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화 (10/74)

10.

아버지가 능력이 없던 것도 아니었는데 엄마가 돈만 밝히며 치장하기 바쁜 사람인 게 어릴 적에는 이해할 수 없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그래도 한 가닥 희망을 품고 연락을 취했다. 하지만 장례식에 오지 않고 보험금 타령만 하던 최악의 여자.

“이시현.”

“아, 미안해요.”

“저녁이라도 든든하게 먹어. 다른 거 생각하지 말고.”

엄마의 시선이 느껴져 맛있는 요리가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정신이 반쯤 나가 있었다.

엄마가 있는 자리에서 쏘아보는 눈빛에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뛰쳐나가고 싶은데 그렇게 했다가는 더더욱 남의 눈에 띌 거 같아서 끝끝내 참을 수밖에 없었다.

다른 생각하지 말라는 데도 머릿속에 처참하게 죽어 가던 아버지의 모습과 새빨간 매니큐어가 발라진 엄마의 손톱이 동시에 떠올랐다.

무진에게만은 절대로 들키고 싶지 않았던 엄마라는 존재.

허무하게 이런 곳에서 맞닥뜨릴 줄 누가 알았을까.

신의 장난도 아니고서야.

속이 상하고 뒤틀리고 있었다.

무진의 할머니가 돈 봉투를 주며 격에 맞지 않는다고 할 때 수긍할 수밖에 없었던 모녀 관계.

온몸이 바닥으로 꺼지는 느낌이었다.

시현은 쓴 커피를 마시지 않는 것은 쓴 인생이 싫어서였다.

거지 같은 기분을 떨쳐 버려야 하는데 맛있는 요리조차 시현의 기분을 풀어 주지 않았다.

최고급 요리를 먹는데도 입 안에 돌이 굴러가는 듯한 껄끄러운 기분이 계속되었다.

비싸고 맛도 좋은 요리일 텐데, 맛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한 입 먹으면 물 한 컵을 마시며 간신히 식사를 끝냈다.

레스토랑을 나올 때 팔짱을 끼고 무진은 시현의 허리에 팔을 감으며 누구 보란 듯이 애정을 과시했다.

그의 할머니가 붙인 사람이든 엄마든 마음껏 볼 수 있게.

애정을 풀풀 뿌리는 듯이 가식적으로 웃으며 눈에서 꿀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였다.

무진에게 들러붙는 여자들을 떼어 낼 때와 비슷한 행동이었다.

레스토랑을 나와서 차를 타고 운전하면서도 그는 시현의 손을 놓지 않았다.

엄마를 보지 않았으면 어떤 분위기였을지 감이 잡히지 않았지만, 시현은 무진의 손을 잡은 게 지금도 동아줄 같았다.

그의 차가 차고에 들어갈 때까지도 목적지를 알지 못했다.

호텔을 벗어난 후 어딘지 모를 으리으리한 집 문을 열고 그는 별안간 시현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어정쩡하게 안긴 자세로 들어간 집을 보고 시현은 어리둥절할 따름이었다.

“여기가…….”

“혼자 있으면 땅굴 파고 있을 거잖아. 오늘은 같이 있어.”

“위로 같은 게 필요한 어린애 아니에요. 사장님하고 식사하는 것으로 업무는 끝나지 않았나요?”

무진은 어깨를 으쓱이며 슈트 상의를 벗었다.

그사이 그의 품에서 벗어난 시현은 집안을 두리번거리며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

“마틴이 당신에 대해 아는 척을 하더니 아무것도 몰랐던 모양이야.”

“여기서 마틴 얘기가 왜 나와요?”

“신원 조회만 했거든. 이시현에 대해서 시시콜콜하게 알아보지 않고.”

“그래서 이제 이혼할 마음이 들던가요? 이혼 합의서에 빨리 사인해서 줘요. 법원에 제출하게요.”

무진은 어이없다며 소리 내어 웃었다.

“말이 왜 그런 식으로 끝나지?”

계약과 결혼은 유효하다니까 콕 집어서 이혼할 만한 사유를 만들지 못해서 끌려가는 거 퍽 좋지 않았다.

시계를 힐끔 보니 밤 10시.

레스토랑을 나와서도 빙빙 돌다가 그의 집에 온 거 같았다.

며칠 전에는 호텔에서 지내더니 완벽하게 꾸며진 집안을 보니 세상에는 돈이 최고인 것 같았다.

그와의 격이 다르다는 것을 깨닫기 전에 늦은 시각인 것을 핑계로 빨리 그녀의 오피스텔로 가고 싶었다.

잠은 집에서 자는 게 맞다. 그리고 내일 출근해야 하니 몸이 쉬고 싶다고 아우성치고 있었다.

시현은 비서로서의 마음가짐으로 차분하게 말했다.

“늦었습니다. 이만 가 볼게요.”

“혼자서 궁상떨지 말라니까. 입을 만한 것을 찾아볼 테니까 가지 마.”

결혼 전에도 가지 말라고 붙잡는 바람에 술과 야릇한 분위기에 휩쓸렸던 게 생각나서 빠져나가려고 했다.

그에게 붙들리면 정말 헤어 나올 방법이 없었다.

언젠간 무진에게 매달리는 여자들의 심정이 조금이나마 이해되기 시작했으니까.

마성의 남자여서 그런지 달콤한 몇 마디면 아찔해져서 정신을 차리기 어려웠다.

그걸 몸소 겪은 그의 애인이자 아내가 아니었던가.

시현은 목소리를 가다듬고 상황을 정리하는 말을 꺼냈다.

“할머님과 사장님 어머니께서 이런 걸 알면 가만히 있겠어요? 애인 대행은 제대로 할게요. 그러니까 깔끔하게 이혼하고 계약만 이행하죠.”

“…….”

“제안하는 거예요. 조금 더 사장님께 이로운 쪽으로.”

“누가 이로워? 연애하는 척 보다 아내가 있는 게 훨씬 편한데.”

시현은 무진의 말에 가시를 세워서 되물었다.

“아내가 있으면 돈 안 들이고 할머니가 붙이는 여자들을 퇴치할 수 있다는 건가요?”

“그럴 리가. 난 네가 제안대로 일할 때뿐만 아니라 혼인 중에도 몇 번 오는 여자들 막아 줄 때마다 계약대로 지급했어.”

언제요? 난 돈 받은 적 없는데?

입으로 내뱉으려다가 흠칫했다.

결혼 후 생활비는 전부 그가 책임져서 통장 관리를…….

시현은 빠르게 그에게 계약금을 받았던 통장의 잔액을 확인하고는 입이 벌어졌다.

돈을 저렇게 써 대면서 어떻게 외국 자본 유치, 투자를 하는 건지.

상상조차 안 하던 엄마를 만난 게 스트레스여서 시현은 무진과 더는 실랑이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이제껏 만 원 한 장도 허투루 쓰지 않았는데 이건 몇 달 동안 많은 돈이 통장에 남았다.

남편 강무진은 그녀의 인생을 좌지우지 송두리째 흔들고 있었다.

“술 한잔할래?”

“늦은 시간이고 내일 출근해야 합니다.”

“왜 그렇게 딱딱해진 거지? 하긴 뭐든 잘해도 넌 융통성이 부족했지.”

시현은 남의 가정사, 연애사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주어진 일만 하며 하루하루 살아가고, 미래 지향적인 것에만 몰두하는 편이었다.

무진의 연애사에 그녀가 끼어든 꼴이었지만, 정확히 애인인 척하는 일을 그저 꼭두각시처럼 해 온 것뿐이었다.

애드리브 하는 일이 적으니 무진이 그녀에게 융통성이 부족하다고 핀잔을 주는 건 이해했다.

지금도 가볍게 한잔하고 가면 될 것을 내일 출근해야 하는 사명감에 술에 취할 수 없다고 말한 것이다.

“융통성이 부족해서 죄송합니다. 이만 가도 되겠습니까?”

더더욱 딱딱한 목소리로 말하며 무진에게 답을 요구했다.

“안 돼. 가지 말라고 했어.”

“사장님.”

“혼자서 우는 꼴은 내가 못 봐.”

“내가 왜 울어요? 엄마 없다고 우는 어린애 아니에요. 사탕 안 준다고 우는 사장님하고 다르다고요.”

무진이 크게 웃으며 말했다.

“내게 반기를 들고 날 미치게 하는 사람은 정말 이시현뿐이야. 열 살 때부터 내 앞에서 설설 기는 사람만 보다가 이시현하고 결혼해서 혼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

“내가 사장님의 몸종이 아니니까요.”

“그렇지. 몸종이 아니라 애인이고 아내지.”

무진이 어느새 위스키를 담은 잔을 시현에게 내밀었다.

잔을 받기 싫었지만, 실랑이할 체력이 없어서 술잔을 받아 들고 단숨에 마셔 버렸다.

윽. 커피보다 더 쓰고 독한 위스키에 목이 타들어 갈 거 같았다.

입안에 퍼지는 독한 알코올에 머리가 울리는 느낌이었다.

“됐어요? 마셨으니까 이만 가도…….”

무진과 시현의 시선이 얽혔다.

이상하게도 술과 엮이면 불꽃이 일으키는 사이였다.

무진이 엷은 미소를 지으며 시현의 빈 잔에 다시 위스키를 채웠다.

“좀 더 마셔.”

“술 마시고 해롱거리는 여자를 안는 거 무진 씨 스타일 아니잖아요. 술 먹고 취해서 들러붙는 여자는 최악이라고 끔찍하게 싫어했으면서.”

“할머니가 붙여 주는 여자들과 이시현이 같은가? 아내가 술 취해 있으면 잘 돌봐야겠지.”

“난 누가 돌봐 주는 거 싫어해요.”

“알아. 그러니까 당신이 날 돌보면 되겠네. 나와 결혼을 유지하면 인생이 달라지지 않겠어?”

진작 달라졌다고 말하면 되나.

강무진을 만나고 나서 형편은 나아졌고 숨통이 트여서 쓴 인생 맛을 덜 느끼고 있었다.

무진의 할머니로부터 돈 봉투를 받고 그에게 벗어나려고 숨은 다음부터 이상하게 꼬인 인생이 되었지만.

“난 진심으로 이시현을 원해.”

“내가 할머니가 붙인 여자들과 달라서요?”

“사랑해서라니까.”

천연덕스럽게 거짓말하는 무진을 보며 시현은 연거푸 위스키를 들이켰다.

무진의 말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의 주변에 어떤 여자들이 있었는지 낱낱이 봤으니까.

왕 할머니의 비서가 보여 준 신상 명세에서 하나같이 대단한 부모와 경제력을 갖추었다.

여자들이 가진 스펙 또한 무시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 여자들도 한낱 장난감으로 취급하던 분입니다. 시현 씨는 새롭고 처음 접해 보는 부류라서 조금 더 흥미를 느낀 것뿐입니다.’

믿지 않으려고 해도 사는 게 다르다는 것.

그리고 사진 속의 무진은 시현이 아는 모습이 아니었다.

진실하지 못한 사람을……. 사랑해서 마음이 아픈 거야.

내가 강무진을 사랑해서 심장이 찢어지는 것처럼.

당신은 날 놀리며 장난감 취급하는 거야. 그렇지?

*** 

취기가 올라서 그에게 몸을 맡긴 것은 아니었다.

위스키를 연거푸 마시며 몽롱해졌지만, 정신없는 시현과 달리 무진의 눈빛은 살아 있었다.

지독하게 그녀를 삼키려는 듯이.

그리고 순식간에 숨 쉴 틈도 없이 무진이 시현의 허리에 팔을 감싸고 격렬하게 입맞춤했다.

입술이 맞물린 채 알싸한 알코올 냄새가 온몸으로 퍼져 나가는 게 느껴졌다.

무진에게 안겨 침실로 가는데도 야릇한 분위기에 또다시 휩싸인 것은 생각하지 않았다.

오롯이 뜨겁게 엉킨 눈빛으로 그저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부부 사이에 서로의 옷을 벗기는 것은 능숙해졌기에 단추를 풀어내는데, 몇 분이 걸리지 않았다.

시현은 무진의 손길이 다급해지는 것을 느끼며 묘한 미소를 지었다.

서로의 몸을 알기에 뜨거운 그의 손은 머뭇거림 없이 자유롭게 그녀를 탐험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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