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어느새 시선을 빼앗겼던 내가 세게 도리질을 쳤다.
“됐어! 책 가지러 온 거지?”
말을 돌리고 책상 서랍을 열었다.
키슈에게서도 들었듯이 아펠이 마탑에 오는 이유는 마법 공부를 위해서였다.
아펠은 며칠에 한 번씩 이렇게 내 방을 지나 도서관에 들어가곤 했는데, 나는 지난번 방문에서 그가 얘기했던 책을 미리 찾아놓은 참이었다.
“아, 고마워. 신경 안 써도 되는데.”
아펠이 밝은 얼굴로 책을 받아 들었다.
참 나, 그렇게 좋아하는 티가 나는데 어떻게 모르는 척을 해?
나는 웃음을 삼키고 태연히 의자에 앉았다.
“황태자님인데 이 정도는 해줄 수 있지.”
“나, 아직 황태자 아니야.”
아펠이 조심스럽게 부인했다.
그러고 보니 지금은 아직 태자 즉위식을 하기 전이었던가? 『하루만 못생기고 싶다』 내용에서는 첫 등장부터 태자였기 때문에 헷갈린 것 같았다.
하지만 당황할 건 없었다.
“너 외동아들이잖아. 어차피 황태자 될 걸, 뭐.”
“그런 얘기 하다가 큰일 나면 어쩌려고 그래.”
“너한테밖에 얘기 안 해.”
내가 밖에서 정치 얘기 할 일이 뭐가 있겠어?
그런 생각으로 꺼낸 말이었지만 아펠의 뺨은 조금 발개졌다. 나까지 민망해지게.
“크흠. 아무튼… 바로 돌아갈 거지?”
깊이 파고들어 봤자 어색해지기만 할 것 같아서 딴소리를 꺼냈다.
“응. 아무래도 들키지 않으려면 가서 공부하는 게 낫겠지.”
아펠이 대답했다. 어린아이가 다른 것도 아니고 원하는 걸 공부하기 위해 이렇게 생고생해야 한다는 게 조금 짠했다.
“마법 배우고 싶다고 하면 안 돼?”
“검술이나 제대로 하고 말하래.”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나는 그 문제의 해결법을 알고 있었다. 원작에서 봤으니까.
나는 잠깐 망설이다가 물었다.
“…도와줄까?”
그러자 아펠이 특유의 새파란 눈동자로 날 쳐다보았다.
사실 나는 미래를 바꾸는 데에 큰 거부감이나 공포심이 있진 않았다. 오히려 미래를 바꾸고 싶어 하는 쪽에 가까웠다.
그 이유는 내게 확고한 목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첫째는 엄마와 갈레트를 암살에서 지키는 것이었고, 둘째는 카눌레를 개심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카눌레를 마탑에 들여보내려 했고 브라우니와 파타슈를 저택으로 불렀다.
하지만 세상일이 꼭 내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진 않았다.
내가 엄마를 지키기 위해 브라우니를 키우기 시작하자 그로 인해 몽블랑은 저택을 방문했다. 엄마가 루아 요새에 갔을 때 그가 거기 온 것도 내가 미래를 바꿨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날, 몽블랑은 목숨을 걸고 나를 지켜주었고 나는 더 이상 몽블랑의 속내를 파악하지 못하게 되었다.
엄마를 암살하려 한 게 몽블랑이 아니면 누구인지도.
그래서 순순히 마탑에 들어왔다. 내가 알고 있는 정보만으로는 미래를 바꿀 수 없을 것 같아서, 주변인들을 지킬 힘이 필요할 것 같아서.
알고 있던 미래가 바뀐다는 건 생각보다 무서운 일이었다.
하지만 아펠이 마법을 배우도록 도와주는 건 미래를 바꾸는 게 아니잖아? 원작에서 나왔던 일이니까!
나는 기나긴 자기변명을 되뇌며 아펠에게 손짓했다. 아펠이 고양이처럼 발소리를 죽이고 내 뒤에 바싹 다가왔다.
방에서 도서관까지 가는 길은 여느 때보다도 음산했다. 추적거리는 빗소리가 벽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서 더 그렇게 느껴지는 것 같기도 했다.
복도를 다 지나서 내가 도서관 문에 손을 올리자 조각된 그림이 바뀌며 소리 없이 문이 열렸다.
이건 언제 봐도 신기하네.
나는 가까운 마법등을 몇 개 켜고 주변을 살펴보았다.
폐관한 시간, 한밤중의 도서관에선 서늘하고 고요한 비 냄새가 났다.
“응. 아무도 없는 것 같아.”
“뒷문으로 들어와도 되는데.”
“감기 걸린다니까.”
나는 아펠에게 다가가 아직 물기가 남은 그의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었다. 아펠이 배시시 웃었다.
“그런 걱정 해주는 건 너밖에 없어.”
“…너 아직 애잖아.”
괜히 낯 뜨거워져서 쏘아붙이듯 말하고 손을 내렸다.
빗소리를 뚫고 어디선가 늑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아펠이 소리 나는 쪽을 봤다가 다시 나를 향해 물었다.
“정말 이걸로 엄마를 설득할 수 있을까?”
“물론이지.”
나는 망설임 없이 대답하며 책장에서 교재 몇 권을 꺼냈다. 피오르가 내게 추천해 줬던 책들이었다.
대부분은 수학이었고, 이 중에는 아펠의 나이에 맞지 않는 어려운 난이도의 문제도 있었다.
내 팔에 책이 몇 권 쌓이기도 전에 아펠이 그것을 대신 들어주었다. 그가 책들을 책상에 올리고 대충 훑어보았다.
“어려워 보이는데…….”
“내가 가르쳐줄게. 일단 몇 권만 더 찾자.”
나는 아펠에게 찾아야 할 책들의 제목을 몇 개 알려주었다.
아펠이 고개를 끄덕이고 탐색을 시작했다. 나도 다른 책을 찾기 위해 2층으로 올라갔다.
『하루만 못생기고 싶다』에서도 아펠은 마법을 배우는 것을 반대당했다. 그럼에도 그가 여기 들어올 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재능이 뛰어나다는 사실을 증명해 줄 이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아펠은 아무에게도 배우지 않은 마법을 독학으로 배워 사용할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
나는 그냥 그 시기를 조금 앞당기려는 것뿐이었다. 사정을 알면서 마냥 무시하기도 뭐하고, 할 수 있는 만큼 도와주는 건 괜찮겠지.
“크레페.”
복층으로 된 도서관은 1층에서도 돔 형태의 천장을 볼 수 있도록 가운데가 훤히 뚫려 있었다.
내가 있는 2층에서 1층을 내려다보는 것도 물론 가능했지만 나는 아펠을 내려다보지도 않고 대꾸했다.
“으응?”
그러자 아펠이 다시 날 불렀다.
“잠깐만 내려와 봐.”
“왜 그래?”
그제야 나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아펠의 정수리는 보이지 않았다.
책장 사이에 가려진 건가?
나는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계단을 내려갔다. 그러나 아펠의 모습은 여전히 발견할 수 없었다.
“뭐야, 어디 있어?”
나는 숨바꼭질이라도 하듯 책장 사이를 돌아다녔다.
벽돌을 쌓아 만든 벽과 대리석 바닥에서 한기가 뿜어져 나왔다. 을씨년스러운 공기가 도서관에 그득했다.
누군가에게 들키기라도 할까 불을 몇 개 켜지 않았기에 사방이 어두컴컴했고, 발밑은 말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바닥에 물기가 남아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내가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약하게 철벅거리는 소리가 났기 때문이었다.
마치 비에 젖은 선객이 들어와 있기라도 한 것처럼.
도서관 안에 들어와서도 음산한 분위기는 계속되고 있었다. 건물을 두드리는 먹먹한 빗소리가 공포 영화의 배경음처럼 들렸다.
긴 책상에는 내가 아펠에게 전해주었던 책이 덩그러니 펼쳐져 있었는데, 마침 어딘가에서 바람이라도 분 듯 책장이 한 장 넘어갔다.
나는 문득 이 도서관에 창문이 없다는 것을 떠올리고 등골이 오싹해졌다.
“야, 어딨냐구…….”
“여기야. 이쪽.”
모습은 없이 목소리만 들렸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 목소리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등 뒤에서 아펠이 날 놀라게 하려는 건 아닐까, 하는 상상 때문에 겁이 났다.
날씨 때문인가? 느낌이 영 별로네.
다행히도 내 상상은 말 그대로 상상일 뿐이었다. 아펠은 도서관 구석에 그저 가만히 서 있었다.
하지만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 이게 뭐야?”
입을 다물지 못하고 물었다. 두 면이 벽으로 막힌 도서관 구석 바닥에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뚫려 있었던 것이다.
“모르겠어. 나도 처음 봐.”
아펠과 내가 나란히 서서 계단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도서관 구석까지 처음 와본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이런 비밀 통로가 있는 걸 지금껏 모르고 있었다니.
밤이라서 드러난 건가? 아니면 비가 와서? 어쩌면 랜덤으로 열리는 문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답은 알 수 없었다. 게다가 아래에는 마법등 하나 켜져 있지 않았다. 거대한 구멍처럼 어두운 공간이었다. 한번 들어가면 다시는 못 나올 것 같은 압박감이 느껴졌다.
나는 아펠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됐어, 그냥 신경 끄자.”
“크레페, 너 그거 알아? 원래 마탑은 지하가 훨씬 넓대. 황궁에도 그런 소문이 있어. 궁부터 마탑까지 이어지는 비밀 통로가 있다든가.”
“딴소리하지 말고 와.”
나는 애써 무시하고 도서관 중앙으로 돌아가려 했다. 하지만 아펠이 먼저 말을 이었다.
“비밀 통로가 있으면, 너한테 민폐 끼치지 않아도 괜찮겠다.”
“야, 안 돼.”
아펠의 푸른 눈이 호기심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그는 내가 안고 있던 책을 가져다가 옆에 있는 책장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웃는 얼굴로 내게 손을 내밀었다.
“가보자. 이번에도 내가 지켜줄 테니까. 응?”
탑에서 떨어질 뻔한 얘기를 이럴 때 끌고 오는 건 반칙이라고!
나는 그 말을 꺼내려다 말았다. 어차피 내게는 그의 행동을 통제할 만한 권한이 없었으니까.
아니면 그냥 내가 잘생긴 얼굴에 약해서 그런 걸지도.
나는 지금껏 모르고 있던 나의 새로운 일면을 깨닫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 소리를 들은 아펠이 날 돌아보았다.
“왜 그래?”
“아냐…….”
힘없이 대답하고 그를 따라 계단을 내려갔다. 문득 뒤를 돌아보니 2미터도 넘게 내려온 것 같았다.
여전히 지하는 어두웠고 어디가 바닥인지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계단의 턱이 낮고 난간 손잡이도 달려 있었기에 내려가는 데 다른 문제는 없었다.
나는 한 손으로는 난간, 다른 손으로는 아펠의 옷자락을 잡고 마저 계단을 내려갔다.
난간은 도료를 발라 매끈하게 만든 나무로 되어 있었는데, 여기까지 내려오는 동안 먼지 한 톨 느껴지지 않았다. 주기적으로 관리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럼 그렇게 위험한 데는 아닐 거야.
사실 마음속으로는 알고 있었다. 이 비밀 장소에 대해 큰 기대나 걱정이 필요하진 않다는 것을.
어둠이 주는 본능적인 불안 때문에 망설였을 뿐, 마탑에 거대한 지하가 있다는 것은 이미 들은 바가 있었으니까.
어쩐지 여기 있는 마법사들 모두에게 숙식을 제공하기엔 마탑의 규모가 너무 작다 싶었는데, 나중에 물어보니 그들의 방은 기숙사 건물 지하에 있다고 했다.
물론 황궁까지 이어지는 비밀 통로 어쩌고 하는 얘기는 들은 적 없지만, 아마 기숙사 건물이나 연구동과 연결된 지하 복도라도 있는 거겠지.
“다 왔어. 문인가 봐.”
앞장서 있던 아펠이 멈췄다. 하마터면 그의 등에 코를 박을 뻔한 내가 그에게 딱 붙어 섰다.
“연다?”
“응.”
나름 진지하게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피오르가 마법 서약을 안 한 게 무서워서라고 했던가?
갑자기 그 얘기가 왜 떠오른 건지 모르겠다.
그러는 사이에 앞을 더듬어 손잡이를 찾은 아펠이 천천히 문을 열었다. 약간의 틈만으로도 밝은 빛이 새어 나오는 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