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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나의 시간이 만나는 순간 (138)화 (138/139)
  • 외전 12화

    길고 긴 시찰을 마치고 황궁에 돌아온 뒤로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고, 여름 막바지의 햇살이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 중앙 정원을 산책하던 안나가 손으로 가림막을 만들어 눈가를 뜨겁게 달구는 태양을 가렸다. 안나의 전담 수행원으로 선택받았던 카밀 에르트가 빠르게 안나의 곁으로 다가와 양산을 펼쳤다.

    “황후 마마. 이만 돌아가시겠습니까.”

    “그게 좋을 것 같네요.”

    산책을 중단하고 방으로 돌아온 안나가 쓰고 있던 모자를 벗는데, 순간 머리가 아찔하며 현기증이 났다. 가까스로 안락의자를 붙들어 몸을 지탱한 안나가 까매진 눈앞이 원래로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황후 마마. 괜찮으십니까.”

    안나의 지시로 차를 챙겨 방으로 돌아온 카밀 에트르가 그녀의 팔을 부축했다. 황후의 이마 위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마마. 제가 바로 주치의를 불러오겠습니다.”

    호흡이 진정된 안나를 의자에 앉힌 카밀이 등을 돌리려는데, 안나가 그의 팔목을 잡아 행동을 저지했다.

    “아니, 카르멘. 카르멘을 불러줘요. 지금 지하 도서관에 있을 거예요.”

    “알겠습니다, 마마.”

    “그리고.”

    안나가 힘겹게 덧붙였다.

    “폐하께는 아무 말도 전하지 말아요. 더위에 잠깐 현기증이 난 것뿐이니까.”

    “……예, 마마.”

    안나에게 깊게 고개를 숙이고 방을 나선 카밀이 빠르게 복도를 지나쳐 지하 도서관으로 향하는 계단에 발을 들였다.

    ‘몸이 안 좋다는 걸 티를 내지 않는 사람이야. 황후의 건강에 조금이라도 이상이 있다고 생각되면 그 즉시 나에게 알리도록 해. 알겠는가.’

    카밀은 제게 떨어졌던, 필리프의 엄한 당부를 떠올렸다.

    보고하지 않아도 괜찮으려나.

    지하 도서관으로 향하던 카밀의 발에 망설임이 섞이기 시작했다. 황후의 상태를 제대로 보고하지 않으면 당장 수행원의 자리를 잃게 될 것이라는 황제의 엄포가 윙윙 귓가를 맴돌았다.

    오랜 고민 끝에, 발의 방향을 바꾸려던 그가 다시 지하 도서관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황제의 명령이 엄중하다고는 하나 지금 자신은 황제가 아닌 황후를 위해 존재하는 사람이었다. 응당 황후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 옳았다.

    * * *

    “깊게 호흡하십시오.”

    방 안에 진정 효과가 있는 향을 피운 카르멘이 침대에 누운 안나의 배에 손을 가져다 댔다.

    “자, 저와 함께 호흡하십시오. 깊게 들이마시고 최대한 천천히 내쉬어야 합니다.”

    어렴풋이 짐작은 하고 있었다. 머지않아 둘째 아이를 가질 것이고, 그 아이가 딸이 되리라는 사실을. 하지만 그 시기가 이렇게 빨리 찾아올 것이라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안나는 지금 제 배 안에 새 생명이 자라나고 있음을 확신했다.

    “황후 마마.”

    안나의 호흡과 배 모양을 세심하게 살핀 카르멘이 천천히 입술을 떼어냈다.

    “아직 정확한 결과를 알 수는 없습니다. 아시다시피, 임신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기계가 없는 상황이니까요.”

    말을 듣는 안나의 얼굴에서 큰 표정 변화가 보이지 않았다.

    “아마 다음 달 정도면 확실한 결과를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때까지 몸 관리에 주의하셔야 합니다. 산모에게는 늘 임신 초기가 가장 위험할 수 있습니다.”

    카르멘은 그 외 몇 가지의 주의사항을 말해 준 뒤 안나의 침실을 나섰다. 납작한 배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누웠던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자 물러서 있던 시종들이 침대 가까이 다가섰다.

    “황후 마마. 재단사가 알현을 청합니다.”

    “음, 들어오라고 해요.”

    매해 수확제를 앞두고 열리는 황궁 무도회가 열흘 앞으로 다가왔다. 드레스 코드가 엄격하게 정해진 무도회라 의상을 고르는 일에도 꽤 긴 시간이 필요했다.

    “황후 마마를 뵙습니다.”

    진지하게 예를 갖춘 재단사가 가봉을 마친 드레스를 안나에게 내밀었다. 드레스의 색과 질감 모두 안나가 원한 그대로였다.

    “천천히 살펴보시고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으시면 말씀해주십시오, 마마.”

    크게 문제되는 것은 없었다. 하지만, 코르셋을 생략하고자 조금 단단한 원단으로 허리를 감싸도록 제작하라 이른 것이 실수였다. 드레스의 품을 살피던 안나가 급히 입을 열었다.

    “드레스 품을 좀 넓히는 것이 좋겠어요.”

    “예? 하지만 그렇게 되면 허리를 충분히 받쳐주지 못해 드레스의 모양이…….”

    “얼마나 넓혀야 할지 따로 일러주겠어요. 다른 건 더 손보지 않아도 좋을 것 같군요.”

    재단사를 돌려보낸 안나가 날짜를 가늠해보기 시작했다. 자신의 예상대로 정말 임신을 했더라도 아직 배가 많이 불러올 시기는 아니었지만, 카르멘이 조금 전 말해주었듯 가장 주의를 기울여야 할 임신 초기였다.

    어쩐지 들뜬 마음이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방 밖으로 모든 시종을 물린 안나가 느린 걸음으로 방을 서성이며 처음 아이를 가졌던 순간을 떠올렸다. 경험을 바탕으로 좀 더 여유롭게 상황에 대처하겠다고 생각했지만, 머릿속이 텅 비어버린 것처럼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이제 조금씩 말을 하기 시작한 스테판은 이른 황태자 수업을 받기 시작했다. 간단한 언어 교육을 마친 스테판과 함께 오후를 보내면서도, 안나의 정신은 온통 다른 곳을 향해 있었다.

    * * *

    “황제 폐하 드십니다.”

    활기 넘치는 스테판과 오후 내내 씨름을 하는 사이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어느새 국무 회의를 마친 필리프가 방으로 돌아와 쿵쾅거리며 품으로 달려드는 스테판을 안아 들었다.

    “또 엄마를 힘들게 한 모양인데?”

    “아니, 아니에요.”

    “아니긴. 너 엄마를 힘들게 하면 혼난다고 얘기했던 거 잊었어?”

    부루퉁한 얼굴로 필리프의 품을 벗어난 스테판이 안나에게로 쪼르르 달려왔다. 두 팔을 쭉 양옆으로 벌린 아이가 안나의 어깨를 있는 힘껏 끌어안았다.

    “엄마는 내 거예요.”

    그러나 필리프는 이대로 순순히 아이의 말에 맞장구를 쳐 줄 위인이 아니었다. 성큼성큼 안나의 곁으로 다가온 그가 보란 듯이 가볍게 그녀의 몸을 들쳐 안았다.

    “아닌데? 누구 맘대로.”

    안나의 몸이 예고 없이 공중에 떠올랐다. 잔뜩 화가 난 스테판이 발을 쿵쿵 구르며 아무리 점프해도 손이 닿지 않을 곳이었다. 금방이라도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굴 것처럼 벌게진 스테판의 눈가를 손가락질하며 필리프가 짓궂은 목소리를 냈다.

    “말했지? 울면 지는 거라고.”

    “엄마! 엄마!”

    “엄마 불러도 소용없어. 엄마는 너보다 나를 더 좋아하거든.”

    “아니야!”

    어이없는 두 남자의 자존심 싸움을 지켜보던 안나가 참지 못하고 하체에 힘을 주며 필리프의 품을 벗어났다. 안나가 바닥에 발을 대기가 무섭게 스테판이 그녀의 치마 품을 파고들었고, 필리프도 질세라 그녀의 어깨를 당겨 안았다.

    “안나, 당신이 말해 봐. 나야, 스테판이야?”

    “엄마! 엄마! 나, 나 여기 있어요!”

    진지한 얼굴의 두 남자를 번갈아 바라보던 안나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씩씩거리며 분을 참던 스테판도, 내심 자신의 이름이 불리길 기대하며 눈을 밝히던 필리프도 동시에 안나를 잡은 손에 힘을 풀었다.

    “유치해. 너무 유치해요, 둘 다.”

    눈물을 매달고 웃던 안나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항의하려 벌린 필리프의 입술을 검지로 막아낸 안나가 스테판을 번쩍 안아 올렸다. 어느새 아이는 한 번에 들기 벅찰 정도로 자라나 있었다.

    “하지만 유치해도 괜찮을 나이죠, 우리 스테판은.”

    “엄마! 나?”

    “당연히 우리 스테판이지.”

    선택받았다는 생각에 한껏 고무된 스테판이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필리프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필리프는 불끈 쥔 주먹을 허공에 살살 흔들어 보이며 끝까지 유치함을 내려놓지 않았다.

    “아직 끝난 게 아니야. 내일 다시 겨루도록 하지.”

    스테판을 내려놓은 안나가 침대 옆 테이블을 정리하는 사이, 필리프와 스테판은 어느새 둘도 없는 부자 사이로 돌아가 침실 이곳저곳을 신나게 뛰어다니고 있었다.

    안나는 자신의 곁에서 영원히 제 편이 되어줄 사람이 하나도 아닌 둘이나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깨달았다. 앞으로 닥칠 모든 일을 준비하는 데에 겁을 먹을 이유가 없었다.

    “우리 스테판, 이제 씻고 돌아가서 자야지?”

    딱 십 분만 더 놀겠다고 고집을 피우는 스테판을 간신히 제 방으로 돌려보낸 안나가 침의로 갈아입은 필리프에게로 다가갔다.

    “오늘 카르멘을 들여서 검진을 받았어요.”

    “검진? 왜? 어디가 안 좋은 거야? 아니, 어디가? 대체 왜 내게 보고가 들어오지 않은 거지?”

    “아뇨, 어디가 안 좋은 게 아니라요.”

    당장 답을 하지 않으면 바로 수행원 카밀 에르트를 불러 문책할 기세였다. 안나가 흥분한 필리프의 손목을 잡으며 말을 이었다.

    “확실한 건 아니지만, 임신한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요.”

    안나가 필리프의 손목을 잡아, 자신의 배로 가져갔다.

    “카르멘도 아직은 정확하게 알 수 없다고 했어요. 그냥, 이상하게도 왠지 그런 느낌이 들어서 가볍게 검진을 받았던 것뿐이에요.”

    아이는 스테판 하나로 충분하다고 힘주어 이야기했던 필리프의 얼굴을 떠올렸다. 가끔은 짓궂은 모습도 보이지만, 그가 얼마나 아들을 깊이 사랑하고 있는지 알고 있다. 안나는 그의 사랑이 새롭게 찾아올 아이에게도 공평하게 돌아갈 수 있게 되길 바랐다.

    “여자아이일까?”

    말없이 안나의 배를 쓰다듬던 필리프가 느릿하게 입술을 떼어냈다.

    “그것도 확실하진 않지만, 그럴 것 같은 예감이 들어요.”

    “당신을 닮았으면 좋겠는데.”

    필리프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자신을 온전히 빼닮은 스테판에게서는 안나의 모습을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녀의 얼굴을 닮은 여자아이가 태어난다는 상상을 하자 가슴 한쪽에서부터 아릿함이 번지기 시작했다.

    “전 또 당신을 닮았으면 좋겠는데요?”

    “당신이 내 얼굴을 아주 좋아한다는 건 잘 알고 있어. 아무래도 좀처럼 질리지 않는 얼굴이지?”

    필리프가 장난기를 가득 머금은 얼굴을 안나의 앞에 바짝 들이밀었다.

    그의 말대로였다. 영원히 질리지 않을 것처럼 아름다운 그의 얼굴을 부드럽게 매만진 안나가 그의 입술에 먼저 입술을 겹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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