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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는 너를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42)화 (42/181)

42화 

“뭐지……?”

아펠이 중얼거렸다.

나는 대답해 줄 생각도 못하고 위를 올려다보았다.

이곳은 지하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넓고 높았다. 천장과 벽은 동굴처럼 자연적인 돌이었고, 한낮의 태양과 같은 흰 빛이 공간 구석구석을 밝히고 있었다.

내가 개미 같아 보일 정도로 거대한 기둥은 고대 그리스 신전의 그것처럼 세로 줄이 조각되어 있었는데, 규칙적으로 배열되어서 엄숙한 분위기를 풍겼다.

마치 거인의 예배당 같은 곳이었다.

“시… 신전인가?”

혼잣말을 꺼내자 내 목소리가 여러 번 메아리쳤다.

“그런 것 같은데?”

아펠의 목소리도 벽에 반향이 되어 울렸다.

그는 용감하리만치 성큼성큼 들어가 우리가 들어온 문 건너편에 있는 거대한 문 앞으로 가서 섰다. ‘거인의 예배당’이라고 비유했던 대로, 아치형의 문은 끝이 안 보일 만큼 높았고 벽처럼 견고했다.

아펠이 문인지 벽인지 하는 그것을 몇 번 두드리다가 뒤를 돌았다. 이 공간의 주인공인 듯 가운데에 자리한 것은 화려한 제단이었다.

멀찍이서 아펠을 바라만 보고 있던 나도 호기심을 못 이기고 제단에 다가갔다.

그 위에는 타다 남은 양초가 가득했지만 제물 따위가 있어야 될 것 같은 중앙에는 아무것도 없이 텅 비어 있었다.

“영화 같은 데 보면 여기서 양의 배를 가르고 그러던데.”

“영화?”

“아무것도 아냐.”

대충 수습하고 제단의 가운데를 손가락 끝으로 쓸어보았다. 내 빈약한 상상력이 부끄럽게도 핏물은커녕 먼지 한 톨 없이 말끔하기만 했다.

“여기가 다인가?”

“그런가 봐. 들키기 전에 올라가자.”

“…그래.”

아펠은 조금 실망한 듯한 기색으로 말했다.

대체 뭘 기대한 건지.

나는 계단이 있는 곳으로 나와 그를 돌아보았다. 싱거운 탐험에 실망한 어린아이 같은, 아니 어린아이다운 표정이었다.

나는 그 얼굴을 보고 피식 웃었다. 그리고 아펠이 나오기를 기다렸다가 문을 닫았다.

“응?”

문을 다시 열어보았다. 낮은 제단 너머, 견고하게 닫힌 거대한 문이 바로 보였다.

“왜 그래?”

“아… 아무것도 아니야.”

방금 저 문 너머가 빛난 것 같았는데……. 잘못 본 거겠지?

【 크레페 】

미지의 지하 공간을 발견한 것치곤 다소 싱거운 탐험이었다. 아펠이 실망한 것도 조금은 납득이 됐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다행이었다. 마음을 다잡고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이 됐다는 게.

아펠은 원작에서도 마법에 재능이 있다고 언급된 만큼 배우는 속도가 매우 빨랐다.

다른 일정이 많아 내가 풀어오라고 내준 숙제를 못 해오는 경우가 종종 있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발전은 유의미한 정도였다.

“어때?”

청량하면서도 무거운 아펠의 마나가 공기와 섞여 사라졌다.

아펠의 질문을 들은 나는 책상 위에 놓인 잔을 톡 건드려보았다. 그냥 물이었던 게 살얼음이 되어 달그락 소리를 냈다.

나는 흐뭇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조금만 더 다듬으면 빙수도 해먹을 수 있겠다!”

“빙수? 그게 뭐야?”

“다음에 해줄게. 완전히 얼릴 수 있게 되면.”

자세한 얘기는 서프라이즈를 위해 남겨두자.

눅눅한 장마철도 지나고 늦가을에 접어든 요즘, 나는 아펠을 가르치는 재미에 푹 빠져 있었다.

정작 나는 마법을 배우는 데 진척이 없었지만 아펠은 내가 배워온 걸 그대로 읊어주기만 해도 쑥쑥 성장하니 그럴 만도 했다.

물만 줘도 자라는 콩나물을 보는 것처럼 뿌듯하다고나 할까.

음, 이런 비유는 별론가.

내가 잠깐 잡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에 아펠이 물었다.

“그거 디저트지?”

“어떻게 알았어?”

“너 단거 좋아하잖아.”

아펠이 나를 마주 보며 웃었다. 하지만 나는 그의 앞에서 디저트 얘기를 꺼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내가 고개를 갸우뚱하고 물었다.

“그건 어떻게 알았는데?”

“꿈에서 봤어.”

생각지도 못한 달콤한 대답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정말 사람 부끄럽게 만드는 덴 뭐 있다니까.

겪어본 적 없는 첫사랑의 기억이 생길 것 같은 파괴력이었다.

나는 고개를 돌리고 민망한 표정으로 헛기침을 했다.

“크흠.”

“다음에 케이크 갖다 줄까?”

“됐어, 들키면 어쩌려구.”

나는 퉁명스레 대답했지만 아펠은 서운한 기색 없이 내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꿀이라도 떨어질 것 같은 눈빛이었다.

아펠은 아무래도 나를 좋아하는 것 같았다. 그 예지몽이라는 것 때문인지, 아니면 『하루만 못생기고 싶다』에 나왔던 운명이라는 것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문제 아닌 문제가 있다면, 나도 아펠의 호의를 아무렇지 않게 받아 넘길 수 있을 만한 위인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도 운명이 작용한 덕인지 뭔지. 어쩌면 그냥 남주라서 콩깍지가 씐 걸지도.

“근데 너 요즘 바쁘지 않아?”

나는 금방 말을 돌렸다.

“맞아, 나 당분간 못 올 것 같아.”

아펠이 아쉬운 기색을 내보이며 대답했다. 나는 이유를 묻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것 같았어.”

“네가 올 수는 없는 거지?”

“여기 마법사분들도 못 가잖아. 어쩔 수 없지.”

같이 호들갑 떨어봤자 방법이 없었기에 되도록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아펠이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실망한 듯한 아펠을 토닥이며 덧붙였다.

“대신 나중에 우리가 사교계에 정식으로 데뷔하고 나면 얼마든지 초대해 줘. 이르지만 생일 축하하고. 응?”

그 말대로, 이제 곧 아펠의 생일이었다. 마탑에까지 그 들뜬 기운이 전해지고 있었으니 규모가 얼마나 크고 화려할지 얼추 짐작이 갔다.

게다가 귀족이 생일에 얼마나 바빠지는지는 나도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황자인 아펠이라면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고마워.”

아펠이 짧게 말하며 자신을 토닥이던 내 손을 잡았다.

나는 고개를 내리고 그와 맞잡은 손을 내려다보았다.

황족 아니랄까봐 그의 손등은 희고 말갰는데, 그와 달리 손마디는 조금 거칠었다. 검술 연습이나 공부를 많이 해서 그런 것 같았다.

원래 사람은 호의에 약하다고 했던가. 특히 그것이 미래의 약혼자임을 알고 있는 상황이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나는 다시 고개를 들고 아펠의 새파란 눈동자를 마주 보았다.

“너무 무리하지 마.”

“…응.”

잠시 말을 않고 있던 아펠이 싱긋 웃었다. 그는 내 손목에 둘러진 얇은 팔찌를 스치듯 만지고 내 손을 놓아주었다.

* * *

원작에서 아펠은 집착이 좀 있을 뿐 애정 표현에는 무뚝뚝한 성격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이라서 그런지 내게 호감이 있다는 사실을 숨기는 것 같지 않았다. 갈레트를 빼면 그렇게 대놓고 호감을 표하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갈레트는 가족이니까 셈하면 안 되려나?

아무튼, 아펠의 태도는 내게 매우 낯설었다. 하지만 지금의 만남도 원작에서 없었던 내용이니만큼 이번 미래에서도 약혼할 거라는 확신은 없었다.

브라우니라는 접점이 없어진 이상, 내가 마탑을 나가고 나면 그를 만날 일도 없어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만일 내가 키슈나 피오르의 밑에 수제자로 들어가면, 아펠이 정식으로 마탑에 들어왔을 때 다시 만날 수도 있겠지만…….

가만히 생각하던 내가 고개를 저었다.

역시 수제자가 될 필요는 없겠지. 어차피 마탑은 곧 폐쇄될 테니까.

그건 원작에서 아펠이 폭군이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사건이었다.

아펠은 자신이 마탑을 졸업하자마자 탑을 폐쇄시켰다. 마법이라는 힘을 독점하고 싶다는 이유라고 했던가.

키슈나 피오르를 비롯한 마법사들에게는 안된 일이지만, 나를 수제자로 들이려는 그들의 제안에 심드렁했던 것도 그런 이유였다.

그 전에 나랑 갈레트가 마법을 마스터해야 할 텐데.

나는 침대에 누워 아펠의 눈길이 닿았던 팔찌를 만지작거렸다.

그러나 내 희망 사항과 달리, 팔찌만 차면 마법사가 될 수 있을 거라느니 했던 피오르의 말뜻도 나는 여전히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쳇.”

원작의 크레페가 마법을 못 배웠던 이유가 있었던 건가.

나는 반쯤 포기하고 팔다리를 파닥거리며 이불을 뭉쳐 껴안았다.

지금쯤 아펠의 생일 파티가 한창일 것이었다. 다음 달까지 그를 못 만난다고 생각하니 조금 아쉽기도 했다.

아펠과의 인연은 어린아이의 풋사랑으로 끝날 확률이 농후했지만, 아무렴 어떤가.

나도 이 기회에 남주랑 썸이나 타봐야지.

가볍게 생각하고 눈을 감았다.

그러나 당분간 만나지 못할 거라는 예측은 정답이 아니었다. 아펠은 바로 그날 내 방의 창문을 두드렸으니까.

처음엔 그 소리를 알아듣기가 쉽지 않았다.

시간은 내가 완전히 잠에 빠져 있을 새벽이었고, 밖에는 가을비가 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덧창을 두드리는 아펠의 노크 소리를 빗소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잠결에 그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는 순간 환청을 들은 줄 알았다.

“크레페!”

나는 뒤늦게 눈을 비비고 일어났다.

비몽사몽간에 창문을 열자 아펠이 웬 작은 강아지를 품에 안고 있었다.

“뭐, 뭐야?”

“나 다시 가봐야 해. 몰래 빠져나온 거라. 이따 데리러 올 테니까 이 녀석 좀 맡아줄래? 부탁할게.”

사정은 모르겠지만 아펠은 어쩐지 다급해 보였다.

뒤로 반듯하게 넘긴 머리카락은 비에 맞아 엉망으로 흐트러져 있었고, 그는 자신을 쫓아오는 사람이 있기라도 한 듯 초조하게 위층의 창문과 옆의 본관을 번갈아 살폈다.

이상한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 새벽까지 그는 단정한 예복 차림이었으며 허리춤에는 보석으로 장식된 얇은 검이 매달려 있었다. 심지어 어디서 넘어지기라도 한 듯 무릎에선 피까지 났다.

“다쳤어? 아니, 싸웠어?”

“설명은 나중에 해줄게. 부탁해.”

그가 날 쳐다보았다. 세찬 비에 젖은 그의 속눈썹에서 빗물이 떨어졌다. 그것은 언뜻 눈물처럼 아펠의 뺨 위를 미끄러져 내렸다.

나는 그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손을 내밀었다.

아펠이 안고 있던 강아지를 내게 건네주었다. 인형 같은 크기에 비하면 제법 옹골찬 무게였다.

아펠이 잠깐 희미하게 웃는 것 같았다.

추측인 것은, 빗물 때문에 표정을 잘 알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강아지로 두 손이 묶인 내게 아펠이 손을 뻗었다. 그가 전쟁터에라도 나가는 듯 내 뺨을 살짝 쓸었다.

“고마워, 크레페.”

그 목소리가 어쩐지 먹먹해서, 어쩌면 방금 전 그의 표정이 웃는 게 아니라 우는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펠은 그 짧은 인사를 마지막으로 다시 위층으로 올라갔다.

나는 아직 얼떨떨한 정신으로 품을 내려다보았다.

귀가 쫑긋하고 주둥이는 톡 튀어나온 강아지가 초라한 몰골로 날 쳐다보고 있었다. 비에 폭삭 젖어 털이 꼬질꼬질해져 있었기에 더욱 그렇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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