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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나의 시간이 만나는 순간 (104)화 (104/139)
  • 104화

    비처럼 쏟아져 내려 하늘을 새까맣게 덮기 시작한 화살에 파이만 제국의 진지를 지키던 군사들이 뒤늦게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전하! 카마르 제국의 기습 공격입니다!”

    “뭐야?”

    답보 상태를 거듭하고 있던 지상전이었다. 해상 공격에 전력을 쏟아부어 지상전에서는 줄곧 방어 태세로 일관해온 파이만 제국의 군사들이 우왕좌왕하며 방패와 활을 꺼내 들었다.

    “폐하! 남은 포탄의 양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모조리 쏟아부어라! 전부!”

    파이만 군대의 반격이 시작되었지만, 상황은 녹록하지 않았다. 쏘아 올린 포탄에 맞은 파이만 제국의 장병들이 숨을 거두면 뒤에 서 있던 다른 군사가 그 자리를 대신했지만. 겁을 집어먹은 군사들은 제대로 된 공격을 하지 못하고 주춤주춤 뒷걸음질 쳤다.

    “해상 공격 상황은 어떠한가.”

    타론의 질문을 들은 작전 대장이 말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전세가 기울기 시작하며 충분히 예상했던 상황이었지만, 생각보다 결정의 시간이 이르게 찾아왔다. 위태롭게 켜진 마지막 촛불이 그 수명을 다하는 순간이 머지않았음이 느껴졌다.

    “모, 모두 대피하라!”

    추풍낙엽이었다.

    강공을 펼쳤지만, 파이만 제국의 군사들은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적들의 활과 포탄에 목숨을 잃었다. 시간이 갈수록 사상자의 수가 늘어났고, 사기가 꺾인 군사들이 주춤주춤 대열에서 물러서기 시작했다.

    기세를 더한 카마르 제국의 군사들이 빠르게 진격하며 파이만 제국의 진지를 둘러싸기 시작했다. 완벽한 포위였다.

    “폐하! 적군이 진지 바로 앞까지 쳐들어왔습니다!”

    “…….”

    잔뜩 충혈된 눈으로 진지 밖 상황을 주시하던 타론이 칼집 손잡이로 손을 뻗었다. 선택을 내려야 할 순간이었다. 절벽이 코앞이었다. 안개가 가득해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길을 향해 발을 뻗을 것인가, 아니면 한발 물러서 안개가 걷히기를 기다릴 것인가.

    ‘약속해 주십시오. 끝까지 용맹하게 싸우고 저에게 승리의 기쁨을 선물해 주시겠다고.’

    ‘내 굳게 약속하겠소. 그대를 위해 반드시 전쟁에서 승리하겠다고.’

    아마 그녀에게 했던 두 가지 약속 모두 지키지 못하게 될 것 같다고.

    잠시 베르나의 얼굴을 떠올린 타론이 침통한 표정을 한 채 무겁게 닫혔던 입술을 떼어 냈다.

    “깃발을 꺼내오도록.”

    “…알겠습니다, 폐하.”

    * * *

    대치하고 있는 베르나는 전혀 먼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기묘한 적막이 흐르는 가운데, 필리프가 베르나의 얼굴과 손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무작정 신호가 들려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무조건 선제공격이다. 절대 주저함이 있어서는 안 된다.

    필리프가 소맷단에 숨겨 놓은 독침에 손을 뻗기 직전, 베르나가 입을 열었다.

    “정말 신기한 일이지요. 피가 섞인 것도 아닌 아버지의 여성 편력까지 닮았으니 말입니다.”

    역시 베르나가 알고 있는 것은 서안나라는 인물이 존재하는 것뿐. 그녀와 관련된 진실을 알지 못한다. 베르나가 눈치채지 못하게 안도의 숨을 내쉰 필리프가 말을 이었다.

    “그래서, 내 여자 문제를 이야기하려고 대화를 요청한 건가?”

    베르나와 관련된 인물이 아직 제국에 남아 있다고 해도 완벽하게 수세가 기운 지금 상황에서 섣불리 행동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더군다나 안나의 도주로와 도주처를 알고 있는 사람은 극비에 부쳤으니, 아무리 베르나라 하더라도 그녀가 있는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기는 어려웠을 터였다.

    “제가 죽는다고 모든 것이 끝이 나는 것은 아닙니다.”

    끝까지 여유를 잃지 않으려는 태도였지만, 파르르 떨리는 입술이 현재 베르나의 심경을 대변해주고 있었다.

    “왜 항상 일을 어렵게 만드는지 모르겠군.”

    독침을 쥐려 뻗었던 손을 거둔 필리프가 얼굴 가득 여유로운 미소를 머금었다. 베르나의 목숨을 끊어 놓겠다는 결심은 확고했지만, 안나의 안전을 위해 확인해 둘 것이 있었다.

    “주어진 자리에 만족하며 사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이었던가?”

    “주어진 자리? 아니! 그 자리는 내 자리였어! 너 따위가 앉아 있을 자리가 아니었다고!”

    답지 않게 평정심을 잃은 베르나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고함을 질렀다. 거친 숨을 뱉는 베르나를 향해 실소를 뱉은 필리프가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아니. 나는 그저 빈 자리에 앉은 것뿐이야. 내가 자리하지 않았다면 다른 누군가 그 자리를 차지했겠지. 네가 아니라.”

    베르나는 절대 성군이 될 수 없는 인물이었다. 그 사실을 일찌감치 깨달은 부모님은 카마르 제국을 위해 최선이라고 생각한 선택을 했던 것일 뿐.

    “나는 너란 인간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어. 내 발밑을 기는 것보다는 목숨을 잃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겠지. 그래서 손에 아무런 패도 쥐지 않은 채 나를 찾았고.”

    기울어진 언덕에서 가까스로 돌부리 하나를 부여잡은 채 버티고 서 있는 모습. 그게 지금 베르나의 모습이었다.

    “내가 가진 패가 공갈 패라고 생각해?”

    마지막 발악이 애처로울 정도였다.

    “공갈 패가 아니었다면, 이미 오래전에 그 패를 내게 던졌겠지. 이렇게 지루하게 시간을 끌 필요가 없었을 테니까.”

    필리프가 태연하게 베르나의 말을 맞받았다. 조금씩 변해가는 베르나의 표정을 보니, 제 생각이 맞았다는 것에 점점 확신이 들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더는 머뭇거릴 이유가 없었다.

    “설마, 그따위 공갈 패가 통할 것으로 생각한 거야?”

    “…….”

    “고작 저게 전부인가? 파이만 제국에서 끌어모을 수 있는 물자란 것이?”

    필리프가 베르나와 함께 해상에 쳐들어온 적군의 함선에 흘끔 시선을 주었다. 베르나의 신호를 기다리는 군함은 고작 다섯 척에 불과했다.

    “나를, 그리고 카마르 제국을 얼마나 우습게 봤으면.”

    “아직 내 사람이 당신 주변에 남아 있어!”

    “네 사람? 곧 유명을 달리할 사람에게 끝까지 충성을 맹세할 이가 과연 몇이나 될까? 이거, 나도 궁금한데?”

    둥둥둥둥.

    분을 참지 못한 베르나가 부들부들 몸을 떠는데, 천둥소리처럼 큰 북소리가 하늘에 울렸다. 소리가 울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베르나의 얼굴이 점점 딱딱하게 경직되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필리프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말려 올라갔다.

    “저런. 그대의 남편은 그대와는 완전히 뜻이 달랐던 모양이야.”

    다시 한번 하늘을 가르는 커다란 북소리를 들은 베르나가 느릿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대보다 훨씬 현명했다고 해야 하나? 적어도 제 목숨은 연명할 수 있게 되었으니.”

    베르나가 입술을 깨물었다. 파이만 제국 지상군의 항복 선언이 머지않았음이 느껴졌다. 아냐, 아직 안 돼! 이렇게 허망하게 끝낼 수는 없어!

    고민하며 몸을 움찔거리던 베르나가 갑판 하단에 설치해 놓은 탈출구를 향해 손을 뻗었다.

    “공격하라!!!”

    선박에서 몸을 일으킨 필리프가 하늘 위로 오른손을 높게 들어 올리며 소리쳤다. 필리프의 공격 명령을 들은 군사들이 일제히 전열을 갖추며 포탄을 쏘아 올렸다.

    * * *

    무시무시한 폭격음이 쉴 새 없이 울렸다. 베르나는 급히 뱃머리를 돌렸지만, 그녀가 타고 있는 선박 끄트머리에 포탄 잔여물이 명중했다. 파이만 제국의 함대 주위로 붉게 화염이 타올랐다.

    빠르게 아군의 최전선에 있는 함선으로 돌아와 상황을 지켜보던 필리프가 직접 포탄을 조준했다. 베르나의 생사를 온전히 확인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필리프는 더 적극적인 공격을 지시해야 했다.

    베르나의 시신을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할 때까지 절대 안심은 금물이었다.

    “공격을 멈추면 안 된다! 남은 포탄 전부를 투입하라!”

    “알겠습니다! 포탄 전부를 투입하라!”

    몇 시간이 넘는 전투 끝에 남은 적의 함선은 고작 두 척뿐이었다. 완전한 승기를 잡았지만, 아직 항복을 선언하는 흰 깃발이 올라오지 않았으니 자비를 베풀기엔 일렀다.

    필리프가 난파된 함선을 피해 직접 뱃머리를 조정했다. 바닷속을 샅샅이 수색해 시신을 찾아내려면 조금이라도 빨리 적군의 항복을 끌어내야 했다.

    “이제 한 척이다! 자비를 두지 말도록!”

    “남김없이 격침하라!”

    적진을 향해 거침없이 포탄을 퍼부으라 지시하는데, 전투 대장이 필리프의 등 뒤로 바짝 다가와 섰다.

    “폐하. 케이든 기사가 알현을 청합니다.”

    “들여보네.”

    여전히 제 사람이라 확신할 수 없는 케이든에게 안나의 도주를 맡기는 것이 옳은 일일까. 필리프의 마음에 다시 희미한 불안이 싹트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제 와, 케이든이 아닌 다른 인물에게 안나의 도주를 맡기기에는 그보다 더한 위험 요소가 있었다.

    남은 카마르 제국의 함선을 모두 격침한 뒤 항복을 받아내고, 바다 수색까지 끝마치기 위해서는 당장 자리를 뜨는 것이 불가능했다. 과연, 어떻게 하는 것이 현명하다 할 수 있을까. 후회하지 않을 결정을 내려야 했다.

    “폐하를 뵙습니다.”

    “…….”

    여전히 자신을 향해 고개를 돌리지 않는 필리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케이든이 다시 무릎을 굽히며 목소리를 높였다.

    “폐하를 뵙습니다.”

    “어, 그래. 상황은 어떤가.”

    “모든 준비가 완료되었습니다. 바뀐 신호를 전달했다는 연락을 받았으니 지금 출발해야 할 것 같습니다. 늦지 않게 진지로 돌아오도록 하겠습니다.”

    보고를 올리는 케이든의 얼굴을 응시하던 필리프가 답 없이 허공을 응시했다. 황제의 침묵을 허락의 의미라고 생각한 케이든이 급히 진지를 나서려는데, 필리프가 돌아서려는 케이든의 손목을 잡아 쥐었다.

    “여기까지.”

    “…예?”

    “자네에게 한 약속은 지키도록 하겠지만, 이제 자네의 임무는 끝났어.”

    “…무슨 말씀입니까.”

    “자네가 할 수 있는 일은 두 가지 중 하나이네. 계속 칼을 들고 조국을 위해 싸울 수도, 아니면.”

    잠시 말을 멈춘 필리프가 케이든의 귓가에 바짝 얼굴을 가져다 댔다.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 시간을 낭비하며, 조국을 위해 싸우다가 숭고하게 목숨을 잃은 동료들의 죽음을 애도할 수도 있겠지.”

    가만히 필리프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케이든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는 곧 결연한 표정을 지으며 허리춤으로 손을 뻗었다.

    “폐하께서 제게 맡기신 임무는 끝까지 수행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

    “아니.”

    필리프가 단호하게 케이든의 말을 끊어냈다.

    “그건 내가 직접 해야 할 일이야. 누구의 손에도 맡기지 않고.”

    제 손으로 직접 지켜내야 마땅한 여인이었다. 결심을 마친 필리프가 쥐고 있던 뱃머리에서 손을 떼어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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