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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나의 시간이 만나는 순간 (112)화 (112/139)
  • 112화

    잊자. 잊어버리자. 잊어야만 한다.

    필리프가 미친 사람처럼 박장대소하던 베르나의 웃음소리를 떨쳐내려 고개를 흔들었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내내 귓가에 이명처럼 울렸다.

    ‘하하하하하. 정말 이게 끝이라고 생각해? 아니. 당신도 이것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어. 평생 불안함에 떨게 될 거야. 정말 끝인가? 모든 것이 끝난 건가? 정말 나를 위협하는 모든 것에서 벗어난 건가? 아니, 절대 아니야. 당신이 편해지는 순간은 당신이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뿐임을 알아 둬.’

    ‘아니, 아니야! 닥쳐!’

    ‘매일매일 주변을 경계하게 되겠지.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곁에 두고도 온전히 행복하지는 못할 거야. 잠시라도 눈을 돌리면 그녀가 위험에 처하게 되지는 않을까? 하루하루가 지옥이겠지. 눈을 감는 순간까지 부들부들 불안에 떨 당신의 모습을 상상하니, 내 마지막이 그리 고되지만은 않을 것 같은데?’

    ‘마지막 발악이 우습기만 하군.’

    ‘마지막 발악? 아니. 당신은 아직 내 마지막 발악을 보지 못했어. 궁금하지 않아? 내가 남겨둔 마지막 선물이?’

    잘못된 첫만남이 있었던 곳에서 베르나가 맞이한 마지막.

    불과 몇 시간 전에 있었던 일이 마치 아주 오래전 벌어진 일처럼 희미한 기억처럼 느껴졌다. 모든 것이 흐릿한 가운데 베르나가 뱉었던 목소리만이 또렷하게 기억에 남아 있었다.

    어쩌면 아무리 떨치려 해도 떨어지지 않고 평생 귓가에 진득하게 달라붙어 자신을 괴롭힐 목소리일 것이다. 아마 그것이 베르나의 마지막 소원이었는지도.

    머릿속에서 베르나의 목소리를 지워내기 위해, 필리프는 안나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다시 만나게 되면 제가 특별한 음식을 만들어 드릴게요.’

    ‘특별한 음식?’

    ‘네. 이제껏 그 누구에게도 만들어 준 적이 없는 특별한 음식이요.’

    ‘어떤 맛인지 궁금한데? 어떤 재료를 쓰는 거지?’

    ‘그건 다시 만나면 직접 보여 드릴게요. 궁금하시면 제 곁에 건강하게 돌아오시기만 하면 돼요. 어때요, 간단하죠?’

    ‘음. 너무 간단한데?’

    까르르 터지던 웃음소리, 생기 가득한 그녀의 목소리를 다시 들을 수 있다는 상상을 하자, 차갑게 굳어 있던 몸에 뜨거운 혈류가 도는 느낌이었다.

    결국, 내가 당신을 이긴 거야.

    자신을 똑바로 응시하던 베르나의 붉게 충혈된 눈을 떠올린 필리프가 미소를 머금었다.

    “아니. 내가 이겼어. 평생 지옥 불에서 원죄를 값을 할 너와는 달리, 나는 곧 사랑하는 사람을 품에 안게 될 테니까.”

    필리프가 다시 내딛는 발걸음에 힘을 실었다.

    “…하아.”

    고비가 될 것으로 생각한 거친 비탈과 깊은 능선을 통과한 필리프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간신히 상처를 감싸고 있던 천 조각이 떨어져 나갔고, 날카로운 바람이 훤히 드러난 상처 틈을 파고들었다. 흐릿해지려는 정신을 다잡은 필리프가 재킷을 여미며 상처를 가렸다.

    “빌어먹을.”

    필리프가 거칠게 욕지거리를 뱉었다. 슬슬 몸에 독성이 퍼지는 것인지, 조금씩 눈앞이 캄캄해지면서 몸에 힘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온몸에 난 상처와 멍 때문에 딛는 걸음걸음이 고통스러웠다.

    조금만 더. 몇 걸음만 더. 필리프가 발끝에 힘을 실었다.

    해가 완전히 지기 전 목적지에 도착하려는 일념에 최대한 신속히 몸을 움직였지만, 산은 바쁘게 주변 빛을 집어삼켰다. 오두막으로 향하는 산길 바로 앞 커다란 돌덩이 위에 자리한 필리프가 칠흑 같은 어둠을 응시하며 눈동자를 굴렸다.

    설마 변을 당한 것은 아니겠지? 인적이 거의 없는 곳에 있는 오두막이라고는 하지만 완전히 사람들 눈에 띄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었다. 혹 불순한 의도를 가진 사내들이 그녀를 발견했다면? 정체가 탄로 날 것을 걱정하지 말고 호위병을 붙였어야 했나? 내 안일한 판단이 그녀를 위험에 처하게 한 것이라면? 불길한 상상이 필리프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아니, 아닐 것이다. 그녀는 무사할 것이다. 틀림없이.

    필리프가 크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돌덩이에서 몸을 일으켰다. 작은 횃불에 불을 밝히고 어두 컴컴한 주변을 돌아보며 오두막으로 향하는 산길에 올랐다. 온몸에서 비 오듯 땀이 쏟아져 내렸다.

    사각사각.

    얼마나 걸었을까. 필리프의 귓가에 마른 나뭇잎을 밟는 소리가 들려왔다. 즉시 움직임을 멈춘 필리프가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느릿하게 고개를 꺾었다.

    짐승이 아닌 사람의 발걸음 소리임을 직감했지만, 바로 몸을 일으키지는 않았다. 상대가 무기를 가졌을 가능성이 있기에, 지척에 다가왔을 때 공격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필리프가 등을 낮추며 상대의 발걸음이 향하는 곳을 확인했다. 그의 발걸음이 안나가 있는 오두막 쪽을 향하고 있었다.

    그래, 지금이다!

    귓가에 발걸음 소리가 또렷해짐과 동시에 필리프가 손을 뻗으며 몸을 일으켰다. 무언가에 몸이 꿰뚫리는 듯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졌지만, 괴한 한 명 처리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으윽!”

    손바닥 안에 상대의 목덜미를 가두고, 손가락 끝에 힘을 실었다. 그 순간 내내 어둠 속에 갇혀 있던 눈꺼풀 안으로 밝은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빠르게 시선을 내려 상대의 몸을 훑었지만, 그는 두꺼운 망토와 모자로 얼굴과 몸을 꽁꽁 가리고 있었다. 손끝에 와 닿는 묘한 잔 떨림을 느낀 필리프가 손가락에 힘을 풀자마자 상대가 비에 젖은 바닥으로 미끄러졌다.

    “켁켁!”

    한참을 목을 잡고 고통스러운 숨을 뱉던 상대가 필리프를 올려다보았다. 자연스럽게 머리 아래로 내려간 모자 사이로 드러난 하얀 얼굴.

    “…안나?”

    그녀의 몸을 일으키려 뻗은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입을 벌렸지만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어 다시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괜찮아?”

    간신히 정신을 차린 필리프가 안나의 허리를 잡아 그녀의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그 순간 그녀가 품 안에 무언가를 꼭 끌어안고 있음을 느꼈다.

    “…필리프.”

    안나가 품에 안고 있던 두툼한 담요의 틈을 벌렸다. 쌔근쌔근. 일정한 호흡을 뱉는 어린아이의 얼굴을 조금 더 자세히 보려 상체를 낮추었다. 고소한 우유 향이 섞인 살 냄새가 코끝을 간지럽혔다.

    “그동안…….”

    필리프의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고통스러웠을 출산을 홀로 감당해 낸 안나에게 자신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나는…….”

    생명의 탄생을 온전히 기뻐할 수가 없었다. 죄책감에 고개를 떨구려는데 안나의 고개가 필리프의 얼굴 밑으로 향하며 그의 시선을 붙잡았다.

    “당신을 다시 무사히 만날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

    “고마워요. 우리에게 돌아와 줘서.”

    우리.

    그래. 이제는 너와 나 둘이 아니지.

    필리프가 안나와 아이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강보 사이로 빼꼼 고개를 내민 아이가 자신을 꼭 닮은 눈동자를 느리게 깜빡였다. 반짝이는 아이의 눈을 마주하자 이루 표현할 수 없는 벅찬 감각에 온몸에 저릿함이 번졌다.

    “다시는 떨어지지 않아. 다시는.”

    안나가 그토록 그리워했던 필리프의 근사한 눈동자를 정면으로 마주하자, 다정한 손바닥이 긴장으로 굳은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안나의 몸이 딱딱한 필리프의 가슴 가까이 당겨졌다. 커다랗게 울리는 심장 뛰는 소리는 그가 아닌 아이에게로 전달되었다. 끈적하게 젖은 필리프의 손바닥이 어깨뼈에 닿고 등허리를 쓸어내렸다. 그제야 필리프가 제 곁에 와 주었다는 사실에 실감이 났다.

    필리프가 안나의 등을 감싸지 않은 손으로 부들부들 떨리는 그녀의 뺨을 쓸고 아이의 등을 감싸 안았다. 이마에 뜨거운 온도를 지닌 그의 입술이 닿고 짧게 머물렀다 떨어져 나갔다. 발개진 코끝을 훑고 내려간 입술이 목덜미로 미끄러지듯 내려왔다.

    “안나…….”

    “…….”

    “서안나.”

    얼굴을 가까이서 마주하며 이름이 불리자 몸의 떨림이 배가 되었다. 숨소리가 섞여든 낮은 음성이 귓속을 파고들고 뱃속을 긁어댔다. 조금씩 시야가 흐려지는 것이 차라리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필리프가 입은 두꺼운 재킷이 삽시간에 축축하게 물들었다.

    “이이… 흐응…….”

    필리프와 안나 사이에 있던 아이의 칭얼거림이 들려 두 사람이 황급히 몸을 뒤로 물렸다.

    “여긴 추우니까 어서 오두막에 들어오세요. 방금 불을 피워서 따뜻할 거예요.”

    안나가 아이를 고쳐 안으며 오두막을 향해 발을 뻗었다. 오두막에서 새어 나온 불빛에 사방이 조금씩 환해져 흘끔 시선을 내리는데, 아이를 감싼 하늘색 강보가 붉게 물들어 있는 것이 보였다. 필리프의 손이 닿았던 곳이었다.

    “…피?”

    급하게 등을 돌리니 그가 바닥에 쓰려져 신음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필리프!”

    그가 입은 재킷 우측 아랫부분이 검붉은 피로 흠씬 젖어 있었다. 너무 놀라 그 자리에 굳은 안나를 안심시키려는 것인지, 필리프가 상체를 세우며 태연한 목소리를 뱉었다.

    “별것 아니야. 오래 걸었더니 좀 피곤해서.”

    “이, 일어날 수 있겠어요? 조, 조금만 걸으면 되니까… 자, 제 손을 잡고 몸을 일으키면.”

    재킷을 타고 흘러 필리프의 벨트 끝자락에 맺혀 있던 핏방울이 뚝, 손등으로 떨어졌다.

    제대로 상처도 치료하지 않고 그가 급히 자신을 찾아온 이유는 오직 하나였다. 이제 더는 불안감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는 것. 그 사실을 자신에게 알리기 위해 고통을 꾸역꾸역 삼키며 바다를 건너고 산에 올랐을 그였다.

    생각보다 심각해 보이는 그의 상처를 보니 덜컥 숨이 막혔지만, 지금은 자신이 침착해져야 할 차례였다. 깊게 숨을 들이마신 안나가 평온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오두막에 유모님이 구해 놓으신 약초가 있어요. 저도 그 쓰임을 좀 배웠으니 금방 치료해 드릴게요. 이 정도 상처라면 금세 회복될 거예요.”

    “하아… 그래. 그렇게 걱정할 것 없다니까.”

    강보를 펴 아이를 등에 업은 안나가 필리프의 어깨 사이에 손을 넣어 필리프의 몸을 일으켰다. 무언가 비릿한 향이 훅 콧속을 파고들었다. 그와 재회하게 되었다는 감격스러움에 차마 알아차리지 못했던 피 냄새였다.

    “조금만. 조금만 힘을 내세요.”

    “…난… 괜찮아.”

    필리프가 안나에게 제 몸의 무게를 더하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잡은 그의 손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제가, 이제는 제가 지켜드릴게요.”

    필리프의 허리를 감싼 손에 가득 힘을 실은 안나가 피가 배어 나올 정도로 세게 아랫입술을 베어 물며 터지려는 울음을 삼켰다. 억지로 입꼬리를 한껏 끌어 올리며 마음을 다잡은 그녀가 발끝에 힘을 주며 필리프를 부축했다.

    균형을 잃은 필리프의 몸이 바닥에 쓰러지기 직전, 안나가 오두막 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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