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과 나의 시간이 만나는 순간 (127)화 (127/139)
  • 외전 1화

    내딛는 필리프의 걸음에 점점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침실 앞에 도착한 그가 문 앞을 지키고 있는 안나의 새로운 수행원에게 바짝 다가갔다.

    “폐하를 뵙습니다.”

    의식에 따라 예를 차린 수행원 카밀 에르트가 고개를 들어 황제의 얼굴을 마주했다. 앞서 네 명의 수행원이 일주일도 되지 않아 자리에서 물러났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황제를 처음 마주하는 그의 얼굴에는 긴장의 빛이 역력했다.

    “그래. 오늘 황후의 일정은 어땠지?”

    황후 책봉식이 열리기 일주일 전이었지만, 안나를 부르는 황제의 호칭은 이미 자연스럽게 황후로 바뀌어 있었다.

    얼굴로 떨어지는 황제의 차가운 시선에 황급히 시선을 떨군 카밀이 헛숨을 몰아쉰 뒤 안나의 하루 일정을 읊기 시작했다.

    “점심을 드신 뒤에는 바로 중앙 정원으로 이동하셨습니다. 그곳에서 황태자 전하와 한 시간 정도 산책하신 뒤 바로 별관 도서실로 향하셨습니다.”

    안나가 침실 안에 들어서기까지의 행적을 낱낱이 보고한 카밀이 내내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조심스럽게 황제의 표정을 살폈다.

    “식사량에 대한 보고가 빠진 것 같은데?”

    “예? 아, 죄, 죄송합니다, 폐하. 식사량은.”

    직선으로 내리깔리는 황제의 눈동자와 눈을 마주하는 순간 등허리가 따끔할 정도의 한기를 느꼈다. 카밀이 잠시 들었던 고개를 급히 다시 발끝에 고정하며 황후의 식사량을 세세하게 보고했다.

    “그래. 고개 들어.”

    보고가 끝나고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에야 황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일도 같은 시간에 이곳에서 대기하도록.”

    “알겠습니다, 폐하.”

    온종일 긴장해 바짝 올라가 있던 어깨의 힘을 푼 카밀이 황제를 향해 깊게 고개를 숙였다. 그는 황제의 축객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복도를 가로질러 모습을 감췄다.

    “폐하. 이번에는 마음에 드십니까.”

    임명식 전까지는 무조건 황후의 수행원이 될 자를 낙점해야 했다. 지금까지 총 다섯 명의 후보를 만나보았지만, 누구 하나 필리프의 마음에 꼭 들어차는 이가 없었다.

    “함부로 행동할 스타일은 아니라 괜찮은데, 너무 겁이 많은 것 같지 않은가?”

    카밀이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던 필리프가 낮게 읊조렸다. 카밀을 대하는 내내 황제가 보였던 태도와 눈빛을 떠올린 수행원이 살짝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폐하의 앞이라 조금 긴장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전임자에 대한 소식을 들었을 테니 더 긴장되었겠지요.”

    “음.”

    “조금 두고 보시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래. 그러지.”

    깔끔하게 고개를 끄덕인 필리프가 침실 방문 손잡이를 잡아 돌렸다. 활짝 열린 문 너머 아슬아슬한 걸음걸이로 문을 향해 다가오는 스테판의 모습이 보였다.

    “바바!”

    카밀의 앞에서 언제 인상을 굳혔냐는 듯, 얼굴 가득 웃음을 매단 필리프가 스테판의 몸을 가볍게 들어 올렸다.

    “제대로 불러야지, 아직도 바바?”

    “바바, 바바!”

    제게로 뻗어오는 고사리 같은 스테판의 양손을 한 손에 모아 잡은 필리프가 바삐 시선을 움직였다.

    “안나.”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안나의 손에는 스테판의 이불이 들려있었다.

    “스테판 요람 준비할 동안만 안고 계세요. 내려놓으면 또 이불을 마음대로 헝클어 놓을 게 뻔하거든요.”

    새 이불의 빳빳한 촉감을 유독 좋아하는 스테판 때문에 요람을 정리하는 데 그동안 무척 애를 먹었던 안나였다. 필리프의 등장을 구세주처럼 느끼며, 그녀가 빠르게 요람 안에 침구를 깔았다.

    “뭐야. 제대로 바라봐 주지도 않는 거야?”

    요람 안에 베개를 놓기가 무섭게, 필리프가 등 뒤로 바짝 다가섰다. 언제나 든든하고 따뜻하게 느껴지는 남편의 체온이었다.

    “아니, 잠깐만 기다리시라고.”

    “요람 정리는 이미 끝난 거 아닌가? 스테판도 좀 졸려 보이지 않아?”

    커다란 눈을 말똥말똥하게 밝힌 스테판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안나의 얼굴을 빤히 응시했다.

    “음. 오늘 낮잠을 좀 많이 자서 지금 잘까 모르겠네요.”

    “낮잠? 아니, 오늘도 낮잠을 재웠단 말이야?”

    필리프의 얼굴에 드러나는 실망감을 읽은 안나가 한숨 같은 웃음을 뱉어냈다.

    “낮잠을 자더라도 깨우지 그랬어. 그래야 밤에 제대로 잠을 잘 거 아냐.”

    “아기는 어른들과 같지 않아요. 짧게 짧게 잠을 여러 번 자는 것도, 잠투정하는 것도 당연한 거고.”

    지난 며칠간 자정이 넘도록 잠을 자지 않고 놀아달라며 보채는 스테판 때문에 필리프는 안나와 돈독한 시간은커녕, 제대로 된 대화조차 나눌 수 없었다.

    사랑하는 아이가 생겼다고는 하지만, 필리프에게 안나는 여전히 1순위였다. 그녀의 주된 관심이 어린 스테판에게 향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섭섭한 느낌을 감출 수 없는 까닭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스테판한테 이유식 먹여 줄래요? 오늘 제가 처음으로 이유식을 만들어 봤거든요.”

    필리프의 어깨가 축 처진 이유를 바로 알아챈 안나가 뚜껑을 덮어 놓았던 자그마한 그릇을 필리프의 손에 쥐여주었다.

    “당신이 직접?”

    “네. 만들어 주신 간이 주방을 처음 이용해 봤는데, 너무 편하고 좋았어요. 다음에는 당신이 좋아하는 스튜에 도전해 보려고 해요.”

    “그래? 괜찮았어? 재료는 충분했고?”

    “네. 딱 필요한 재료가 전부 있어서 황궁 주방에 다녀오지 않아도 되었어요.”

    금세 평소의 활기를 되찾은 필리프가 그릇 속 이유식을 유심히 살피기 시작했다.

    “여기 들어있는 채소를 전부 직접 준비했다고? 아니, 이 정도는 시종을 시켜야지.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정말 기억 속에서 온전히 지워 버린 걸까? 안나는 황궁 주방에서 일하며 산더미 같던 채소를 다듬고, 고기를 손질하던 때를 떠올렸다.

    “기억 안 나세요? 제 소스 맛있다고 바로 다음 날 최대한 넉넉한 양을 준비하라고 하셨던 거. 지금에 와서야 드리는 말씀이지만, 그때 손목이 빠지는 줄 알았다니까요? 백 번 이상 저어야 간신히 점성이 나오는 소스였다고요.”

    어이가 없어 와다다 쏟아낸 안나의 말에 필리프가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작은 목소리로 무언가를 구시렁거렸다.

    “네? 뭐라고요?”

    안나의 반문에 필리프는 이유식 그릇을 재빨리 받아들었다.

    “아, 아니야. 자, 이제 충분히 식은 것 같은데? 스테판, 아 해 봐. 아!”

    안나에게서 모르는 척 시선을 돌린 필리프가 작은 숟가락 가득 이유식을 담아 스테판의 입가에 가져다 댔다.

    한두 번 곱게 이유식을 먹이는가 싶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필리프가 붕붕 소리를 내며 공중 높이 들었던 숟가락을 정신없이 흔들어대기 시작했다.

    재미있는지 스테판의 입가에서는 연신 까르르 웃음소리가 흘러나왔지만, 이리저리 흩날리는 밥알을 바라보는 안나의 미간에는 옅은 주름이 새겨지고 있었다.

    하아……. 정말 요즘엔 애들 두 명을 키우고 있는 느낌이라니까.

    절레절레 고개를 저은 안나가 필리프와 자신이 입을 침의를 꺼내 침대에 내려놓았다. 그 사이 비행기 놀이를 끝낸 필리프가 주섬주섬 자리를 정리하는 것이 보였다.

    “아, 두세요. 제가 할게요.”

    “그냥 둬. 내일 시종에게 정리하라고 하면 되니까.”

    스테판을 요람 안에 내려놓은 필리프가 자리를 정리하려 움직이는 안나의 허리에 가볍게 손을 감았다.

    “오늘 저녁 제대로 안 먹었다면서?”

    허리를 감싼 필리프의 손에 제 손을 얹으려던 안나가 휙 등을 돌리며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설마 오늘도 수행원을 달달 볶으신 건 아니겠죠?”

    “달달 볶다니? 당신이 제대로 식사했는지 내가 궁금해하는 건 당연한 것 아닌가?”

    “매번 얼만큼의 양을 먹었는지 확인하라고 하지 마세요. 식사할 때마다 그릇에 쏟아지는 시선이 얼마나 부담스러운지 아세요?”

    “글쎄. 난 늘 겪어온 시선이라 별로.”

    태연한 그의 태도가 놀라운 것은 아니었다. 매번 식사할 때마다 수십 명의 시종을 등 뒤에 두고 포크와 나이프를 움직였을 그이니.

    “이번에는 그냥 그대로 두세요. 좋은 사람인 것 같았으니까.”

    “……좋은 사람?”

    필리프가 눈썹을 확 치켜세웠다.

    “네. 필요한 것도 눈치 있게 챙길 줄 알고, 행동이 굉장히 빠르던데요?”

    요람 안에 있는 스테판에게 시선을 주느라, 안나는 조금씩 변해가는 필리프의 표정을 곧바로 알아차리지 못했다.

    “따로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직접 스테판에게 필요한 용품을 챙겨주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앗!”

    허리를 감은 필리프의 손에 순간 강하게 힘이 실렸다. 안나가 그제야 고개를 들어 필리프의 표정을 확인했다.

    “아, 그래서……. 이번 수행원이 그리도 마음에 든다는 말이지?”

    “네? 아니, 제 말은 그게 아니라…….”

    “그래. 알았어. 아주 잘 됐군. 아주 잘 됐어.”

    필리프는 어쩐지 조금 음산하게 느껴지는 목소리로 연신 잘 됐다는 중얼거림을 이어갔다. 안나가 뒤늦게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빠르게 변명의 말을 뱉어놓았다.

    “아뇨. 그 사람 자체가 좋다는 게 아니라요. 저뿐 아니라 스테판까지 잘 챙겨서 마음에 든다고 했던 것뿐이에요.”

    “아니? 좀 전까지만 해도 아주 엄청나게, 몹시, 너무나도 마음에 든다는 표현을 했던 것 같은데?”

    석연치 않은 이유로 벌써 네 명의 수행원을 갈아치우게 했던 필리프였다. 이대로라면 내일 아침 다시 새로운 이를 수행원으로 맞이해야 할 수도 있었다. 매일 새로운 사람을 대해야 한다는 것에 피로감이 들기 시작한 지금, 어떻게든 필리프의 마음을 돌려놔야 했다.

    머리를 굴려야 해. 저 남자를 설득할 만한 말을 해야만 해. 너무 장황하지 않게, 너무 꾸며냈다는 느낌이 들지 않게.

    “정말 아직도 모르시겠어요?”

    안나가 허탈한 한숨과 함께 말을 뱉었다. 안나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뭘? 정말 모르겠다는 듯, 멀뚱히 제 얼굴을 바라보는 필리프의 눈동자를 똑바로 마주하며 그의 어깨에 양팔을 둘렀다. 안나의 시선에 맞게 그가 살짝 고개를 낮추어 주었다.

    “제게 폐하 이외의 다른 남자는 모두 똑같이 보인다는 것을요.”

    “뭐?”

    “당신 이외에는 그 누구도 제게 떨림을 줄 수 없다는 말이에요.”

    필리프의 어깨에서 스르르 밀려 내려가 그의 손등을 잡은 안나의 손이 그녀 자신의 가슴 위에 안착했다. 쿵쿵. 빠르게 뛰는 심장 박동이 그를 불안을 잠재우길 바랐다.

    한동안 손바닥 안의 커다란 울림을 느낀 필리프가 알겠다는 듯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곧 따뜻한 입술이 안나의 정수리와 이마, 입술에 차례로 내려앉았다.

    스테판의 울음소리가 들려온 것은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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