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2화 (42/74)
  • 42.

    식사도 안 한 듯한데, 굳이 캐물어서 상황을 나쁘게 만들고 싶지 않은 생각이 커서 화제를 돌렸으니까.

    그것보다 진보라는 휴식 중에 잠깐 일을 도와 달라는 무진의 제안을 받아들인 거였다.

    월가에서 보인 능력을 회사 성장에 조금 도움을 받길 원했다.

    무진은 진보라가 성공에 관한 열망이 커서 한국에서 아주 잠시 머문다고 생각했다.

    어릴 적부터 친구까지 관리하던 할머니라서 진보라를 알 테지만, 맞선 상대로는 보라를 밀지 않았다.

    진보라하고 자신은 어디까지나 친구이고 이성적인 감정은 10년 넘도록 없었다.

    “왜 만났는지 물어보지 않은 거 잘한 거지?”

    듣지도 못하는 시현을 빤히 보며 중얼거리고는 잠에 방해될까 싶어서 조심스레 몸을 일으켰다.

    해사하게 웃던 아내는 너무 예뻤다.

    쇼핑하며 시간을 보내지 않고 만취하거나 노는 데 정신이 팔리지 않는, 너무나 성실했던 아내는 왜 도망갔을까.

    그런 푼돈보다 자신을 꽉 쥐고 있으면 더 큰 돈이 생길 텐데.

    할머니의 돈을 받고 몸을 숨겼다는 것이 여전히 믿기지 않았다.

    그는 알고 있었다.

    시현은 싫은 말을 상대에게 안 하는 편이지만, 자신이 싫어하는 일은 피한다는 걸.

    그렇기에 할머니한테 돈을 받고 갑자기 숨어 버린 시현에게 화가 났다.

    “뭐가 어떻게 되는 건지…….”

    아내를 매일 보고 있지만, 그의 마음은 시리고 아팠다.

    *** 

    시현한테 이상한 일이 생기기 시작했다.

    예민하게 생각하고 싶지 않지만, 감시자가 사무실까지 들어온 듯했다.

    진보라 본부장을 만난 이후부터라고 하기에는 그전부터 책상 위의 물건에 손을 탄 흔적이 있었으니 콕 집어낼 수 없었다.

    왕 할머니의 감시자가 무엇을 찾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설마, 백혜련을 찾은 걸까.’

    누구도 시현에게 위협이 되지 않았다.

    그저 누구의 인형으로 살다가 버려지는 것을 원치 않아 곤란한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진보라가 무진을 놓아주라고 막말을 서슴지 않던 이후, 시현의 신상을 줄줄이 아는 메시지를 받았다.

    그뿐만이 아니라 뚝 끊어지는 전화도 여러 번 걸려왔다. 소개팅 주선자한테 연락처를 받았다며 약속을 정하자는 사람이 있었다.

    “존?”

    영어 이름을 쓰는 한국인까지 연락해 오니 이건 장난이라도 도가 지나쳤다. 무시하고 있지만 사생활 침해로 돌아 버릴 듯했다.

    “왕 할머니가 이상한 사람을 보내는 건가.”

    시현은 무심코 이상한 일의 주범이 왕 할머니라고 단정 짓다가 화들짝 놀라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미친 생각이었다.

    사람이 싫으면 대놓고 말할 정도라서, 자신을 쫓아내는 일로 이런 식으로 시간을 허비할 이유가 없었다.

    시현은 감시자의 행동이 이렇게 달라진 것에 겁이 났지만, 업무에 집중하려고 애썼다.

    신고해 봤자 돈과 권력이 있는 사람의 처벌도 약하니 신중하게 행동해야 했다.

    한국에서 정착하려는 동생하고 평화로운 삶을 이어 가고 싶었다. 확고한 마음을 들여다보니까 왕 할머니와 무진의 사이에서 줄다리기해도 되는지 의문이 들었다.

    멍해진 시현은 자료를 정리하다가 퇴근 시간인 걸 알았다.

    시현은 정신없는 하루를 보내고 업무를 정리하며 박 실장 자리를 힐끔거렸다.

    “실장님은 오늘도 야근인가요?”

    “저쪽 일도 하다 보니 어쩔 수 없네요. 시현 씨는 퇴근해요.”

    “먼저 퇴근할게요. 실장님, 월요일에 봬요.”

    서류 정리를 마치고 가방을 챙겨 사무실을 나오는데 주변을 둘러보던 시현은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돈 있는 사람의 함정에 빠져 이러다가 미칠 것 같았다.

    주차장까지 내려가면서도 시현은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지나가는 사람조차 감시자 같아서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주말에 뭐 해?

    무진의 메시지에 시현은 간결하게 답장했다.

    일주일에 한 번이라던 데이트가 두세 번으로 흐지부지해졌으니 주말을 사수하고 싶었다.

    -쉽니다. 정말 쉬어야 해요

    휴식이 필요하다고 강조하자 그는 어이없다는 듯 메시지를 길게 보내왔다.

    -누가 뭐래? 내가 맨날 널 잡아먹는 줄 알겠어. 악덕 업주라도 된 거 같다니까

    -사장님도 주말 잘 쉬세요

    -말 돌리는 건 선수급이지. 쉬어

    시현은 엘리베이터 앞에서 답장하고 회사 건물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시현은 시도 때도 없이 울리는 핸드폰 알람으로 경찰에 신고하려다가 망설였다.

    우선, 어디서 핸드폰 번호가 유출되었는지 알아보는 것보다는 변경하는 게 나았다.

    왕 할머니의 감시자가 한 짓이라면, 신고해 봤자 소용이 없을 테니까.

    왕 할머니의 제안을 외면하고 무진의 손을 잡았다고 이렇게 감시자가 번거로운 일을 한다는 게 의심스러웠다.

    시도 때도 없이 울리는 핸드폰 메시지 알람에 무음을 해 놓고도 시현은 신경이 예민해졌다.

    시현은 뒤를 힐끔거리다가 대로변에 나와서 진보라 본부장을 보고 비명을 지를 만큼 놀랐다.

    “어머나.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놀라서 비명을 질러요?”

    “죄송합니다. 본부장님.”

    얼떨결에 죄송하다고 말하며 옆으로 비켜서 가려는데 앞을 가로막는 진보라를 올려다보았다.

    “며칠이 지났는데 아직도 계산기 두들겨요?”

    “…….”

    “무진이가 백야 그룹을 포기할 수 있을까요? 사표라도 내요. 사정이 어려워서 필요하면 돈도 챙겨 줄게요.”

    대꾸하기 싫어서 입술을 깨물던 시현은 반격하지 않고서는 진보라하고 쓸데없는 대화로 시간을 허비할 거 같았다.

    크게 심호흡하고 딱딱하게 말했다.

    “진보라 본부장님께서 신경 쓸 일이 아닙니다.”

    “빈손보다는 손에 뭐라도 쥐고 있는 게 낫잖아요. 난 어디까지나 시현 씨를 생각해서 하는 말이에요.”

    강무진이 결혼하든 말든 상관없었다.

    혼인 유지 상태에서 누가 헛물을 켜는 건지 몹시 궁금해지는 참이었다.

    시현은 왕 할머니가 할 법한 말을 진보라 본부장이 하는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그래서 그럴싸하게 포장하며 막말하는 진보라의 속내를 알지 못해서 말을 아낄 뿐이었다.

    “더 할 말이 있습니까? 없으면 퇴근하는 길이어서 가겠습니다.”

    “이시현 씨. 너 그러다가 큰 게 다쳐요. 정신 좀 차려.”

    앞을 막는 진보라를 밀치다시피 하고 시현은 택시를 잡아탔다.

    다들 강무진이 뭐라고!

    갑자기 나타나서 놀란 것도 잠시, TS 투자 자산 운용사는 백야 그룹과 별개로 무진의 회사였다.

    투자자로 언론에 공개되었지만, 백야 그룹의 차기 총수의 이타적인 행보라고 알려졌다.

    왕 할머니가 보낸 감시자한테는 사생활을 드러냈다. 하지만 그 외에는 무진과 자신이 사는 곳도 알려지지 않았으니 매사 조심해야 했다.

    투자를 원하는 사람들을 회사 밖에서, 개인적인 공간에서는 절대로 마주치기 싫다는 강무진의 바람이었다.

    그래서 스케줄을 짜고 약속된 사람하고만 미팅하는 까다롭지만, 효율적인 업무 스타일이 있었다.

    중요한 자리에는 늘 박 실장이 수행하고 있어서 보안에 민감할 정도로 신경을 썼다.

    투자자가 된 강무진은 누구에게도 사적으로 받는 게 없고 공정함을 내세우고 있었으니까.

    희한한 일이야.

    진보라가 나타난 타이밍이 왜 이렇게 거슬리지.

    지난번에도 10여 분 만에 자리에서 일어서게 할 정도로 예의를 밥 말아 먹는 못돼먹은 성질.

    마지못해 강무진이 불러들인 임원이니 존대를 하지만 될 수 있으면 욕을 퍼붓고 싶었다.

    오피스텔 안에는 누가 들어온 흔적이 없었다.

    사무실은 조금씩 나쁜 손을 타는 듯이 사소한 것을 건드리는 정도였다.

    진보라 본부장의 비서 장소연도 시현의 신경을 건드렸다. 점심시간만 되면 불쑥불쑥 나타나서 속을 뒤집었다.

    시현은 한계에 부딪혔다.

    ‘어디서부터 뭘 알아봐야 하는 걸까.’

    방금 진보라를 본 게 찜찜하지만, 왕 할머니가 보낸 감시자로 진보라를 지적할 수 없었다.

    시현은 고개를 세차게 내저었다.

    괴롭히는 것도 아주 악질이라며 구시렁거렸다.

    *** 

    주말 낮, 집 밖으로 나와 햄버거를 사는데 누군가 말을 걸었다.

    “시현이 맞지?”

    “…….”

    “연락 주고받은 지 몇 달인데 얼굴도 기억 못 해? 나 기억 못 해? 존이잖아. 존.”

    “누구세요?”

    “장난하는 거 재미없다. 지난주에는 왜 안 나왔어? 전화해도 받지 않고.”

    정말 모르는 사람이어서 황당한 건 시현이었다. 살갑게, 친근하게 말하는 남자는 쉴 새 없이 떠들었다.

    “우리 얼마 만인지 기억 못 하는 거야? 왜 모른 척하는 건데?”

    “…….”

    “네가 갑자기 귀국해서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

    “지난주부터 연락을 무시하고 뭐냐.”

    남자의 말이 위협적으로 들려서 시현은 뒷걸음을 쳤다.

    며칠 전부터 존이라는 남자가 끊임없이 연락해 왔지만, 아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서 무시했는지 자신이 가끔 들르는 햄버거 가게에서 아는 척하니까 소름이 끼쳤다.

    “저기요. 저는 여자 기숙 학교에 다녔어요. 누군지 몰라도 저야말로 이런 장난 불쾌합니다.”

    존이라고 이름을 말하던 남자는 비웃음을 흘리며 시현을 찬양하는 듯 애써 표정을 관리하고 떠들어 댔다.

    “여기는 한국이라서 그래? 우리는 아메리카 스타일.”

    “이러지 마세요!”

    햄버거 가게를 나오는데도 계속 쫓아와서 버럭 화를 내니까 도리어 적반하장으로 나오는 남자는 시현을 미친 사람 취급했다.

    “선물은 다 받아 처먹고 만나자고 해서 나왔더니 입을 싹 닦아? 너 원래 이런 여자였나?”

    모르는 사람이 아는 척하는 것도 겁이 나는데 치근덕거리는 게 아주 질이 나빴다.

    “몰래 귀국해도 참았는데 왜 피해? 내가 너한테 얼마나 헌신적이었는데 우리 친구들이 다 알아.”

    “…….”

    “날 모른 척하는 이유가 뭔데?”

    “난 그쪽을 처음 봅니다. 사람을 잘못 본 것 같은데요.”

    시현은 최대한 창피한 일을 당하지 않으려고 타이르듯 말했다.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면 상관없지만, 처음 본 사람이고 한국에는 가까운 친인척조차 없었다.

    남자는 막말을 서슴지 않았다.

    “내가 허영심 가득한 너를 위해 대출까지 받아서 선물한 것만 쏙 먹는 거냐? 네 집에서 보낸 뜨거운 밤은 어쩔 건데?”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사람 잘못 봤다고요.”

    시현의 말투도 점점 거칠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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