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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나의 시간이 만나는 순간 (113)화 (113/139)
  • 113화

    필리프를 부축해 오두막 안으로 들어온 안나가 이마를 흥건히 적신 땀방울을 손등으로 닦아냈다. 필리프의 코밑에 손가락을 넣어 호흡을 확인하니, 미약하지만 미지근한 콧바람이 손가락에 와 닿았다. 안도의 숨을 내쉰 그녀가 찬찬히 그의 상태를 살피기 시작했다.

    “아… 몸이 너무 찬데.”

    분명 오두막을 나서기 전 벽난로 불씨를 지펴 놓았는데, 불씨가 많이 남지 않았던 탓에 공간에 싸늘함이 감돌았다. 필리프의 가슴 위로 두꺼운 담요를 덮어준 안나가 황급히 벽난로 불씨를 지피기 시작했다.

    “으으응…….”

    등에 업힌 아이는 찰나의 칭얼거림을 뱉은 뒤, 곧 고른 숨을 내뱉었다. 고마워, 아가. 엄마가 금방 더 편하게 재워 줄게. 고개를 돌려 아이의 귓가에 속삭이며 부지런히 부지깽이를 움직였다.

    불씨가 타오르기 시작한 벽난로 주위로 조금씩 열기가 퍼지기 시작했다. 바로 몸을 일으킨 안나가 주방으로 이동했다. 아이를 낳기 전 이레네에게 간단한 응급 치료를 배워 놓은 것이 다행이었다.

    “가만. 소독용 약초로는 이것을 사용하고, 상처 부위에서 고름이 나기 시작하면 이쪽 약초를 쓰라고 하셨지.”

    이레네가 가르쳐 주었던 내용을 소리 내어 읊으며 찬장에서 꺼낸 약초 병을 정리하고, 그녀가 출산 후 달여 먹을 용도로 준비해 놓은 약초 다발도 꺼내 들었다.

    “기력을 회복하는데 좋은 약초라고 하셨으니, 그에게 먹여도 좋은 것이겠지.”

    말린 참나무 잎, 야생마늘로 만든 연고와 깨끗한 천을 든 안나가 자리에 앉아 필리프의 상처 부위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찢긴 부위는 그리 넓지 않았지만, 생각보다 흐른 피의 양이 많은 것 같았다. 아마도 날카로운 창이나 칼에 찔린 상처로 보였다.

    “자, 이렇게…….”

    안나가 상처 부위에 정성스럽게 연고를 바르고 약초를 덧대었다. 다시 한번 그의 코밑에 손가락을 대어 콧바람의 세기를 확인한 뒤, 벽난로 위쪽 갈고리에 매달린 둥근 냄비 안에 물과 깨끗이 씻은 약초 다발을 넣었다.

    “금방 괜찮아질 거예요. 그러니 잠시 잠이 들었다고 생각하세요.”

    살짝 찌푸려진 필리프의 미간에 손바닥을 얹으며 속삭였다. 제 마음을 읽은 것인지, 깊게 패어 있던 그의 미간이 매끄럽게 풀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아, 아가. 아가도 배고프지? 잠깐만.”

    업고 있던 아이를 가슴에 안고 젖을 물리면서도 내내 필리프의 상태를 주의 깊게 확인하고 그의 호흡을 살폈다.

    유모님이 계셨으면 좋았을 텐데.

    출산 후 정신을 차리고 나서는 감쪽같이 사라진 이레네를 찾기 위해 날이 어두워지면 아이를 안고 오두막 주변을 살피곤 했다. 아무런 말도 없이 사라진 이레네의 흔적을 찾을 수 없어 막막한 기분을 느끼고 있을 때, 거짓말처럼 필리프가 제 앞에 나타났다.

    “유모님이 무사하다는 사실만 알 수 있어도 좋을 텐데.”

    “우우웅…….”

    배불리 젖을 먹은 아이가 안나의 겨드랑이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아이의 순한 잠투정이었다.

    “아, 이제 졸려? 그래. 그만 코 자자.”

    안나가 나지막한 자장가를 노래하며 꼬물꼬물 몸을 움직이는 아이의 몸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조금씩 아이의 움직임이 느려지고 호흡이 잔잔하게 가라앉았다. 아이가 완전히 잠이 들었다는 것을 확인한 안나가 아이를 요람에 눕히고 필리프의 곁으로 다가왔다.

    불씨가 타오르는 벽난로 앞에 누운 필리프의 몸이 느릿하게 위아래로 들썩거렸다. 조심스럽게 만져본 그의 얼굴과 손, 발에 아주 미약하게 온기가 돌아오는 것이 느껴졌다.

    “어? 고름이다.”

    연고를 발라둔 복부 상처 주변으로 어느새 누르스름한 고름이 차올라 있었다.

    “그래. 이제 이것을 사용하면 되겠어.”

    이레네가 가르쳐 준 내용을 떠올리며 차근차근 연고를 바르고 상처의 상태를 살폈다. 늦은 밤, 인적을 찾을 수 없는 곳에서 당장은 그의 상처를 치료해줄 사람을 찾는 것이 불가능했다. 날이 밝으면 무슨 일이 있어도 이곳을 떠나 상처를 봐줄 의원을 찾아야 한다.

    “그때까지 상처가 악화되지만 않으면 좋겠는데…….”

    안나가 약을 바른 환부에 입바람을 쐬고 커다란 약초잎을 덮어 마무리했다.

    살짝 촛불로 비춰본 필리프의 얼굴이 동요 없이 편안해 보였다. 느리고 규칙적인 숨소리에 안도한 안나가 필리프의 손등에 제 손바닥을 얹었다.

    “으으음…….”

    “어, 저, 정신이 들어요?”

    필리프의 입술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의 어깨 사이에 손을 넣어 살짝 고개를 들게 한 안나가 그의 입술이 벌어지기를 기다렸다. 한참 힘겹게 입술을 달싹이던 그가 느릿하게 말을 뱉기 시작했다.

    “…완전히… 떠나버릴까?”

    “…예?”

    “…아무도 우리를 알 수 없는 곳으로. 너와 나, 그리고 아이와 함께.”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던 그의 말에 놀란 안나가 차마 답을 하지 못하고 멍하니 그의 입술을 응시했다. 굳게 감겨 있던 그의 눈꺼풀이 서서히 위로 들렸다.

    “…정말이야. 난 그럴 수 있어.”

    “…….”

    “너와 아이. 이렇게 둘만 있으면 나는… 나는 전부 괜찮아.”

    그가 짊어진 삶의 무게가 어느 정도일지, 차마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제국의 황제가 아닌 평범한 남자인 그와 남들과 다를 것 없는 평범한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적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정말 그렇게 하길 원하세요?”

    “…….”

    단 한순간도 온전히 편한 적 없었을 그의 삶이었다. 그 누구에게도 자신의 두려움을 들켜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완벽한 황제의 모습을 갑옷처럼 두르고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가면을 쓰고 살았을 이였다.

    그가 무거운 갑옷을 벗고 성가신 가면을 내려놓길 원한다면 기꺼이 그 결정에 따를 것이다. 하지만.

    “폐하께서 전부 내려놓지 못하실 것을 알고 있습니다. 폐하의 곁에는, 폐하를 믿고 따르는 수많은 이들이 있으니까요.”

    그의 숙명을 이해하고, 그가 진 짊을 조금이라도 나누어 가지려 노력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알아두셔야 할 것은… 무슨 결정을 내리시든, 저와 아이는 늘 당신 곁에 있을 것이란 사실입니다.”

    안나가 필리프의 손등에 얹은 손에 힘을 실었다.

    “그러니 어서 자리를 털고 일어나세요. 이렇게 맥없이 누워 있는 모습은 폐하와 어울리지 않으니까요.”

    똑. 안나의 눈망울에서 떨어진 눈물방울이 필리프의 뺨을 적셨다. 그대로 상체를 낮춘 안나가 필리프의 팔에 얼굴을 묻고 상처가 없는 그의 가슴으로 손을 뻗었다. 제 몸의 열기 전부를 그에게 전해 준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여전히 찬기가 남아 있던 그의 몸에 빠르게 온기가 도는 것이 느껴졌다.

    * * *

    “윽. 어쩌지 너무 맛이 없는데. 음… 그래도 몸에 좋은 약이 입에 쓰다는 말도 있으니까 괜찮겠지?”

    희미하게 들리는 안나의 목소리를 들은 필리프가 천천히 눈을 떴다. 따끔거리는 눈꺼풀 안쪽에 환한 빛이 가득 쏟아져 들어왔다.

    “그래. 이 정도면 됐어.”

    아이를 등에 업은 채 벽난로 앞에 선 안나가 혼잣말을 내뱉으며 몸을 바삐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바로 그녀의 이름을 부르려 했지만, 마른 혓바닥이 입천장에 달라붙어 제대로 된 소리를 낼 수가 없었다.

    “어? 일어나셨어요?”

    커다란 냄비를 손에 들고 등을 돌린 안나가 급히 필리프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의 이마에 손등을 얹어 체온을 확인한 그녀가 가슴 위로 올라온 이불을 걷어냈다.

    “다행히 열은 많이 떨어졌어요. 잠시 일어날 수 있겠어요? 따뜻한 차를 끓였는데 식기 전에 드시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복부의 상처를 살피고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폭이 좁은 찻잔에 냄비 안 내용물을 따르는 가느다란 손목이 쉴 새 없이 움직였다.

    “난.”

    “괜찮다는 소리 하려고 했죠?”

    빙긋 웃은 안나가 필리프의 어깨 뒤로 손을 넣었다. 읏차. 힘주어 필리프의 상체를 받친 안나가 필리프의 입가에 찻잔을 가져다 댔다.

    “아, 이리 줘.”

    “그냥 이렇게 드세요. 손바닥에도 잔 상처가 많아서 새벽에 연고를 발라 두었거든요. 아직 미끈거려서 잔을 잡기 힘들 거예요.”

    찻잔을 쥐려 뻗은 필리프의 손을 본체만체, 안나가 찻잔 속 액체를 식혔다. 척, 입가로 뻗어진 잔을 바라보던 필리프가 설핏 웃으며 입술을 벌렸다.

    스르르 벌어진 입안으로 따뜻한 액체가 조금씩 밀려들어 왔다. 액체를 머금기가 무섭게 놀라울 정도로 씁쓸한 향이 입안 가득 퍼져 미간을 찌푸렸지만, 안나는 찻잔을 거둘 생각이 없어 보였다.

    “조금 쓰긴 하지만, 몸에 좋은 차니까 남기지 말고 마셔야 해요. 이레네 유모님께서 기력을 회복하라고 직접 구해주신 것이거든요.”

    반쯤 잔을 비운 필리프가 그제야 이리저리 시선을 돌리며 오두막 곳곳을 살폈다.

    “아, 그러고 보니 유모가 안 보이는데.”

    “…….”

    “왜, 어디 먼 곳에라도 간 건가?”

    이레네의 행방을 묻자마자 바닥으로 시선을 떨군 안나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그에게 이레네 유모님이 행방불명되었다는 사실을 알려야 할까? 그랬다가는 분명 상처도 제대로 치료하지 않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설 이였다. 그래. 잠시만 시간을 벌자.

    “아. 아주 먼 곳은 아니고. 나중에 말씀드릴 테니까 먼저 이 차부터 다 드세요.”

    말을 얼버무리는 것이 무언가를 감추고 있다는 것이 분명했지만, 그녀는 이유 없이 자신을 속일 사람이 아니었다. 궁금함에 입술 밖으로 빠져나오려는 질문을 꾹꾹 눌러 삼킨 필리프가 찻잔을 깨끗이 비워냈다.

    “자, 이제 다시 누우세요. 저는 상처를 좀 볼게요.”

    잡고 있던 필리프의 어깨를 놓아 다시 자리에 눕힌 안나가 그의 복부 상처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때 큰 투정 없이 안나의 등에 업혀 있던 아이가 갑자기 커다란 울음을 뱉었다.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선 안나가 아이를 달래보았지만, 울음은 잦아들지 않았다.

    “이리로.”

    “…예?”

    “내가 안아 봐도 되겠어?”

    필리프가 손을 올려 안나의 드레스 자락을 붙잡았다. 팔을 뻗자마자 어깨에 엄청난 통증이 느껴졌지만, 가까스로 신음만은 삼켜낼 수 있었다. 온몸을 제대로 두들겨 맞은 기분이었다.

    “안을 수… 있겠어요?”

    “제 자식을 안지 못하는 아버지도 있나?”

    저 스스로 상체를 세운 필리프의 얼굴을 바라보던 안나가 등에 두른 띠를 풀었다. 뻗은 필리프의 양손 안으로 아이를 넘겨주니, 오두막이 떠나가라 울던 아이가 단번에 울음을 그쳤다.

    “그래. 내 품에 안기고 싶어서 그리 시위를 했단 말이지.”

    필리프가 울음기가 남은 발간 아이의 코끝을 아프지 않게 잡아당기며 아이의 엉덩이를 단단히 받쳐 들었다.

    “뭐? 뭐라고?”

    별것 없는 아이의 옹알거림을 들으며 아이의 입가로 바짝 얼굴을 가져다 대는 필리프의 모습을 지켜보던 안나가 고개를 돌리며 웃음을 뱉었다.

    아직 아무것도 확실해지지 않았지만, 다가올 미래의 삶이 밝은 빛으로 채워지리란 어렴풋한 예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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