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지난번에 저택에서 얘기를 들은 후부터 갈레트와 며칠에 한 번씩 주고받고 있는 편지였다.
기절했다는 말을 곧이곧대로 적으면 걱정을 사겠지만, 적어도 저번 편지처럼 논문 같은 글은 안 보내겠지.
얕은 한숨을 내쉬며 편지를 접었다.
그 말대로, 최근에 받은 갈레트의 편지는 차마 끝까지 읽기 힘들 정도였다.
아니, 편지라기보단 논문이라고 해야 할지도.
나는 떠올리다 말고 고개를 저었다.
내용의 대부분은 자신이 내 얼굴을 보지 못해서 발생하는 집중도의 손실이 얼마나 될지, 이번에 못 만나면 다음에는 언제 볼 수 있을지를 분석한 글이었다.
그나마 마지막 줄에는 ‘정 바쁘면 어쩔 수 없지만’ 하는 문구가 들어가 있었으나 힘이 꾹꾹 들어간 것이 누가 봐도 진심이 아니구나 싶은 필체였다.
구질구질한 마지막 발버둥 같았다고 하면 좋은 설명이 될지도.
어쨌든 나는 그 긴 글에 담긴 마음을 눈치채지 못한 척하기로 했다.
뻔뻔하게 ‘이해해 줘서 고맙다’는 말로 마무리 지은 편지를 봉투에 넣고 밀랍으로 봉했다.
“끄응.”
한껏 기지개를 켜고 책상에서 일어났다.
창문 밖은 아직 아침 해도 뜨지 않은 어두컴컴한 새벽이었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그럴 만하지. 검술 훈련 때 쓰러지고서 삼 일 가까이 잠만 자고 있었다잖아.
혼자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이다가 책을 폈다.
“뭐야, 벌써 일어났어……?”
침대에 누워 있던 에클레어가 부스럭거리는 소리라도 들었는지 눈을 비볐다.
“아, 미안. 나 땜에 깼어?”
희미하게 켜두었던 마법등을 끄고 말했다.
그러나 에클레어는 다시 잘 생각이 없는 듯 침대에서 허리를 일으키고 이리저리 스트레칭을 했다.
“끄으응! 나도 일어나야지. 중간고사 때 1등이었던 네가 이 시간부터 공부를 하겠다는데. 아니, 시험 기간에 삼 일 내내 잠만 자놓고 어떻게 그게 가능한 거야?”
“하하…….”
멋쩍은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에클레어가 샐쭉하니 입술을 비죽거리다가 이불을 젖히고 일어났다.
“됐다, 그래도 카눌레 이겼으니까 만족할래. 다음은 검술 대회야!”
에클레어가 씩씩하게 말하고 내가 반응하기도 전에 방을 뛰쳐나갔다.
* * *
“너, 이번 대회에 출전 정지당했다며?”
서로 아는 척하지 말자던 약속 이후로 카눌레가 먼저 내게 말을 거는 건 드문 일이었다.
평소였다면 웬일이냐며 능글맞은 대답을 했겠지만, 나는 그 용건을 듣자마자 볼을 부풀렸다.
“조만간 항의할 거야. 학생의 자기 주도적인 학습 의욕을 저해하는 판단이라구.”
사실 학교 측에서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갑자기 기절하는 사람을 대회에 출전시켰다가 대회에서 사고라도 나면 어쩌겠나.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였다.
출전 정지를 먹으면서 특별 훈련에도 참여하지 못하게 된 나는 크렘과의 접점이 거의 끊어진 상태였다.
원작에서부터 마당발로 유명했던 크렘인 만큼 다른 수업 시간이나 쉬는 시간에는 항상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느라 바빠 보였기 때문이었다.
봐라, 검술 수업이 코앞인 지금도 크렘은 사람들과 수다나 떨고 있지 않은가.
“뭐라는 거야.”
물론 내 상황을 알 리 없는 카눌레는 눈살만 찌푸리고 말았다.
“그래서 왜? 놀리려고 왔어?”
내가 물었다. 카눌레가 다른 용건 없이 말을 걸었을 리가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아, 혹시 내가 걱정돼서?
뒤늦게 든 생각으로 눈을 빛냈다.
그러나 이어지는 카눌레의 물음은 그것과 별 상관 없는 내용이었다.
“갈레트 형한테서 얘기 못 들었냐?”
“응?”
어리둥절한 날 위해 카눌레가 품 안을 뒤적여 편지 하나를 꺼냈다.
“탈주한다던데.”
갈레트와 편지를 주고받을 때 카눌레의 기숙사 방 호수를 알려준 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가 카눌레에게 편지를 보낸 것 자체는 그리 놀랄 만한 일이 아니었다.
물론 갈레트가 카눌레에게 따로 편지할 내용이 있었다는 게 의외이긴 했지만.
아무튼 나는 검술 수업이 시작하고 나서도 제자리에 서서 카눌레에게서 받은 편지를 읽느라 정신이 없었다.
대충 마탑 생활이 지루하다고 칭얼거리는 내용이 반, 나의 안부를 묻는 내용이 반이었다. 거기다 마지막 줄에는…….
[아무튼 크레페 생일을 얼굴도 못 보고 지나칠 순 없어. 마법진 그려줄 테니까 탈주하는 거 도와줘!]
탈주? 진짜? 마탑을?
나는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편지 안으로 들어가기라도 할 듯 고개를 들이댔다.
내가 제대로 본 건지 의심스러워 두 번, 세 번 반복해 읽던 도중 가까이에서 날 방해하는 소리가 들렸다.
“크흠, 크레페 님!”
“네? 아.”
“수업에 집중해 주십시오.”
검술 선생님의 목소리였다.
그가 내게 큰 걸음으로 다가와 나뭇가지를 내밀었다.
여전히 부끄러웠지만, 다른 생각에 정신이 팔린 이번만큼은 그것을 아무 생각 없이 받아 들 수 있었다.
연습하는 척 나뭇가지를 몇 번 휘휘 젓다가 에클레어의 옆에서 벗어나 슬쩍 카눌레에게 다가갔다.
“오빠는 어떡할 건데?”
“난 대회 때문에 바빠.”
카눌레와 의견을 나누어볼 생각이었지만 그는 이미 갈레트의 제안 따위는 받아들이지 않기로 결심한 모양이었다.
나를 심란하게 만들 때는 언제고 연습으로 정신없어 보이는 게 조금 얄미웠다.
물론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지만.
나는 방금 읽었던 갈레트의 편지 중 한 부분을 곁눈질했다.
그가 적어놓은 탈주 일정은 정확히 검술 대회일과 겹쳤다.
당연히 카눌레는 그날 몸을 빼기가 힘들 것이다.
그래도 마법진이라는 미끼가 있음에도 낚이지 않은 건 조금 의외…….
그런 생각을 하며 다시 고개를 들었다.
카눌레는 마침 검을 휘두르던 것을 멈추더니 훈련 중인 에클레어를 의식하며 검 손잡이를 고쳐 쥐었다.
에클레어 역시 카눌레를 향해 눈을 부리부리하게 떴다.
둘 사이의 라이벌 관계에 불을 지핀 내게 선견지명이라도 있었다고 해야 하나?
나는 영양가 없는 생각을 하며 머리를 긁적이고서, 아이들 한 명 한 명을 지도해 주고 있는 선생님의 눈을 피해 다시 편지를 보았다.
“…….”
잠시 생각에 잠겼던 내가 갈레트의 편지를 접어 손 안에 숨겼다.
다행히 여기에는 갈레트의 계획과 일정, 카눌레가 도와줬으면 하는 것 등이 소상히 적혀 있었다.
내가 먼저 선수 쳐야겠다.
* * *
“갑자기 어딜 가려고?”
“내일까진 돌아올 거야.”
대충 대답하는 것처럼 보였는지 에클레어는 언짢아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눈치채지 못한 척 마저 짐을 챙겼다.
짐이라고 해도 거창한 건 아니었고, 추우면 입을 겉옷을 포함한 물건 한두 가지뿐이었다.
“크레페, 내일이 대회일인 건 알지? 꼭 오늘 나가야 해?”
“생일 때문에…….”
“뭐?”
“크레페 아가씨!”
익숙한 목소리가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다급히 가방을 들고 어깨를 가로질러 멨다.
“다녀올게!”
“자, 잠깐…….”
당황한 에클레어를 뒤로하고 건물을 나갔다.
그녀에게 사정을 털어놓고 괜찮다며 진정시키기엔 시간이 부족했다.
수업이 끝난 후였기 때문에 밖은 벌써 저녁이었다.
나는 해가 지는 방향에 서 있는 마르크에게 크게 손을 흔들었다.
“아저씨!”
“아이쿠, 그렇게 급합니까?”
고삐 풀린 브라우니처럼 달리다가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나는 마르크의 품에 콱 머리를 박았다가 대답도 하지 못하고 마차에 후다닥 올라탔다.
“빨리 가요!”
마르크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외치자, 그가 내 재촉에 못 이겨 나를 따라 마차에 탔다.
마부가 곧바로 마차를 출발시켰다.
이랴, 하는 소리를 들은 후에야 나는 한숨을 내쉬며 몸을 축 늘어뜨렸다.
“늦진 않겠죠……?”
“뭐에 말입니까?”
“…….”
나는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입술을 실룩거렸다.
마르크가 기다리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역시 아가씨도 큰도련님이 보고 싶었던 거죠? 갑자기 마탑에 가야겠다는 편지를 받아서 저랑 에이미 님이 얼마나 놀랐는데요.”
그 말대로, 갈레트가 여기까지 오는 걸 막으려면 내가 그보다 먼저 마탑에 찾아가는 수밖에 없겠다 싶었다.
내 눈앞에서 죽는다는 원작의 내용이 있었으니 이왕이면 아예 만나고 싶지 않았지만, 가만히 뒀다간 정말 축제일에 학교까지 숨어들어 올 것처럼 보였으니까.
결심하자마자 저택에 호위를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으나 그게 에이미에게 도달하고 다시 내게 오는 답변을 기다리기까지 며칠이 소요된 상태였다.
그것만 아니었다면 이렇게 상황이 급박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최소한 내가 통신구를 사용할 수 있었다면…….
“아, 그러고 보니 검술 대회는 끝났습니까?”
마르크가 깜빡 잊고 있었다는 듯 물었다.
“내일이에요.”
“예? 내, 내일이 시합인데 오늘 나오면 어쩝니까!”
“괜찮아요. 저 출전 정지당해서 안 나가거든요.”
“예?!”
귀청 떨어지겠다.
내가 뒤늦게 귀를 막았다.
내게는 별로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지만 마르크는 잔뜩 패닉에 빠져 며칠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냐는 둥, 출전 정지는 어쩌다가 당했냐는 둥 질문을 쏟아냈고, 결국 나는 마탑으로 가는 내내 그의 질문 공세에 시달려야 했다.
* * *
마탑에 내가 방문할 거라는 연락을 따로 해놓지는 못했다. 당장 마르크가 언제 날 데리러 올지 확실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덧붙여 갈레트에게도 내가 오늘 찾아갈 거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애초부터 내가 받은 편지에 갈레트의 작전 얘기는 없었기도 하고.
물론 ‘혹시라도 직접 올 생각은 마!’ 하는 내용의 편지는 보내놨지만… 글쎄, 갈레트가 그 정도로 포기할 성격이었다면 애초부터 학교까지 날 만나러 오겠다는 말도 안 하지 않았을까.
아무튼 이런저런 생각으로 여유가 없던 나는 마차가 멈추자마자 마탑을 향해 달려들었다.
짐을 챙겨 나올 당시에 내 방을 갈레트가 그대로 쓴다는 말을 들었던 적이 있으니 목적지를 헤맬 걱정은 없었다.
“크레페 님?”
“안녕하세요!”
키슈도 제법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었으나 나는 인사만 한 마디 달랑 남겨놓고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한 층도 채 올라가기 전에 숨이 차서 팔찌를 발동시켜야 하긴 했지만.
“잠깐만요! 이게 대체…….”
“오빠!”
키슈의 부름도 뒤로하고 벌컥 문을 열었다. 그러나 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허둥지둥 날 따라온 키슈가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
“무… 무슨 일인데 그렇게 급해요?”
하지만 나는 이번에도 그녀의 질문에 대답을 해주지 못했다.
문이 잠기지 않은 걸 보니 나간 지 얼마 안 됐구나.
나는 곧바로 한 층을 더 올라가 순간 이동을 위한 포트와 리시버가 있는 방의 문을 열어젖혔다.
“뭐, 뭐야?”
포트에는 짐 가방을 든 피오르가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