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1화 (41/74)
  • 41.

    이혼을 원하는 아내한테 계약을 핑계로 붙들고 있는 자신이 바보 같았다.

    진보라는 믿을 만한 친구이자 업무적인 파트너라고 생각하지만, 시현하고 만나는 게 몹시 신경 쓰였다.

    진보라가 남자도 아닌데 상황을 나쁘게 보는 자신이 우스웠다.

    무엇 때문에 도망쳐 몸을 숨겼는지 알 길이 없으니까 모든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할머니의 비서가 찾아낸 백혜련이라는 사람이 중요 인물인지 아직 알지 못했다.

    여러 가지 일로 복잡한 심경에 시현이 진보라를 만난 것을 보니 심란함을 온몸을 짓누르는 듯했다.

    무진은 차에 앉아서 오피스텔 앞을 떠나지 못했다.

    시현의 생활을 헤집을 권리도 없는데 한국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진보라를 만난 이유가 궁금해서 참을 수 없었다.

    치졸한 불신이 온몸을 휘감은 것도 모르고.

    머리는 아니라고 강하게 부정하면서 속은 뒤집히고 진보라하고의 만남 자체로 불쾌감이 번졌다.

    그것은 하나의 변명거리였다.

    할머니와 시현이 어떤 거래를 했는지 알고 싶은 거니까.

    몇 마디 주고받는 것만 보고 식사하고 집에 오는 시간으로는 부족한 시간인데도 자꾸 거슬렀다.

    불쾌하고 화가 나는데 불신이라고 인정할 수 없었다.

    궁금증. 단순히 할머니하고의 일을 침묵하는 시현의 생각이 어떤 것인지 알고 싶다는 것뿐이라고 합리화했다.

    돈을 받고 한국에 들어와 몸을 숨겼다.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다는 것을 머리로 아는 것과 불신 가득한 마음은 다른 거였다.

    “부부가 계약이든 뭐든 다 알아야지.”

    즉흥적인 결혼이라고 했지만, 무진은 시현이 다른 남자한테 웃어 주는 게 싫었다. 그녀의 매력에 파리가 꼬이는 것 같아서였다.

    착하고 성실한 것은 덤이고, 대화가 통하며 사소한 것조차 잘 맞아서 결혼 이후 다툼이 없었다.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하고 만족감을 느끼는데 싫을 사람이 있을까.

    늘 상대를 배려하며 뭘 해도 사랑스러운 아내.

    시현에게 자신을 각인시키려고 안달이 났던 기억에 스스로 두려웠다.

    풋풋한 감정이 그새 농염하게 익어서 감정이 날뛰는데, 어쩐지 옭아매고 독점하려는 것은 당연한지도 모른다.

    집착인가.

    무진은 시현이 사는 곳을 올려다보았다.

    놓기 싫어서 한 달 만에 찾아낸 아내한테 끌리는 건 당연했다. 사랑이 그대로 남아 있다는 건 외쳐도 시현이 무시하고 있지만.

    얼굴만 봐도 몸이 뜨거워지고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아도 할머니의 뜻대로 되지 않게 할 생각이었다.

    ***

    벨이 울리자 시현은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무진을 들어오게 했다.

    출근해서 오전에 얼굴을 봤는데, 또 보니까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그러면서 의미 없고 끝이 빤히 보이는 관계를 정리하지 못해 자책하고 있었다.

    무진의 연락이 혼란스럽고 마음에, 더는 상처받고 싶지 않은데 놓는 걸 망설이니 누굴 탓하리.

    시현은 소파에 앉아서 저녁을 먹을 건지, 왜 왔는지 물어봐야 하나 괜히 자기 집에서 무진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분위기가 가라앉은 듯했다.

    “무슨 일 있…… 앗.”

    갑자기 키스를 퍼붓는 그를 밀어낼 새도 없었다.

    등받이에 등이 베이길 정도로 그는 예고도 없이 입술을 삼켰다.

    “하아……, 아파.”

    말도 없이 눈이 마주치자 거칠게 입맞춤했다.

    집이어서 화장기도 없는 뽀얀 얼굴, 머리를 감고 드라이어도 안 했는지 젖은 듯한 머리카락, 샴푸인지 바디 워시인지 시현의 달콤한 체향에 취해 갔다.

    그는 어떤 이유를 찾아서라도 그녀를 놓지 않을 생각인데, 자꾸 밀어붙이기만 했다.

    무진의 감정은 사랑이지만 시현이 인정하지 않았다.

    결혼이라는 굴레에 묶어두고 순간을 즐기며 그녀를 아끼며 할머니로부터 보호하려고 했건만.

    어디서부터 어긋났을까.

    그는 시현이 없는 허전한 마음을 그녀로 채우고 싶었다.

    진보라와 무슨 일로 만났는지 궁금해도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으려고 했다. 할머니하고 엮여 그를 궁지로 몰지만 않으면 되는 것이다.

    그는 공허함을 드러내지 않으며 시현의 입술을 물고 놓지 않았다.

    “아파?”

    “괜찮아요.”

    아픈 걸 내색하지 않는 시현.

    길고 거친 키스는 고통스러웠지만, 무진의 눈을 마주하니 화조차 낼 수가 없었다.

    “저녁 먹을래요? 먹고 온 거 아니죠?”

    “이제 요리도 할 줄 알아?”

    “못하고 안 해요. 떡볶이 사서 올 테니까 기다려요.”

    시현은 무진에게 시큰둥하게 말하고 대충 머리카락을 묶고 밖으로 나갔다.

    후유……, 입술이 부르트고 피가 나는 상처는 금세 아물어.

    마음 깊이 생채기가 나면 아물지 못하는 건데.

    시현은 무진의 키스가 거칠어졌다고 아프다고 말하고 싶지 않았다.

    문득 박 실장이 보너스로 보약을 먹고 있다고 한 말이 생각나 피식 웃었다.

    아픔은 다른 것이지만 금세 부르튼 입술을 손으로 만지면서 떡볶이와 보약을 떠올렸다.

    잠시 후, 떡볶이에 튀김을 잔뜩 사서 집에 온 시현은 접시에 옮겨 담았다. 물과 사이다를 식탁에 놓고 거실 소파에 앉아 있는 그를 불렀다.

    “순대는 없어요.”

    그의 입맛을 아는 것도 결혼 생활로 익숙해진 몇 가지뿐이었다.

    “저녁에 이런 걸 먹고 괜찮겠어?”

    “허기진 배만 채우는 건데 어때요.”

    시현은 무진하고 마주 앉아 떡볶이를 먹으니 몇 달 전에 한인 타운에서 먹은 삼계탕이 생각이 났다.

    좋은 날을 떠올린 시현과 다르게 무진의 머릿속은 진보라 본부장과 할머니, 시현의 연결점이었다.

    그는 누구든 자신을 떠보는 걸 싫어하면서 궁금한 걸 참지 못했다. 결국 머릿속을 잠식해 가는 말을 꺼내고 말았다.

    치졸하고 유치한 비틀어진 마음인지도 모르고.

    “퇴근하고 바로 집에 온 건가?”

    “진보라 본부장을 잠깐 외부에서 보고 집에 왔는데 왜요? 뭘 중요한 걸 묻는 줄 알았는데 별일 아니었어요.”

    갑자기 무진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진보라를 만난 것을 숨길 줄 알았기에 뜻밖의 말에 입꼬리를 실룩거리며 되물었다.

    “진보라 본부장하고 친했던가? 미국에서는 몇 번 본 거 아니야?”

    “무진 씨한테 대학 친구라고 소개받은 게 전부예요. 무진 씨가 더 잘 알면서 뭘 물어봐요?”

    “아니, 저번에 진보라 본부장이 널 잘 아는 것 같아서. 그런데 밥도 안 먹었어?”

    “얼굴 마주하고 밥 먹을 만큼 친하지 않아요.”

    무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남을 배려해도 낯가림이 있는 시현의 성격에 자신의 친구라고 친분을 나눈 것은 아닌 모양이다.

    무진은 보라를 친구로, TS 투자 자산 운용사로 불러들일 땐 협력하는 동료로 생각했다.

    시현하고의 관계를 알아도 일에 지장 주지 않을 거라는 믿음도 있었다. 그런데 지난번 사무실에서 리스크를 시현으로 생각한 진보라가 밖에서 만나려고 했다는 것이 의구심을 자아냈다.

    “처남은 군대 생활 어떻대?”

    “…….”

    “다른 뜻 없어. 순수하게 안부가 궁금해서 묻는 거니까.”

    “곧 휴가를 나올 건가 봐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뿔뿔이 흩어지지 않고 동생하고 살게 된 것은 천만다행이었다.

    제대하고 동생은 한국에 정착하고 싶어 하니까 준비할 게 많았다.

    시현은 무진하고 관계가 정리되면 거액의 위자료를 손에 쥔 것이라 동생의 정착을 손쉽게 도울 수 있었다.

    그런데 진보라 본부장에 이어서 군에 있는 세현의 안부까지 묻는 무진의 의도가 궁금했다.

    “군 생활은 잘하나 보네.”

    “군대에 있어도 한국이라 적응이 수월한가 봐요.”

    “그건 다행이네.”

    신뢰에 금이 간 상태로 의심하고 무작정 찾아왔는데 시현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무진은 치졸하게 군 것과 어찌나 세게 물었는지 시현의 입술이 부르튼 게 미안해서 빤히 쳐다볼 수 없었다.

    무진은 가족의 안부로 대화의 물꼬를 트다가 엉뚱한 말이 튀어나올까 봐 애꿎은 사이다만 연거푸 마셨다.

    할머니가 진보라 본부장까지 손을 뻗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타이밍이 묘한 시가에 친하지 않은 진보라와 시현이 밖에서 만났다는 게 무진의 신경을 건드렸다.

    “언제 갈 거예요?”

    상념에 빠져 시현의 말을 듣지 못했다.

    다시 퉁명스러운 시현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늘도 안 가겠다고 고집 피우지 마요. 난 쉬고 싶으니까요.”

    “먹자마자 내쫓는 거 야박하잖아. 네가 자면 갈게.”

    “…….”

    “칫솔 좀 줘. 매운 거 먹어서 양치하고 키스하고 싶은데.”

    “뭐라고요? 당장 가요!”

    버럭 화를 내는 시현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는 욕실로 가서 칫솔을 찾아 제집처럼 양치하고 느긋하게 소파에 비스듬히 누웠다.

    몇 개 없는 접시를 설거지하고 소파에 있는 무진을 노려보는 시현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안 가요? 내일 출근해야 하거든요!”

    “네가 자면 알아서 갈 테니까 보채지 마. 근데 양치 안 해도 내가 했으니까 키스는 해도 되지?”

    “기가 막혀. 뭐라는 거…… 읍.”

    그의 키스에 시현의 말이 잘렸다.

    짧은 키스일 줄 알았는데 입술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길고 감미로운 키스에 빠져든, 서로를 끌어안으며 눈을 감았다. 이대로 흘러가듯 지낼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와 그녀는 멈추지 못했다.

    간신히 입술이 떨어졌다.

    “씻고 잠옷 입어. 네가 자면 진짜 갈 테니까.”

    “무진 씨, 자꾸 막무가내로 이러면…….”

    “고집 피우면 말할 때마다 키스할 거야.”

    “뭐, 뭐라고요?”

    “내 집도 싫다는데 진짜 막무가내로 여기서 출퇴근할지도 몰라. 그러길 바라?”

    멀어지고 싶고, 빨리 관계를 정리해야 하는데 헤어나지 못하는 것은 시현의 마음이 크기 때문이었다.

    시현은 눈을 가늘게 뜨고 제집처럼 좁은 소파에 앉은 무진을 바라보았다.

    나쁜 놈.

    차마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없는 말을 삼키고 시현은 쿵쿵 발소리를 내며 욕실로 들어가 버렸다.

    잠시 후, 눈꺼풀을 깜박이다 잠든 시현을 바라보는 그는 피식 웃음이 났다.

    진보라하고 뭔가 있었더라면, 자신이 모르지 않았을 텐데.

    할머니가 어디까지 손을 뻗었을지 알 수 없다 보니 시현이 누굴 잠깐 만나는 모습만 보고 불신에 휩싸인 자신이 웃겼다.

    ‘근데 보라가 시현을 왜 만나자고 한 걸까.’

    무슨 대화가 오고 갔는지 물어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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