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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나의 시간이 만나는 순간 (107)화 (107/139)
  • 107화

    원하는 약초를 찾아 바삐 몸을 움직이던 이레네가 이곳 오두막에 도착하기까지의 과정을 떠올렸다.

    필리프는 정식적인 유통 교류가 아닌, 밀수 밀매업자들의 불법적 해상 루트로 이용하는 제국 남단 항구로 안나와 이레네를 안내했다. 필리프가 즉위하며 불법적 해상 업을 엄격히 통제하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눈속임을 가장한 밀매업이 이루어지고 있는 곳이었다.

    ‘밀매업자들이 자신들만이 아는 길로 제국을 빠져나가고 있어. 믿을 만한 사람 두 명과 함께 밀수업자로 위장할 예정이야.’

    카마르 제국령이 되었지만, 아직 그 쓰임새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하닐 섬.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에 적격이라는 생각이었다.

    ‘걱정 마세요. 폐하의 약속을 기다리며 건강히 지내겠습니다.’

    씩씩한 안나의 말과 함께 영원히 떨어지지 않을 것 같던 두 사람의 손이 떨어졌다. 밀매업자들이 임신한 안나의 정체에 관해 의구심을 품었지만, 안나는 유연하게 대처하며 그들의 의심을 지워냈다.

    ‘임신한 여자를 의심할 사람은 많지 않죠. 마약을 밀매하는 사람일 것이란 생각은 더더욱 하지 못할 테고. 자, 제가 어떻게 물건은 운반했는지 보여드려야 합니까?’

    평온한 표정으로 볼록한 배를 두드리던 안나가 입고 있던 드레스 안쪽으로 손을 뻗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그녀의 모습에 밀매업자들이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고, 곧 하닐 섬으로 향하는 항해가 시작되었다.

    “어쩌면 생각보다 훨씬 강한 사람인지도 모르겠어.”

    빠르게 기지를 보였던 안나의 모습을 회상한 이레네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걸음을 재촉했다.

    오두막을 막고 있는 커다란 바위 옆으로는 키가 큰 나무들이 병풍처럼 둘러서 있었다. 시야를 가리고 있는 빽빽한 나무들을 삥 돌아 걷다 보면 커다란 바위 위로 살짝 기울어져 자라고 있는 나무가 있었다.

    “음, 이쯤이었던 것 같은데…….”

    이레네가 반쯤 기울어진 나무 밑의 공간을 오 분 정도 기어가, 하닐 섬 최북단의 절벽에 다다랐다. 사람의 발길이 거의 닿지 않는 이곳은, 쉽게 구할 수 없는 약초가 자라기에 안성맞춤인 공간이었다.

    안나의 배 모양을 확인한 이레네는 아이의 위치가 정상적이지 않음을 직감했다. 몇 주 동안 아이의 위치를 돌릴 수 있는 민간요법을 사용해 봤지만, 출산이 임박한 지금까지 아이는 고집스레 제 위치를 바꾸지 않고 있었다.

    산모보다는 아이에게 위험한 상황. 무슨 일이 있어도 아이를 지켜내야 한다는 결심만큼은 추호도 변함이 없는 이레네였다. 혹시 이 선택이 후에 필리프와 척을 지게 하는 결정일지라도.

    “아, 저기 있군.”

    며칠 전 있었던 폭우에 정통으로 바람을 맞은 탓인지 커다란 나무가 군데군데 쓰러져 있었다. 강한 바람과 비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은 나뭇가지들을 찾아 바삐 몸을 움직이던 이레네가 약초가 무성한 수풀 사이로 몸을 밀어 넣었다.

    “그래. 이거면 될 거야. 통증을 줄이는데, 이만큼 효과적인 것이 없으니.”

    속이 깊은 그릇처럼 생긴 황갈색 약초. 꼼꼼히 약초 잎과 뿌리를 살핀 이레네가 둘러맨 꾸러미 안에 고른 약초 다발을 넣었다.

    자리에서 일어서 하늘을 바라보니 조금씩 어둠이 짙어지고 있었다. 이제 얼마 지나지 않아 칠흑 같은 어둠이 숲 전체를 집어삼킬 것이고, 안나는 극심한 진통을 겪게 될 것이다. 조용히 짧은 주문을 외운 이레네가 빠르게 몸을 움직이며 수풀 틈을 통과했다.

    * * *

    감은 눈을 떴다고 생각했는데, 앞은 여전히 짙은 암흑이었다.

    아직 살아있는 건가? 아니면, 설마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죽어버린 건가?

    “…피… 필리프…….”

    간신히 쥐어짠 목소리가 희미하게 제 귓가에 울렸다. 아, 아직 죽지 않았구나. 아직 살아 있구나. 안나가 바들바들 떨리는 손을 움직였다. 땅에 닿아있는 손바닥이 축축했다. 뜨끈한 액체가 묻은 손을 힘겹게 들어 올렸을 때 보이는 것은 검붉은 피였다.

    “…아, 아아아…….”

    두려움에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여전히 부른 배를 감싸 안고 숨을 헐떡이던 안나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걸쇠를 걸어 놓은 문이 흔들렸다.

    “문을 열어 줄 수 있겠습니까.”

    덜컹거리는 문밖에서 익숙한 이레네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도저히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가까스로 붙잡고 있던 정신이 흐릿해지려는 순간, 배 속 창자가 그대로 뒤틀리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으아아아악!!!”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고통이 배에서 몸 전체로 퍼졌다. 견딜 수 없는 고통에 까무룩 정신을 잃기 직전, 덜컹거리던 문의 걸쇠가 떨어져 나갔다.

    “…….”

    잠시 안나의 얼굴을 내려다보던 이레네가 들고 있던 꾸러미 안 약초를 꺼내 들었다. 그녀가 무어라 중얼거렸지만, 무슨 소리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 주문 같은 것이었다. 사지가 찢지는 듯한 통증이 멎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하으… 배… 배가… 피가… 아… 아이는… 아이는 괜찮습니까?”

    “쉬이. 몸에 힘을 푸십시오. 곧 당신이 하늘에 떠 있는 것 같은 기분을 느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안나의 입 속으로 차가운 액체와 표면이 거친 약초가 연이어 들어왔다. 어렵게 입 속 내용물을 삼켜내자 희한한 일이 일어났다.

    “자, 당신은 걷고 있지만, 당신의 발이 땅을 스치지는 않습니다. 어떻습니까. 몸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끼십니까?”

    “…하아… 네… 네, 유모님.”

    이레네의 말 그대로였다. 하늘에 붕 떠 있는 것만 같은 부유감을 느낀 안나가 자연스럽게 긴장하고 있던 근육에서 힘을 풀었다. 아랫배에 불덩이가 굴러다니는 듯 고통스러운 느낌도 조금씩 사그라들었다.

    “어쩌면 아이가 길을 찾는 것이 수월하지 않았겠지요. 어느 세계에 남게 될지 확신할 수 없었을 테니.”

    “…흐으… 아아아…….”

    “계속 비행하십시오. 운이 좋다면 원하는 사람의 모습을 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오로지 시각에만 온 정신을 집중하십시오.”

    원하는 사람의 모습? 그 순간 깜깜했던 시야가 환해지면서 눈앞에 커다란 강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 강가로 날아가 보자. 기분 좋게 불어오는 바람이 안나가 원하는 길로 그녀를 안내했다.

    잔물결이 이는 강가의 수면이 맑아지기를 기다리길 한 참, 조금씩 물결이 사라지는 수면에 그리웠던 이의 얼굴이 비치기 시작했다.

    “…피, 필리프.”

    고리로 만든 갑옷과 은색 투구로 전신을 가리고 있었지만, 한눈에 그를 알아볼 수 있었다. 그의 손에 자신이 사용하던 낡은 손수건이 들려 있었다. 잠시 투구를 벗어낸 그가 들고 있던 손수건에 얼굴을 묻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보고 싶어… 너무 보고 싶어.”

    그를 안고 싶은 마음에 손을 뻗었지만, 손끝이 수면에 물결을 만들어내 오히려 그의 얼굴을 사라지게 했다. 자신이 뻗은 손을 원망스럽게 바라본 안나가 다시 물결이 잠잠해지기를 기다렸다.

    “좋습니다. 계속 그렇게 호흡하세요.”

    배 속 고통이 완전히 멎으면서 정신이 점점 혼미해졌다. 두 눈을 부릅뜨고 필리프의 얼굴이 비치는 강의 수면을 응시했지만, 그의 얼굴이 보였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몽롱한 의식 속에서 누군가 혀를 차는 소리가 들리고 코끝에 고약한 냄새가 나는 무언가가 들이밀어 졌다.

    “숨을 멈추지 말고 들이마셔요. 그래요, 아주 좋습니다. 이제 천천히 내쉬며 이 고약한 향을 몰아냅시다.”

    “…으, 하으…….”

    깊게 호흡한 안나가 없는 힘을 쥐어짜며 고개를 들었다. 흐릿한 시야에 넓게 벌어진 제 다리와 그사이에 앉아 고개를 숙인 이레네의 정수리가 보였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조금만 참으면 이 아이를 볼 수 있다. 환상과 환각으로 고통을 눈가림하긴 싫었다. 아이를 낳는 순간의 모든 것을 직접 느끼고 싶었다.

    “하아… 유, 유모님. 이제… 이제 아이가 나오는 것입니까?”

    완전히 들어 올린 안나가 눈에 단단히 힘이 실려있었다.

    “지금은 객기를 부리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다시 눈을 감으세요.”

    “괜찮아요. 다 견뎌낼 수 있습니다. 아, 아흐…….”

    분명 환각용 약초를 사용했을 이레네였다. 그녀가 양을 제대로 조절했다고 하더라도 아이가 제 몸에 있는 한 아이에게 문제가 될 만한 그 어떤 것도 사용하고 싶지 않았다.

    “이럴 수가.”

    안나에게 억지로 약초를 사용하려던 이레네가 단발 감탄사를 내뱉었다. 끝내 제 위치를 바꾸지 않던 아이가 거짓말처럼 천천히 원래 있어야 할 위치로 이동했음이 느껴졌다. 자신이 안나를 떠났던 그 짧은 순간에 일어난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윽! 하, 아아아!”

    안나가 힘주어 이레네의 손을 잡았다. 그녀는 끊임없이 배 속 아이와 필리프의 이름을 부르며 고통을 견뎌내고 있었다.

    아이는 제 자리를 찾았지만, 쉽게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완전히 날이 지고, 다시 해가 밝을 때까지 끔찍한 진통이 이어졌다.

    “더 버티는 것은 무리입니다! 자, 잠시 몸에 힘을 푸세요.”

    “하으… 아니, 괜찮습니다… 저, 저는 괜찮습니다.”

    안나의 이마에서 흐르는 굵은 땀방울을 닦아 준 이레네가 안나의 입에 깨끗한 천을 물려주었다. 이레네가 살면서 경험해 본 것 중 가장 지독하고 긴 진통이었다. 배가 뒤틀리는 고통을 참아 내느라 안나의 입술 전체에 핏방울이 맺혀있었다.

    발버둥 치고 새된 신음을 쉴 새 없이 내지르면서도 그녀는 끝내 환각 성분이 있는 약초를 쓰길 거부했다. 혹시나 아이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으으… 흐으…….”

    “힘을 주십시오. 그래, 조금씩 열리는 것이 보입니다!”

    이레네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고집스레 어미 속을 태우던 녀석이 드디어 세상을 볼 준비를 마친 모양이었다.

    “하아… 하아… 후우!”

    “그래요. 절대로 정신을 놓아서는 안 됩니다. 이제 거의 다 왔습니다!”

    “하읏!”

    아가야, 무사히 태어나야 해. 무사히 태어나서 아빠랑 엄마랑 같이 손잡고 산책도 하고, 맛있는 것도 먹고, 귀여운 동물들과 함께 뛰어놀아야지.

    온몸 장기가 뒤틀리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던 통증이 느릿하게 잦아들었다. 안심하며 호흡하는 것도 잠시, 다리 사이의 묵직함이 느껴지면서 신체 부위가 쪼개지는 듯 강렬한 통증이 찾아들었다.

    “아악!”

    한계였다. 어떻게든 버텨보려 했지만, 더는 정신을 온전히 유지할 수가 없었다. 희미해지는 의식 속에서 누군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느껴졌다.

    안나, 안나!

    처절한 울음 같은, 간절한 바람을 담은.

    안나! 서안나!

    그의 목소리에 대답하려 입을 벌리는 순간, 우렁찬 아이의 울음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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