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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나의 시간이 만나는 순간 (108)화 (108/139)
  • 108화

    몸이 쪼개지는 듯한 극렬한 고통은 멈추었지만, 팔다리는 여전히 제 것같이 느껴지지 않았다. 안나가 묵직했던 배가 뻥 뚫린 것처럼 허전한 감각을 도저히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 다시 우렁찬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무사, 무사한가요? 아… 아이, 우리 아이는.”

    탯줄을 끊고 핏덩이를 안아 든 이레네가 아이의 손가락 발가락 개수와 얼굴 몸 전체를 찬찬히 확인했다.

    “아…….”

    아직 눈을 뜨지 못하고 있는 아이의 눈가로 손을 가져가려는 순간, 아이가 고운 은실처럼 내려와 있던 속눈썹을 움직이며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이레네가 갓 태어난 아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커다란 눈동자와 오뚝한 코, 석류처럼 붉은 입술을 홀린 듯 차례로 바라보았다. 필리프가 처음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와 너무나도 닮은 모습이었다.

    솜털이 보송보송 돋아난 아이의 하얀 귀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한참 감격에 젖어 있던 이레네가 떨리는 목소리를 뱉었다.

    “…건강합니다.”

    무사히 세상 빛을 보셨군요. 영명하신 황태자 저하.

    강보에 싸여 커다란 울음을 뱉는 아이를 향해 깊게 묵례한 이레네가 준비해 놓은 요람에 아이를 눕혔다.

    “아아아아앗!”

    등 뒤에서 들리는 고통스러운 안나의 신음에, 이레네가 즉시 등을 돌렸다. 아이가 무사하다는 말에 긴장이 풀렸는지, 좀 전까지만 해도 빳빳하게 세워져 있던 안나의 상체가 바닥에 힘없이 허물어져 있었다.

    “아아… 추워… 너무 추워요. 유, 유모님… 손을… 제 손을 잡아주세요.”

    공중으로 채 뻗지 못한 안나의 손가락이 힘없이 꿈틀거렸다. 꼬박 하루 반이 넘게 이어진 진통 끝에 아이는 무사히 세상 빛을 보게 되었지만, 안나의 상태는 그리 희망적이지 않았다.

    마치 마지막 남은 모든 힘을 아이를 출산하는 것에 쏟아버린 듯, 손가락 하나 까딱일 힘도 남아 있지 않은 안나의 모습에 이레네가 번쩍 정신을 차리며 발을 옮겼다.

    “자, 제 손을 잡으십시오.”

    안나의 오른손을 잡은 아레네가 안나의 이마에 손등을 얹었다. 출산 이후 꽤 시간이 흘렀지만, 손등에 닿은 열기가 쉽게 사그라지지 않고 있었다.

    산욕열인가? 아니, 산욕열과는 그 증상이 좀 다르다. 체온이 오른 것은 사실이지만, 산욕열을 앓는 산모만큼은 아니었고, 결정적으로 생식기 감염을 막기 위해 최대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아아아… 추워요. 너무 추워… 눈밭을 뒹굴고 있는 것 같아…….”

    이레네가 다급하게 안나의 손목을 쥐고 맥을 짚었다. 맥이 잡혔지만, 제대로 확인하기 어려울 정도로 약한 진동만이 느껴졌다.

    한 겹 한 겹 안나의 옷을 벗겨낸 이레네가 나신이 된 안나의 다리 사이를 살폈다. 태어난 아이의 상태를 확인하느라 안나의 몸 상태를 바로 확인하지 못했다.

    “아…….”

    정체를 알 수 없는 시커먼 울혈 덩어리가 안나의 다리 사이에서 쏟아져 나온 것이 보였다. 출산하며 그녀가 느꼈을 고통이 얼마나 컸을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안타까움에 외마디 탄식을 뱉은 이레네가 약초가 담긴 꾸러미로 손을 뻗었다.

    “많이 고통스러우면 이것을 물어뜯으십시오. 절대로 정신을 놓아서는 안 됩니다! 아시겠습니까!”

    “으으으…….”

    “자, 입을 벌리십시오! 어서!”

    차마 입을 벌릴 힘도 남지 않은 안나가 그대로 고개를 떨구는 순간, 이레네는 본능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만일 안나가 지금 정신을 놓는다면, 절대 그녀의 혼을 붙잡아 놓을 수 없다는 사실을. 그를 찾을 시간이었다.

    오피르수스.

    이레네는 제 이복 오라비이자 안나를 이 세계에 데려다 놓고 제멋대로 영혼 간의 이동을 꾀했던 남자의 얼굴을 불현듯 떠올렸다.

    오피르수스가 제 능력을 알게 된 것은 아주 어렸을 때의 일이었다. 여느 때처럼 함께 집 앞 숲에 올라 약초를 따던 오피르수스가 눈동자를 반짝이며 이레네를 멈춰 세웠다.

    ‘이레네. 내가 아주 신기한 경험을 했는데 말이야. 꿈을 꾼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었어.’

    ‘뭔데?’

    ‘자, 저기 저 사냥꾼 보이지?’

    오피르수스가 먼발치에서 토끼를 쫓고 있는 사냥꾼을 가리켰다. 수풀 사이에 숨어 몸을 잔뜩 웅크리고 있는 사냥꾼을 본 이레네가 오피르수스를 응시했다. 그의 눈에 이제껏 단 한 번도 본 적 없었던 광기가 도사리는 것을 느꼈다.

    ‘응. 저 사냥꾼이 왜?’

    ‘잠시만 있어 봐.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움직이면 안 돼.’

    ‘그게 대체 무슨 말이야.’

    말을 마친 오피르수스가 숨을 깊게 들이쉬며 사냥꾼을 응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먼발치의 사냥꾼이 푹 자리에서 쓰러지는 것이 보였다.

    ‘어? 저기 좀 봐! 저 사람 어디 아픈 거 아냐?’

    고개를 돌렸지만 이레네의 곁에 앉아 있던 오피르수스 역시 바닥에 쓰러진 상태였다. 순간적으로 혼란에 빠진 이레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순간, 사냥꾼이 몸을 일으키며 이레네를 향해 고개를 까딱이며 브이자를 그려 보였다.

    오피르수스가 신나는 일이 있을 때마다 이레네에게 자주 보이던 행동이었다.

    ‘그럼 설마…….’

    얼마 후 바닥에 누워있던 오피르수스가 부스스 몸을 털며 일어나며 얼굴 가득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때? 굉장하지? 아직은 나와 다른 사람의 영혼이 아주 잠시 뒤바뀌는 정도만 가능한데, 조금만 연습하면 서로 다른 사람의 영혼을 완전히 바뀌게 할 수도 있을 것 같아. 만약 그렇게 된다면 정말 엄청날 것 같지 않아?’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이상한 짓 하지 마!’

    ‘이상한 짓이라니. 너한테만 신기한 능력이 있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지 뭐야. 이건 정말 대단한 능력이라고.’

    이제껏 본 적 없는 그의 광기 가득한 눈동자. 그 순간 이미 느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를 막을 방법 따위 없을지도 모른다고.

    오피르수스는 몇 년 동안 방안에 틀어박혀 광적으로 제 능력에 집착했고, 결국 다른 영혼 간의 이동을 넘어 서로 다른 세계와 시간의 이동에 관여하는 것에까지 성공했다.

    그는 자신을 필요로 하는 자의 꿈에 나타나 원하는 조건을 제시했고, 사람들은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그의 제안을 너무나도 쉽게 받아들였다.

    ‘영원한 삶이란 절대 존재하지 않아. 제 욕심을 위해 천지를 거스르는 일을 꾸미는 것이 두렵지 않은가!’

    이대로 오피르수스를 내버려 두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굳은 다짐을 한 채 그를 찾았던 순간이 떠올랐다. 선황의 청을 받아들여 필리프를 황태자의 자리게 오르게 한 이듬해의 일이었다.

    천둥 같은 이레네의 힐난에도 꿈쩍하지 않은 오피르수스는 손가락을 부딪쳐 시간의 거스름을 구현했다. 중년의 남자였던 그의 얼굴이 앳된 청년의 모습으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글쎄. 이것을 보고도 영원한 삶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소리를 하는 건가? 내 얼굴을 좀 봐. 이 얼굴을 보고도 내가 너의 오라비라는 사실을 믿을 사람이 있을까?’

    ‘세상에 대가 없는 일은 없어. 신이 내릴 벌이 두렵지도 않나!’

    ‘신이라. 신……?’

    얼굴 가득 비웃음을 매단 채 콧방귀를 뀐 오피르수스가 이레네의 코앞으로 바짝 다가와서며 입을 열었다.

    ‘제 욕심을 위해 천지를 거스르는 일을 한 사람이 어디 나 하나뿐인가?’

    ‘…뭐?’

    ‘지금 황태자의 자리에 있고 곧 황제의 왕관을 쓰게 될 자의 원래 지위는… 가난한 약초상의 자식 아닌가.’

    ‘닥쳐!’

    퍼렇게 굳어진 이레네의 얼굴을 보며 즐겁다는 듯 킬킬 웃은 오피르수스가 목소리의 톤을 바꾸었다. 낮게 깔린 음산한 목소리를 듣는 순간 이레네의 온몸에 저릿한 소름이 끼쳤다.

    ‘세상의 이치를 깼다는 이유로 만일 신이 벌을 내리신다면, 벌을 받을 대상이 나 하나만은 아닐 것이란 이야기야. 안 그런가?’

    오피르수스가 이레네의 손목을 가볍게 쥐며 웃음을 흘렸다. 삶의 온기라고는 조금도 느낄 수 없이 차디차게 식은 손바닥 온도에 온몸에 저릿한 소름이 돋았다.

    ‘이 손 놔!’

    ‘아마도 사후 세계에는 이렇게 손을 잡고 함께 갈 것 같으니, 이 세계에서도 좀 더 사이좋게 지내는 것이 좋겠지? 우리는 피를 나눈 사이잖아.’

    뻔뻔한 얼굴로 돌아서려던 오피르수스가 발을 멈추며 고개를 돌렸다. 이레네가 가진 능력을 우습게 볼 수 없기에 그녀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을 빌미로 마지막 경고를 내뱉었다.

    ‘다시 한번 내 계획을 방해한다면 가벼운 내 입이 참지 못하고 움직이게 될 거야. 나는 네 아들, 아니 내 조카의 안위 따위에는 큰 관심이 없어서 말이야.’

    만약 이 자를 막으려던 계획이 틀어지고, 필리프가 위험에 빠지게 된다면? 안 돼.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그것만은 막아야 했다.

    ‘그러니까 신중하게 생각하라고, 동생. 어차피 너만 가만히 있으면, 내가 너와 네 아들을 건드릴 이유는 없으니까. 결국, 네가 원하는 것도 네 아들이 행복해지는 것 하나뿐이잖아?’

    오피르수스가 계략을 꾸미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음에도 이레네가 손 쓸 생각을 하지 못했던 이유는 여기에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필리프의 안전을 위하려 했던 자신의 이기심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은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고 눈과 귀를 닫고, 이치에 어긋난 채 벌어지는 일을 모른 체하려 했다.

    태어나자마자 이유를 알 수 없는 병에 시달리다가 고작 네 살의 나이에 죽음을 맞은 황태자, 그 황태자와 나이와 체격이 비슷했던 이레네의 아들 필리프.

    만일 제 아들을 황태자의 자리에 앉히기 위한 선황의 계획에 동의하지 않았더라면 베르나 황녀가 악랄한 계획을 세우는 것을 막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베르나의 술수에 놀아나, 복수의 대상을 착각한 안나 스완이 오피르수스를 찾는 일 따위 없지 않았을까.

    어쩌면 이 모든 일의 근원에 자신이 있는 것이 아닐까.

    머릿속을 좀먹는 질문에서 해방되기 위해 이레네가 택한 것은 도피였다. 순리를 거스르지 않는 범위에서만 관여하며 오피르수스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애썼다. 그것이 제 아들이자 제국의 황제인 필리프를 지키는 일이라 믿었기 때문이었다. 비겁한 회피라 해도 어쩔 수 없었다.

    “아아아아아…….”

    고통스러운 신음을 뱉는 안나의 얼굴을 내려다보던 이레네의 눈가가 하얗게 흐려지기 시작했다.

    원치 않는 시간의 흐름을 경험하고 사랑하는 이를 위해 위험을 무릅쓴 그녀가 이대로 삶을 놓아 버리게 된다면, 필리프뿐 아니라 이레네 그녀 자신이 스스로를 영원히 용서할 수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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