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그래, 나간다!”
이렇게 된 이상 뻔뻔하게 나가기로 했다. 나는 참새처럼 가슴을 부풀리고 당당히 외쳤다.
순간 주변의 시선이 내게 쏠렸다.
“학생이었어?”
“언니나 오빠를 따라온 줄 알았는데.”
“최연소 입학했다는 걔잖아! 갈레트네 동생!”
“그런 애가 검술 대회까지 나온다고?”
빵빵하게 부풀렸던 가슴이 도로 웅크려졌다.
나는 에클레어의 옷자락을 당기고 그녀의 뒤에 숨었다.
크바스가 한 박자 늦게 피식 웃음을 터뜨리더니 제자리로 돌아가며 말했다.
“갈레트가 검술 대회에서 얼마나 창피당했었는지는 아나 몰라~”
“나도 봤거든요! 일등석에서 생생하게!”
그렇게 맞받아치며 나는 메롱, 혀를 내밀었다.
그러다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반성했다.
자랑할 건 아니었구나.
* * *
“몸풀기부터 시작하겠습니다.”
보충 수업은 학년이나 나이와 관련 없이 이루어졌다.
학생은 선생님들을 따라 운동장을 돌거나 자율 연습을 했고, 도중에 힘이 부치면 알아서 대열을 나가 쉬는 식이었다.
“헥… 헤엑…….”
운동장 두 바퀴를 채 돌기도 전에 입이 바싹바싹 말랐다.
앞사람을 잘 따라가던 에클레어가 날 돌아보더니 곁에 와 붙었다.
“벌써 힘들어?”
“으윽…….”
대답도 하지 못할 정도로 숨이 찼다.
에클레어가 이미 반 바퀴쯤 멀어진 대열을 보고 다시 입을 열었다.
“역시 너 출전 포기해라. 마법 물품 쓴다면서, 써도 이 정도면 진짜 가망 없어.”
“헤… 응? 쿨럭, 마법, 써도 돼?”
헥헥거리느라 말이 자꾸 끊겼지만 에클레어가 알아듣기엔 무리 없었던 것 같았다.
그녀가 무슨 당연한 말을 하냐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물품을 잘 사용하는 것도 연습해야 가능하니까. 나도 처음부터 쓰고 있었는데.”
“으윽, 진작 말하지!”
어쩐지 달리는 속도가 너무 빠르다 했다!
나는 뒤늦은 한탄을 한 후 왼쪽 손목에 차고 있던 팔찌를 감싸 쥐었다.
눈을 감고 마나의 흐름을 제어하려 애쓰자 얼마 안 있어 내 호흡이 안정을 되찾았다.
“후아, 살 것 같다.”
“뒤에! 쉴 거면 운동장 밖에서 쉬세요!”
“아, 갈게요!”
내가 후다닥 달려 대열에 합류했다.
멍한 표정으로 있던 에클레어가 한발 늦게 나를 따라왔다.
“뭐야, 너? 오늘은 손수건 안 가지고 있잖아?”
최근까지 내가 손수건에 자수를 놓고 있던 게 마법 물품을 만들기 위함이었다는 걸 숨긴 적은 없었다.
그래서인지 에클레어는 내가 손수건 없이 달리기를 하고 있는 게 신기한 듯했다.
나는 바지런히 다리를 놀리며 왼팔을 내밀었다.
“네가 원래부터 하고 있던 팔찌? 이게 마법 물품이었어?”
“응.”
내가 짧게 대답했다. 정확히는 원래 그냥 팔찌였던 것에 내가 마법진을 새겨 넣은 것이었다.
집에 들러서까지 책을 찾고 생각에 생각을 거듭한 결과, 검 끝에 새겨진 마법진과 내 손수건의 마법진에 이렇다 할 차이점이 보이진 않았다. 조각과 자수라는 것만 빼고.
혹시나 싶어 자료를 찾아보자 방법과 소재로 인해 마법 효과에 크게 차이가 날 수도 있다는 내용이 있었다.
나는 고민 끝에 마법진을 손수건 대신 보석에 새겨보기로 했다.
이왕이면 몸에 항상 가지고 다니는 장신구.
편하게 하고 다닐 수 있고 이상하게 보이지 않을 만한 것.
이런저런 계산을 해보다가 나온 결과는, 아펠에게서 받은 팔찌의 보석에 마법진 작업을 해보는 것이었다.
선물받은 거라 좀 그렇긴 해도, 괜히 장신구를 하나 더 하고 다니는 것보다는 훨씬 편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과는 대성공!
타인이나 다른 물건에 영향을 미치는 마법은 여전히 미미한 효과였지만, 나 자신에게 행하는 마법은 얼마든지 쓸 수 있었다.
“하지만 이거 내가 만들었다는 건 비밀로 해줘.”
달리느라 바쁜 학생들의 귀에는 들어가지 않도록 목소리를 낮춰 덧붙였다.
혹시라도 이 사실이 알려지면 키슈나 피오르가 다시 날 마탑으로 끌고 가려 할지도 모르니까.
“그, 그래.”
“그럼 이제 본격적인 훈련을 시작하겠습니다!”
에클레어의 입에서 얼떨떨한 대답이 나오자마자 달리기가 끝났다.
완주한 학생들 대부분은 마법 물품을 사용한 듯 가뿐해 보였고, 숨을 몰아쉬는 사람은 몇 명 보이지 않았다.
아마 저들이야말로 순전히 신체 능력만으로 이 속도를 따라잡은, 말하자면 체육계의 유망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안에 크바스와 카눌레가 둘 다 들어 있다니, 괘씸하면서도 자랑스럽군.
그러고 보니 크렘은…….
나는 뒤늦게 크렘의 존재를 쫓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일찌감치 대열에서 이탈해 운동장 구석에서 발로 흙장난을 하고 있는 크렘을 발견했다.
아니, 저 녀석이?
* * *
크렘과 친해질 기회를 얻기 위해.
내가 검술 시합에 신청한 이유를 간단히 말하자면 그것뿐이었다.
대회에 참가 신청을 한 사람들을 모아 따로 특훈을 한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땀내 나는 우정! 끓어오르는 동지애! 미리 맛보는 전우애!
…라는 건 조금 과장한 희망이었지만, 아무튼 내가 노린 건 대충 그런 유대감이었다.
공통된 화제가 있으면 말을 걸기도 쉬울 테고 말이다.
하지만 크렘은 특훈을 받으면서도 딱히 훈련에 매진하는 느낌이 없었다.
처음에는 이것도 날 피하기 위해서인가 생각했지만 꼭 그런 것도 아닌 듯했다.
필요 이상 노력하지 않는 태도는 그날 이후로도 내가 멀리 있든 근처에 있든 한결같았기 때문이다.
내가 문득문득 돌아보면 크렘은 검을 휘두르기보다 다른 참가자들과 즐겁게 담소나 나누고 있을 때가 더 많았다.
“쟤가 그렇게 신경 쓰여?”
에클레어가 뽀송뽀송한 수건으로 얼굴의 땀을 닦으며 말했다.
마법 물품을 사용했는데도 땀이 날 정도면 그녀가 얼마나 훈련에 열심히 임했는지 알 만했다.
“언니는 신경 안 쓰여?”
나는 다소 찜찜한 기분으로 되물었다.
일전에도 말했던 것처럼 그녀는 원래 크렘과 행쇼 해야 하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에클레어는 크렘에게 전혀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녀가 무심한 눈빛으로 크렘을 돌아보았다가 수건을 수련용 인형에 대충 던져 걸쳐놓았다.
“커스터드 자작가 정도면 봐줄 만은 하지. 사실 자작가라는 게 그리 좋은 직위는 아니지만, 그래도 이 학교 덕에 돈도 꽤 벌었을 테고 이름값도 있으니까. 가문 살리자고 늙은 장사치한테 팔려가는 것보다야 낫지 않겠어?”
“언니!”
무례하고 직설적인 말투는 원래 그녀의 성격인 듯했다.
그 내용이 나이에 어울리지 않을 만큼 속세에 찌들어 있는 건 성격 탓인지, 귀족이라는 배경 탓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는 혹시 그 말이 다른 귀족의 귀에 들어가기라도 할까 놀라 만류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틀린 말이라도 했냐는 듯 뻔뻔하게 덧붙였다.
“솔직히 네가 꿀릴 건 없잖아. 너는 백작가인 데다 마탑 사람들과도 연줄이 있고, 아빠는 변방의 수호자에 친오빠는 유망한 천재. 더구나 본인도…….”
에클레어가 내 팔찌를 슥 보더니 다시 나를 마주 보았다.
공작 영애인 그녀의 눈에는 나도 썩 마음에 차지 않을지도 몰랐다.
나는 반사적으로 마른침을 삼켰다.
에클레어의 앞에만 서면 날카로운 검을 마주하고 있는 것 같다던 원작 크레페의 기분이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에클레어는 픽 웃으며 손을 들어 내 뺨을 콕 찔렀다.
“그래, 제대로 대시해 봐! 네가 백배는 아깝지. 귀엽고! 애교도 많고! 물론 좀 통통하긴 하지만… 뭐, 살이야 빼면 되니까.”
더 이상 젖살이라고도 할 수 없는 볼살이 폭신하게 들어갔다.
그녀는 재미가 들린 듯 내 뺨을 몇 번 더 조몰락거리다가 이내 손을 떼고 내 등을 팡 때렸다.
“자, 그런 의미에서 다시 훈련! 사랑 얘기는 여기까지!”
에클레어 입장에서만 사랑 얘기였던 잡담을 끝내고, 그녀가 다시 수련용 인형에 대고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나는 운동장 한편에서 사람들과 잡담을 나누고 있는 크렘을 쳐다보았다.
멀리서도 눈에 띄는 뽀얀 피부와 밝고 부드러운 머리색.
웃으며 대화하던 그가 시선을 느낀 듯 나를 쳐다보더니, 잠깐 헛기침을 하고 무리에서 벗어나 연습 자세를 취했다.
그가 높이 치켜들었던 검을 힘차게 내리그었다. 수련용 인형에 맞은 검 끝이 통 튀어 크렘의 이마에 딱 소리 나게 부딪쳤다.
“윽.”
“푸하하! 너 지금 뭐 한 거야?”
“방금 크렘 봤어? 킥킥.”
크렘과 얘기를 나누던 사람들이 그 모습을 목격하고 웃음보를 터뜨렸다. 크렘이 빨개진 이마를 가리고 어설프게 마주 웃었다.
하마터면 함께 웃음을 터뜨릴 뻔한 내가 합, 입을 막아 참았다.
“크레페 님?”
“아, 네!”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듣고 빠릿빠릿하게 차렷 자세를 취했다.
내게 다가온 검술 선생님이 지난 수업에서 썼던 뭉툭한 나뭇가지를 내밀었다.
“여기, 크레페 님이 쓰실 검입니다.”
목검이 아니라 진짜 나뭇가지.
나는 그걸 빤히 바라보다가 헛기침을 했다.
“크흠, 괜찮아요. 대회 때는 마법 물품을 쓸 거니까 보통 가검으로 연습할게요.”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럼요!”
생긋 웃으며 자신만만하게 대답하고는 훈련 시작과 동시에 한 자루 챙겨 왔던 목검을 들었다.
역시 팔찌를 발동시키고 자세를 취해보니 이전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가볍게 느껴졌다.
후후, 이거지!
나는 속으로 웃음을 삼키고 천천히 검을 치켜들었다.
카눌레의 검술 연습을 오래 지켜봤던 덕분에 겉보기만큼은 그럴싸했을 거라고 자신할 수 있었다.
게다가 엄마와 아빠 모두 검술에 능한 사람이었는데, 나라고 못하겠어?
“저기 봐, 쟤.”
“크레페?”
“제대로 검을 든 건 처음 보는 것 같은데.”
멀지 않은 곳에서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들리는 쪽을 흘끗 쳐다보자 아까 크렘을 보며 웃었던 낯선 이들은 물론이고 크렘 본인과 카눌레, 에클레어도 나를 지켜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게다가,
“호오.”
해볼 테면 해보라는 듯한 표정의 크바스까지.
“흥.”
두고 보라지!
저절로 전의가 불타오르는 순간이었다.
선생님이 내 자세를 봐주겠다는 듯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나는 천천히 호흡을 고르고 눈을 부릅떴다.
그리고 수련용 인형을 향해 검을 내리친 순간, 내 기억은 거기서 끊어졌다.
* * *
[…그대로 기절했지 뭐야. 아무래도 내가 마법을 너무 오래 발동시키고 있었나 봐.
보통 사람들은 마나가 부족해지면 몸이 먼저 아플 테지만, 난 이 체질 때문에 그런 증상 없이 픽 쓰러지는 모양이더라고.
아무튼 키슈 님이랑 피오르 선생님한테는 비밀인 거 알지?
못 만나게 된 거 이해해 줘서 고마워! 역시 오빠가 최고야. ―크레페가.]
마침표를 찍고 깃펜을 잉크병에 꽂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