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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나의 시간이 만나는 순간 (41)화 (41/139)
  • 41화

    마음이 급해진 안나가 황궁 복도를 내달리기 시작했다. 먼저 그의 얼굴을 보며 확인해야 할 것이 있었다.

    “무슨 일이냐.”

    황제의 집무실이 있는 복도에 들어서자마자 문 앞을 지키고 있던 호위병들이 안나의 앞을 가로막았다. 안나가 답 없이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오는 집무실 문을 응시했다.

    “무슨 일인지 물었다!”

    호위병이 안나에게로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서며 윽박지르듯 물었다.

    “저…….”

    뒤를 생각하지 않고 무작정 그를 찾은 것이 잘못이었다. 안나가 빠르게 머리를 굴렸지만, 상황에 맞는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자신을 내려다보던 호위병의 얼굴이 점점 험상궂게 변해가는 것이 보였다.

    아, 어쩌나. 이대로 그냥 다시 돌아가야 하나.

    “무슨 일인가.”

    그대로 등을 돌릴 수도, 무작정 황제를 만나겠다고 알현을 청할 수도 없어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데, 필리프의 수석 수행원이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두꺼운 서류철을 쥔 그가 호위병과 안나 사이를 파고들었다.

    “아, 안녕하십니까.”

    익숙한 얼굴을 마주한 안나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무슨 일이지?”

    수행원이 웃음기 하나 없는 건조한 소리로 물었다. 다시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무는데, 그 순간 필리프가 제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누구라도 네게 해가 될 것 같은 행동을 한다면 즉시 나를 찾아오도록 해.’

    그래. 주눅 들 이유가 없어. 그가 수행원에게 분명 말을 전했을 거야. 당당하게 허리를 편 안나가 수행원과 눈을 맞추며 입을 열었다.

    “저, 폐하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혹시 지금 바쁘시지 않다면, 잠시 뵙고 이야기를 드리고 싶습니다. 청을 거절하시면 바로 돌아가겠습니다.”

    안나의 이야기를 들은 수행원이 문 앞을 지키고 있던 호위병들과 짧게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문을 두드리고 집무실 안으로 들어간 그가 얼마 지나지 않아 문밖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들여보내게.”

    깊게 심호흡한 안나가 열린 문틈 사이로 들어섰다. 널찍한 가죽 소파 등받이에 기대앉아 있던 필리프가 안나의 얼굴을 보는 순간 바로 몸을 일으켰다.

    “폐하를 뵈…….”

    인사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가 안나의 턱 끝을 들어 눈을 맞추게 했다.

    “신기한 일인데? 안 그래도 너를 부르려던 참이었는데 말이야.”

    “폐하.”

    부드러운 미소가 걸려있는 그의 얼굴을 보니 막상 꺼내 놓으려 했던 수많은 질문이 머릿속에서 한꺼번에 전부 사그라들었다. 정말이지, 눈부시게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저, 폐하.”

    “회의 전에 잠시 시간이 남을 것 같아서.”

    필리프의 목소리 톤이 미묘하게 변해 있었다. 뻐끔거리는 안나의 입가로 손을 뻗은 그가 그녀의 입술을 느리게 문질렀다. 벌어졌던 입술이 그대로 스르르 다물렸다.

    “얼굴색이 좋지 않은데, 혹시 아직 다리가 불편한 건가?”

    “아… 저기…….”

    일부로 이러는 것이 틀림없었다. 귓가에 차곡차곡 고이는 낮은 목소리에, 입안이 바짝 마르는 것을 느꼈다.

    “눈은, 감는 것이 좋겠지?”

    안나의 입가를 매만지던 손끝이, 발개진 그녀의 눈가로 옮겨졌다. 성큼 다가온 얼굴을 응시하다가 눈을 둘 곳을 찾지 못해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이성이 소멸해 버리기 일보 직전이었지만, 안나가 남은 힘을 쥐어짜며 입을 열었다.

    “저, 폐하. 드릴 말씀이.”

    익숙한 온기가 벌어진 입술 틈을 망설임 없이 헤집고 들어왔다. 내내 긴장하고 있던 몸에서 순간적으로 힘이 빠졌지만, 필리프가 안나의 허리를 고쳐 안으며 그녀를 바짝 품 안에 가두었다.

    아니, 저는 이러려고 온 것이 아닌데요.

    아무 생각 없이 그가 주는 열기에 몸을 맡기고 싶은 생각과 선택의 시간을 더는 늦출 수 없다는 생각이 치열하게 격돌했다.

    “흐읏!”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이 못마땅한 듯, 필리프가 입 안 깊숙이 혀를 들이밀었다. 갈 곳을 찾지 못해 방황하는 안나의 혀를 그가 이로 가볍게 무는 순간, 목에서 절로 우는 소리가 흘렀다. 더는 다른 생각을 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느끼며 얽어 오는 혀를 서툴게 빨고 핥았다.

    커다란 손이 안나의 얼굴을 감싸고 볼을 느리게 쓰다듬었다. 고개를 튼 그가 입술을 틈 없이 포개고 반사적으로 벌어지는 입술 사이로 혀를 깊게 밀어 넣었다. 혀끝이 닿고 비벼지는 순간, 정신이 아득해지며 머릿속 생각이 흩어졌다.

    조금의 틈도 없이 맞닿아 있던 입술이 질척이는 소리를 내며 떨어져 나가고, 커다란 그의 몸이 안나에게로 바짝 기울어졌다. 그녀의 등이 딱딱한 벽에 닿는 순간, 그가 입을 맞춘 채로 그녀의 몸을 공중으로 들어 올렸다.

    “하아…….”

    졸지에 몸이 공중으로 솟아올라 그의 얼굴을 내려다볼 수 있게 되었다. 머리 반 개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그의 얼굴이 마치 처음 본 것처럼 생경했다.

    “너와 함께 마시려고 준비한 술이 있는데, 한잔하겠어?”

    여전히 열에 들떠 가쁜 호흡을 내뱉는 안나를 바라보던 필리프가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간지럽게 닿아오는 숨결에 도저히 거절의 말을 뱉을 수가 없었다. 침묵을 긍정으로 해석한 그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안나의 몸을 안은 채로 발을 떼어낸 필리프가 커다란 안락의자에 그녀를 앉히며 뒤돌아섰다. 그가 안나의 손에 술을 가득 채운 잔을 쥐여 준 후에야 반쯤 나가 있던 정신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향이 훌륭하니 먼저 향을 맡아 봐.”

    기다란 손으로 잡은 잔을 빙그르르 돌린 그가 술로 입술을 적셨다. 잡은 잔을 그대로 테이블에 내려놓은 안나가 그를 찾은 용건을 꺼내 놓았다.

    “폐하. 제가 오늘 폐하를 찾은 이유는.”

    진지한 안나의 표정을 읽은 필리프가 느슨하게 풀어져 있던 상체를 세웠다.

    “저는… 사실 저는…….”

    만일 사실을 전부 털어놓는다면, 그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정신이 나간 여자라고 생각하진 않을까? 그 차갑던 눈동자에 얼마 전부터 따뜻함이 섞이기 시작했는데, 다시는 그 다정한 눈빛을 받지 못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왜. 무슨 말이든 해 봐.”

    말없이 안나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던 필리프가 그녀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손끝에서 다정함이 담뿍 묻어났다. 안나가 망설임에 달싹이던 입술 사이로 말을 뱉었다.

    “제가 어떤 모습이라도, 만일 폐하께서 생각하는 모습과 전혀 다른 사람이라도… 괜찮을지 모르겠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지?”

    핵심이 죄 빠져 있는 말을 그가 전부 이해해 주리라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확인 받고 싶었다. 그의 가슴 한쪽에 작게 자리한 사람이 서안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말해주길 바랐다. 확신이 필요했다. 원래의 삶을 전부 놓을 수 있게 할 확신이.

    “제 외모가 이렇지 예쁘지 않고, 나이가 지금처럼 어리지도 않고 또 이렇게 날씬하지 않아도. 그래도.”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필리프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이제껏 본 적 중에서도 가장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지금 뭘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가 어떤 말을 뱉을지 예상되지 않아 도저히 그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입술을 깨문 안나가 발치로 떨어뜨렸던 시선을 올리지 못하는데, 필리프가 상체를 낮춰 기어이 시선을 마주해왔다.

    “설마 내가 너를 찾는 이유가, 네가 예쁘고 나이가 젊고 날씬해서라고 생각하는 거야?”

    “…….”

    “엄청난 자신감이군.”

    “…예?”

    안나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마를 짚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필리프가 안나의 코끝을 가볍게 꼬집었다.

    “연회에 가면 보게 되겠지. 너보다 예쁘고, 더 어리고, 훨씬 몸매가 좋은 여자들이 내 눈에 띄기 위해 발악을 하는 모습을.”

    하긴. 황궁에서 몇 번 마주친 귀족 자제 중 외모가 특히 뛰어난 여성을 종종 보긴 했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대놓고 비교를 하시면!

    “네 겉모습 때문에 너를 원하는 것이 아니란 말이야.”

    필리프가 안나의 정수리부터 뺨, 허리 그리고 허벅지를 차례로 쓸어내리며 말을 이었다.

    “할 말이 더 남았어?”

    안나가 미묘한 표정으로 웃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럼, 앞으로 저는 어떻게 되는 건지 궁금합니다.”

    비겁하다고, 속물이라고 욕한다 해도 하는 수 없었다. 원래의 삶을 포기하고 이 삶을 선택한다면, 어떤 삶이 보장되어 있을지 알고 싶었다.

    “무슨 말이 듣고 싶은지는 알겠지만, 지금 당장은 그 무엇도 확신할 수 없어.”

    “…….”

    “알다시피 너와 나는 처한 환경이 다르니, 너를 마음에 품고 있다고 해도 너를 바로 황후에 자리에 앉히는 건 불가능해.”

    고개를 끄덕이는 안나를 보며 필리프가 눈을 둥글게 휘어 웃었다.

    “확실한 건, 너를 늘 내 곁에 두고 싶은 마음뿐이라는 거지.”

    다정한 그의 말이 귓속을 파고들어 심장에 꽂혔다. 심장 근처가 뜨끈해지고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필리프가 안나를 향해 완전히 몸을 돌리며 물었다.

    “이제 질문은 끝난 건가?”

    끄덕끄덕. 목소리가 나오지 않을 것 같아 살짝 고개를 끄덕이니, 그가 웃으며 테이블에 내려놓았던 술잔을 다시 안나의 손에 쥐여 주었다.

    “자, 이제 마셔 봐. 분명 좋아할 테니.”

    “…감사합니다.”

    확실하게 길을 정해야 할 시간이었다. 단지 사랑에 눈이 멀어 어리석은 선택을 하는 것이 아니라고 믿고 싶었다. 진정으로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을 선택하는 것이 옳은 일이라 되뇌었다.

    “그렇게 벌컥벌컥 마시다가 또 기절해 버리려고?”

    “아, 아닙니다! 그때는 몸이 좋지 않아서.”

    “뭐. 이제는 기절하더라도 곱게 돌려보내지는 않을 테니까.”

    방향을 찾은 다음 할 수 있는 일은 앞으로 나아가는 것뿐이었다. 가보지 않은 길이라 두려운 사람은 비단 자신만이 아닐 테니, 모든 것을 잃을 각오로 부딪혀보기로 했다.

    “이제 돌아가겠습니다. 괜히 폐하의 시간을 뺏은 것 같아 죄송합니다.”

    느리게 고개를 저은 필리프가 그녀의 잔에 술을 채우며 답했다.

    “너와 술 한잔할 시간이 없는 것은 아니니 신경 쓸 것 없어.”

    언젠가 누구를 진심으로 좋아하게 되면, 그 사람도 같은 크기로 자신을 좋아해 주길 바랐다. 그저 평범하게 함께 밥을 먹고 일상을 이야기하고, 하루의 시작과 끝을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랐다.

    “회의에 가기 싫어지는데,”

    필리프가 책상에 놓인 두꺼운 서류철을 한쪽으로 밀며 말했다. 평소답지 않은 그의 태도에 안나의 입에서 어이없는 웃음이 흘렀다.

    “폐하.”

    “아무래도 안 되겠어. 오늘 저녁 간단한 음식을 준비하라고 할 테니, 침실로 오도록 해. 음식은 아무거나 상관없으니 대충 만들어 와.”

    이번에는 소리 내어 웃은 것 같다. 세상을 전부 가진 특별한 남자의 두 눈 가득, 자신만이 담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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