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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나의 시간이 만나는 순간 (40)화 (40/139)
  • 40화

    “어때, 음식은 입에 맞는가?”

    연회를 위해 준비한 음식을 최종적으로 평가받는 자리였다. 연회장 가운데 차려진 커다란 대리석 테이블은 화려한 음식 접시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준비를 열심히 한 것 같은데요?”

    연회장 천장 높이 매달린 샹들리에 불빛에 비친 식기가 번쩍거렸다. 알맞게 익은 송아지 고기를 잘게 잘라 입에 넣은 베르나가 입가에 은은한 미소를 걸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음식이 있으면 이야기해. 바로 바꾸라고 할 테니.”

    필리프가 베르나의 접시 가까이 양고기 커틀릿 접시를 밀어주며 말했다. 너그러운 말투였다. 냅킨으로 입가를 닦은 베르나가 필리프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감사합니다, 폐하. 천천히 맛본 후 말씀드리겠습니다.”

    꼴 보기 싫은 동생이 황궁을 떠난다니, 아주 신이 나는 모양이지?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음식을 맛보는 필리프의 얼굴을 흘끔 바라본 베르나가 비소를 머금었다.

    “대공께서 내일 제국에 도착하신다고 합니다.”

    “음. 대공을 맞이할 준비는 해 놓았으니 걱정할 것 없어.”

    “예.”

    말없이 음식을 맛보던 베르나가 이제 막 생각났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포크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아, 수확제 때 황궁을 나가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필리프를 감시하고자 붙여 놓은 끄나풀은 모두 발각되었지만, 그에 대한 감시의 끈을 아예 놓아 버린 것은 아니었다. 베르나는 황궁 문지기를 통해 황제의 외출 사실을 알게 되었고, 은밀한 동석자의 정체를 확인했다.

    황제와 황궁을 나선 이를 확인한 순간 바로 안나 스완을 불러들일까 생각했던 베르나였지만, 아직은 그녀를 철저히 감시한다는 느낌을 받게 할 때가 아니었다.

    “외출할 일이 있어서.”

    더 대화를 이어나가길 원치 않는 듯 짧게 끊어 답한 필리프가 과실주 잔을 들어 입술을 적셨다. 필리프의 표정을 확인한 베르나가 바로 화제를 돌렸다.

    “양고기 커틀릿 맛이 훌륭하군요. 이 요리를 메인으로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베르나의 말에 동의하듯 필리프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주방 시종들 요리 실력이 나날이 좋아지는 것 같습니다.”

    이번에는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주방 시종의 이야기를 꺼내는 순간 확연하게 달라지는 필리프의 표정을.

    “황녀를 위한 연회 음식이니, 평소보다 더 신경을 쓰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필리프가 낮고 침착한 목소리로 답했다. 베르나 이야기의 방향은 처음부터 충분히 짐작 가능한 것이었다. 불필요한 소모전으로 괜히 기운을 낭비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면 하지. 용건을 꺼내 놓기 전 주변을 빙빙 도는 대화법은 서로를 피로하게 할 뿐이니.”

    “제가 어찌 황제 폐하께 궁금한 것을 전부 여쭐 수 있겠습니까.”

    베르나가 당치도 않은 말을 한다는 듯 고개를 살짝 저어 보였다. 웃기지도 않는 연기를 지켜봐야 한다는 것에 기가 찼지만, 곧 떠날 이에게 잠시 장단을 맞춰 주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답할 만한 것이라면 대답해 줄 테니 말해 봐.”

    앞접시를 멀찌감치 밀어놓은 베르나가 필리프를 향해 등을 틀었다. 어차피 음식 따위를 제대로 맛보기 위해 이 자리에 나온 것이 아니었다.

    “황궁에 조금씩 소문이 퍼지고 있습니다.”

    분명 주변에 듣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목소리를 낮추는 꼴이 우스웠지만, 필리프는 표정 변화 없이 그녀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황궁 시종과의 소문 말입니다.”

    “그게 왜.”

    “…예?”

    아무런 타격도 받지 않은 듯 심드렁한 태도였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그의 태도에 놀란 베르나가 벌어졌던 입을 다물었다.

    “나와 황궁 시종과의 사이를 의심하는 소문이 퍼지고 있다는 말이지?”

    차마 답을 하지 못한 베르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바람 빠진 웃음을 뱉은 필리프가 과실주 잔을 깨끗하게 비워 냈다.

    “틀린 말이야.”

    필리프가 베르나와 똑바로 시선을 맞추었다.

    “소문이 아닌, 사실이거든.”

    “…예?”

    뭐야. 진심으로 그 여자를 좋아하고 있다는 이야기야? 충격으로 멈춘 머리가 삐걱대며 굴러갔다. 필리프의 입가에서 새어 나오는 미소를 확인한 베르나가 바로 표정을 고쳤다.

    “폐하.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말 그대로. 나와 안나 스완 사이를 의심하며 감시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야. 내가 그녀를 마음에 품은 것이 사실이니.”

    이 냉혈한 같은 남자가 여자를 마음에 품다니, 그것도 한낱 주방 시종 따위를.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이야기의 전개였다.

    “그러니까.”

    필리프가 의자 등받이에 기대고 있던 등을 꼿꼿이 세우며 말을 이었다.

    “더는 관여하지 마. 나와 그 여자의 일에.”

    “폐하, 하지만.”

    “그 여자를 건드릴 생각도 하지 말고.”

    사나운 눈빛을 읽은 베르나가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그의 말이 진심임을 확인할 수 있었지만, 아직 확인해야 할 것이 있었다.

    “그 시종과 황궁 소속 기사 사이의 염문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베르나가 오라비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듯한 동생의 표정을 꾸며냈다.

    “그거야말로 소문일 뿐이지.”

    예상했던 것보다 빠르게 간단한 답이 돌아왔다. 뭐야, 이거 진짜잖아? 어떻게 구워삶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고단수인 여자인데?

    단호하게 황제의 마음을 사로잡겠다고 말하던 안나 스완의 얼굴을 떠올린 베르나의 입가에서 낮은 감탄사가 흘렀다.

    그래. 황궁 시종과의 염문을 반길 귀족과 대신은 단 한 명도 없을 테니, 자신에게는 확실히 득이 될 이야기였다. 그렇다면 이 남자와의 용건은 여기서 끝, 이 남자의 마음을 사로잡은 안나를 확실한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급선무였다.

    “저는 그저 폐하가 걱정되어 드린 말이었습니다. 너무 괘념치 마십시오.”

    나붓하게 말한 베르나가 다시 음식 접시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남은 용건을 최대한 빠르게 마무리해야 했다.

    “메인 요리는 전부 훌륭한 것 같으니, 이제 디저트를 맛보아도 되겠습니까?”

    * * *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팠다. 벌써 몇 시간째 이어지는 지독한 두통에 제대로 눈을 뜨는 것마저 힘겹게 느껴졌다.

    “안나. 너 정말 괜찮아? 혹시 그때처럼 몸이 안 좋아진 거 아냐?”

    걱정을 가득 담은 마샤의 목소리를 듣고도 차마 괜찮다는 말을 뱉을 수가 없었다. 간신히 고개를 들어 올렸지만, 마샤의 얼굴이 흐릿하게 보였다.

    “안나! 아니, 왜 이렇게 땀을 흘려! 안 되겠다, 잠시만 기다려! 내가 사람을 좀 불러올게.”

    지금 네 삶은 네 것이 아니야. 다른 사람의 삶을, 함부로 욕심내서는 안 돼.

    목소리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반복해서 울려댔다. 비틀비틀 몸을 일으킨 안나가 통로 안쪽으로 비켜서는데, 커다란 장식품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똑똑히 시야에 들어왔다.

    스물 남짓의 서양 여자. 얼굴도 나이도 원래 자신과는 너무도 다른 지금의 모습이 어째서 지금에 와서야 이토록 또렷이 보이는 것일까. 다른 사람의 몸을 빌려 제 의지로 살아간다는 것이 애초부터 가능한 이야기였을까?

    불에 태워 재가 되는 것을 분명히 확인했지만, 수첩은 다시 제 눈앞에 나타났다. 그러니까, 확실한 경고의 의미였다. 지금 이 몸은 네 것이 아니니, 절대 네 의지대로 행동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계속해서 안나를 괴롭히던 목소리가 사라지고, 어지럽던 머릿속이 순식간에 차분하게 정리되는 느낌이 들었다. 안나가 천천히 눈꺼풀을 내리감았다. 시야에 두 갈래의 길이 보였다.

    길의 끝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희뿌연 안개가 낀 길 끝을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천천히 발을 떼어냈다.

    선택의 순간이 목전으로 다가왔음이 느껴졌다. 길이 갈라지는 지점에 멈춰선 안나가 다시 한번 두 개의 길 끝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자욱한 안개가 걷히고 길 끝에 서 있는 두 사람의 인영이 보이기 시작했다.

    한쪽에는 필리프, 다른 쪽에는 원래 본인의 모습이 보였다.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자신을 향해 손을 뻗는 필리프에게 달려가고 싶었지만, 발이 쉽게 내디뎌지질 않았다. 다른 한쪽에 서 있는 원래의 삶을 버릴 자신이 없었다.

    어차피 돌아가 봤자 구질구질한 삶일 뿐이야. 아무도 너를 사랑해주지 않고, 신경 쓰지 않잖아. 그곳에서 너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지만 이쪽을 봐. 이렇게나 멋진 남자가 네게로 손을 뻗고 있어. 잘 생각해봐. 정말 저 손을 잡지 않을 거야?

    이건 네 삶이 아니야. 누군가가 계획해 놓은 삶을, 의지 없이 살아가고 싶은 거야? 점점 네 영혼을 갉아먹고 결국에는 네 육신마저 차지하려 들 거야. 저 남자? 정말 저 남자가 사랑하는 사람이 너라고 생각해? 아니. 저 남자가 사랑하는 사람은 안나 스완이야. 서안나가 아니라고.

    오른쪽과 왼쪽. 각각의 귓가에 속삭이던 목소리가 하나로 합쳐졌다.

    그러니까, 네가 진짜 원하는 길이 어디야?

    번쩍. 감고 있던 눈을 뜬 안나가 방금 들은 질문을 천천히 읊조렸다.

    “내가… 진짜 원하는 길…….”

    분명 돌아가려 했다. 서안나의 삶을 되찾기 위해 이 세계에 적응하려 한 것일 뿐이었다. 이 세계에서 살아남으면 언젠간 다시 본래의 삶으로 돌아갈 기회를 찾게 되리라 막연하게 생각했다.

    ‘그냥 너를 내 곁에 두고 싶었다는 뜻이 되겠지.’

    그의 곁에 머물고 싶다는 욕심이 생기면서, 돌아가고자 했던 원래의 삶이 조금씩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어쩌면 지금 이대로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좋아하는 요리를 하고, 누구보다 특별한 사람의 관심을 받을 수 있는 안나 스완으로서의 삶이.

    다시 천천히 눈을 감은 안나가 들려오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니까, 네가 진짜 원하는 길이 어디야?

    묻고, 또 되물었다. 여전히 쉽게 걸음을 떼어내지 못하는데 그 순간 평평했던 발밑이 조금씩 잠겨 오기 시작했다. 빨리 벗어나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제 몸뚱어리 전체를 삼켜 버릴 것만 같은 깊은 늪이 선택을 재촉하고 있었다.

    “안나, 너 괜찮은 거야?”

    “안나. 일단 주방장님을 모셔왔어. 자, 이쪽으로 손을 좀 뻗어 봐.”

    통로 구석에 서서 부들부들 몸을 떠는 안나의 모습을 지켜보던 카라나와 마샤가 안나의 어깨로 손을 뻗었다. 힘을 주어 안나의 몸을 당기는데, 빳빳하게 굳은 몸이 꼼짝을 하지 않았다.

    “그때와 같구나. 아직 몸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것 같은데.”

    “주, 주방장님! 빠, 빨리 사람을 더 불러와야 할 것 같아요.”

    마샤가 울먹거리며 자리를 뜨려는 순간, 안나가 감고 있던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안나! 너 괜찮아?”

    “마샤.”

    “어서 숙소로 가서 누워야 하겠어. 움직일 수는 있겠어?”

    “나, 만나야 할 사람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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