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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나의 시간이 만나는 순간 (31)화 (31/139)
  • 31화

    이상하다, 정말.

    혼잣말을 중얼거린 안나가 들고 있던 수첩을 펼쳤다 닫기를 반복했다. 기대와는 달리 수첩에는 그 어떤 글자도 적혀 있지 않았다. 수첩을 오랜만에 펼쳐 보기로 한 것은 필리프가 제게 했던 말 때문이었다.

    분명 수확제 전에 함께 다녀올 곳이 있다고 했었는데. 사람을 보낼 테니 기다리라고 했잖아. 계획이 변경된 건가? 그럼 그렇다고 말이라도 해줬으면 좋잖아. 뭐, 공사다망한 황제의 자리에 있는 사람이니 이해는 되긴 하다만.

    수확제를 고작 하루 앞둔 오후의 황궁 주방 풍경은 고요했다. 황제는 지방 영주들을 방문한다는 이유로 수일 째 황궁에서 식사하지 않고 있었고, 이에 주방 시종들 대부분은 수확제 음식 준비에 포함되었다.

    “자, 안나 너는 고기 손질을 맡도록 해라.”

    “예, 주방장님.”

    황궁 음식 창고에 저장된 식자재를 남김없이 사용하라는 황제의 명이 떨어졌다. 황제의 식탁에 오를 음식을 준비할 때처럼 정성을 쏟는 요리를 만들 필요는 없었지만, 수없이 많은 재료를 손질하고 또 손질해야 했다.

    “안나. 다 했으면 고기를 옮겨라. 자, 이 통에 담아서.”

    “예.”

    고기 손질을 마치자마자 고기 굽는 것을 도와야 했다. 다양한 종류의 고기를 굽고 또 구웠다. 연기에 그대로 질식해버리기 일보 직전이었다. 마지막으로 남은 메추라기를 구운 안나가 참고 있던 기침을 토해내며 가마에서 몸을 물렸다.

    “아, 죽겠네.”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지만, 숯덩이가 잔뜩 묻은 손으로 닦아낼 수가 없었다. 그대로 고개를 바닥에 떨구고 매운 눈물을 흘리고 있는데, 누군가 자신의 앞에 검은 그림자를 새겼다. 아, 느낌이 좋지 않은데.

    “야, 너!”

    슬픈 예감은 왜 한 번도 틀린 적이 없는 것일까. 목소리만으로 소름 끼치는 불쾌감이 느껴졌다.

    “왜. 뭐 할 말 있어?”

    눈물에 시야가 흐릿한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카밀라에게서 바로 시선을 돌린 안나가 사용한 나뭇가지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야, 내가 말 하는 중이잖아!”

    나뭇가지를 줍는 안나의 손목을 힘주어 낚아챈 카밀라가 억지로 자신과 시선을 맞추게 했다.

    “이거, 얼굴이 꽤 볼 만하잖아? 이런 모습이라면 폐하께서 차마 거들떠볼 생각을 안 하셨을 텐데.”

    카밀라는 굉장히 쉽게 속내를 파악할 수 있는 인간이었다. 전형적인 강약약강. 자신보다 약하다고 생각하는 이를 밟고 올라섰을 때 희열을 느끼는 인간. 그래, 학창 시절에 돈 없고 빽 없다고 왕따시키던 주동자들이 대부분 이런 유형이었어.

    “이거 좀 놓고 말해.”

    안나가 잡힌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 절대적으로 보여 줄 필요가 있었다. 나는 너보다 약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아, 그래. 네가 헛소문을 퍼뜨리고 다닌다지? 내가 황제 폐하의 눈에 띄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고? 그리고 뭐? 밀회를 즐겼다고?”

    순간적으로 당황한 카밀라가 마주하고 있던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네까짓 게, 감히 황제 폐하의 마음에 찰 수 있을 것 같아?”

    “내가 궁금한 게 있는데 말이지.”

    살짝 몸을 물린 카밀라를 향해 한 발 가까이 다가선 안나가 주변을 돌아보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설마 본 거야? 나랑 폐하가 밀회를 즐기는 모습을?”

    “…뭐, 뭐라고?”

    “잘 생각하고 대답해야 할 거야. 만약 보지 않고 그런 말을 했다면 넌 네가 스스로 헛소문을 퍼뜨렸음을 인정하게 되는 거고, 실제로 본 것을 말했다면.”

    잠시 말을 멈춘 안나가 머릿속으로 빠르게 해야 할 말을 정리했다.

    “너는 절대 발을 들여서는 안 될 곳에 몰래 숨어들었다는 말이 되니까.”

    “…….”

    “말해 봐. 어느 쪽이야?”

    카밀라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카밀라는 곧 베르나 황녀와 황궁을 떠날 인물이었다. 소문을 퍼뜨린 것이 베르나의 지시인지 스스로 꾸민 일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키스 장면을 실제로 목격하지 못한 것은 확실했다. 황궁 중앙 정원은 시종들의 출입이 엄격히 금지된 곳이었기 때문이다.

    “너!”

    “곧 황궁을 떠난다는 건 알고 있지만, 그때까지는 해야 할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 아닌가? 아직 주방에 손질해야 할 재료가 산더미야. 더 할 말 없으면 난 이만 돌아가 볼게.”

    모아놓은 나뭇가지를 커다란 소쿠리에 옮겨 담은 안나가 카밀라를 지나쳤다. 울분을 삼키는지 카밀라의 등이 잘게 떨리는 것이 보였다.

    “너! 멋대로 행동하면 곤란해질 거야.”

    “뭐?”

    “황녀님이 어떤 분인지 잊은 건 아니겠지?”

    잠시 발을 멈춘 안나에게로 빠르게 다가온 카밀라의 얼굴에 처음과 같은 의기양양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아, 잊은 거야? 그럼 다시 한번 똑똑히 말해 줄게.”

    고개를 튼 카밀라가 안나의 귓가에 속삭였다.

    “행동을 조심하지 않으면, 너도 곧 네 언니의 곁으로 가게 될 거란 말이야.”

    카밀라의 말을 듣는 순간 강한 확신이 들었다. 안나의 언니와 베르나 황녀가 깊게 연관된 것이 분명하다. 그럼 그녀의 죽음과도?

    “조만간 황녀님께서 너를 찾으실 거야. 그때도 부디 이렇게 뻣뻣한 태도를 유지하길 바랄게.”

    거드름을 피우듯 말끝을 길게 늘인 카밀라가 안나에게서 등을 돌렸다. 안나가 잠시 그 자리에 멈춰서 머릿속 생각을 정리했다.

    안나 언니의 죽음과 베르나 황녀가 깊게 관련되어 있고, 원래 이 몸의 주인이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면? 회복하지 못할 병에 걸린 것이라 확신한 황녀가 잠시 관심을 돌린 사이에, 자신이 이 아이의 몸에 빙의한 것이라면?

    그래서 황녀가 몇 번이고 언니에 관해 물은 것인지 모른다. 기억하는 것이 있는지 확인하려고. 의문 몇 개가 해소된 것 같았지만, 머릿속은 점점 복잡하게 엉켰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 * *

    ‘황궁 주방 시녀로 일하고 있는, 안나 스완입니다.’

    궐련 갑을 꺼내든 필리프가 케이든이 뱉었던 말을 떠올렸다.

    ‘안나 스완?’

    ‘예, 폐하. 그녀와 혼인하는 것이 제 유일한 소원입니다.’

    분명 연인이라 말했다. 케이든의 눈동자에 거짓은 섞여 있지 않았다. 정말 그렇다면, 그 말이 진실이라면.

    지방 영주 방문 일정을 수확제 이후로 미뤄 놓았던 필리프는 급히 계획을 변경했다. 미뤄 둔 일정을 앞당겨 처리하기로 한 뒤 바로 황궁을 벗어났다. 그녀에게서 그리고 그녀에게 과하게 끌리는 자신에게서 벗어나기 위함이었다.

    ‘신분은 다르지만, 저희 두 사람은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였습니다.’

    덧붙인 케이든의 말은 필리프의 이성을 끊어놓기 충분했다. 식사 자리는 어색하게 마무리되었고, 애써 표정을 숨긴 필리프는 생각해 보겠다는 말을 뱉고 빠르게 정찬실을 벗어났다.

    카마르 제국 내에서는 엄격한 신분제가 기본이 된 혼인이 주로 이루어지고 있었지만, 신분을 넘어서는 결혼이 금기시되는 것은 아니었다. 영주로부터 독립해 부를 쌓은 일반 서민과 권세를 잃은 귀족 간의 결혼이 암암리에 성사되고 있기도 했다.

    케이든과 안나의 결혼을 막을 명목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황궁에 발을 들여놓는 모든 시종이 처음 듣게 되는 말, 죽어 재가 될 때까지 황궁을 벗어날 수 없다는 선황이 만들어 놓은 율법이었다.

    “하. 꼴이 우습게 됐군.”

    필리프가 쓴웃음을 지으며 들고 있던 궐련 갑을 바닥에 내팽개쳤다. 자신의 앞에 서서 떨림을 숨기지 못하던 안나의 모습이, 모두 숙련된 연기였다는 말인가? 이 모든 것이 전부 자신의 마음을 사기 위한 연기였던 것인지 그녀에게 묻고 싶었지만, 망설임이 행동을 주저하게 했다.

    만일 그렇다면, 정말 그런 것이었다면.

    황제를 능욕했다는 이유로 그녀의 목을 내리치라 명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폐하. 마차가 준비되었습니다.”

    “하사품은 전부 전달했는가.”

    “예, 폐하.”

    “이만 돌아가지.”

    꾸역꾸역 미뤄 두었던 시간이 목전에 다가왔다. 마차에 올라타 긴 한숨을 내쉰 필리프가 변하는 차장 풍경을 감흥 없는 눈길로 바라보았다. 영지를 벗어난 마차가 제국 시내에 접어들고, 곧 번화가를 지나 황궁으로 향하는 큰길에 접어들었다.

    그래. 먼저 입을 열 기회 정도는 주는 편이 좋겠지.

    마차가 황궁 입구에 들어섰다. 짧게 고개를 끄덕인 필리프가 마차에서 내리며 황궁 건물 전체를 빠르게 훑었다.

    * * *

    베르나 황녀가 자신을 찾는다는 말에 안나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자신이 머릿속으로 정리한 생각과 카밀라의 경고가 뒤엉켜 커다란 산처럼 온몸을 짓누르는 느낌이었다.

    “지, 지금?”

    “응. 저번에 네가 했던 요리를 다시 드시고 싶다던데? 너 황녀님께 요리해 드렸어?”

    “어. 며칠 전에 언니가 했던 음식을 드시고 싶다고 하셔서.”

    “아, 맞아. 그 요리를 참 좋아하셨지. 매번 언니를 불러가셨잖아.”

    마샤가 무언가를 알고 있지 않을까? 하지만 괜히 마샤를 끌어들였다가 그녀까지 곤란해지게 할 순 없어. 그래. 베르나 황녀가 황궁을 떠날 때까지만 어떻게든 버텨보자. 설마 보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 황궁 내에서 무슨 짓을 하지는 않겠지.

    “난 그럼 다녀올게, 마샤.”

    “응, 다녀와.”

    주방을 나서자마자 복도 끝에 서 있던 황녀의 시종 세 명이 안나의 주위를 둘러쌌다. 지난번 별궁에 불려갈 때 제 등 뒤를 바짝 따라붙었던 이들이었다.

    “저… 황녀님은 어디에 계시나요?”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자신을 이끄는 시종들을 쫄래쫄래 따르던 안나가 우측에 선 시종을 슬쩍 돌아보며 물었다.

    “…….”

    “혹시 별궁으로 가시는 건가요?”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어차피 크게 기대했던 것도 아니었기에 안나가 조용히 벌렸던 입을 다물었다.

    어? 여기는 별궁으로 가는 길이 아니잖아. 다른 건 몰라도 길눈 하나만큼은 밝은 안나였기에, 한번 발을 들인 곳을 잊는 법이 없었다. 별궁으로 가기 위해서는 황궁 중앙 정원을 지나야 하는데, 정원을 바로 눈앞에 두고 앞선 시종이 향하는 방향을 바꾸었다.

    발을 바꾼 시종이 우측 복도 끝 가파른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계단을 오르니 좁고 기다란 복도가 보였는데, 흔한 샹들리에와 횃불도 찾아볼 수 없는 어두컴컴한 공간이었다.

    “내가 얼마 전에 재미난 말을 들었는데.”

    소리도 없이 등 뒤로 바짝 다가선 베르나가 안나의 어깨에 가볍게 손을 얹었다.

    “황, 황녀님을.”

    “예는 차릴 필요 없어.”

    베르나가 바로 고개를 숙이려는 안나의 턱을 억지로 잡아 올렸다. 그녀에게서 낯선 향이 풍겼다. 이제껏 단 한 번도 맡아 본 적 없었지만, 어쩐지 익숙하다고 생각되는 향이었다. 본능적으로 향을 기억하는 몸이 절로 뒷걸음질 쳤다.

    “앓기 전 상황을 전부 기억하지 못한다는 네 말을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야.”

    “…화, 황녀님!”

    안나의 턱을 쥔 베르나의 손에 힘이 실리고, 그녀의 얼굴이 안나를 향해 점점 가깝게 다가왔다.

    “난 그저 완벽한 마무리를 보려 하는 것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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