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6화 (46/74)
  • 46.

    이시현은 어디서든 눈에 띄는 사람이 아니었다.

    무진은 그녀가 보석같이 빛나는 걸 아는 건 자신뿐이라 확신해 왔다.

    즉흥적인 상황으로 결혼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그는 시현을 사랑해서 결혼을 서둘렀다.

    그녀는 남의 말에 현혹되는 일도 없었다. 소문의 중심에 있을 만한 일도 없었는데, 뭐가 뭔지 모르겠다.

    인수 합병으로 비서를 새로 채용했다.

    특채도 아닌 공채로 수많은 지원자 중에 비서를 뽑았고 각 임원에게 배정되고, 성적이 좋은 시현이 사장실로 배속되었다.

    그래서 타 부서에서 일하지도 않은 사장의 비서에 관한 험담이 직원들 입을 통해서 퍼지고 또 말이 더해진다는 게 의아했다.

    공적인 일에 개인감정이 깊게 파고드는 걸 고민할 때였다.

    무진은 밖에 있는 시현을 불러서 확인할까 고민하다가 고모의 비서실장이 결과를 알려 줄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 

    시현은 생각지도 않게 진보라 본부장의 비서인 장소연을 통해 사내에서 자신에 관한 악의적인 소문을 듣게 되었다.

    화가 났다가 어이없어서 한숨을 내쉬기를 반복.

    애써 태연한 척하며 무시하고 있지만, 상처를 안 받은 게 아니었다.

    한국에서 자신을 아는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래서 악의적인 소문이 어디서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짐작할 수 없었다. 막연하게 왕 할머니가 보낸 감시자를 통해 번졌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잘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 변명하듯 말하기 싫을 뿐, 속은 뒤집히고 억울하며 속상했다.

    무진과 어정쩡한 관계가 이어질수록 마음에 생채기는 심해졌고 울적했다.

    TS 투자 자산 운용사와 백야 그룹을 따로 생각할 수 없다고 해도 자신을 험담하는 게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불과 며칠 사이에 말이 돈다고 했다.

    왕 할머니가 뭘 어떻게 했는지 몰라도 혼인 중인 강무진에게 줄을 대려고 난리였다.

    잘 알지 못하는 직원은 구내식당에서 무진의 정보를 캐내려고 하면서 사정을 말해 줄 때도 심장에 못이 박힌 듯했다.

    계약이 마무리되고 이혼하면 남남인 것을.

    진보라 본부장까지 한술 더 떠서 막말로 시현을 생채기를 내고 있었다.

    이제는 차마 입에 담기 어려운 소문이 도는데 사장과 비서 이전에, 부부 관계부터 정리해야 하는 상황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듯했다.

    알면서 빨리 이혼을 마무리 짓지 못한 자신이 바보 같았다.

    시현은 그에게 붙잡혔을 때 왕 할머니를 핑계로 그를 놓지 못하는 것이 사랑이 아니라 집착처럼 느껴졌다.

    위약금을 낼 수 없는 사정에 계약 이행을 내세워 쾌락을 나누는 관계일 뿐이었다.

    완전한 사랑을, 그를 가질 수 없는데도 아슬아슬하게 관계를 이어 가고 있었다.

    시현은 미친 거라고 스스로 욕해도 손을 내미는 그를 뿌리치지 못했다.

    왕 할머니가 어떤 사람인지 알면서, 그의 어머니는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으니 며느리도 아니었다.

    시현은 꾹 참았던 것이 실체 없는 소문에 모든 게 퇴색해 버렸다.

    그는 알고 있을까.

    염장을 지르러 온 것처럼 장소연은 방긋거리며 시현의 속을 뒤집었다.

    “이 비서님. 요즘 사무실에 꽃바구니랑 간식 같은 게 배달된다면서요. 그게 소문하고 관련이 있는 거 같아요.”

    “…….”

    “저까지 아는 정도라면서 꽃바구니에 뭔가 있는 거 아니에요?”

    시현은 장소연의 말을 듣고 있으면서 생각이라는 걸 할 수 없었다. 소름이 돋는 것은 박 실장 외에 알지 못하는 꽃바구니와 간식 배달을 장소연이 어떻게 아느냐는 것이다.

    박 실장이 따로 보고하지 않은 듯 무진조차 모르는 일을 어떻게 아는 걸까.

    “제 귀에 들어왔으니 조만간 사장님도 아는 거 아니에요? 이 비서님만 곤란해질 거 같아서 걱정되네요.”

    시현은 장소연의 말이 빈정거리는 것처럼 들렸다.

    걱정이 아니라 사장실에서 무슨 사달이라도 나기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곤란해지는 일이 없을 거예요. 어디서 오는지 모르는 물건은 보안 팀에서 전부 수거해서 버렸으니까요.”

    “어머나. 그런 거예요?”

    “장소연 씨는 사장실에 오는 물건을 어떻게 잘 알아요?”

    “왔다 갔다가 하다가 본 거죠. 뭘 어떻게 알아요.”

    장소연은 뜨끔했다.

    하지만 꽃바구니와 간식은 기태가 보낸 것이고 소문은 자신이 낸 게 아니었다.

    시현에게 곤란한 일이 생긴 게 남자 문제였으면 강무진을 잘 엮어 보려고 사장실을 들락날락했을 뿐이었다.

    장소연은 시현이 매섭게 물어보자 발끈하지 않고 차분하게 상황을 살폈다.

    “보안 팀에서 소문에 관해서도 알아낼까요?”

    “장소연 씨만 조용히 해 주면 좋겠어요. 여기서 일이 커지는 게 불편하거든요.”

    “아, 그렇게 하죠.”

    “고마워요.”

    “말할 사람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불러요. 저는 일이 많지 않거든요.”

    시현은 약 오르는 것도 아니고 장소연의 해맑은 표정에 오히려 얼굴이 굳었다.

    염탐하러 온 것처럼 매일 사무실을 둘러보는 눈빛만큼 회사 내의 소문을 직설적으로 말해 주는 게 놀리는 것 같았다.

    *** 

    시현은 퇴근해서 회사에서 조금 떨어진 바에 가서 칵테일을 마셨다.

    술이라도 마시지 않으면 맨정신으로 잠들지 못할 만큼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다.

    불안감을 느끼자 망상에 빠지게 되는 듯 그녀의 집중력을 흐트러뜨렸다. 술이 도움이 되지 않아도 아주 잠깐, 나쁜 생각을 털어 내려고 했다.

    “카시스 프라페 주세요.”

    바텐더한테 칵테일을 주문했다.

    “달콤한 맛을 즐기시나 봅니다.”

    “쓴 술을 잘 못 마셔요. 당도를 높여도 되니까 맛있게 해 주세요.”

    “마시기 좋게 해 드리겠습니다.”

    혼자서 칵테일을 마시기 좋은 조용한 바에서 바텐더와 가볍게 말을 주고받았다.

    벌써 얼마나 마셨는지 알 수 없었다.

    한 잔이 두 잔이 되고,

    칵테일이 달콤해서 목 넘김도 좋았다. 장소연이 전해 준 나쁜 말에 가라앉은 기분도 슬슬 나아지고 있었다.

    주문을 받는 바텐더가 걱정스럽게 시현을 힐끔거리고 있지만, 싱긋 웃어 보였다. 시현은 한 잔씩 테이블에 놓인 칵테일을 마셨다.

    잔잔한 음악이 흘러나오고 대부분 혼자인 손님이어서 바텐더와 간간이 대화할 뿐 주변 사람을 신경 쓰지 않았다.

    으음…… 뭘 마시지.

    시현은 아는 칵테일이 몇 개 없어서 색깔로 고르거나 맛을 설명해 주면 선택해서 마시고 있었다.

    “추천할까요?”

    “네. 맛있는 거면 다 좋아요.”

    잠시 후, 시현은 바텐더가 추천한 칵테일을 바라보았다.

    “P.S 아이 러브 유입니다. 한번 마셔 보세요.”

    살짝 입을 대고 한 모금 목으로 넘겼다.

    칵테일 이름이 예쁘고 흰색에 부드럽고 맛있어서 입에도 잘 맞았다.

    “손님이 달콤한 칵테일을 선호하셔서 만들어 봤습니다.”

    “정말 맛있어요.”

    “손님이 처음 주문한 카시스 프라페는 향이 좋아서 연인이 키스 전에 마시는 칵테일이라면, 지금 마신 건 키스 후 고백하기 좋은 칵테일이죠. 괜찮은가요?”

    “네. 설명을 들으니까 덩달아 기분도 좋아지네요.”

    좋다면서 방긋 웃던 시현.

    인생은 쓴맛인데 달콤한 게 입 안에 번져 나가니 우울한 기분이 금세 그녀를 덮어 버리는 듯했다.

    동생이 한국에서 정착하기를 바라지 않았더라면.

    TS 투자 자산 운용사의 입사 지원서를 내지 않고 다른 일을 찾았더라면.

    미국에서 강무진을 만나지 않았으면 인생이 쓰지 않았을까.

    평온한 인생이라는 게 뭘까.

    아버지가 살아 계셨다면 굴곡이 없는 평범한 삶을 살았을 텐데.

    아버지 없이 아등바등 동생하고 꿋꿋하게 살아왔다. 누구에게도 욕 한 번, 손가락질 한 번 당하지 않았다.

    잘난 남자를 만나서 모욕적인 말에도 참을 수밖에 없는 처지가 괴로웠다.

    사랑에 쉽게 빠지는 타입도 아닌데 그는 정말 멋있는, 자신만 사랑해 줄 거 같은 남자였다.

    그에게 상처 주려고 한 적이 없었다.

    왕 할머니가 돈을 주고 겁박하니 그저 동생을 위해 숨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원했던 것은 그저 사랑하는 거였다.

    남에게 버러지 같은 인간이라고, 돈이 없다고 거지라고, 누군가의 장난감으로 몰아갔다.

    시현은 무진을 놓아주고 싶었다.

    제 것이 아닌 남자와 뜨거운 밤을 지새우고 싶지 않았다.

    순간, 뺨을 타고 눈물이 툭툭 흘러내렸다.

    다른 손님의 주문을 받던 바텐더는 말없이 휴지만 시현의 앞에 살며시 놓았다.

    시현은 사랑이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마음을 다해서 달콤한 칵테일처럼 너무 달아서 질식할 만큼 사랑을 받아 보고 싶었다. 즉흥적이어도 재미있고 웃음이 가득했던 때로 돌아갈 수 없는 걸까.

    서로에게 미친 사랑.

    돈을 받고 도망쳤지만, 그는 이유를 묻지 않았다.

    그래서 왕 할머니의 말이 진실처럼 시현의 가슴에 콱 박혀 있었다.

    미국에서도 늘 쫓아다니던 낯선 시선이 사라졌다고 생각한 순간, 마음의 평화가 조금씩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무진하고 이혼을 결심하며 사람과의 교류는 분명한 선을 그었다.

    인생에서 학교 성적이 전부가 아닌 것처럼 사랑이 없어도 그럭저럭 살아가는 것은 힘들지 않을 것 같았다.

    그와 헤어지며 평범한 이시현으로 돌아갈 줄 알았는데.

    그녀에게 우주 같았고 드넓은 곳에서 영원하기를 바랐던 첫사랑은 허무하게 깨졌다.

    짧은 결혼 생활에 대가를 바라지 않았다.

    도망가면 안 된다는 무진에게 왜 숨어야 했는지 말할 수 없었다.

    한 달 동안 호텔에 숨어서 그를 그리워했다는 것을 누가 믿을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상실감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는 동생 앞에서 시현은 자신의 상처를 들추지 못했다.

    지금도 매형이 잘 있냐고 묻는 동생한테 결혼이 끝났다고 말하지 않았다.

    저마다 상처를 받는 세상에 살기에 시현은 힘들다는 말조차 하지 않고 혼자서 이겨 냈다.

    무진이 그녀를 찾아 헤매고 기어이 찾아서 같이 왕 할머니를 포기시키자고 하기 전까지.

    시현은 평온한 삶을 바랐다.

    자신을 고통 속에 남겨 둔 그를 미워하지만, 사랑은 버릴 수 없었다.

    그가 아니었으면 결혼하지 않았을 것이다.

    숨겨 둔 사랑을 누군가 시기한 것도 아니고 안 좋은 일이 연거푸 생겼다. 한국에서 처음 다니게 된 회사에서 손가락질당하게 생기자 폭발 직전이었다.

    정착하고 싶어서 아등바등해 봤자 이룬 것이 없었다.

    사랑받고 사랑하며, 행복한 삶을 원했을 뿐인데, 어디서부터 어긋났는지 알 길이 없었다.

    자신을 둘러싼 기이한 일이 왕 할머니로부터 시작된 것이 두려웠다.

    칵테일을 여러 잔 마신 시현은 테이블에 얼굴을 기댔다. 바텐더가 건넨 불투명한 흰색을 띤 칵테일을 바라보았다.

    “말하고 싶지만, 하기 싫어. 우린 처음부터 만나면 안 되는 사이였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