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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나의 시간이 만나는 순간 (11)화 (11/139)
  • 11화

    안나는 산나물을 가득 넣은 전을 회심의 안주로 준비했다. 전이라면 으레 막걸리를 떠올리는 것이 보통이지만, 독주와의 궁합도 나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저, 정말 제가 먼저 먹어도 괜찮을지…….”

    그는 답 없이 안나의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조금씩 바뀌는 그의 표정을 보니 더 시간을 끌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느슨히 팔짱을 끼고 자신을 지켜보는 필리프의 눈치를 살핀 안나가, 시선을 내리며 전의 끝부분을 잘라 입에 넣었다. 희한하게도 음식을 씹고 있지만, 그 맛이 느껴지질 않았다. 분명 음식 준비를 마치고 모양이 좋지 않은 것을 골라내며 슬쩍 맛을 보았는데, 어찌하여 지금은 그 맛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것일까.

    필리프의 눈동자가 음식을 오물거리는 안나의 입술에 진득하게 머물러 있었다. 그의 눈빛을 피하며 입안 내용물을 서둘러 삼킨 안나가 어색한 표정으로 포크를 내려놓았다.

    “맛은?”

    테이블에 손을 올린 필리프가 턱을 괸 채로 물었다. 갑작스레 훅 얼굴 사이의 거리가 좁혀져 억지로 시선을 끌어올리며 답했다. 목구멍이 조여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질 않았다.

    “아, 그게… 제, 제 입맛에는 잘 맞는 것 같습니다.”

    “아, 그래?”

    필리프가 말려 올라가려는 입가에 힘을 주며 부러 잘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의 반응 하나하나에 온 신경을 기울이고 초조한 표정으로 힐끔거리는 모습이 좀 가엽긴 했지만, 시시각각 변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재미를 놓을 수가 없었다.

    안나에게서 시선을 거둔 필리프가 손을 뻗어 안나가 사용한 포크를 잡았다. 화들짝 놀란 안나가 포크를 잡으려 손을 뻗었다.

    “아니, 왜 그것을! 새것을 가져다드리겠습니다!”

    “왜, 무슨 전염병에라도 걸린 건가?”

    “아, 아닙니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제가 썼던 것을 어찌.”

    별것 아닌 일로 호들갑을 떤다는 듯 태연한 태도였다. 도무지 캐릭터를 쉽게 파악할 수 없는 남자였다. 깐깐하고 까탈스러운 것 같지만, 또 묘하게 소탈한 부분도 있는 것 같았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서로 아주 친밀한 사이가 아니고서야 같은 포크를 사용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인데.

    안절부절, 어쩔 줄 몰라 하는 안나에게 대수롭지 않은 시선을 보낸 그가 안나의 입에 닿았던 포크를 움직여 전을 집었다.

    필리프가 음미하듯 눈을 감고 음식을 씹는 모습을 바라보는 안나의 얼굴에 초조한 빛이 감돌았다. 식당에서 외국인들에게 꽤 인기가 좋았던 전이었지만, 이 시대 사람들에게는 생소한 맛일 수 있었다. 게다가 간장이 없어 급한 대로 만들어낸 소스 맛도 자신할 수 없었다.

    아, 너무 소박한 음식을 준비한 건가?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고, 그냥 눈에 보기 화려한 음식으로 준비할 걸 그랬나? 질 좋은 고기가 많았는데, 역시 고기를 이용하는 편이 나았을 것을.

    눈썹을 찡긋한 그가 다시 작게 자른 전 조각을 입에 넣었다. 다시 맛을 보는 것을 보니 그렇게 나쁘지는 않다는 뜻인 것 같은데, 표정은 그리 마음에 든 것 같지가 않고. 안나의 초조함이 극에 달해 허벅지가 부들부들 떨려오기 시작할 무렵 그가 포크를 내려놓고 술잔을 들었다.

    조심스레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지만, 당최 제대로 읽어낼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가 유리병을 들어 빈 술잔을 채우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처음 먹어보는 음식인 것 같은데.”

    나른한 웃음기가 섞인 목소리였다. 나쁘지 않았다는 것이 분명하다. 아, 역시 소탈한 면이 있는 남자였어!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쉰 안나가 입을 열고 더듬더듬 설명을 이어갔다.

    “아, 예. 나물 향이 좋아 다른 향신료를 사용하지 않고 밀가루만으로 반죽해 얇게 부쳐 보았습니다. 담백한 맛이지만, 기름을 사용했기에 독주와 궁합이 좋을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아무래도 늦은 시간이라 위에 너무 부담이 가는 음식은 좋지 않을 것 같아서…….”

    신이 나서 말을 이어가던 안나가 슬쩍 필리프의 눈치를 살폈다. 의례 말이 너무 많다는 타박이 들려와야 할 타이밍이었지만, 어쩐 일인지 그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를 경청하는 태도를 보였다.

    뭐야, 음식이 그렇게 마음에 드나? 아니 맛이 괜찮긴 하더라도 그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왜 말을 멈추지?”

    “아, 그게, 그게 이 음식을 준비한 이유입니다. 소박한 음식도 충분히 맛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초콜릿을 입힌 과일로 시선을 옮겼다.

    “이런 디저트는 너무 흔한 것 아닌가?”

    “아, 예. 단순한 디저트이지만, 쌉쌀한 초콜릿과 술의 궁합이 좋을 것 같아 준비해 보았습니다.”

    잔을 들어 술을 머금는 동안에도 필리프의 시선이 안나의 얼굴에서 떨어지질 않았다. 뭐지? 또 먼저 먹어 보라는 이야기인가? 가만, 그의 입에 닿았던 포크를 다시 내 입에? 그건 좀 부끄러울 것 같은데. 아니, 서안나!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아무래도 이상해.”

    “…예? 아니, 뭐, 뭐가.”

    “술을 마신 사람은 나인데, 왜 네 얼굴이 벌겋게 익었는지.”

    설마 생각을 읽은 건가? 불순한 생각을 했다는 사실이 부끄러워 안나가 푹 고개를 숙였다. 부끄러움을 참을 수 없어 치맛자락을 힘껏 움켜쥐고 달아오른 열기가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안나의 얼굴을 향해 있던 시선이 그녀의 정수리 위로 떨어졌다. 곧 들려오는 목소리에 잔잔한 웃음기가 섞여 있었다.

    “자, 음식을 만드느라 고생한 것 같은데 한잔 들지.”

    슬금슬금 고개를 드니 눈앞에 반 정도 채워진 술잔이 보였다. 처해 있는 상황도 잊고, 황제가 마시는 술은 대체 어떤 맛일지 궁금증이 일었다. 호기심 가득한 안나의 얼굴을 슬쩍 올려다본 필리프가 거의 비운 제 잔에 가득 술을 따랐다.

    “내가 먼저 마셔 봤는데, 독은 들어 있지 않았으니 안심해도 괜찮아.”

    다시 웃음 섞인 말을 뱉은 필리프가 먼저 술잔을 공중에 들어 올렸다. 이 잔도 들라는 뜻이겠지? 술잔의 가느다란 목 부분을 쥔 안나가 그의 술잔보다 조금 낮은 위치까지 술잔을 올렸다.

    이곳은 서양이니까 예의를 차리느라 고개를 돌리고 마실 필요까진 없을 거야. 그래, 그냥 마시자.

    전에 마셨던 와인은 술맛이 거의 나지 않는 포도 주스에 가까웠지만, 이 술은 그래도 술맛이 꽤 느껴졌다. 맛 자체는 조금 쓴 편이었지만, 술을 넘기고 나니 입안에 은은한 단 과일 향이 감돌았다.

    오랜만에 술다운 술을 마시니, 온몸에 후끈 열기가 도는 기분이었다. 안나가 서둘러 잔을 기울였다.

    필리프가 느긋하게 술잔을 기울이며 안나를 응시했다. 자신이 음식을 먹는 모습을 지켜보던 안나의 초조한 눈빛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아주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황급히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계속해서 입가에 피어나는 웃음을 참으려, 필리프가 아랫입술을 가볍게 말아 물었다.

    “음, 입에 잘 맞는 모양이지?”

    정신을 차려보니 술잔을 모두 비운 것도 모자라 잔에 매달린 술 방울을 입안에 탁탁 털어 넣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 이런 추잡스러운 행동을 보이다니. 뒤늦게 진한 수치심이 밀려들었다.

    “한 잔 더 하겠어? 술이 꽤 많이 남았는데.”

    술을 한 잔 더 마시고 싶다는 마음과 그의 앞에서 더는 볼썽사나운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치열하게 격돌했다. 다행히 한 가닥 남아 있던 이성이 슬금슬금 술잔을 잡으려던 손을 저지했다.

    “아, 아닙니다. 제가 술은 잘 마시지 못해서요.”

    피식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명백한 비웃음에 울컥해 호기롭게 한잔 더 달라 청하려던 순간, 그간 술에 취해 저질렀던 수많은 실수가 머릿속을 스쳤다.

    만취해 막차 버스 안에서 뻗어 버린 통에 피눈물을 흘리며 할증 택시를 잡아탔던 일, 알바 회식 자리에서 잘 마시지도 못하는 소주를 미친 듯이 퍼마시다가 사장님에게 삿대질하고 고함을 질렀던 일, 그 외에도 술에 취해 저질렀던 억지로 머릿속에서 삭제해 버렸던 수많은 실수가.

    그래, 참자. 참아야 해. 내 원래 주량과 안나 스완의 주량이 다를 수도 있으니 언제 훅 취해버릴지 몰라. 또다시 하이킥 거리를 만들 수는 없지. 특히 이 사람 앞에서는 더더욱.

    “술을 잘 마시지 못한다는 게 사실이야? 지금 네 얼굴은 멀쩡한 것 같아서 말이지.”

    술의 유혹을 잘 버텨 낸 자신을 칭찬하고 있던 안나가 번뜩 정신을 차렸다. 그의 목소리 톤이 미세하게 바뀌어 있었다. 농밀하고, 끈적했다.

    안나가 용기 내 고개를 들고 그의 눈을 마주했다. 술잔에 닿아있던 매끈한 눈매 속 흑요석처럼 새까만 눈동자가 스르르 안나의 얼굴로 옮겨졌다. 그대로 정신을 놓아 버릴 것 같은 기분에 허리에 꽉 힘을 주고 마른침을 삼켰다.

    “예? 아, 아 그게 무, 무슨 말씀이신지…….”

    초콜릿이 묻은 딸기를 손으로 집어 입에 넣은 필리프가 느릿하게 입술을 움직였다. 뭐야. 고작 술 한 잔에 취한 건가? 왜 이렇게 정신이 몽롱하지? 혹시 저 술에 뭘 탄 건가? 아냐. 분명 같은 병에서 따른 술을 나눠 마셨는데 저 남자는 멀쩡하잖아.

    “재미있어. 이유를 알 수 없지만, 너와 함께 있으면 나도 모르게 웃게 되더란 말이야.”

    빈 안나의 술잔을 느긋한 표정으로 매만진 필리프가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금세 목덜미부터 얼굴 전체가 붉게 달아오른 안나의 모습에 다시 한번 입꼬리가 상승했다. 그러니까 역시, 재미있어.

    안나가 두 눈을 꾹 감았다가 뜨며 필리프의 얼굴을 응시했다. 그의 눈동자와 정면으로 눈이 맞닿는 순간 쿵쿵쿵쿵,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재, 재미있다고요? 그, 그게 무, 무슨 뜻이신지 저는 잘… 알아듣게 설명해 주시면 참 좋겠는데…….

    필리프의 얼굴이 점점 안나의 얼굴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심장의 떨림이 너무 심해 손발 끝으로까지 아릿한 감각이 퍼졌다.

    필리프의 손가락 끝이 안나의 정수리에 스치듯 닿았다. 안나가 반사적으로 어깨를 움찔 움츠렸지만, 기다란 손가락은 안나의 머리카락 사이를 가볍게 파고들었다. 그의 손끝이 닿은 뒷덜미에 소름이 돋으면서 온몸에 힘이 풀렸다. 바로 뒤로 물러서려 했지만, 고장 난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아, 아니… 왜…….”

    그의 숨결이 제 얼굴에 와 닿아 뜨겁게 퍼지는 것을 느끼는 순간, 안나가 그대로 질끈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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