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7화 (47/74)
  • 47.

    TS 투자 자산 운용사 사장실.

    끊임없는 일로 한 시도 제대로 쉬지 못한 무진은 일을 마쳤다.

    목이 버근해서 좌우로 돌리며 손으로 어깨를 주물렀다. 테이블에서 마침 일을 끝낸 박 실장을 보았다.

    “박 실장, 이만 퇴근하지.”

    “차 대기하라고 하겠습니다.”

    박 실장이 사무실을 나가고 무진은 서류 가방과 슈트 상의를 챙겼다.

    책상에 둔 핸드폰으로 시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메시지에 답장도 없는 게 몹시 신경 쓰여서 받을 때까지 책상 옆에 서서 줄기차게 걸어 보았다.

    또 짜증 나게 하네.

    욕지거리를 내뱉다가 한숨을 내쉬면서 연락이 되지 않는 게 살짝 걱정될 시간에,

    몇 번째인지 사무실을 막 나서는데 연결음이 끊어지고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 다급하게 물었다.

    “……이시현 씨 핸드폰 아닙니까?”

    -성함은 모르겠습니다. 손님의 핸드폰이…….

    “거기 어딥니까? 손님이 여자분 맞습니까?”

    -장소를 알려 드리겠습니다.

    테이블에 있는 전화를 받지 않는 손님이 술을 많이 마셔서 받았다는 말에 무진은 인상을 찌푸렸다.

    핸드폰 벨이 울리는데 쳐다볼 뿐 받지 않아 직원이 받았다니.

    가게 위치는 회사하고 멀지 않았다.

    시현이 퇴근해서 도대체 집에 안 가고 술이나 마시니까 무진은 기분이 언짢았다.

    쉬어야 한다고 박 실장하고 야근하는 것까지 정해 놓고 술 마시는 데 시간을 허비하다니.

    무진은 직접 운전해서 가게 앞에 주차했다.

    그가 들어간 곳은 잔잔한 음악이 깔려 사람의 목소리도 거의 들리지 않는 조용한 술집이었다.

    불빛이 어둡고 바텐더 뒤로 온갖 술이 진열되었다.

    테이블이 오래된 느낌에 제각기 달라서 분위기가 오묘한 곳이었다.

    무진은 입구에서부터 술집을 쭉 훑어보았다.

    바텐더 세 명이 몇몇 손님의 주문을 받는 테이블 앞에 엎드려 있는 시현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혼자서 술을 마시는 손님이 많은 편이어서 시현을 쳐다보는 사람이 없었다.

    인상을 쓰며 그는 빠른 걸음으로 시현에게 다가갔다.

    지난번에도 술에 취해 해롱거리더니, 이번에는 얼마나 마셨는지 무방비 상태로 엎드려 있는 모습에 짜증이 났다.

    “시현아, 일어나 봐.”

    그는 시현의 어깨를 흔들며 이름을 불렀다.

    시현의 시선은 칵테일 잔에만 멈춰 있었다.

    무진은 바텐더한테 술값을 계산한다며 몇 잔을 마셨는지 물었다.

    “이 사람 얼마나 마신 겁니까? 눈은 뜨고 있는데 정신을 못 차리는 게 얼마나 마셨는지.”

    “알코올 도수가 높지 않은 칵테일만 여섯 잔을 섞어 가며 마셨습니다.”

    그는 카드를 내밀었다.

    “전화를 받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팁도 같이 계산하세요.”

    “감사합니다, 손님.”

    그는 술값을 계산하고 멍해진 상태로 일어서지 않으려고 버티는 시현을 둘러업고 나왔다.

    술에 취한 것은 아니고 만사 귀찮다는 표정으로 흐느적거리는 팔다리가 그의 화를 돋우고 있었다.

    흐트러진 모습에 한마디 하려다가 한숨만 내쉬었다.

    “미워. 싫어…….”

    시현이 중얼거리는 말을 듣지 못한 그는 화가 난 상태였다.

    취기에 몸이 늘어진 것인지, 자신을 알아보고도 가만히 있는 시현을 업고 술집에서 나오면서 알 수 없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같이 살자고 했을 때 얼버무린 이유가 이런 자유를 원해서일까.

    한 달 사이에 술꾼이 다 된 시현을 보고 있으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할머니가 보낸 사람이 시현의 이 같은 행동을 어떤 식으로 보고할지 안 봐도 뻔했다.

    다.

    *** 

    오피스텔도 그녀의 단조로운 삶을 보여 주듯 포인트가 있는 파란색을 빼면 아무것도 없었다.

    무진은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은 집에서 사는 시현을 이해하지 못했다.

    침대하고 좁은 소파를 빼면, 가전과 생활 소품까지 남이 쓴 것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오피스텔의 보안도 엉망이고 할머니한테 받은 돈도 있을 텐데 허름한 곳에서 왜 사는지.

    지난번에도 몇 번이나 말하려다가 멈칫했다.

    시현이 술을 마시는 것과 인생에서 재미있는 짓은 그가 알려 준 것이다.

    “하아…….”

    무진은 한숨을 내쉬며 술집을 나와 시현을 조수석에 앉혔다. 안전벨트를 해 주는데도 반항하지 않고 멍한 눈으로 시현은 앞만 보고 있었다.

    그는 시현을 힐끔거리며 신경질적으로 운전하면서 짜증이 난 채로 집에 도착했다.

    차에서 흐느적거리는 시현을 다시 업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건 사장이 비서의 뒤치다꺼리하는 거잖아.”

    차고에서 집 안으로 들어가면서 투덜거렸다.

    시현을 거실 소파에 앉히고 정신 차리라고 생수를 가져다주었다. 하지만 그녀의 손은 움직이지 않았고 초점이 흐린 시선만 얽힐 뿐이었다.

    시현은 어디선가 무진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한데 기운이 없어 긴가민가했다.

    머릿속을 비우고 있으니 술에 취하지 않아도 현실과 꿈의 경계에 서 있는 듯 몽롱해졌다.

    눈에 보이는 게 강무진 같으면서도 아니라고 부정하며 멍해진 채로 허공만 올려다보았다.

    몸이 물에 젖은 솜처럼 무거운데,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더니 눈앞에 그가 보였다.

    달콤한 칵테일은 알코올 도수가 높지 않아 취기만 돌고 있었다.

    대담해진 그녀는 화가 잔뜩 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몸에 손을 뻗었다.

    얇은 셔츠를 만지는데 손의 감촉에 단단한 복근이 느껴졌다.

    듬직한 등도 쓰다듬고 헤벌쭉 웃었다.

    깨진 사랑에 마음대로 기댈 수 없는 그의 넓은 가슴.

    시현은 그의 눈빛이 변한 것도 알아채지 못하고 손을 움직이고 있었다.

    금세 몸이 달아올랐다.

    ‘이런 감각도 싫어. 없어지면 좋겠어.’

    계약대로 일이 마무리되면 결혼도 끝나는 거였다. 아마도 회사까지 그만두면 그가 그립고 사랑하는 마음에 상처받는 것에 무뎌질 것이다.

    부부지만, 또 그렇지 않은 계약 관계.

    의미를 부여할 수 없는,

    결혼한 것을 누가 알게 되면…….

    TS 투자 자산 운용사뿐만 아니라 어떤 회사에서도 일하기가 어려워질 것이다.

    그래서 시현은 제 사생활을 숨기고자 했다. 어째서 그게 자신의 약점이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그는 계약 이행을 원하면서 애인보다 아내 역할을 요구했다.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는데도 말이다.

    뭐가 어떻게 되든 엮이지 않았으면 괜찮았을까.

    강무진하고 관련된 사생활이 드러나도 문제인데, 그녀가 하지도 않은 일, 그것도 남자하고 엮이는 나쁜 짓을 했다며 소문이 돌고 있었다.

    처음 다니는 회사에서 최악을 경험하고 있었다.

    소문의 중심인 자신의 귀에 가장 늦게 들어온 것을 생각하면 앞으로는 어떻게 될지 끔찍한 생각만 머릿속에 남았다.

    왕 할머니가 포기하면 그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이혼해 줄 텐데.

    결혼했어도 불안전한 관계이자 법적인 부부라는 허울 좋은 포장만 있는 껍데기였다.

    시현은 꿈을 꾸는 듯 현실을 구분하지 않으려는 생각과 몽롱한 기분에 더 용기를 내서 그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고 키스했다.

    그의 뺨과 목덜미에 입을 맞추었다.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고 드러나는 복근을 손끝으로 스치며 강무진이 눈앞에 실제로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고 늘 그가 하듯이 입술을 가져다 댔다.

    그 이상 무언가 더 하고 싶은데, 침대에서는 늘 사랑을 받아서 할 줄 아는 게 없어 동작을 멈추었다.

    그는 시현이 자신을 만지면서도 울먹이는 묘한 표정을 그저 바라보고 있었다.

    셔츠 단추를 풀 때만 해도 취한 듯한 그녀에게 화가 나 있었다.

    열정적이기는 하나 언제나 수줍어하던 아내의 다른 모습에 놀라 눈이 커졌다.

    “당신 지금 뭐 하는지 알아?”

    “알면? 그리고 모르면 또 어때?”

    반말로 툭 던지듯 말하고는 입술을 삐죽이는 시현의 모습은 도발이었다.

    그는 어이없이 그녀를 바라보고 감정이 없는 듯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 취했어. 아침에 짜증 내지 말고 지금은 자는 게 낫겠어.”

    “몰라! 맨날 멋대로야!”

    갑자기 화를 내며 가슴팍을 때리는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너…….”

    다른 한 손으로는 그의 가슴팍을 어루만지는 시현의 손을 잡아챘다.

    깍지를 낀 채 시선이 얽히며 불꽃이 일렁거렸다.

    “내가 먼저 한 거 아니다. 아침에 짜증을 내면 가만 안 둬.”

    술에 취한 여자 아니, 아내여도 다음 날 후회하거나 기억 못 하는 게 싫어서 재우려던 그는 실패했다.

    입술이 닿았다.

    서로의 숨결을 미친 듯이 삼키며 그는 그녀를 번쩍 안아 올렸다.

    그녀는 눈을 감고 그를 느끼며 짜릿한 감각에 빠지는 욕망을 드러냈다.

    버겁지만 그의 움직임에 따라 신음하며 빈껍데기일 뿐인 부부 관계를 유지해 봐야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는 걸 알고 있었다.

    그의 입에서 옅은 탄식이 흘러나오는 것에 희열을 느꼈다.

    쾌감에 물들어 휘몰아치는 폭풍 속에 잠겼다.

    그녀를 기쁘게 만족시키고 싶은 듯 격정적이었고 탐험을 시작하듯 곳곳에 불꽃을 피우며 각인하는 키스.

    빈틈없이 하나가 되어 가는 과정이 은밀하고 뜨거우며, 절정에 내지르는 신음이 그의 침실을 가득 메웠다.

    그와 그녀의 달뜬 신음이 어두운 밤과 다르게 활활 타올랐다.

    서로를 삼키고 한계로 몰아가며, 끝내고 싶지 않은 두 사람의 어긋난 마음을 알기라도 하듯 탐하고 탐해도 멈출 수 없었다.

    뜨거움과 다르게 해맑게 웃는 그녀의 표정에 빠져들어 그는 헤어 나오지 못했다.

    불꽃이 일렁이며 감각의 소리는 여과 없이 침실에 흩어졌다.

    몸의 감각과 마음이 뒤섞여 서로에게 닿고 싶은 갈증에 허덕였다.

    ‘너만 보면 우리의 뜨거웠던 그때로 돌아간 거 같아.’

    타오르는 갈증을…….

    폭풍이 가라앉고 그가 그녀를 다정하고 안타까운 손길로 끌어안았다.

    “시현…….”

    “…….”

    “혼자 술 마시지 마. 도대체 네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 걸까. 무방비하게 있지 말고.”

    대답 없는 시현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넘기는 그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그녀의 옆에 누워 높디높은 천장을 바라보다가 옆을 돌아보니 눈물 자국이 생긴 뺨을 어루만졌다.

    “우리는 이제…….”

    꿈을 꾸는지 흐느끼는 그녀를 으스러지게 껴안았다.

    마음껏 널 탐하고, 미치도록 널 안고 사랑하고 싶은.

    그는 고통스럽게 말을 이어 가지 못하고 속으로 삼키며 눈살을 찌푸렸다.

    깊이 잠든 시현을 바라보며 애증인지, 집착인지 알 수 없고 거친 숨만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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