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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는 너를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29)화 (29/181)

29화 

나는 애꿎은 문장과 씨름하다가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뭐 하세요?”

“으아아아악!”

갑자기 등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놀라 나는 비명을 질렀다. 편지 몇 장이 허공에 휘날렸다.

“노크를 하구 와요!”

“했는데… 못 들으셨어요?”

키슈가 멋쩍게 말하며 바닥에 떨어진 편지들을 주웠다.

내가 너무 집중하고 있었나?

나도 덩달아 민망해져서 내 인생 공략집을 덮고 나머지 편지지를 정리했다. 키슈가 자신이 주운 편지를 책상에 내려놓았다.

“감사합니다.”

“어머, 이건 뭐예요? 내 인생 공략집?”

“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그녀의 시선이 내 공책에 와 있는 것을 깨닫고 후다닥 두 팔로 표지를 덮어 글씨를 가렸다.

“어, 어, 어떻게 알았써요?”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이건 내가 아주 어렸을 때, 슈트루델국의 글자를 배우기도 전부터 쓰던 것이었다. 당연히 표지에 적힌 제목도 모두 한글이었다.

카눌레도 한글을 읽지 못해서 몇 년 동안이나 나를 낙서쟁이라고 불렀다. 근데 키슈가 한글을 안다고?

혹시 키슈도 여기가 책 속이라는 걸 아나? 혹시 한국인? 두 유 노 김치?

당황한 나머지 뜬금없는 생각들이 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그러나 정작 키슈는 호탕하게 웃으며 내 등을 두드렸다.

“아하하, 놀라시긴. 암호로 쓴 일기장 같은 건가 봐요?”

“네? 네, 네.”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키슈는 관심 없다는 걸 어필하듯 뒤로 살짝 물러나며 말했다.

“너무 놀라지 마세요. 저 정도 되는 마법사는 마법 서약을 할 때 신의 축복을 받거든요. 읽는 눈이라고 하는데, 그 능력이 있으면 외국어나 암호문 같은 걸 그냥 자연스럽게 읽을 수 있어요. 그걸로 고서를 해독하고 마법을 연구하는 거죠.”

나는 엎드려 있던 몸을 일으키고 내 인생 공략집을 내려다보았다.

읽는 눈? 신의 축복?

아직 키슈의 말이 완벽히 이해된 것은 아니었다. 나는 얼빠진 사람처럼 눈을 끔뻑거렸다.

키슈가 어깨를 으쓱하며 아무렇지 않게 덧붙였다.

“뭐, 평생 독신으로 살겠다고 서약까지 했는데 그 정도 혜택은 있어야죠. 말하기나 쓰기는 못하지만.”

“신의 축복이요? 그것도 마법이에요?”

나는 신경 쓰였던 단어를 다시 물었다. 전생에서부터 마땅한 종교가 없던 나는 그 단어가 매우 낯설었다.

키슈가 짧게 대답했다.

“아뇨.”

신이 있다고?

나는 순간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키슈가 내 놀란 표정을 보며 까르르 웃었다.

“아하하, 대단하죠? 마탑 들어오실래요?”

기승전 영업인가.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정신이 들어 헛기침을 했다.

“끄흠. 그래서 이 시간에 무슨 일로 오셨써요?”

“브라우니 때문에요. 이번에 수플레 님이 영지를 떠날 때 제가 브라우니를 데리고 동행하려고 하는데, 괜찮죠?”

“네? 엄마가 영지를 떠난다구요?”

나는 대답 대신 그녀에게 되물었다. 키슈가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아… 수플레 님한테 얘기 못 들으셨어요?”

“엄마아아아!”

해가 다 진 시간이었지만 엄마는 아직도 집무실에 있었다. 나는 비탈길을 구르는 도토리처럼 달려 집무실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헥… 헥…….”

“크레페? 아직 안 잤니?”

“어… 훅…….”

아이고, 오면서 괜히 소리 질렀네.

막상 문은 열었는데 목소리가 안 나와서 나는 한참 숨을 골랐다. 그새 뒤따라온 키슈가 어색하게 웃으며 뒷머리를 긁었다.

“조사 나가신다는 거 비밀이었어요?”

“…….”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듯 엄마가 내게 다가와 허리를 숙였다.

“크레페?”

“가, 가지 마요!”

나는 거두절미하고 그렇게 말하며 엄마의 치맛자락을 잡아당겼다.

엄마가 키슈에게 눈짓을 했다. 키슈가 민망해하는 얼굴로 사과하고 자리를 피해주었다.

“끙차.”

엄마가 날 안아 들었다.

“아이구, 우리 크레페 언제 이렇게 컸어? 이제 한 손으로 안지도 못하겠네.”

“엄마…….”

“근데 몸만 컸나 봐. 엄마랑 떨어지는 게 그렇게 무서워?”

엄마가 소파에 날 내려놓고 옆자리에 앉았다.

에이미가 말하길, 엄마가 요즘 나 때문에 걱정이 많다고 그랬다. 아마 그녀가 나 몰래 영지를 나갔다 오려던 것도 날 위해서였던 것 같았다.

내가 이렇게 초조해할까 봐.

“엄마, 가지 마요.”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엄마가 곤란한 듯 웃었다.

“놀러 가는 게 아니라 아빠를 대신해 가는 거야. 아침부터 밤까지, 딱 하루만 있다 올 거고.”

“그럼 저두 같이 갈래요.”

주저 없이 말하며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듯 엉덩이를 들썩이자, 엄마가 내 어깨에 손을 올리고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크레페, 엄마는 남부에 있는 루아 요새가 튼튼한지 확인하러 가. 몬스터나 산적은 변방에만 있는 게 아니거든. 거기는 아주 위험해서 널 데려갈 수가 없어.”

엄마의 고동색 눈동자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꾸짖는 것도, 억지로 달래는 것도 아니었다.

어지간한 상황이었다면 나도 이쯤에서 물러났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엔 어지간한 상황이 아니었다.

“싫어요.”

“크레페, 이건 네 고집으로…….”

“엄마.”

나는 그녀의 손 위에 나의 다른 손을 포개고 말을 이었다.

“루아 요새면 엄마 가문에서 관리하고 있던 거잖아요. 남부면 완전 미개척지도 아니구, 몽블랑 후작령 근처 아니에요? 게다가 키슈 님이 브라우니를 데려간다는 건 파타슈 님도 같이 간다는 뜻일 텐데, 진짜 위험하면 그렇게 할 리가 없죠. 그쵸?”

“…….”

엄마에게 이런 식으로 대꾸하긴 처음이었다. 아니, 엄마뿐 아니라 그 누구에게도.

그래서인지 엄마는 조금 놀란 듯한 기색이었다.

아이처럼 안 보였을까? 내가 뭔가에 씌기라도 한 것 같았을까?

문득 그런 걱정이 들었으나, 그런 것 때문에 내 주장을 굽힐 생각은 없었다.

“저한테도 꼭 엄마를 따라가야 할 이유가 있써요. 위험한 짓은 안 하겠다고 약속할게요. 부탁이에요.”

“…….”

말을 마치고 입을 다물었다.

그녀를 설득하지 못하면 마차에 잠입이라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제 그녀가 내 진심을 알아주길 바라는 수밖에…….

“…언제 이렇게 어른스러워졌을까, 우리 딸.”

입을 다물고 있던 엄마가 옅은 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엄마?”

엄마가 나를 품에 안고 말했다.

“그래, 알았어. 네 말대로 할게.”

이렇게 금방 긍정의 답을 얻어낼 줄이야!

“고, 고마워요!”

나는 화색을 띠고 대답했다. 하지만 엄마는 어쩐지 어두워 보이는 기색이었다.

그녀가 내 눈을 마주 보고 진지하게 말했다.

“크레페, 대신 한 가지만 약속해 줘.”

“네, 네.”

위험할 만한 일은 하지 않기라든지, 그런 거겠지.

나는 가볍게 생각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가 말을 이었다.

“엄마한테 아무것도 숨기지 않겠다고.”

“아…….”

반사적으로 머뭇거렸다가 뒤늦게 입을 다물었다. 아니, 이 반응이 오히려 더 수상해 보였을까?

나는 불안한 시선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엄마는 내 대답을 더 추궁하는 대신 살포시 웃으며 손가락을 들었다. 그리고 내 뺨을 콕 찔렀다.

“엄마……?”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그녀를 불렀다. 엄마가 못 들은 척 다시 내 볼을 꾹 눌렀다.

“후후, 갈레트가 이걸 왜 좋아하는지 알겠다.”

엄마가 어린애처럼 장난스럽게 웃으며 양 손바닥으로 내 볼따구니를 자근거렸다.

“그만뇨.”

내가 붕어 입술로 말하자 엄마가 손을 떼고 날 다시 껴안았다. 그녀가 내 귓가에서 속삭였다.

“약속한 거야. 알겠지?”

* * *

“날씨가 좋네요.”

익숙한 얼굴인 마르크가 말했다. 위험한 곳을 가는데 개인 호위기사 한 명 없이 떠날 순 없었기에 그가 나와 동행하게 된 것이다.

“그러게요.”

나는 짧게 대답했다. 마차 옆자리에 앉은 마르크가 슬쩍 내 눈치를 보았다.

“크흠, 아가씨.”

“네?”

“혹시 불편하시면 저 나갈까요?”

다른 기사들은 모두 마차 밖에서 말을 타고 있었다. 내가 평소와 다르게 말수가 없으니 저 때문일까 걱정하는 모양이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그냥 졸려서 그래요.”

그렇게 말하자마자 타이밍 좋게 하품이 터져 나왔다.

나는 입을 쩍 벌려 하품하고 고개를 털어 잠을 쫓았다. 파타슈의 무릎에 앉아 있던 브라우니가 덩달아 하품했다.

당연하게도 나는 잠을 설쳤다. 오늘이 결전의 날이라고 생각하니 편하게 잠들 수가 없었다.

그래, 오늘일 거야.

나는 그렇게 되뇌었다. 그 생각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우선 루아 요새가 몽블랑 후작령과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것.

오늘 뭔가 일이 생긴다면, 원작에서 엄마의 죽음을 두고 ‘자신이 신경 쓰지 못한 탓’이라고 말했던 몽블랑의 대사와도 정황상 일치한다.

그리고…….

나는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만지작거렸다. 은색 실로 마법진 자수가 새겨진 이것은, 몽블랑이 놓고 갔던 물건이었다.

“사랑하는 그분을 볼 생각으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나 봐요?”

키슈가 내 속도 모르고 웃었다. 나는 잠깐 눈만 흘기고 말았다.

그녀의 말대로, 오늘 요새에는 몽블랑도 오기로 되어 있었다. 키슈가 브라우니를 데려온 이유도 몽블랑과 약속을 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니 몽블랑이 엄마를 암살하려 한다면 오늘만큼 적절한 기회도 없을 것이다.

사실 『하루만 못생기고 싶다』 원작에서는 없던 내용이었다. 내가 브라우니를 키워서 생긴 변화인가 싶기도 했다.

얻는 게 있다면 잃는 것도 있다고 했던가. 브라우니를 키워 안전해지려고 한 것이 어쩌면 자충수였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뭐 어쩌겠어.

어차피 과거는 돌이킬 수 없다. 중요한 건 지금이지.

“하암…….”

하품을 한 지 얼마나 됐다고 또 하품이 터져 나왔다. 나는 손수건을 품에 넣고 눈을 비비적거렸다.

“잠깐 눈이라도 붙여요.”

키슈의 말을 귓등으로 흘리며 창밖을 쳐다보았다. 이 마차에는 키슈와 파타슈, 나와 브라우니, 마르크가 타고 있었고 엄마는 요새의 책임자와 같이 다른 마차에 타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래두 몇 시간 안 걸릴 텐데 그냥 기다릴게요.”

나는 눈에 힘을 주고 창문 밖에 보이는 엄마가 탄 마차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래, 쉽게 잠들 수야 없지. 가는 길에 엄마가 위험해질 수도 있는…….

“크레페 님!”

“에, 네?!”

화들짝 놀라 대답했다.

어쩐지 입가가 축축해서 나는 소매로 턱을 문질렀다. 마르크가 어색하게 웃었다.

“루아 요새에 도착했습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창문 밖을 보았다. 키슈와 파타슈는 이미 브라우니와 함께 저 멀리까지 나가 있었다.

뭐야, 나 언제 잠들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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