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과 나의 시간이 만나는 순간 (103)화 (103/139)
  • 103화

    “고개를 숙이십시오!”

    어마어마한 폭발음이 울림과 동시에 이레네가 안나의 등을 감싸 안았다. 토굴 안쪽으로 잔떨림이 전해질 정도로 커다란 폭발음이었다.

    “그분이 오신 모양입니다. 늘 그랬듯, 화려한 등장이군요.”

    지축을 뒤흔드는 큰 소리가 완전히 멈추기를 기다린 후 이레네가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세차게 뛰는 가슴을 진정시킨 안나가 토굴 구멍을 올려다보았다.

    “그분이요?”

    안나의 발아래 두툼한 이불을 정리한 이레네가 몸을 일으켰다.

    “이제 두 분이 만날 날이 그리 머지않은 것 같습니다.”

    “베르나 황녀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한동안 토굴 밖 상황을 신중하게 주시하던 이레네가 시선을 낮추었다. 예상했던 대로 우리 군대를 교란하기 위한 공포탄이었던 모양이었다.

    “이제는 황녀가 아니시죠. 타국의 황후가 되신 분입니다. 우리 카마르 제국을 침략하려 한 타국의 황후.”

    단호하게 베르나의 현 지위를 정의한 이레네가 무릎을 굽혀 안나와 시선을 맞추었다.

    “폐하께서 지켜야 할 것이 많아져 상황을 또렷하게 보지 못하시는 것 같습니다.”

    필리프가 토굴 근처로 가까이 다가왔음을 느꼈던 이레네였다. 다행히 토굴에 도착하기 전 공포탄이 울렸으니 섣부른 움직임을 취하지는 않으실 테지.

    “몸은 좀 어떻습니까.”

    “전 괜찮습니다. 생각했던 것보다는 지내기가 나쁘지 않은 것 같아요.”

    “오랜 시간 햇빛을 보지 못하는 것은 아이에게 좋지 않습니다. 게다가 점점 배가 불러오는 상황이니, 움직임이 더 어려워지기 전 한시바삐 머무는 곳을 옮기는 게 좋겠습니다.”

    이레네의 말대로 하루가 다르게 배가 부풀어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움직임을 줄여 최대한 노출을 자제해야 하는 전시 상황이었지만, 수월하게 거동할 수 있을 때 머물 곳을 옮기는 편이 나았다.

    휘익!

    바람 소리와 휘파람 소리가 동시에 울렸다. 하루에 한 번, 토굴로 음식과 옷가지를 전해 주러 오는 수색병의 암호였다. 몸을 일으킨 이레네가 토굴 구멍을 가린 짚더미를 걷어냈다.

    별생각 없이 고개를 들어 마주한 남자의 얼굴을 보고 놀라는 것도 잠시, 안나가 이내 토굴 안 자리를 정리했다.

    “케이든 기사님.”

    “몸은 좀 괜찮습니까.”

    “예. 괜찮습니다.”

    자신이 안나 스완의 몸을 빌려 생활했었다는 사실을 알 턱이 없는 케이든과 다시 만난 것은 전쟁이 있기 일주일 전이었다.

    안나 스완의 실종 이후 기사단을 그만둔 케이든은 내내 안나의 흔적을 찾아 헤매고 있었다. 전쟁을 앞두고 누구보다 능력이 뛰어났던 케이든의 필요성을 절감한 필리프를 돕기 위해, 안나는 하나의 방책을 생각해냈었다.

    케이든에게 사실을 이해시킴과 동시에 그에게 선택할 기회를 주는 것. 필리프는 케이든이 전쟁에 출전하는 조건으로 자신이 안나 스완에 대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털어놓겠다 약조했고, 케이든은 오랜 고민 끝에 이 요구를 받아들였다.

    “폐하께서 토굴에 오르시다가 공포탄 소리를 들으셨습니다. 적군의 함선 몇 대가 뒤이어 들어오는 급박한 상황이라 그대로 산에서 내려가셔야 했습니다.”

    “…예. 저, 혹시 폐하가 다치시진 않았습니까?”

    케이든의 즉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그의 반응에 겨우 몸을 지탱하고 있던 두 팔의 힘이 풀려 안나의 몸이 바닥으로 미끄러졌다. 가까스로 안나의 몸을 받아든 이레네가 케이든의 얼굴을 응시했다.

    “대답해주세요!”

    “심하지는 않지만, 가슴 아래 부상이 있으십니다. 해상 전투에서 입은 부상인데 초기 치료는 마친 상황입니다.”

    “초기 치료요? 그게 대체 무슨! 당장 제대로 상처를 치료하셔야지요!”

    온몸에 힘을 주어 몸을 일으킨 안나가 케이든의 팔을 잡아 붙들었다. 제 반응에 놀란 것인지, 배 속 아이의 움직임도 따라 한껏 격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지금은 적군 후발대의 규모를 파악해야 할 시기입니다. 폐하께서 한가로이 상처를 치료할 여유가 없다고 판단하신 것 같습니다.”

    “말이 되지 않습니다! 제국 황제의 안전을 생각하는 것이 가장 우선 아닙니까? 아니, 어떻게 그런… 유모님! 유모님께서 폐하의 상처를 봐 주시면―!”

    “당신은 제 도움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반쯤 정신이 나간 안나의 어깨를 돌려세운 이레네가 질책하는 듯한 말을 뱉었다.

    “상처를 치료하는 대신 당신의 얼굴을 보려 하셨던 폐하이십니다. 자신의 몸 상태를 그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시는 분이시니 그리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지만!”

    울음을 참으려 안나가 아랫입술을 힘주어 깨물었다. 그래. 분명히 건강히 내 곁에 돌아오겠다고 약속한 사람이야. 자기가 한 약속은 반드시 지키겠다고 했으니 그의 말을 믿어야 해. 조금만 차분해지자. 조금만.

    “오늘 밤, 제가 이동을 돕도록 하겠습니다. 날이 어두워지는 대로 움직일 테니 그때까지 체력을 보충해두도록 하십시오. 이동 거리가 그리 짧지 않습니다.”

    안나의 흥분이 가라앉기를 기다린 케이든이 먹을 것과 옷가지가 든 꾸러미를 건네며 말했다. 커다란 꾸러미 안에는 두 덩이의 고기와 밀가루 빵, 아직 열기가 남아 있는 수프 통과 겨울용 외투가 담겨 있었다.

    “그럼 저는 이만.”

    용건을 전한 케이든이 토굴을 빠져나갔다. 케이든의 뒷모습을 멍하니 지켜보고 있던 안나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저 자신이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 세계로의 귀환을 선택하며 전쟁을 피할 수 없음을 예상했다. 남자들만의 싸움이 될 전쟁 상황에서, 필리프가 돌아오기만을 빌고 기다리지는 않겠다고 결심했었다. 어떻게든 그를 돕겠다고 생각했지만, 자신은 그에게 짐이 되고 있을 뿐이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점점 뼈저리게 깨닫고 있어요.”

    말없이 안나의 말을 들으며 이레네가 나무 그릇에 보자기 속 음식을 담았다. 천으로 여러 겹 싸맨 수프 통에서는 여전히 따끈한 김이 올라오고 있었다.

    “인생은 결국 선택입니다. 직접 내린 선택에 따른 결과 모두 감당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지금 당신이 해야 할 일은 폐하께서 내릴 선택을 믿는 것입니다.”

    이레네가 안나의 손에 수프 그릇을 쥐여 주었다.

    “식기 전에 드십시오. 이렇게 편히 쉴 시간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 * *

    “폐하, 이쪽입니다.”

    파이만 제국이 보낸 후발대가 도착했다는 소리에 황급히 함선으로 돌아온 필리프가 갑판 위에 올라섰다. 위협적인 포탄을 쏘아 올린 적군의 함선 두 척이 가라앉은 배를 가림막 삼아 자리를 잡고 있었다.

    “물자를 싣고 온 것 같지 않은데.”

    “예, 폐하. 오로지 공격을 위한 전투용 함선입니다.”

    베르나가 타고 있다. 뿌연 안개에 가려져 있던 함선이 완전히 모습을 드러낼 때쯤 확신할 수 있었다. 도박을 걸어 볼 목적으로 베르나가 본국에 돌아왔음을.

    “남은 적군의 함선은 얼마나 되지.”

    “아직 완전히 격추되지 않은 함선과 추가된 함선을 포함해 모두 여덟 척입니다.”

    “음. 원거리 사격을 준비하도록.”

    “알겠습니다, 폐하.”

    전투용 함선 두 척이 투입되었다고는 하지만, 이미 기운 승기를 뒤집기는 역부족이었다. 분명 다른 꿍꿍이를 가지고 직접 제국에 왔을 베르나였다. 그녀가 허튼수작을 부리기 전 잡은 승기를 더 공고히 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포격을 준비하라!”

    “준비!”

    포탄 사격을 준비하는 군사들 뒤로 불화살을 겨눈 군사들이 빼곡하게 자리했다. 군사들 모두 필리프의 공격 지시를 기다리고 있는데, 하늘 위로 몸집이 거대한 매 한 마리가 떠올랐다.

    “잠시 대기하라!”

    하늘을 가로지른 매의 발목에 전갈로 보이는 종이가 묶여있었다. 전투 사령관이 갑판에 내려앉은 매의 다리에 묶인 전갈을 풀어 필리프를 향해 내밀었다.

    [마지막으로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폐하와 단둘이 이야기할 기회를 주시겠습니까? 폐하의 여동생이자 과거 카마르 제국의 황녀로서 드리는 마지막 부탁입니다.]

    패색이 짙은 상황에서 꺼내 보일 수 있는 마지막 카드. 어떻게든 자신의 눈을 속여 보려는 수작임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폐하. 공격 명령을 내려 주시면.”

    “모두 대기해.”

    베르나와의 악연을 확실히 끊어내리라 다짐했었다. 그녀는 절대 자신을 향한 자격지심과 열등감을 극복해내지 못할 것이고, 성공할 때까지 끊임없이 제 목숨을 노릴 것이다.

    그녀의 존재에 늘 촉각을 기울이면서도 그녀를 없앨 생각은 하지 못했던 이유는, 아마 가슴 한구석 미약하게 자리한 미안함 때문이었다. 그녀의 말대로, 황제의 자리는 마땅히 황실 적통이 차지했어야 할 자리였으니까.

    선두에 있던 적군의 군함에 하늘색 깃발이 걸렸다. 항복이 아닌, 잠시 휴전을 요청하는 깃발을 바라보던 필리프가 사격 중지를 알렸다.

    “소형 선박을 준비해.”

    “알겠습니다, 폐하.”

    카마르 제국 곳곳에 자신의 눈과 귀가 되어줄 첩자를 심어놓은 베르나였다. 안나와 아이의 존재가 그녀의 귀에 들어간다면? 베르나의 칼날이 언제라도 안나와 아이를 향해 그 방향을 바꿀 수 있었다. 단호한 결단을 내릴 시간이었다.

    “폐하를 호위하라!”

    필리프가 몸을 실은 선박이 적군과 아군이 대치하고 있는 중앙으로 이동했고, 베르나를 태운 선박 역시 같은 곳을 향했다. 두 사람이 타고 있는 배 뒤로 각각 두 척의 배가 뒤따랐다. 혹시 모를 기습 공격에 대비해 배에 탄 군사들이 공격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갑옷과 무기를 갖춘 각국의 군사가 번갈아 필리프와 베르나가 있는 배에 탑승했다. 배에 폭발물을 비롯한 위험 물질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두 척의 배가 조금 더 가깝게 맞닿았다.

    서서히 날이 지기 시작했다. 조금씩 제 존재를 드러내는 푸르스름한 달빛과 검은 어둠이 섞여, 필리프와 베르나의 얼굴에 얼룩진 음영을 그렸다. 선박에 몸을 실은 두 사람이 말없이 서로의 얼굴을 응시했다. 칼날 같은 정적을 깨고 입을 연 이는 필리프였다.

    “그래. 그대의 마지막 부탁이 무엇인지 들어주지.”

    차갑게 떨어지는 필리프의 말투에는 조금의 온기도 실려있지 않았다.

    “상황을 보니, 이번 전쟁도 승리하실 것 같군요.”

    “지금이라도 항복을 선언한다면, 최소한 남은 군사들의 희생은 막을 수 있게 되겠지.”

    “폐하가 저였다면, 지금 항복을 선언하셨겠습니까?”

    “내가 그대였다면, 자신이 태어난 조국을 침략하려는 계획 따위 애초에 세우지 않았을 거야.”

    비웃음이 실린 무덤덤한 음성을 뱉은 필리프의 시선에는 짜증이 역력히 실려있었다.

    “검은 머리를 한 여자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절대 동요하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 필리프가 미간에 바짝 힘을 주었다.

    “그래서?”

    “신기하지요? 폐하의 표정이, 마치 제가 안나 스완에 대해 말씀을 드렸을 때와 너무도 비슷한 것이.”

    베르나의 표정이 말하고 있었다. 지금 전쟁에서 패배하더라도, 절대로 자신과 자신이 사랑하는 이들에 대한 공격을 멈추지 않겠다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