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과 나의 시간이 만나는 순간 (137)화 (137/139)
  • 외전 11화

    필리프가 스테판의 몸을 공중으로 번쩍 들었다가 파도가 밀려오는 순간에 맞춰 아이의 발을 바닷물에 담갔다.

    커다란 웃음소리를 내며 스테판과 장난을 치는 필리프의 얼굴을 바라보던 안나는 언젠가 필리프와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여자아이?’

    ‘네. 딸이 있으면 좋잖아요. 만약 딸이 생긴다면 예쁜 드레스를 입고 인형 놀이만 하며 자라게 하진 않을 거예요. 검술도 가르치고, 스테판과 비슷한 나이가 되면 말 타는 것도 가르쳤으면 해요.’

    ‘…….’

    ‘너무 예쁠 것 같지 않으세요?’

    안나의 말을 듣는 필리프의 표정이 그리 밝지 않았다. 미간에 힘을 준 채 깊은 한숨을 내쉰 그는, 피곤한 표정으로 눈가에 손을 가져다 댔다. 침묵을 깨고 들려온 그의 말은 안나의 기대와는 전혀 달랐다.

    ‘난 스테판 하나로 충분해.’

    ‘……네?’

    ‘내 아이들이 서로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 날 모습을 상상하면…….’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일이었다. 고개를 떨군 필리프는 끝내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이복동생과 길고 긴 권력 다툼을 해왔고 그 과정에서 죄 없는 사람들이 수없이 목숨을 잃었다. 만약 둘째 아이를 갖게 된다면 자신의 아이들이 결코 그렇게 되지 않도록 그 역시 무척이나 힘쓸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권력욕이 사람을 얼마나 잔인하게 만드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얘기는 그만하지.’

    필리프가 단호하게 안나의 말을 끊어냈다. 필리프의 마음을 이해하기에 안나는 그 이후로 단 한 번도 스테판에게 동생이 생겼으면 좋겠다는 식의 언급을 하지 않았었다.

    안나가 여전히 품 안에 소중하게 담고 있던 복숭아를 내려다보았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여자아이가 누구에게 복숭아를 받았는지, 제게 주어진 복숭아가 어떤 의미인지 예상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잠깐 얼굴이라도 보여 주시지…….”

    안나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혼잣말을 뱉었다. 문득 모진 산고를 겪었던 순간과, 이레네가 자신의 곁을 떠나지 않았던 덕에 무사히 스테판이 세상에 나올 수 있었던 순간이 떠올랐다.

    “정말 물에 안 들어갈 거야? 바닷물이 엄청 시원한데.”

    이레네를 떠올리느라 바다에서 잠시 시선을 돌린 사이, 어느새 등 뒤로 다가온 필리프가 안나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어깨에 닿은 그의 손바닥 온도가 서늘하게 식어 있었다.

    “이제 보니까 물놀이는 스테판보다 폐하가 더 즐기시는 것 같은데요?”

    “무슨 소리. 난 그저 아이 보호자의 역할에 충실할 뿐인데.”

    어깨를 으쓱해 보인 필리프가 안나가 건네는 수건을 받았다. 그에게서는 짭짤하지만 맑은 땀 냄새가 풍겼다.

    “스테판, 배고프지 않아? 뭘 좀 먹을까?”

    안나가 스테판을 안고 먹을 것이 들어있는 바구니를 뒤지는데, 꼬물거리며 다가온 손이 안나가 무릎에 놓아둔 복숭아를 만지작거렸다.

    “이건 안 돼, 스테판.”

    커다란 손이 스테판의 손에서 복숭아를 낚아챘다.

    “이건 엄마 주고, 스테판은 더 맛있는 걸 먹자. 응?”

    복숭아를 안나에게 건넨 필리프가 그녀의 손에서 이유식 그릇을 받아들었다. 아이를 품에 안고 달래며 이유식을 먹이는 그의 모습이 이제는 제법 익숙해 보였다. 불과 열흘 전만 하더라도 아이보다 자신이 편한 자세를 고수했던 그가, 지금은 아이가 편히 자세를 취할 수 있도록 커다란 몸을 잔뜩 수그리고 있었다.

    “역시 잔소리가 효과가 있었던 건가.”

    “응? 뭐라고?”

    “아, 아뇨. 이제 저보다 아이를 더 잘 보셔서요. 놀랐어요.”

    “뭐, 이 정도쯤이야.”

    그의 얼굴에 의기양양한 빛이 스몄다가 사라졌다. 불편해 보이는 자세로 꿋꿋이 스테판에게 이유식을 먹인 그가 그릇 정리까지 자처했다.

    “그건 제가 할게요.”

    “아냐. 별것도 없는데 뭘.”

    이제는 갓난아이도 아니라 제법 무게가 나가는 스테판을 한 손으로 안은 그가 아무렇지 않게 주변을 정리하는 모습을 안나는 홀린 듯 지켜보았다.

    “졸린가 봐요.”

    필리프의 품 안에 안긴 스테판은 무거워지는 눈꺼풀을 감당하지 못하고 꾸벅꾸벅 고개를 떨구었다. 목소리를 낮춰 속삭인 안나가 금세 색색 잠이 든 스테판의 가슴 위로 제 실크 가운을 덮어주었다.

    “내가 전에도 말했잖아. 효자라고.”

    “네?”

    “우리가 단둘이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자리를 피해 주는 거지. 눈치껏.”

    필리프가 최대한 발끝에 정신을 집중하며 몸을 일으켰다. 안나에게 눈빛을 보낸 그가 멀찌감치 대기하고 있던 신하를 호출했다. 시선을 흐트러뜨리지 않으려 손수건으로 스테판의 눈가를 가린 그는 신하와 함께 도착한 유모 수잔의 손에 아이를 넘겨주었다.

    “자, 우린 좀 걸을까?”

    선명한 푸른빛이 넘쳐났던 하늘에 어느새 붉게 물든 노을이 자리하고 있었다. 먼저 필리프의 손을 잡은 안나가 노을빛이 물든 바다를 바라보며 걸음을 떼어냈다.

    “아까 어떤 여자아이가 준 거예요.”

    그녀가 여전히 소중하게 품은 복숭아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걸 전해주라고 한 분이 있다고 했는데, 그분의 상황을 물으려는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어요.”

    안나의 말을 들은 필리프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으시다고,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안부를 전해오신 걸 거예요.”

    필리프의 손에 순간적으로 힘이 실리는 게 느껴졌다. 갑자기 걸음을 멈춰선 그가 안나의 얼굴 가까이 상체를 기울이며 입을 열었다.

    “아니. 선물을 주러 들른 거야. 평생 나에게 주는 것만 아는 사람이었으니까.”

    저물어가는 해를 등지고 선 그의 얼굴이 조금씩 가까워졌다. 익숙하게 입술이 열리고 곧 그의 달콤한 숨결이 입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희한하게도, 내뱉은 그의 숨결에 향긋한 복숭아 향이 듬뿍 스며 있었다.

    * * *

    필리프와 안나는 해가 완전히 저물기 직전까지 손을 잡고 바다를 거닐었다. 소금기를 머금은 밤바람이 끈적하게 온몸에 달라붙는 느낌이었지만, 이상하게도 기분이 좋았다. 마차에 올라타 바다 옆 저택으로 향하면서도 두 사람의 맞잡은 손은 떨어지지 않았다.

    “스테판을 확인하고 올 테니까 먼저 침실에 가 있어.”

    가까스로 안나의 손을 놓은 필리프가 유모의 방으로 향했다. 스테판이 깊게 잠들었다는 것을 확인한 그가 달리듯 복도를 지나쳤다.

    드레스를 벗고 얇은 가운을 걸친 안나가 침실 문 앞에 서 있었다. 거칠게 문을 닫은 필리프가 빠르게 그녀의 곁으로 다가갔다.

    어떤 대화도 필요하지 않았다. 하나의 몸처럼 겹쳐진 두 사람의 입술이 맞닿았고, 곧 그들이 걸치고 있던 옷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갑자기 느껴진 찬 공기에 안나가 몸을 부르르 떨었지만, 단단한 몸이 이내 익숙한 온기를 돌려주었다.

    가느다란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자 아기 분내처럼 고소한 향과 미세한 소금기가 풍겼다. 깊게 호흡하며 안나의 체취를 들이마신 필리프가 으스러질 듯 강하게 그녀의 몸을 끌어안고 잠시 떨어졌던 입술을 재차 맞댔다.

    “하아…….”

    숨을 쉴 때마다 급하게 오르락내리락하는 안나의 가슴을 부드럽게 쓸고 들썩이는 허리 사이에 손목을 끼워 넣었다.

    “내가 말했었나? 당신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

    “너무 부드러워.”

    손가락이 춤을 추듯 움직이며 매끄러운 그녀의 몸 곳곳에 닿았다. 점차 손의 움직임이 빨라졌고, 그녀가 헐떡이기 시작했다.

    신음을 참으려 얼굴을 돌린 안나의 고개가 필리프의 가슴으로 떨어졌다. 열 오른 그녀의 얼굴이 닿는 곳에 뜨겁게 피가 끓었다. 틈 없이 맞닿아 있으면서도 더욱더 강하게 그녀를 끌어안고 싶었다.

    “뭐든 당신이 원하면 난 괜찮아, 뭐든.”

    “하아……. 뭐든?”

    “뭐든.”

    그녀의 기다란 눈꺼풀이 느릿하게 감겼다. 낭창한 그녀의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지만, 최대한 마지막을 미뤄두고 싶었다. 강렬한 폭발을 기대하던 하체를 애써 뒤로 물린 필리프가 안나의 눈가로 입술을 내렸다.

    “하, 아아……. 왜.”

    감은 눈을 뜬 안나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전부, 전부 알아야지.”

    필리프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동그랗게 눈을 뜬 안나를 보며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하체를 그녀의 허벅지 아래로 내린 필리프가 그녀의 몸 구석구석을 탐색하듯 살피며 뜨거운 입맞춤을 남겼다.

    자신의 입술이 닿는 곳마다 붉은 흔적이 남았고, 생소한 감각을 느낀 그녀의 몸이 이제껏 보지 못했던 반응을 해왔다. 축축하게 젖은 손이 필리프의 등에 닿았다. 저도 모르게 힘주어 손끝을 세우자 날카로운 손톱이 단단한 등허리에 자국을 남겼다.

    필리프는 안나에게서 시선을 놓지 않았다. 가슴 주변을 쓸어올릴 때마다 파르르 떨리는 입술과 허벅지를 쓸어줄 때 토해져 나오는 한숨 같은 신음. 그리고 촉촉하게 젖어 눈물을 머금은 눈동자와 숨을 내쉴 때면 입술 사이로 빠져나오는 새빨간 혀를 빠짐없이 눈에 담았다.

    입을 맞추자 안나의 혀가 입천장을 사르르 훑으며 반응해왔다. 그녀의 혀가 입 안을 한번 훑을 때마다 몸에서 스르르 힘이 빠졌다.

    안나의 가벼운 다리가 움찔거리더니 빠르게 필리프의 허리를 감싸고 그를 깊숙이 끌어당겼다. 필리프의 입에서 자연스러운 신음이 터지고 숨소리가 조금씩 격해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말랑말랑한 가슴이 강하게 짓눌렸다.

    지금껏 함께 수없이 많은 밤을 보냈지만, 단연코 처음 느껴보는 강렬한 감각이었다. 허리가 꿰뚫릴 것처럼 날카로운 쾌감을 느낀 안나가 비명 같은 신음을 뱉었다. 그녀의 안에서 전조 없는 날카로운 폭발이 이어졌다.

    멈추지 마.

    그녀가 말했는지, 자신의 입을 통해 나왔는지 확실하지 않았다. 확실한 것은 안나와 필리프, 두 사람 모두 멈출 마음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절정의 시간이 길었다. 오늘 밤이 영원히 계속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두 사람 모두 집요하게 서로의 몸을 갈구했다.

    그녀의 몸이 들썩일 때마다 달콤한 내음을 머금은 공기가 함께 움직였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충족함을 만끽하며, 필리프는 미끈거리는 안나의 배에 얼굴을 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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