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나는 입을 다물고 브라우니를 내려다보았다.
원작인 『하루만 못생기고 싶다』에서는 브라우니의 주인인 아펠 황태자와 파타슈가 모두 마법사였다. 그래서 브라우니가 그렇게 빨리 성장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는…….
“저 재능 있써요?”
키슈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키슈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집약된 마나를 눈으로 보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거든요. 게다가 마법사들의 마나도 느껴지신다면서요.”
“맞아요, 그거 대단한 꺼예요. 저도 보는 건 잘 못하거든요.”
파타슈가 거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별로 큰 위안이 되어주진 못했다.
그들의 말대로, 마법사들이 마법을 부리려 할 때 그 마나를 느끼는 것이나 마법진을 보는 것은 어느 정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내가 직접 그 마나라는 것을 느끼고 이용하는 것은 별개였다.
갈레트와 나는 지난 1년 동안 브라우니를 만지작거리며 그 마나라는 것을 느끼려 부단히 노력했으나 결국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고 갈레트는 마탑에 들어가서 배우겠다며 이론서만 읽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는데, 내게는 그렇게 시간이 많지 않으니 초조함만 더할 뿐이었다.
“휴…….”
나는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어디 가시려구요?”
설마 낮에 무슨 일이 일어나진 않겠지. 키슈랑 파타슈도 있고.
나는 파타슈에게 우리 엄마를 지켜달라는 말 대신 짧게 설명했다.
“디저트 먹으러요.”
“아. 다녀오쎄요.”
파타슈가 미련 없이 고개를 내렸다.
나는 그의 손끝에서 자지러지는 브라우니를 보고 있다가 쓸쓸히 걸음을 옮겼다.
아무튼 자식 새끼 키워봤자 소용없다니깐.
내가 부엌 근처를 기웃거리는 것을 발견하자마자 에이미는 두말 않고 티 세트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우선 차가 식지 않도록 하는 천 덮개를 찻주전자에 씌우고, 바퀴가 달린 트레이를 가져와 그 위에 화려한 찻잔과 은으로 된 티스푼, 티 타이머 용도의 모래시계를 놓았다.
뒤이어 3단짜리 티 트레이까지 올리려 하는 걸 보고 내가 손을 내저었다.
“그냥 우유랑 케이크만 가져갈게요!”
같이 먹을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굳이 저런 수선을 떨 필요는 없었다. 내게 필요한 건 당분뿐이었으니까.
그러나 내가 그렇게 말하자마자 에이미는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그래도 괜찮으시겠어요?”
아니, 누가 보면 내가 맨날 3단짜리 티 트레이를 다 비우는 줄 알겠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말했다.
“괜찮아요. 밖에서 가볍게 먹을 거라서.”
“그러시다면…….”
에이미가 말끝을 흐리고 케이크와 포크, 쿠키를 올려놓은 접시 하나와 우유가 담긴 컵 하나를 준비해 주었다. 직접 그것을 들고 나를 따라오려는 걸 내가 말렸다.
“제가 가져갈게요.”
내가 그녀를 향해 두 손을 뻗었다. 에이미는 썩 마뜩잖은 표정으로 내게 접시와 컵을 넘겨주었다.
나는 접시에 쌓인 쿠키가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조심 받아 들고 인사했다.
“고맙습니다.”
“아가씨.”
“네?”
고개를 들어 에이미를 마주 보았다. 에이미가 무릎을 굽히고 앉아 말했다.
“아가씨가 요즘 기운이 없어 보인다고 주인님이 걱정이 많으세요. 이제 혀 짧은 소리도 자주 안 내시고.”
마지막에 덧붙인 말은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어찌 대답해야 할지 머뭇거렸다.
에이미가 말을 이었다.
“케이크든 뭐든 잔뜩 준비해 드릴 테니 기분 푸세요. 큰 도련님의 파티에 참석하기 싫으면 쉬셔도 되고, 작은 도련님이 놀리는 게 문제면 제가 혼내드릴게요. 연애 문제라도… 저는 응원할 테니까요. 몽블랑 후작님이든 파타슈 님이든.”
에이미의 말을 들으며, 나는 문득 작년의 파타슈를 떠올렸다. 어린아이가 제 감정을 꾹 억누르고 아무렇지 않은 척 고개를 치켜들었던 그때의 상황을.
어쩌면 에이미가 날 볼 때 느끼는 감정도 그것과 비슷할 것 같았다.
“푸핫.”
에이미의 표정이 너무 진지해서 나는 그만 웃음을 터뜨려버렸다.
“아가씨?”
“아하하. 괜찮아요, 에이미.”
미래를 걱정하는 건 나 하나면 됐다. 나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하지 않아도 될 걱정을 하는 일은 원치 않았다.
나는 에이미에게 다가가 그녀와 뺨을 맞대고 쪽, 소리를 냈다.
“걱쩡해 줘서 고마워요.”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더니, 몸이 피곤한 건 여전했지만 기분은 많이 풀렸다.
어쩌면 나는 욕심을 부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지난 생에 가지지 못했던 행복을 다신 놓치기 싫어서.
하지만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 때문에 현재를 망칠 순 없지.
나는 벤치에 앉아 옆자리에 우유를 내려놓고 접시와 포크를 들었다.
접시에 담겨 있는 건 서양식 쇼트케이크였다. 비스킷 위에 진하게 조린 딸기청과 크림, 생딸기를 얹고, 그 위를 다시 담백한 비스킷으로 덮은 것.
꼭대기에는 슬라이스한 딸기와 생크림, 민트 잎으로 장식되어 보기에도 예뻤다. 생크림은 딸기청과 닿아 연한 분홍색이었고 케이크 옆에는 쇼트 브레드 쿠키도 함께였다.
으으, 맛있겠다!
“또 먹냐?”
나는 고개도 안 들고 케이크를 잘라 입에 넣었다. 생크림의 은은한 단맛, 혀끝을 간질이는 딸기 향, 입안에서 부스러지는 바삭한 비스킷과 부드러운 크림이 어우러지는 감촉까지, 무엇 하나 그냥 넘길 수 없는 환상적인 조합이었다.
캬! 역시 스트레스받을 땐 단게 최고야!
“야, 내 말 안 들려?”
카눌레가 내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나는 케이크를 오물오물 씹어 삼킨 후에야 카눌레의 눈을 마주 보았다.
“넌 왜 멀쩡한 데 놔두고 여기서 케이크를 먹고 있냐? 다 쳐다보잖아.”
나는 그 말을 듣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기는 피낭시에 제2기사단의 연무장이었다. 그의 말마따나 근처에 있던 기사들이 훈련을 하며 이쪽을 힐끔거리고 있었다.
에, 굳이 헬스장에 간식을 가져와 먹는 것처럼 보였으려나.
기사 연무장이 단식원은 아니니까, 하고 가볍게 생각했지만 다시 보니 조금 이상한 짓을 한 것 같기도 하다.
나는 민망함을 뒤로하고 태연한 척 웃었다.
“우리 오빠 연습하는 거 구경하러 왔찌. 잘하고 있어?”
“궁금해?”
카눌레가 가검을 제 어깨에 올리고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얼마 전에 커스터드 귀족 학교에서 또 축제가 열렸다.
이번에 갈레트는 검술 대회에 아예 참가하지 않았지만 카눌레는 엄마를 졸라 축제 구경을 갔다. 카눌레가 검술에 재능이 있다는 기사단장의 추천이 있었기 때문에 엄마도 시간을 냈다.
토너먼트로 선출된 검술 대회의 우승자는 나도 아는 얼굴이었다. 갈레트의 생일 파티에서 진상을 부렸던 덩치였다.
이름이 크바스였지, 아마?
카눌레는 크바스에게 졌던 기억이 떠올랐는지 그날부터 검술 연습에 더욱 열을 올렸다.
그랬던 카눌레가 지금 저렇게 의기양양한 태도를 보이니 내가 다 기특했다.
나는 접시를 내려놓고 벤치 위에 섰다. 그리고 손을 뻗어 카눌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열씸히 했구나. 잘했어!”
그러자 카눌레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내가 자길 애 취급 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열 살이면 충분히 애였지만.
“치, 치워!”
카눌레가 후다닥 내 팔을 뿌리치고 손등으로 뺨을 가렸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카눌레를 보며 내가 슬쩍 말했다.
“배신할 거면 너무 열심히 하진 마.”
“뭐라는 거야?”
그런 게 있단다.
나는 대답 대신 다시 벤치에 앉았다.
* * *
오늘도 평온한 하루라 다행이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방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잠들기 전에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다.
나는 책상 앞에 앉아 서랍을 열었다. 작년에 몽블랑이 버려두고 간 그의 손수건이 보였다.
나는 그 옆에서 빈 편지지를, 책상 한쪽에서는 깃펜을 뽑아 들었다.
오늘은 몽블랑 후작에게 편지를 쓰는 날이었다. 원래 한 달에 한 번만 보내고 있었지만, 내가 일곱 살이 된 후부터는 몽블랑에게 편지를 쓰는 횟수를 보름에 한 번으로 늘렸다. 이유는 말할 것도 없이 아부성이었다.
저 착하죠? 싹싹하죠? 귀엽죠? 그러니까 우리 가족 좀 살려주세요.
음, 이렇게 말하니 너무 구질구질한데.
아무튼 내용은 별것 없었다. 혹시라도 암살 계획에 도움이 될까 봐 일부러 집안 관련된 얘기는 쏙 빼고 적었으니까.
오늘은 브라우니랑 뭘 하고 놀았다, 키슈 님과 무슨 말을 했다. 그런 게 내용의 전부였다.
그럼 이번엔…….
나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몇 마디 썼다.
[안녕하세요, 몽블랑 후작님. 크레페예요. 오늘은 딸기 쇼트케이크를 먹었습니다. 우유와 같이 먹으니 달달해서 맛있었습니다. 후작님도 꼭 드셔보세요.]
그러고 보니 저번 편지에는 치즈 케이크에 대해 썼던 것 같기도.
에이, 뭐 어때.
디저트 칼럼 같은 편지를 대충 마무리하고 종이를 접었다. 그리고 엄마에게 그 편지를 갖다 주기 전, 다시 서랍을 열어 이번에는 내가 쓴 『내 인생 공략집』을 꺼냈다.
[크레페는 일곱 살에 엄마를 잃었다.]
공책의 제일 마지막 페이지는 그것과 관련된 내용으로 도배가 되어 있었다. 내가 사소한 것이라도 떠올리기 위해 고군분투한 낙서들이었다.
다행히 보람은 있었다. 엄마가 아닌 다른 인물에 대한 정보를 정리하던 중에 새로운 단서를 얻어낸 것이다.
이를테면, 크레페가 몽블랑을 만나 회상하는 장면은 대충 이렇게 시작됐다.
[몽블랑 후작의 외모는 마치 겨울의 설산을 사람으로 빚어놓은 것 같았다. 그의 앞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오한이 들 정도였다. 나는 숨소리를 떨지 않기 위해 마른침을 삼켜야 했다.
내가 이 남자에 대해 떠올릴 수 있는 가장 오래된 기억은 엄마의 장례식이 있던 날이었다. 그날은 해가 뜬 후에도 하늘이 흐렸다. 기사들이 엄마의 시신을 인수하기 위해 부산히 움직이고 있었다.
몽블랑은 서늘한 바람이 부는 정원에 서서 시녀장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안개비가 내려 표정은 잘 보이지 않았다. 어린 내게 그의 한마디가 들렸다.
“제가 신경 쓰지 못한 탓입니다.”
그때부터 나는 이 사람이 꺼림칙했다.]
물론 이건 순수하게 내 기억력에 의존한 것이니 완벽히 똑같진 않겠지만, 적어도 그 분위기는 확실했다.
‘몽블랑이 신경 쓰지 못해서?’
나는 내가 적어놓았던 글에 밑줄을 쳤다.
단순히 유감의 표현으로 한 말이 아니었다면, 그것은 분명 큰 힌트였다. 그냥 어느 날 저택에 암살자들이 쳐들어와서 엄마를 죽이고 떠난 거라면 몽블랑이 그런 말을 했을 리 없으니까.
나는 지금까지 몽블랑에게서 받았던 답장들을 쭉 꺼내 읽기 시작했다. 혹시 여기에 내가 놓친 정보가 있다면 그게 이 위기를 극복할 실마리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백 번 천 번 들여다봐도 이거다 하는 부분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