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과 나의 시간이 만나는 순간 (30)화 (30/139)
  • 30화

    축축하게 젖은 숲 한가운데 홀로 서 있었다. 안나가 바쁘게 다리를 움직이는데 튀어나온 돌부리에 발이 걸리고 말았다.

    ‘으악!’

    넘어지지 않으려 붙잡은 나뭇가지는 썩어 있었고, 공중으로 뜬 몸이 커다란 나무에 정면으로 부딪쳤다. 하염없이 비탈을 굴러도 몸이 멈추질 않았다. 썩은 나뭇가지와 군데군데 튀어나온 돌부리들이 몸 이곳저곳을 찌르고 할퀴어댔다.

    ‘아, 안 돼!’

    비탈이 끝나는 부분을 눈앞에 두고 어떻게든 살아보며 발버둥을 쳤지만, 속도를 이기지 못한 몸은 그대로 땅 밑으로 쑥 꺼지고 말았다. 관자놀이에 지독한 통증을 느낌과 동시에 사방이 지독한 어둠에 잠겨 들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 가장 먼저 느껴진 것은 공기 중에 풍기는 싸늘한 겨울 냄새였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눅눅한 여름 공기를 마셨던 것 같은데.

    ‘제대로 찾아왔구나.’

    낮게 울리는 목소리를 들은 안나가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사위는 여전한 어둠이었다. 너무 어두워서 자신이 눈을 뜨고 있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손을 들어 눈가를 비비고 다시 한번 소리가 들려오기를 기다렸다.

    ‘블루문. 이렇게 밝은 청회색 빛을 발하는 것은 오랜만에 보는군.’

    여전히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몸을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몽롱한 기분을 떨어내고자 고개를 좌우로 크게 흔든 안나가 어둠 속 작은 빛을 찾아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렸다.

    ‘무엇을 원해 나를 소환했지?’

    소환? 내가? 누구를?

    스르르. 천이 바닥을 스치는 듯한 소리가 들리고, 무언가가 바로 제 얼굴 앞으로 다가왔음이 느껴졌다. 분명 상대는 코끝까지 바짝 다가와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응당 느껴져야 할 사람의 체온과 호흡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복수를 원합니다.’

    분명 제 입으로 뱉은 말이었지만, 자신의 의지로 뱉은 말은 아니었다. 놀랄 겨를도 없이 안나의 입이 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가장 잔인한 방법을 통한 복수를.’

    ‘하지만 너도 알고 있지 않은가. 네 혼이 네 육신을 떠나기 직전이라는 사실을.’

    순식간에 시야가 밝아지며 눈앞에 있는 자의 정체가 드러났다. 커다란 동굴 안에는 눈이 가득 쌓여 있었고, 출처를 알 수 없는 어슴푸레한 빛이 쏟아지는 곳에 노인 한 명이 앉아 있었다.

    눈처럼 새하얀 머리카락이 바닥을 덮을 정도로 치렁치렁했고, 계절과는 어울리지 않는 얇은 천으로 간신히 몸의 중요 부위를 가리고 있었다.

    ‘다른 이의 혼을 사용한다고 하더라도 상관없습니다.’

    ‘네 개인적인 원한을 갚기 위해 다른 이의 혼을 멋대로 빌리자는 말인가?’

    ‘언제부터 그런 것을 신경 썼지? 대가를 지급하면 그만 아닌가?’

    노인이 쭈글쭈글한 입술 사이로 나직한 비웃음을 뱉었다.

    ‘그래. 나는 아무 상관없지. 그럼 한번 볼까? 네가 가지고 온 것을 먼저 확인하고 너를 도울지 결정하도록 하지.’

    안나가 내내 등 뒤에 감추고 있던 커다란 미색 보자기를 꺼내 들었다. 빠르게 보자기를 낚아챈 노인이 어슴푸레한 빛이 쏟아지는 곳으로 보자기를 던졌다.

    희미한 빛이 사라지는가 싶더니, 사위가 안개에 잠긴 듯 희뿌옇게 변했다. 사라진 노인을 찾아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는데, 안개가 사라진 자리에 열대여섯 정도로 보이는 소년이 자리하고 있었다.

    아니, 어떻게 이런…….

    소년이 기다란 수염에 손을 가져다 대자 수염 전체가 흰 먼지가 되어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깊은 주름이 파였던 얼굴은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는, 맑고 생기 있는 소년의 얼굴이 조금 더 자세히 보였다.

    ‘모서리 끝을 완성할 소지품은.’

    소년이 안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녀의 주머니에 있던 수첩과 그녀가 신고 있던 신발이 소년의 손으로 빨려 들어갔다.

    ‘억겁과 같은 시간의 흐름을 버티고 버터야 한다.’

    앉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소년이 매끄러운 자신의 피부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상황을 의심하지 말고, 시간의 변화에 쉽게 적응할 수 있는 유연함을 가진 사람이어야 할 것이다. 두고 온 삶에 큰 미련이 남지 않으려면, 적게 가지고 태어나 절대 많은 것을 가질 수 없는 삶이어야 하겠지.’

    후드득.

    갑자기 내리기 시작한 빗줄기가 동굴 안 눈을 녹이기 시작했다. 스산한 바람이 옷깃을 파고들기를 한참, 살을 에는 칼바람이 살갗을 찔러댔다.

    소년이 무언가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말소리를 조금 더 자세히 듣고 싶어 그에게 가까이 다가서려 했지만, 그 자리에 그대로 굳어버린 몸이 꼼짝을 하지 않았다.

    ‘편히 잠들거라. 너의 혼이 다시 불릴 때까지.’

    소년이 말을 뱉음과 동시에 안나의 두 눈이 감겼다. 검은 어둠 사이로 푸른 달이 빛났고, 달을 향해 날아오른 매 한 마리가 힘차게 날갯짓했다.

    “헉!”

    꿈이었나. 안나가 축축하게 젖은 침대 시트를 망연자실하게 내려다보았다. 지독하게도 생생한 꿈이었다. 자리하고 있던 곳의 공기와 냄새가 전부 생생하게 기억이 날 만큼. 분명 이 몸의 주인인 안나 스완이 겪었던 일이 확실하다.

    “안나. 뭐 안 좋은 꿈이라도 꿨어?”

    안나의 옆으로 다가온 마샤가 흐른 땀으로 축축해진 안나의 등허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물었다.

    “어. 너무 생생한데 기분 나쁜 꿈이었어.”

    “몇 번이나 깨웠는데 일어나지 않더라고. 어떤 꿈이었는데?”

    “그냥. 몰라, 뭔가 말이 안 되는 꿈이었어.”

    잠시 혼자 생각할 시간을 갖고 싶었지만, 주방으로 향해야 할 시간이었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안나가 빠르게 채비를 마쳤다.

    “그리고 안나. 카밀라 말은 너무 신경 쓰지 마. 곧 사그라들 소문이니까.”

    “어? 응, 알았어.”

    간밤 마샤에게 들은 이야기를 떠올린 안나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황제의 눈에 띄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으며, 며칠 전 사람들이 모두 잠든 깊은 밤 몰래 숙소를 빠져나가 황제와 밀회를 즐겼다는 이야기였다.

    “원래 헛소문 퍼뜨리는데 선수잖아. 이제 카밀라 말을 전부 믿는 사람도 없으니까 금방 잠잠해질 거야.”

    “그런데 마샤.”

    전부 헛소문이라 넘겨버리기에는 찜찜한 구석이 있었다. 사실 밀회라 일컬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일정 부분 황제와 얽히게 된 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나 사실 그, 있지.”

    “왜?”

    “그… 그게… 나 사실.”

    마샤에게 전부 털어놓아도 괜찮을지는 확신할 수 없었지만, 아무것도 이야기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화, 황제 폐하 말이야. 나 사실은.”

    그래. 일단 폐하에게 마음을 품고 있다는 정도로만 이야기하자. 굳이 입맞춤 이야기까지 할 필요는 없겠지.

    안나가 어렵게 입을 열려는 순간 마샤가 눈동자의 크기를 키우며 창문을 가리켰다.

    “저기 봐, 안나! 기사단 행렬이야.”

    마샤의 손가락이 가리킨 곳에 무리를 이뤄 황궁으로 진입하는 기사단 행렬이 보였고, 행렬 가장 앞에 선 익숙한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 * *

    “그대들의 공을 치하하는 의미로 마련한 자리이니, 마음껏 즐기고 마시도록 해.”

    “감사합니다, 폐하.”

    보통 황제의 직계가족만이 앉을 수 있는 황제의 전실 테이블에 기사단 열 명이 나란히 자리했다. 테이블 상석에 앉은 필리프가 준비된 그릇에 담긴 물로 손을 씻으며 고풍스러운 정찬 음식을 차근차근 살피기 시작했다.

    “이런 자리에 좋은 술이 빠질 수 없겠지. 자, 준비된 술을 내오도록.”

    “예, 폐하.”

    당도 높은 과실주를 시작으로 성대한 코스 요리가 차례차례 서빙되었다. 전채 요리는 싱싱한 샐러드와 송로버섯구이, 맑은 거북이 수프였다. 필리프가 신중하게 음식을 맛보며 어떤 음식에 안나의 손이 닿았을지 짐작해 보았다.

    아니, 이 음식은 그녀가 만들었다고 하기엔 잡다한 향신료가 너무 많이 쓰였어. 샐러드드레싱도 조금 특이하긴 하지만, 입에 익숙한 것을 보니 카라나의 솜씨가 확실한 것 같고.

    전채 요리에 이어 총 다섯 가지 종류의 고기 요리가 테이블에 놓였다. 화려한 접시를 훑던 필리프의 시선이 멈춘 곳은 토마토소스를 곁들인 양고기 커틀릿이었다.

    역시. 예상을 벗어나지 않아.

    양고기 커틀릿을 맛본 필리프의 입가에서 만족스러운 미소가 피어났다. 평소 익숙하게 맛보았던 토마토소스와는 확연하게 달랐다. 조금 더 매콤했지만, 토마토 본연의 향이 담뿍 묻어나는 맛이었다.

    음식을 먹는 순간 바로 안나의 얼굴이 떠올랐다. 만일 지금 이 음식을 만든 이를 불러오라 말한다면, 그녀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조마조마한 표정으로 제 반응을 기다리고 있을 그녀의 얼굴을 상상하지 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저릿함이 퍼지기 시작했다.

    “폐하. 지난번 말씀하신 국경 지역 수색대는 말씀하신 대로 재배치하였습니다.”

    “그래.”

    말없이 음식을 즐기는 필리프의 눈치를 살피던 기사 대장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평소에 주로 업무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식사 자리를 마련했던 황제가, 오늘따라 유독 음식에 집중하는 모습이 낯설게만 느껴졌다.

    “국경 지역의 총지휘는 케이든 아들레드가 맡기로 하였습니다.”

    포크를 테이블에 내려놓은 필리프가 기사 대장이 가리킨 이와 눈을 맞추었다.

    “그래. 이번에 자네의 역할이 대단했다고 들었어.”

    “아닙니다, 폐하. 저는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케이든은 국경 지역 내에서 끊이지 않은 도발을 일삼는 무리를 척결하는데 큰 공을 세우고 황제가 직접 선사하는 훈장을 받기로 되어 있었다. 케이든에게로 완전히 몸을 튼 필리프가 직접 그의 잔에 술을 채워 주었다.

    “조금만 늦게 발견했어도 우리 쪽 피해가 막심했을 거야. 공로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으니 지나친 겸손은 거두게.”

    “감사합니다, 폐하.”

    자리에서 일어서 두 손으로 잔을 받은 케이든이 황제를 향해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훈장은 직접적인 보상이 되지 않을 것 같은데, 혹시 필요한 것이 있으면 말해봐.”

    필요한 것. 케이든이 눈동자를 밝히며 황제와 눈을 맞추었다.

    “부담 없이 말해 봐. 들어줄 수 있는 범위 내에서는 최대한 들어줄 테니.”

    테이블에 내려놓았던 포크를 든 필리프가 반쯤 먹은 양고기 커틀릿으로 손을 뻗으며 말했다. 한시라도 빨리 이 지루한 대화와 식사 자리를 마무리 짓고, 핑곗거리를 만들어 안나의 얼굴을 마주하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제 결혼에 관한 이야기인데 괜찮겠습니까.”

    “결혼?”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이야기에 필리프의 고개가 들렸다.

    “예, 폐하. 한시라도 빨리 연인과 혼인을 치렀으면 하는 것이 제 유일한 소원입니다.”

    “연인과 혼인을 하는데, 굳이 내 허락은 필요 없을 것 같은데?”

    부드러웠던 식사 자리의 분위기가 한순간에 차갑게 얼어붙었다.

    “황궁의 시종과 혼인을 하려면 폐하의 허락이 필요하다고 알고 있습니다.”

    “시종?”

    접시를 멀찌감치 밀어놓은 필리프가 케이든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물었다.

    “황궁의 시종 누구를 말하는 거지?”

    묵직한 황제의 시선을 받아낸 케이든이 무언가 결심한 듯한 표정으로 입술을 떼어 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