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 (9/74)

9.

왕 할머니한테 불만을 토로하는 무진을 보면서 박 실장은 말을 보태지 않았다.

“백야 그룹으로 내 목을 조를 수 없게 준비해야 하니까 주식, 채권이 나오면 곧바로 사들여.”

“알겠습니다.”

“아, 시현이는 일 좀 해?”

“며칠 안 되었지만 성실하고 잘합니다. 이력서에는 4개 국어를 한다고 썼던데 독일어도 조금 하는 모양입니다.”

“할 줄 아는 게 공부뿐인가 봐.”

나직이 중얼거리는 말을 들은 박 실장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칭찬인 듯한데 무언가 서운한 느낌이 들었다.

“이시현 씨의 업무를 늘려도 되겠습니까?”

“그건 직속 상사인 박 실장 권한이니까 알아서 하되, 보안이 우선이라는 걸 상기해.”

“알겠습니다.”

갑자기 전화기가 울렸다.

발신 번호를 확인한 무진이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전화를 받자, 박 실장은 다 마신 커피 잔을 챙겨 나갔다.

“네. 어머니.”

-잘 지내는 거니?

“잘 지내고 있습니다.”

-할머니가 식사 한번 하자는데 주말에 시간 좀 내겠니? 불쌍한 엄마 생각해서 꼭 참석을…….

“어머니, 며느리 안 보셨죠? 그 사람하고 같이 갈 테니까.”

-누가 며느리니? 그런 건 애들 소꿉장난이지 그게 결혼이니?

어머니의 높아진 언성에 무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양가 허락받고 결혼할 나이가 훌쩍 지났는데도 인정을 안 하시니 자꾸 겉돌면서 거리를 두려는 거였다.

정략결혼이 필요치 않는다고 몇 년을 말하고 있는데도 들어주지 않았다.

무진도 격해진 상태로 짜증스럽게 말했다.

“제가 종마도 아니고 후사를 보겠다고 억지로 정략결혼을 한다는 게 말이 됩니까?”

-네가 백야 그룹의 희망이니 그런 거야. 후사 문제가 있다는 게 아니란다.

“어머니 며느리입니다. 보듬어 주지 않겠습니까? 어쨌거나 며느리도 같이 보시는 거 아니면 안 갑니다.”

-할머니가 받아들이겠니? 내가 그 애를 보듬는다고 뭐가 달라지겠어?

“달라질 겁니다. 나중에 어머니만 찾아뵈겠습니다.”

-무진아. 아들!

“끊습니다.”

뚝. 일방적인 대화에 무진은 똑같은 방식으로 전화를 끊어 버렸다.

*** 

시현은 퇴근 무렵, 박 실장의 부탁이자 업무 지시로 무진과 식사하러 이동하고 있었다.

난처해하는 박 실장을 외면할 수 없어서 지난번처럼 무진의 차를 탔다.

오늘도 별일 없을 것 같은데 이런 시간을 내서 데이트를 꾸며야 하는 것이 못마땅했다.

“집에 가서 쉬고 싶은데 안 되겠죠?”

투정을 부리듯 말해 봤지만, 기대감은 없었다.

“알면서 왜 물어?”

“밥만 먹는 거면 맛있고 비싼 거 사요.”

시현은 심기가 불편하다는 무진의 신경을 긁을 생각이었지만, 박 실장의 부탁인 것을 되새기고 있었다.

밥이라는 것은 모름지기 친하거나 편한 사람하고 먹어야 했다.

어정쩡한 관계인 남녀가 오붓하게 먹는 것은 달갑지 않았다.

몇 마디 이후 차 안에는 불편한 공기가 퍼져 그녀를 짓누르는 느낌이었다.

음악도 틀지 않은 적막만 흐르는 자동차 안.

어디로 가는지 밖을 보자 그의 차는 지난번처럼 회사에서 멀지 않은 호텔로 향하고 있었다.

목적지가 호텔인 걸 눈치채고 시현은 무심하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또 우리를 보는 건가요?”

예상과 다른 답이 들렸다.

“이번에는 순수하게 밥 먹는 거야. 설마 호텔이라고 섹스만 한다고 생각하는 거 아니지?”

시현은 대답 대신 입술을 삐죽였다.

라스베이거스에서 결혼한 걸 빼면 무진과 시현은 고용 관계였다.

얼마나 불편한 관계인지 알지 못하는 그의 무심함에 짜증이 났다.

고용된 사람과 즐거울 게 없으니 술을 마시던 식사를 하던지 빨리 먹고 집에 가고 싶을 뿐이었다.

엘리베이터도 번쩍거리는 게 왜 이렇게 눈에 거슬리는지 몰랐다.

머릿속을 비우고 싶었던 시현은 무진과 한 뼘의 거리만 둔 채 바짝 붙어서 걸었다.

생각해 보니, 그에게서 여자들을 물리칠 때면 이렇게 비싸고 호화스러운 레스토랑에 와서 보너스처럼 대접을 받았다.

그때와 다른 식사 자리인 걸 아는데도 굳이 마주 앉아 밥을 먹어야 하는지 의문이 들었다.

시현은 그가 순수하게 밥만 먹는다는 걸 믿을 수 없지만, 회사를 그만두고  나갈 용기도 없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메뉴판은 열어 보지 않고 말했다.

“주문은 무진 씨가 마음대로 해요.”

“아무거나?”

“네. 비싼 거로.”

그에게 주문을 맡기고 화장실을 다녀온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진하고 동행하는 게 아니면 이런 곳에 오지 않았을 테니 호강한다고 생각해야 할까.

복잡한 속내가 자꾸 얼굴에 드러날까 싶어서 날숨을 쉬며 화장실에 갔다.

볼일을 보고 화장실에서 손을 씻는데 거울에 비친 여자 얼굴을 보고 시현은 화들짝 놀랐다.

“너…….”

여자의 목소리에 순간, 시현의 몸이 파르르 떨렸다.

차마 여자를 비켜 나가지 못하고 화장실 세면대에 손을 올린 채 심호흡하고 있었다.

목소리만 들어도 소름이 돋고 한국에 와서도 절대로 마주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었다.

길에서 부딪힌 남보다도 못한 사이기에 모른 척하고 없어지기를 바랐는데.

아버지가 사고로 돌아가시면서도 원망하지 말라고, 인간은 누구나 제 인생을 사는 거라고 하셨다.

하지만 평생 안 보고 살기를 바랐기에 한국에 오는 것이 껄끄러웠다.

동생의 부탁만 아니었으면 절대로 한국 땅을 밟고 정착하려고 애쓰지 않았을 것이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는 게 맞는 듯했다.

“너 설마, 한국에 와서 날 쫓아다닌 거니?”

한 옥타브 높은 목소리로 시현을 나무라는 여자.

“누구시죠?”

세면대에서 몸을 돌려 여자를 노려보며 되물었다.

처음 보는 사람인 것처럼 시현의 눈동자는 텅 비었다.

“누구? 얘 좀 봐. 머리가 어떻게 된 거니?”

“말조심하세요.”

“버릇없는 건 여전하네. 아버지 사망 보험금으로 이런 곳에서 밥이나 먹고 아주 되바라진 애네.”

“갈 길 가세요. 상관없는 돈에 가타부타 말할 처지 아니잖아요.”

“하여간 구질구질하게 날 찾아다니다니 기가 막히네. 네 동생이랑 왔니?”

끔찍한 여자였다.

하필이면 넓고 넓은 한국 땅에서 그것도 수많은 호텔 레스토랑에서 아버지를 버린 여자를 만났을까.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안 보고 살아야 할 인간이니 그냥 이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그쪽이 어디에 사는지 뭘 하는지 알고 싶지 않으니까 길에서 봐도 알은척하지 마세요.”

“얘가 버르장머리 없이 그쪽?”

왜 시비를 걸어!

당신은 그럴 자격조차 없어!

소리를 지르고 싶은 것을 꾹 참으며 화장실을 나가는데 뒤따라 나오면서 여자가 시현을 붙잡았다.

“너 여기서 사는…….”

여자는 말을 매듭짓지 못하고 시현의 앞에 서 있는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일순간, 시현은 무진이 동아줄을 내려 주는 사람처럼 보였다.

무진의 애인인 척하며 남을 속였던 것처럼 나긋나긋하게 말하며 바짝 몸을 붙었다.

“나 안 온다고 여기까지 온 거예요?”

“뭐 곤란한 일이 생겼나 해서 와 봤어.”

찰나의 시간이라고 생각했는데 몇 마디 주고받은 게 꽤 시간이 흐른 모양이었다.

시현은 입꼬리를 한껏 올리며 말했다.

“화장실에 사람이 좀 많았어요. 가요.”

이쯤에서 물러나 주길 바랐으나 눈치코치 없는 엄마가 그의 앞에 나섰다.

상대가 불쾌하든 말든 감상하듯 무진을 위아래로 훑어보고는 턱을 올리고 말했다.

“누군데 우리 애를…….”

시현이 엄마의 말을 잘랐다.

“자기야. 나 배고픈데 빨리 가요.”

시현의 태도에 무진은 중년 여성과 그녀를 번갈아 가며 쳐다보다가 시현을 구제하듯 손을 잡았다.

걸음을 옮기려고 하자 몰상식하게도 시현의 팔을 확 낚아채는 중년 여성을 보며 무진이 눈살을 찌푸렸다.

“뭡니까?”

상당히 날이 선 무진의 목소리에 시현은 심장이 덜컹거렸다.

“누군데 우리 애를.”

“그만해요. 시비 붙은 거 사과할 테니까 각자 갈 길 가요.”

“넌 말을 그따위로 하니? 버릇없는 게 누굴 닮은 건지.”

“말 시키지 마요. 상관없는 사람이잖아요.”

중년 여성이 잡은 팔을 확 쳐 내고 시현은 무진에게 팔짱을 낀 채 화장실을 벗어났다.

자리로 돌아가서도 심장이 벌렁거리고 하필 만나도 강무진 앞에서 걸렸는지 꺼림칙하고 화가 치밀었다.

모성애는 눈곱만큼도 없고 오로지 제 살길만 찾는 여자는 보고 싶지 않았다.

워낙 기대치가 낮았고, 그 여자의 말을 빌리면 배만 빌려서 나온 엄마라는 존재였다. 시현은 빨리 머릿속에서 지난 일을 몰아내고 싶었다.

하지만 눈치가 빤한 무진이 툭 던지듯 물었다.

“시비가 붙은 건가?”

“…….”

“아는 사람이지?”

무진이 묻는 말에 진실을 말해야 할지, 거짓으로 둘러대야 할지 망설였다.

주문한 코스 요리가 나오는데, 하나하나 신경 써 주는 무진을 보며 시현은 울컥했다.

50대 초반이어도 엄마는 여전히 아름답고 주름 하나 없어서 나이에 비해 훨씬 젊어 보였다.

화장실 주변의 조명이 은은해서 얼핏 보면 시현의 엄마는 30대로 보였을 것이다.

끔찍한 하루가 짜증 나고 괜히 서글픈 생각이 들어 자꾸 울컥했지만, 애써 눈물을 참고 있었다.

그런데 무진이 시현의 손을 다정히 잡으며 나오는 요리를 한 입 넣어 주면서 애정을 표했다.

시키지 않아도 잘하는 강무진답게.

“누군지 말 안 해 줘?”

“엄마예요.”

툭 던지듯 내뱉었다.

“엄마? 당신 부모님이 없다고 하지 않았나? 아버지는 사고로 돌아가시고 처남만 있는 줄 알았는데.”

“동거 중에 낳아서 아버지가 혼자서 세현이와 나를 키웠어요.”

남 말하듯 시현의 말은 공허하게 울렸다.

“생일 때마다 찾아와서 케이크랑 옷을 사 주었지만, 아버지의 등골을 빼먹었던 여자예요.”

그는 시현이 빠르게 말하는 것을 듣고만 있었다.

“할아버지가 남겨 준 선산을 팔아서 우리는 미국에 갔으니까요. 그러고서 본 적 없어요.”

엄마가 주는 것은 전부 그만한 대가를 치렀다.

시현과 세현에게 선물을 주고 나면 꼭 아버지한테 큰돈을 뜯어 가던 엄마가 미웠다.

자식을 둘이나 낳았지만, 결혼한다면서 아버지한테 비수를 꽂던 엄마는 그야말로 악마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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