는 재빨리 자신이 아는 정보를 덧붙였다.

    “성도 살리바를 경유해 엘바로 갈 예정이라고 합니다.”

    무언가를 생각하듯 손가락으로 제 손등을 가볍게 두드리던 카이엔이 물었다.

    “리스벨 그 여자는?”

    “메르디에스에 남았다고 합니다. 예정대로 진행해도 될 것 같습니다.”

    “처음부터 내 초대에 응했으면 훨씬 간단하게 끝났을 일인데. 아리아드네, 그대 여행이 꽤 길어지겠군.”

    사랑하는 연인을 그리워하듯 제법 아련한 얼굴을 한 카이엔이 걸음을 옮겼다. 푸른 브로치로 고정한 붉은 망토가 펄럭였다.

    “모든 건 예정대로 진행한다.”

    칼 같은 어조에 제프리는 재빨리 몸을 숙였다.

    “아, 그리고 엘바에도 선물을 준비해야겠어. 내 사랑스러운 약혼녀가 실망하게 할 순 없지 않나.”

    카이엔의 온화한 미소에 제프리의 목덜미가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실수는 없어야 했다. 제 주인은 관대함과는 거리가 멀었으니까.

    * * *

    아찔할 정도로 진한 장미 향기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베아트리스는 숨을 깊게 내쉬며 정원 입구를 지키고 선 사제에게 물었다.

    “안에 계셔?”

    사제가 옆으로 비켜서며 몸을 숙였다.

    “교황 성하께서 성녀님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베아트리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느릿느릿 발을 옮겼다. 걷는 길마다 화사하게 피어난 꽃들이 아리따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꽃이 모여 있다는 교황의 정원이었다.

    정원 깊숙한 곳에는 치렁치렁한 검은 머리카락을 허리까지 늘어뜨린 사람이 정원 가위로 붉은 장미를 끊고 있었다.

    “어머니.”

    베아트리스의 부름에 장미를 끊던 여자가 뒤를 돌아보았다.

    여자가 입은 단출한 검은 옷은 수도원의 것이나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검은 생머리는 장신구 하나 없이 늘어뜨린 채였고, 붉은빛이 도는 눈동자가 여자가 지닌 유일한 색이었다.

    여자가 제 손에 들린 붉은 장미를 베아트리스에게 건네며 말했다.

    “살리바의 장미가 만개했구나. 네가 좋아하지 않았니?”

    장미를 받은 베아트리스는 입술을 끌어 올리며 간신히 웃음을 만들어 보였다.

    “어머니 정원의 꽃들은 모두 아름다우니까요.”

    교황 아그네스의 유일한 취미가 원예였다. 교황의 정원에 들어설 때마다 베아트리스는 꽃들이 내뿜는 강렬한 향기에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아그네스의 손에 들린 장미는 피처럼 선명한 붉은색이었다. 겹겹이 겹쳐진 꽃잎이 풍성했다. 가운데에 자리한 꽃잎은 항아리처럼 모여 있었고, 가장자리의 꽃잎은 밖으로 누운 것처럼 굽어 있었다.

    “좋은 장미를 얻으려면 해가 뜨기 전에 따야 하지. 늑장을 부렸더니 이것들은 못 쓰겠구나.”

    아그네스가 그렇게 말하며 손짓하자 누군가 교황의 손에서 장미를 받아 들고는 사라졌다. 손이 자유로워진 아그네스가 자리에 앉으니 피처럼 붉은 장미가 그녀 뒤로 그림처럼 펼쳐졌다.

    “별일은 없고?”

    “유진이 곧 돌아온대요. 메르디에스의 딸과 함께요.”

    “메르디에스의 딸이라…….”

    아그네스는 무표정한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찰나의 침묵에 잔뜩 긴장한 베아트리스가 제 손끝만 잡아 뜯었다.

    “신세를 지게 해서 나쁠 인사는 아니지.”

    역시나 제 마음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베아트리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우리 아름다운 조카님은 마음씨도 고우시지.”

    테이블 건너편에 앉은 남자가 킬킬대며 웃었다.

    “그렇게 울 것 같은 얼굴을 할 바엔 방문자님의 부탁 같은 건 싫다고 하지 그러셨습니까?”

    구불구불한 금발에 에메랄드 같은 녹색 눈동자를 가진 미남자였다. 겉으로 봐서는 쉽사리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운 외양을 한 그는 마치 성화 속의 천사와 같은 얼굴을 하고서 길거리의 건달처럼 웃었다.

    “네가 결정한 일이잖니?”

    아그네스가 귀찮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네.”

    울컥 서러운 울음이 터질 것 같아 베아트리스는 장미를 꽉 움켜쥐었다.

    “그만 가 보려무나.”

    눈물이 차올라 눈앞의 풍경이 점점 흐려졌다. 그렇게 베아트리스가 슬쩍 걸음을 떼 정원에서 벗어나려던 순간이었다.

    “잊지는 않았겠지? 성물의 진정한 주인이 누구인지.”

    차오른 눈물로 아그네스의 모습은 윤곽조차 흐릿한데 장미의 붉은 빛만은 유난히도 선명했다.

    “베아트리스?”

    대답을 재촉하는 아그네스의 부름에 베아트리스는 억지로 입을 열어 그녀가 원하는 답을 들려주었다.

    “네, 단 한 번도 잊지 않았어요.”

    꽉 움켜쥔 장미의 가시가 베아트리스의 손바닥으로 파고들었다. 장미의 가시에도 꽃잎처럼 붉은색이 덧입혀졌다.

    장미 따윈 정말 질색이었다. 베아트리스는 단 한 순간도 장미를 좋아한 적이 없었다.

    베아트리스는 정원을 들어설 때와는 달리 빠른 걸음으로 그곳을 벗어났다.

    “누이, 어린 딸한테 너무 야박하십니다.”

    멀어지던 베아트리스를 지켜보던 사내가 능글맞은 웃음을 머금은 채 파이프에 불을 붙였다. 파이프에서는 매캐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매캐한 연기가 불쾌한 듯 인상을 찌푸린 아그네스가 손을 내밀자 곁에 있던 사제가 그녀의 손에 은으로 된 긴 파이프를 들려 주었다. 섬세한 세공이 들어간 은 파이프는 발간빛을 내며 흰 연기를 토해 냈다.

    치렁치렁한 긴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채 허공을 응시하는 아그네스는 마흔이라는 나이가 무색하게 소녀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아그네스 베르딜.

    교황이 되어 상티모니아라는 성을 달게 된 아그네스가 이전에 사용하던 ‘베르딜’이라는 성은 선대 교황 테오도로 3세의 것이었다.

    성 상티모니아의 39대 교황이었던 테오도로는 여느 교황들처럼 적당히 부귀영화를 탐했으며, 적당한 수의 사생아를 두었다.

    아그네스는 테오도로의 사생아 중 하나로 테오도로가 수도원의 견습 사제를 취해 태어난 아이였다. 테오도로가 자신의 아이임을 인지하여 테오도로 본가의 성을 물려받았을 뿐 아그네스는 테오도로의 숱한 사생아 중 하나로 자랐다.

    아그네스의 첫 번째 선택은 열여섯, 성년이 되던 해였다. 수도원을 나가 그저 그런 귀족과 결혼하거나, 수도원에 남아 사제의 길을 걷는 갈림길에서 아그네스는 후자를 선택했다.

    모두가 알지만, 아무도 말하지 않는 교황의 사생아라는 위치를 아그네스는 꽤 영악하게 이용했다. 빠르게 수석 사제의 자리까지 오른 아그네스는 거기서 만족하지 않고 교황의 충복이 되기를 자처했다.

    아그네스의 두 번째 선택은 스물, 대사제의 관문이었다. 주교급이나 추기경급의 대사제가 되려는 사제들이 공을 세우기 위해 살리바를 떠나는 것을 ‘대사제의 관문’이라 불렀다.

    스물의 나이로 살리바를 떠난 아그네스는 반년 후, 그동안 감춰 왔던 강력한 성력을 드러내 보이며 살리바로 귀환했다. 그 가공할 성력은 아그네스를 단박에 성 상티모니아 사제들의 정점인 추기경 반열에 들게 했다.

    아그네스는 스물의 나이에, 20인의 추기경 중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20인의 추기경은 성 상티모니아의 유일한 절대 권력, 다음 교황의 후보자인 동시에 교황을 뽑는 선거인단이었다.

    아그네스가 추기경의 자리에 오른 지 두 계절이 지나고, 테오도로 3세가 선종했다. 성교 중 심장마비로 인한 사망이었으나 사인은 비밀에 부쳐졌다.

    추기경의 투표로 결정되는 다음 교황의 선출식에서 아그네스는 건강상의 이유로 기권표를 던지고, 선출식에 불참한다.

    유례없이 강력한 성력의 보유자 아그네스는 가장 유력한 교황 후보 중 하나였으나, 어린 나이와 여자라는 점이 걸림돌로 작용했다.

    하지만 교황을 뽑는 선출식에 불참할 정도로 몸이 좋지 않다는 점이 도리어 아그네스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그토록 강대한 성력을 지닌 부작용으로 아그네스가 얼마 살지 못할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지자 19인의 추기경들은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차선으로 아그네스를 선택했다.

    그렇게 아그네스는 성 상티모니아의 세 번째 여성 교황이자 마흔 번째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하지만 곧 죽을 줄 알았던 아그네스는 교황 선출 당시 죽을병을 앓았던 것이 아니라 출산을 했던 것이며, 자신이 신의 뜻에 따라 성령을 잉태했음을 선포한다.

    아그네스가 낳은 아이는 황금빛 머리카락에 황금빛 눈동자를 지니고 있었는데, 검은 머리에 붉은 눈동자인 아그네스와는 조금도 닮지 않은 모습이었다.

    거기에 더해 아그네스를 아득히 뛰어넘는 강력한 성력과 성 상티모니아 최고의 성물 카푸트와의 기이할 정도의 친화력. 성녀 베아트리스의 탄생이었다.

    “우리는 선종하신 테오도로 3세의 피를 이은 유일한 혈육이 아닙니까? 저는 언제까지고 당신의 신실한 종입니다.”

    낄낄대던 남자가 아그네스의 발치에 엎드려 그녀의 치맛자락에 키스했다. 남자의 행동에 미간을 찌푸린 아그네스가 그의 손에 잡힌 치맛자락을 걷어 내며 말했다.

    “귀찮게 굴지 마라, 시몬.”

    “누이, 하나밖에 없는 동생에게 이리 야멸차게 구실 겁니까?”

    “테오도로의 피를 이은 혈육이 바닷가의 모래만큼 있다고 해도 놀랍지 않다.”

    남자의 이름은 시몬 랭스턴.

    그는 아그네스와 같은 해에 태어난 이복동생이자, 성 상티모니아의 자치령인 랭스턴 공국을 다스리는 랭스턴 공작이었다.

    이름 없는 사제였던 아그네스의 생모와는 달리 시몬의 생모는 성 상티모니아 최고 권력자 중 하나인 랭스턴 공작가의 적녀였다.

    시몬의 생모는 스펜서 자작과 혼인했으나, 그녀는 법적 남편인 스펜서 자작보다 교황 테오도로의 첫 번째 여자이기를 원했다.

    교황 테오도로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은 랭스턴 공작이 되었고, 그녀는 스펜서 자작과 이혼하고 랭스턴 공작가로 돌아왔다.

    “아니요, 누님의 동생은 저뿐이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서로에게 힘이 되어 줄 혈육이라는 의미에서라면 시몬의 말이 맞았다.

    아그네스가 성 상티모니아를 이토록 완벽히 틀어쥘 수 있었던 것은 시몬이 랭스턴 공작이기 때문이었고, 시몬의 지위와 위세가 그토록 확고한 것은 아그네스가 성 상티모니아의 교황이기 때문이었다.

    “해서 입만 아픈 이야기를 잘도 늘어놓는구나. 우리의 연대야 파도에 쓸려 나갈 모래성에 불과한 것을.”

    아그네스의 입에서 하얀 연기가 가는 실처럼 흘러나왔다.

    “내게서 등을 돌릴 때는 늘 조심하렴. 네 역겨운 낯짝을 참는 것도 점점 힘겨워지니.”

    하지만 권력을 위해 연대하기는 쉬워도 그것을 지키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서로에게 힘이 되어 줄 유일한 혈육이란 뒤집어 말하면 서로에게 위협이 되는 유일한 혈육이란 뜻이기도 했다.

    “누님은 이 땅에 자애와 포용을 베풀어야 할 교황 성하가 아니십니까? 저도, 사랑스러운 딸도 좀 더 아껴 주십시오.”

    성 상티모니아의 교세 확장을 위해서라면 철권도, 학살도, 성전(聖戰)도 마다치 않아 피의 교황이라 불리는 아그네스였다.

    그런 그녀에게 자애와 포용이란 영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시몬의 넉살인지, 비꼼인지 모를 말에 조소를 머금은 아그네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야 사랑할 필요가 없는 개자식이니 제쳐 두더라도 베아트리스라면 충분히 사랑하고 있으니 네가 걱정할 일은 아닌 것 같구나.”

    “누님께서 말입니까?”

    정원 가득 내린 붉은 노을이 불처럼 타올랐다.

    “그 아이를 품었을 때의 그 충만함과 환희를 어찌 말로 다 표현할까.”

    아그네스의 붉은 눈동자가 석양빛에 반짝였다.

    “내게 이 세상 전부를 안겨 준 아이인걸.”

    땅에 떨어진 장미의 붉은 잎이 아그네스의 발밑에 소복이 깔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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