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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나의 시간이 만나는 순간 (126)화 (126/139)
  • 126화

    산자락 너머로 당장 손에 잡힐 것처럼 커다랗게 보이는 해가 모습을 감추려 하고 있었다. 찬란한 황금빛을 띠는 노을을 잠시 바라보던 안나가 준비해온 소쿠리를 꺼냈다.

    “배 안 고프세요?”

    필리프도 안나도 눈코 뜰 새 없이 정신없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잠시 대화를 나눌 시간 내기도 쉽지 않은 하루하루를 억지로 버텨오던 필리프는, 오후 재정 회의가 끝나자마자 안나의 손을 이끌고 중앙 정원을 찾았다.

    “그런데 꼭 이렇게 바닥에 앉아서 먹어야 해?”

    멀쩡한 테이블을 앞에 두고 굳이 잔디 바닥에 천을 깔고 앉아야 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 표정 변화 없이 소쿠리를 덮은 천을 걷어낸 안나가 접시의 뚜껑을 열었다.

    “시간이 좀 생기면 함께 소풍을 가고 싶었거든요.”

    “소풍?”

    “원래 제가 있던 곳에서는 소풍하러 가면 늘 이렇게 바닥에 뭘 깔고 앉아서 도시락을 먹곤 했어요.”

    접시에는 손바닥만 한 크기의 샌드위치가 담겨 있었다.

    “원래 제가 먹고 싶었던 건 이게 아닌데, 시간이 없어서 만들 수가 없었어요.”

    “뭘 먹고 싶었는데?”

    “김밥이라고 하는데요, 음……. 설명하기가 좀 까다로운데, 아 이 시대에 김이 있었나? 바다가 있으니까 김 채취는 그리 어렵지 않았을 것 같은데.”

    음식 설명을 하려던 안나가 다시 혼자만의 생각에 잠겼다. 필리프가 자신이 아는 세계 이외의 세상을 경험해 본 안나에게 궁금한 것을 질문할 때마다 그녀가 자주 보였던 모습이었다.

    “아, 아무튼 김이라는 해초에 밥이랑 각종 채소를 넣고 돌돌 말아 예쁘게 썰어 먹는 건데요, 야외에서 먹으면 특히 맛이 좋아서요.”

    “그래?”

    “네. 음. 여기 재료가 얼마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중에 꼭 해 드릴게요. 그때는 황궁 정원이 아니라, 탁 트인 하늘을 바라볼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안나가 필리프의 손에 자그마한 샌드위치 하나를 들려주었다. 황후 임명식이 얼마 남지 않아 준비할 것도 많을 텐데, 시간을 내어 음식을 준비해 준 그녀의 정성이 기꺼웠다. 그냥 먹어버리기에는 아까운 마음에, 필리프가 선뜻 샌드위치를 입에 넣지 못했다.

    “그래도 오랜만에 바깥 공기를 쏘이니까 너무 좋네요.”

    불어오는 바람이 안나의 머리카락을 엉망으로 흩뜨려 놓았다. 필리프가 이마 아래로 흘러내린 안나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리고 스테판 유모 수잔 말이에요.”

    “음.”

    “너무 좋은 분 같아요. 그렇게 오래 고민했던 것이 후회될 만큼요.”

    이틀 밤을 새우며 유모 후보군을 줄이고, 열 명의 대상자를 일일이 만나 이야기를 나눈 이후, 안나는 수잔 야스민을 스테판의 유모로 선택했다.

    “워낙 오래 아이를 봐 오시던 분이라 제가 배우는 것도 많아요. 저번 주에 아이의 몸에 바르면 좋은 천연 로션을 만드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거든요? 그래서 제가 만들어 봤는데 향이 너무 좋았어요.”

    신이 나서 이야기를 이어가던 안나가 필리프의 코끝으로 불쑥 제 오른쪽 팔목을 들이밀었다. 그녀의 가느다란 팔목에서 향기로운 허브 냄새가 풍겼다.

    “어때요? 너무 좋죠? 혹시 몰라서 제가 먼저 발라봤거든요. 스테판의 몸에 두드러기 올라오면 안 되니까요.”

    “냄새가 너무 좋은데? 하지만 나는 이런 냄새보다 당신 냄새가 훨씬 취향이라서.”

    필리프가 불시에 안나의 목에 얼굴을 묻었다. 움찔 놀란 안나가 몸을 피하려 했지만, 필리프가 먼저 안나의 등을 감싸며 퇴로를 차단했다.

    “폐하.”

    “왜 또 폐하야. 요즘은 그렇게 잘 안 불렀던 것 같은데.”

    최근 안나는 폐하라는 호칭 대신 필리프, 혹은 당신이라는 호칭을 주로 사용하고 있었다. 다른 이의 입을 통해서 늘 듣게 되는 호칭이 아니었다. 오직 그녀의 입을 통해서만 들을 수 있는 특별한 호칭은 언제나 필리프의 가슴을 뛰게 했다.

    “어서 불러 봐. 내 이름.”

    안나가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린아이처럼 안나의 목에 착 달라붙어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 필리프의 몸을 밀어내 보았지만, 그의 몸은 그대로 땅에 박힌 돌덩이처럼 당최 꼼짝을 하지 않았다.

    “저기…….”

    “아, 내내 이렇게 있고 싶은 거야? 그래, 뭐. 당신이 원한다면.”

    안나의 손목을 가볍게 그러쥔 필리프가 손끝을 세워 그녀의 손바닥 안쪽을 간질였다. 여전히 입을 굳게 다문 안나의 모습에 오기가 일었는지, 필리프가 양손을 아래로 내려 안나의 무릎부터 허벅지를 따라 유연하게 선을 그리듯 쓰다듬기 시작했다.

    그의 손이 허벅지에서 조금 더 깊은 쪽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쿵쿵쿵쿵. 거세게 뛰기 시작한 심장에 귓불이 얼얼해질 정도였다. 그러니까 언제나처럼 자신이 백기를 들지 않으면 끝나지 않을 일이었다. 항복을 선언한 안나의 입술이 스르르 벌어졌다.

    “필리프.”

    단호한 안나의 음성이 주문처럼 필리프의 행동을 멈추게 했다. 빙긋 미소를 짓는 필리프의 모습에 안나의 입가에서 어이없다는 듯한 탄식이 터졌다.

    아, 이럴 땐 정말 어린아이 같다니까.

    희미하게 풀어진 필리프의 눈가를 바라보았다. 푸른 나무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금빛 햇살이 아름다운 그의 얼굴을 더 빛나게 했다.

    평생 보고만 있어도 지루하지 않을 것 같은 얼굴을 빤히 응시하다가, 충동적으로 그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그의 손에 허리를 잡혀 조금의 틈도 없이 몸이 밀착되었다. 안나의 입술을 가볍게 혀로 핥은 필리프가 그녀의 등을 느리게 문지르며 말했다.

    “가끔 보면 아주 대담한 면이 있는 것 같은데 말이야?”

    “저를 먼저 자극하셨잖아요.”

    “아, 그러니까 내 잘못이다?”

    쪽 소리를 내며 입술이 맞닿았다. 안나가 안긴 필리프의 품을 깊게 파고들었다. 익숙한 온도와 체향이었지만, 여전히 코를 묻으면 소리 높여 가슴이 뛰었다.

    “황후 임명식이 끝나면 지금보다는 훨씬 여유가 생길 거야. 고단하겠지만, 그때까지만 버텨 볼 수 있겠어?”

    “하나도 고단하지 않아요. 제가 어려서부터 이 체력 하나는 자신 있었거든요. ”

    안나가 불끈 쥔 두 주먹을 필리프의 얼굴 앞으로 내밀며 덧붙였다.

    “그러니까 그 힘든 황궁 주방 생활도 문제없이 버텨 냈죠. 이건 모르실까 봐 드리는 말씀인데요, 사실 주방 일이 보통 힘든 게 아니거든요.”

    “아, 그래?”

    “참, 임명식 이후에는 본격적으로 검술을 배우고 싶어요.”

    “검술?”

    “네. 예전에도 말씀하신 적 있었잖아요. 간단한 호신술 외에 기본적인 검술을 익히는 것이 좋을 거라고.”

    “내가 그랬었나?”

    필리프가 안나의 눈동자를 피하며 말을 얼버무렸다. 어? 이 사람이 왜 이러지?

    “왜요? 제가 검술을 배우는 게 싫으세요?”

    “아, 그런 게 아니라.”

    “아니면요? 네? 말씀해 보세요.”

    안나가 제게서 시선을 떼어 낸 필리프의 옆 모습을 뚫어지라 바라보며 답을 재촉했다. 눈썹을 위로 슬쩍 들어 올린 그가 얼굴에서 웃음기를 완전히 걷어내며 말했다.

    “내가 직접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면 안 돼.”

    “…네?”

    “당분간은 도저히 시간을 낼 수 없으니까 여유가 생기면 내가 직접 가르쳐 주는 것으로 하지.”

    “아니 왜 굳이 직접…….”

    이해할 수 없다는 안나의 말투를 들은 필리프의 미간에 힘이 들어갔다.

    “설마 나 아닌 다른 남자에게 검술을 배우려는 건 아니었겠지?”

    “아, 그거야… 저는 여자도 상관없지만, 황궁 소속 기사 중에 여자는 없지 않았나요? 그렇다고 잘 모르는 외부인을 황궁에 들일 수도 없으니까요.”

    안나의 말을 수긍하듯 잠시 아무 말을 하지 않던 필리프가 낮게 중얼거렸다.

    “안 그래도 조만간 여자 기사도 뽑을 계획이 있었어. 기초 체력에서는 당연히 남자들과 차이가 있겠지만, 정교한 검술에서는 오히려 더 유리할지도 모르니까.”

    “네?”

    여자 기사를 뽑겠다고? 아니, 대체 언제부터 그런 계획을 하고 있었지?

    “그러니까 검술 이야기는 조금 시간이 지난 후에 하는 게 낫겠지?”

    “아, 뭐.”

    어쩐지 이야기 끝이 조금 찜찜하다는 기분이 들었지만, 지금 당장 검술을 배우겠다는 마음으로 꺼낸 말은 아니었기에 안나가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필리프와 안나가 임명식이 진행되는 순서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정원 입구에 서 있던 수행원이 등 뒤로 다가왔다.

    “폐하. 유모 수잔 야스민이 알현을 청합니다.”

    “들라 이르게.”

    아, 맞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되었네. 스테판이 잠에서 깨면 정원으로 데려다 달라고 말했었지.

    새로 들인 유모를 신뢰하게 된 안나였지만, 하루에 다섯 시간 이상 아이를 유모에게 맡기지 않고 있었다.

    “폐하, 황후 마마.”

    수잔이 필리프와 안나에게 깊게 고개를 숙이는데, 이제 막 잠에서 깨 심술이 잔뜩 난 스테판이 수잔의 품을 빠져나오려 발버둥을 쳤다.

    “아, 제가 안을게요.”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난 안나가 스테판을 받아 안아 꽁꽁 싸맨 보자기를 풀었다.

    “수고하셨어요. 오늘 밤은 제가 재울 테니, 방에 돌아가 보세요.”

    “알겠습니다, 황후 마마.”

    유모와 이야기를 나누는 안나의 모습을 바라보던 필리프의 얼굴빛이 어두워졌다. 여전히 신하들에게 하대하지 않고 격식을 차리는 안나의 태도가 염려스러웠다. 이제 그녀의 태도 하나하나가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한 번은 이야기할 필요가 있는 문제였다.

    “안나.”

    “여기 이것 좀 보세요!”

    스테판의 겨드랑이 사이에 손을 넣은 안나가 벅찬 목소리로 외쳤다.

    “저 지금 손 떼고 있어요! 지금 얘가 혼자 서 있는 거예요!”

    스테판의 몸에서 살짝 손을 뗀 안나가 아슬아슬하게 서 있는 스테판을 바라보며 감격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아니. 아이가 자라면 혼자 서고, 조금 더 자라면 걷고, 조금 더 자라면 뛰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닌가?

    필리프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애써 감추며 손을 둥글게 펴서 아이의 주변을 감싸는 안나의 모습을 감상했다.

    “대단하죠? 보고 계세요?”

    안나가 여전히 스테판에게서 시선을 떼어 내지 못하고 필리프의 반응을 재촉했다. 아, 그러니까 함께 감격해 달라는 이야기이군. 터지려는 웃음을 꾹 눌러 삼킨 필리프가 빠르게 아이의 곁으로 다가갔다.

    “야, 정말 대단한데?”

    “그렇죠? 우리 스테판 손 한 쪽씩 잡고 걸을 날도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아요.”

    필리프의 머릿속에 안나, 스테판과 함께 어깨를 맞대고 걷는 모습이 자연스럽게 그려졌다. 가슴 한가운데에서부터 피어오르는 간지러움이 온몸 가득 번지는 느낌이 들었다.

    “이제 설 수 있으니까 한번 걸어 볼까?”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를 낸 필리프가 스테판의 다리로 손을 뻗는 순간, 안나가 스테판의 몸을 받쳐 안았다.

    “또 장난치려고 그러는 거죠? 아이한테 맨날 장난만 치시고.”

    “장난이 아니야. 사내아이는 늠름하게 키우는 게 맞지. 나는 이 나이에 걷고 뛰고 다 했다고 그러던데.”

    “누가 그래요? 말도 안 돼.”

    “자, 놔둬 봐. 아이는 원래 넘어지면서 크는 거야.”

    “아, 저리 가세요!”

    스테판이 먼저 웃음을 터뜨렸고, 곧 안나와 필리프의 입가에도 나지막한 웃음이 번졌다.

    길고 길었던 여정의 끝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안나가 서서히 빛을 잃고 어둠이 번져가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혹시 당신이 저와 같은 상황에 놓인다면 어떻게 하실 것 같아요?

    어떻게든 찾아내야지.

    저를요?

    우리가 함께 있을 수 있는 시간을.

    당신과 나의 시간이 만나는 순간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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