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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나의 시간이 만나는 순간 (12)화 (12/139)
  • 12화

    “안나, 너 괜찮아? 이제 일어나서 준비해야지.”

    희미한 의식 속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안나가 꽉 닫힌 눈꺼풀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여전히 또렷해지지 않는 시야 속 자신을 내려다보는 마샤의 얼굴이 보였다.

    “여, 여기.”

    목이 꽉 잠겨 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마른침을 모아 삼킨 안나가 간신히 목소리를 내었다.

    “여기가 어디…….”

    “어디긴 어디야. 네 침대지. 근데 괜찮은 거야? 너 어제 갑자기 기절했다고 해서 내가 얼마나 걱정했다고.”

    “…응? 기절? 그게 무슨.”

    안나가 여전히 몽롱한 정신으로 흐릿하게 남은 마지막 기억을 더듬었다.

    그러니까 황제의 안주를 준비해 직접 음식을 그의 침실로 가져갔고, 그와 포크 한 개를 돌려쓰며 전을 맛보았다. 그리고 그에게 술을 한 잔 받았고, 깨끗이 비운 술잔을 보며 그가 술을 더 권했었지. 공손하게 거절한 후에… 그다음에… 그의 얼굴이 가까워졌고, 그리고…….

    “헉!”

    벌떡 상체를 세운 안나의 몸이 침대에서 그대로 튕겨 나왔다.

    “왜 그래, 안나. 너 괜찮아?”

    “저, 마샤. 나 어제 어떻게 된 거야? 자세히 좀 말해 줘. 응?”

    마샤의 어깨를 잡은 안나가 다그치듯 물었다.

    “어? 너 어제 폐하의 방에서 갑자기 기절해 버렸대. 그래서 폐하가 주치의를 부르셨는데, 주치의가 그냥 그대로 잠이 든 것 같다고 해서 수행원이 방으로 옮긴 거야. 너, 정말 기억 하나도 안 나?”

    안나가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기억이 안 나는 것이 다행인지 불행인지도 분간할 수 없었다. 아니, 그대로 기절해 버렸다니. 설마 술 한잔에 맛이 간 것인가? 그는 또 얼마나 황당했을까? 아, 그 술을 먹는 게 아니었어. 입에서 달게 느껴지는 술이 얼마나 위험한 줄 알면서. 서안나, 바보. 이 멍청이.

    “안나. 황녀님이 오늘 황궁에 돌아오시잖아. 그래서 오늘은 폐하께서 황녀님과 함께 점심을 드신대. 아침은 평소보다 최대한 간단하게 준비하라고 하셨어.”

    “…어, 그래. 황녀님. 폐하가… 아, 그렇구나.”

    “어서 준비하러 가야지. 벌써 시간이 거의 다 됐어.”

    몸 그 어떤 부위에도 제대로 힘이 실리질 않았다. 마샤의 손을 잡고 완전히 침대를 벗어난 안나가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 손으로 드레스를 갈아입고 앞치마를 둘렀다.

    “이번에는 황녀님께 타박을 듣지 않아야 할 텐데.”

    안나가 준비하는 모습을 기다리던 마샤의 입가에서 긴 한숨이 흘렀다. 근데 황녀님? 황녀님에 관한 이야기를 어디서 듣긴 들었던 것 같은데. 무슨 이야기였지?

    “자, 가자.”

    안나가 재촉하는 마샤를 따라 방을 나서려는데 눈을 감기 바로 직전의 상황이 떠올랐다.

    ‘재미있어. 이유를 알 수 없지만, 너와 함께 있으면 나도 모르게 웃게 되더란 말이야.’

    술기운이 번진 나른한 목소리가 귓구멍을 느릿하게 파고들었었다. 재미있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이었을까? 그는 그냥 사람을 괴롭히는 것에서 희열을 느끼는 고약한 취미가 있는 남자인가? 아니야. 그렇다고 하기엔 그다음이.

    마치 조금 전에 있었던 일처럼 생생했다. 직선으로 마주했던 그의 눈동자와 뺨에 흩어지던 뜨거운 그의 숨결. 모른 척하는 건지, 앙큼한 짓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던 그의 말은 대체 무엇을 의미했을까.

    아니, 설마.

    “안나, 내 말 듣고 있어?”

    만일 기절하지 않았다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보통 남녀 사이에서 그 정도 거리감이라면 응당 다음 단계는. 그러니까 분명히.

    “안나?”

    “어? 어, 어.”

    “너 정말 괜찮아? 열 있는 거 아냐? 얼굴이 너무 빨간데.”

    마샤가 안나의 이마로 손을 뻗었다. 슬쩍 고개를 물린 안나가 억지 미소를 머금었다.

    “아, 아니야. 괘, 괜찮아. 어제 누, 누군가에게 쫓기는 꿈을 꿨더니 좀 정신이 없네.”

    “정말 괜찮은 거야? 혹시 몸 안 좋으면 오늘 하루 쉬는 게 어때? 내가 주방장님께 말씀드릴게.”

    “아냐. 나 정말 괜찮아. 어서 가자.”

    마샤의 손을 잡은 안나가 고개를 휘휘 내저으며 발걸음의 폭을 넓혔다. 다른 생각을 해서 그의 잔영을 덮어버리자. 어떤 생각을 할까. 그래, 음식을 생각하자.

    아침은 간단하게 준비하라고 했으니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되겠지. 황녀님과의 식사에는 어떤 음식이 오를까. 이제 금육일도 끝났으니 아마 고기 요리가 오르겠지? 지난번처럼 양고기나 노루고기 손질을 맡았으면 좋겠는데. 아무래도 조류는 좀 어색하단 말이야. 형태가 고스란히 살아있던 공작새를 손질하던 과정을 떠올린 안나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런데 안나. 폐하께서 음식은 맛있게 드셨어?”

    간신히 필리프의 얼굴을 머릿속에서 밀어내는 것에 성공했는데, 마샤의 말 한마디에 도로 아미타불이 되어 버렸다.

    “어, 글쎄. 맛있다는 말씀은 안 하시던데.”

    “분명히 맛있게 드셨을 거야. 그러니까 다음 주에도 또 음식을 준비하라고 하셨겠지.”

    “뭐? 지금 뭐라고 했어?”

    “어? 폐하께 못 들었어? 다음 주에도 안주를 준비하라고 하셨다던데. 어제 폐하의 수행원이 주방장님께 말씀하신 걸 들었거든.”

    안나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어제 있었던 일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터져 버릴 것 같은데 다시 또 안주를 준비하라고?

    다시 안주를 준비해 그의 방을 찾고, 어제처럼 기절해버리지 않는다면. 그렇게 된다면.

    “어, 베르나 황녀님이다! 고개 숙여, 안나!”

    홀린 사람처럼 발을 재촉하는 안나를 멈춰 세운 마샤가 고개를 숙였다. 복도 끝에 화려한 크림색 풀 드레스를 입고 커다란 황금빛 가발을 쓴 여자의 얼굴이 보였다.

    우와. 저건 진짜 드라마에서만 보던 복장이다. 어쩜 치마가 저렇게 스프링으로 고정해 놓은 것처럼 동그랗지? 저, 허리 좀 봐. 진짜 개미허리잖아. 분명 코르셋을 입은 거겠지? 어휴. 얼마나 강한 코르셋을 사용한 거야. 저런 옷을 입고 제대로 숨을 쉬는 것이 가능하긴 한가? 저 커다란 가발 좀 봐. 얼마나 무거울까?

    정신을 놓고 고급스러운 드레스와 꾸밈새를 감상하던 안나가 뒤늦게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조아렸다. 따각따각. 구둣발 소리가 점점 가까이에서 들려오기 시작했고, 바로 눈앞에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고개를 들어.”

    차갑고 고저 없는 목소리였다. 조심스레 고개를 든 안나가 눈앞의 여자와 눈을 마주했다.

    아무런 감정을 느낄 수 없는 눈동자가 섬뜩할 정도로 불투명했다. 안나가 여자와 눈이 마주치는 즉시 시선을 바닥으로 떨구었다.

    “오랜만에 보는 것 같지?”

    조금 누그러진 목소리였다. 황녀를 대할 때도 황제를 대할 때와 같은 인사말을 전하면 되는 거겠지? 안나가 살짝 고개를 들어 답했다.

    “화, 황녀님을 뵙습니다.”

    허리를 굽히고 인사를 하자 즉시 고개를 들어도 좋다는 답이 들려왔다.

    “꽤 오래 앓았다고 들었는데, 많이 회복한 모양이지?”

    “예? 아, 예. 이제 거의 다 나았습니다, 황녀님.”

    “다행이군.”

    제국의 황녀가 어째서 일개 시녀의 몸 상태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는 거지? 자연스러운 의문이 생겼지만, 따져 물을 수는 없었다. 안나가 갸우뚱거리던 고개를 다시 숙이려는데, 생각이 한순간에 전부 흩어지며 머릿속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차질이 없게 준비했겠지.’

    ‘물론입니다, 황녀님.’

    컴컴한 어둠 속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여인 두 명의 모습이 보였다. 한 명은 지금 제 앞에 서 있는 황녀였는데, 나머지 한 명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조금만 더 가까이. 여자의 얼굴을 확인하고 싶어 몸을 움직이려 해 봐도 딱딱하게 얼어붙은 몸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사실이 발각되면 너도, 나도 끝이야. 잘 알고 있지?’

    ‘염려 마십시오. 황녀님의 안위를 위해서라면 제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어있습니다.’

    두 여인이 손을 맞잡았다. 고개를 끄덕인 황녀가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주변 빛이 환해지기 시작했다. 어두컴컴했던 공간에 빛이 들어차기 시작하자 황녀의 맞은편에 서서 커다란 모자를 눌러 쓴 여인의 얼굴이 보였다.

    빛나는 금발, 하얀 피부 또렷한 이목구비. 어쩐지 너무나도 익숙하게 느껴지는 얼굴이었다.

    “안나, 너 왜 그래. 황녀님께서 물으시잖아.”

    마샤의 팔꿈치가 옆구리를 찌르는 순간 환영이 사라졌다. 제 얼굴을 내려다보는 황녀의 표정에 불쾌감이 서려 있었다. 표정 없는 새까만 눈동자를 마주한 안나가 황급히 사죄의 말을 뱉었다.

    “아, 죄송합니다. 황녀님.”

    “얼굴빛이 좋지 않은데, 몸이 아직 낫지 않은 모양이지?”

    “아닙니다. 잠시 두통 때문에 말씀을 듣지 못했습니다. 죄송하지만 다시 한번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느릿하게 눈썹을 추켜세운 황녀가 안나에게 한 걸음 가까이 다가서며 물었다.

    “네 언니가 네게 무언가 남긴 것이 있는지 물었다.”

    “어, 언니라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안나의 어깨 옆으로 다가온 마샤가 황녀의 앞에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죄, 죄송합니다, 황녀님. 저, 안나가 앓고 난 이후 기억을 좀 잃은 것 같습니다. 잘 기억하던 것도 잊어버리고 제게 묻는 일이 많았습니다.”

    잠시 마샤에게로 넘어갔던 황녀의 시선이 다시 안나에게로 돌아왔다.

    “이 말이 사실인가.”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인 황녀의 질문에 안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렇습니다. 앓고 난 이후로 기억이 좀 희미해졌습니다. 죄송합니다, 황녀님.”

    알싸한 침묵이 흐르는 동안에도 황녀의 시선은 안나의 얼굴에 집요하게 고정되어 있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황녀가 안나에게서 한 걸음 물러서며 말했다.

    “내가 굉장히 잘하는 것이 있는데, 바로 거짓을 말하는 이를 귀신같이 알아챈다는 것이야. 고개를 들어.”

    안나가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황녀와 눈을 마주했다. 짧은 눈 맞춤 후 그녀가 시종에게서 비단부채를 건네받았다.

    “거짓을 말하는 것 같지는 않으니, 돌아가 보도록 해.”

    “…예, 황녀님.”

    안나가 기다렸다는 듯 황녀에게서 뒷걸음질을 치는데, 황녀의 부채 끝자락이 급하게 움직이던 발을 멈추게 했다.

    “혹시 뭔가 기억나는 일이 있으면 별궁으로 넘어오도록.”

    “아, 알겠습니다, 황녀님.”

    황녀의 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안나는 내내 참고 있던 숨을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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