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5/74)
  • 5.

    몸이 바들바들 떨리고 서 있는데도 무릎이 꺾일 거 같아서 발끝까지 힘을 들이려고 했다.

    하지만 주저앉지 않게 그가 허리를 단단히 잡고 있을 뿐이었다.

    “책상에 눕히고 싶지만, 박 실장 앞에서는 조심해야겠지?”

    시현은 그를 노려보았다.

    명백히 약 올리는 말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난 나 싫다고 도망간 여자를 붙잡아 두는 질척거리는 놈이 아니야.”

    “지금 질척이는 거 아니에요?”

    “사랑이니까. 내가 널 사랑한다는 말을 믿어 봐.”

    자꾸 무진의 입에서 사랑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걸 보니 진짜 거짓말에 능숙한 듯싶었다.

    어쩌면 그에게는 의미가 없는 말일지도 모른다.

    사랑이라는 말에 심장이 고장 난 것처럼 불규칙하게 뛰는 것은 그녀뿐이니까.

    “놔요.”

    “당신이 할 말 있다고 문 열고 사무실에 들어와서 유혹하고는 발을 빼려고?”

    “무진 씨!”

    시현이 소리를 높여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무진은 방향을 제시하듯 너무 쉽게 상황을 정리하며 말했다.

    “할머니든 어머니든 돈을 주면 받고 욕하면 받아쳐. 두 번 다시 계약을 이행하지 않고 도망치지 말고. 네가 사라지면 난 처남부터 잡을 테니까.”

    동생 없이 어디에도 가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모양이다.

    하긴 동생 세현이 한국에 정착하고 싶어 해서 시현이 이곳으로 도망 와 취업까지 했다는 걸 그가 모르지 않겠지.

    말싸움으로는 절대로 이길 수 없는 나쁜 놈이었다.

    괜히 싸움을 걸어서 문제만 커진 것은 아닌지 문득 걱정스러워서 최대한 불쌍한 척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픽, 웃더니 살짝 입을 맞추었다.

    “계약대로 잘 좀 해. 우리의 연결 고리는 유효하니까.”

    세상 사는 게 얼마나 팍팍한지 알면서 돈이 필요하다고 겁 없이 그의 제안을 덥석 물었다.

    그리고 무시무시한 계약에 묶인 것도 싹 잊고 즉흥적으로 결혼까지 했다.

    그를 사랑하지 않았으면 괴로움에 떠나려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으스스한 목소리로 말을 덧붙었다.

    “남자랑 도망갔으면 죽였겠지만, 혼자서 호텔에 숨어 있는 건 아주 귀여웠어.”

    귓가에 울리는 그가 나직이 뱉은 말에 흠칫했다.

    그가 도무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는데도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에게 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여자가 시현이었다.

    오만한 남자가 진짜 사랑에 빠진 눈빛을 하고 있으니 시현은 헷갈리기 시작했다.

    “할머님을 막아 줄 것도 아니잖아요. 이런 일인 줄 알았으면 무진 씨가 제안한 것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거예요.”

    “내 아내로 버티면 막지 않아도 막아질 텐데.”

    “자신 없어요. 미안해요.”

    돈을 받고 헤어지기를 결심했다면 그가 경멸할 줄 알았다.

    경멸의 시선 따위 견딜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예상과 정반대로 그는 주는 돈을 다 받아서 가지라고 했다.

    쉽게 정리될 일이라 생각했는데…….

    잠깐 딴생각을 하는데 그가 허리에 감은 팔에 힘을 세게 쥐었다.

    밀치려고 팔을 뻗어도 그는 꿈쩍하지 않았다.

    입술이 닿았다.

    살짝 닿는가 싶어서 고개를 돌려 보려고 해도 갑자기 헤집으며 격하게 숨결을 삼켜지자 정신이 아득해졌다.

    진한 키스에 정신을 차리지 못한 시현의 표정이 그의 기분을 고조시켰다.

    “우리 잘 맞잖아. 키스로 불꽃이 일렁이는 남녀 사이가 생각보다 많지 않아.”

    시현은 아니라는 말을 내뱉지도 못하고 무진이 불러오는 아찔한 감각에 빠져들었다.

    불이 붙는 사이가 좋은 건가.

    이런 걸 바란 게 아닌데 이 남자를 어떻게 밀치지.

    머릿속과 몸의 반응은 정반대였다.

    두 사람의 숨소리만 들리는 사무실이 어느새 1년 전 라스베이거스의 결혼식장이 된 듯했다.

    그 누구와 비교하지 않아도 키스만큼은 좋았다.

    시현은 남은 업무를 어떻게 했는지, 버스에서 내려 집까지 오는 동안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에게 화를 내다 키스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모습만 보이고서 지친 몸으로 오피스텔에 도착했다.

    그의 사무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정신이 하나도 없는지, 집에 들어서자마자 한숨이 터졌다.

    “후유…… 거기서 왜 반응해!”

    집안에 불도 켜지 않고 침대에 누워 가만히 천장을 바라보았다.

    호텔을 나와 하루 만에 얻는 자그마한 오피스텔을 둘러볼 새도 없이 지친 몸을 침대에 눕히니 무거운 눈꺼풀이 감기려고 했다.

    “씻고 자야 하는데.”

    신경전을 벌여서 몸에서 기력이 전부 빠져나간 듯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천장을 바라보다가 시현은 옆으로 몸을 돌려 살며시 눈을 감았다.

    *** 

    1년 전.

    시현은 졸업을 반년 앞두고 친구가 급하게 귀국하게 되어서 몇 달 비싼 아파트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월세는 이미 친구가 냈고 시현은 아파트를 관리하면서 공과금과 생활비를 마련해야 했다.

    아버지를 따라 미국에 와서 대학 공부까지 하게 되었지만, 사고로 돌아가시고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었다.

    아버지가 남긴 것으로는 고등학교까지 졸업할 수 있었다.

    대학 진학 후에 안 해 본 아르바이트가 없고 장학금 받으며 간신히 버티며 살았다.

    아르바이트를 하나 늘려서 금요일에만 일하는 레스토랑에서 작은 소란이 있었다.

    듣고 싶지 않아도 발악하는 여자의 목소리가 가게 안에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시현뿐만 아니라 레스토랑에서 일하는 직원들은 남녀의 대치 상황을 힐끔거렸다.

    “결혼해 달라고 조르지 않을게요. 우리를 만나게 한 어머니들을 생각해서라도 조금 더 만나요.”

    “…….”

    “잘못했어요. 그 여자가 회사 직원인지 몰랐어요.”

    “…….”

    “뭐라고 말 좀 해 봐요. 내가 잘못했다고 빌잖아요.”

    한가한 시간이었지만, 레스토랑 사장 마틴과 아는 사람인지 두 남녀는 손님이 없다고 해도 민망스러운 상황을 연출하고 있었다.

    여자는 남자의 팔을 붙들고 울기 직전이었고 남자는 무심한 표정이었다.

    시현은 힐끔거리며 보지 않으려고 했으나 여자가 작정하고 매달리니 가게 안에 소란이 점점 커졌다.

    듣고 싶지 않아도 여자와 남자의 대화는 귀에 쏙 박힐 정도였다.

    그들의 대화는 한국말이었기에 미국인인 직원들은 궁금해서 귀만 쫑긋거렸다.

    “정말 이럴 거예요? 잘못했다고 몇 번을 사과하는지 알아요!”

    “직원한테 가서 직접 사과해.”

    “무진 씨. 일개 직원한테 사과는…….”

    “백야 그룹에서 파견 나온 직원을 안내하다가 여자라는 이유로 너한테 맞았잖아. 그 직원이 고소·고발하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겨.”

    남자는 일어서서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 내듯 손으로 툭툭 치면서 여자에게 뭐라고 하는 것처럼 보였다.

    “무진 씨!”

    남자의 이름을 얼떨결에 듣게 되었지만, 여자는 매달리고 남자는 귀찮은 것을 떼어 내려는 행위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한 달 새 세 번이나 레스토랑에서 비슷한 광경을 목격한 시현은 혀를 차며 속으로 남자 욕을 해 댔다.

    남의 사정은 알 수 없지만 울고불고하는 여자를 매정하게 떼어 내는 남자의 모습이 퍽 좋지 않았다.

    시현의 눈에 남자는 카사노바처럼 보였다.

    마음을 줄 듯 말 듯 간 보다가 여자를 갈아 치우면서 마음에 상처를 입히는 거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이상하고 못된 남자가 시현에게 한국말로 말을 걸었다.

    “한국 사람이죠?”

    “그런데요?”

    “퇴근 언제 합니까?”

    “왜요?”

    “우연히 그쪽이 통화하는 것을 들었거든. 나쁜 일 아니니까 5분만 시간 내요.”

    건방이 하늘을 찌르는 남자였지만, 아르바이트하는 레스토랑 사장 마틴과 아주 각별해 보여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남자와 함께 온 날 시현에게 말을 걸었다. 그리고 레스토랑을 나갔다가 시현이 퇴근할 무렵 다시 왔다.

    예약제로만 운영되는 레스토랑에 전화 한 통으로 자리가 생기는 남자였다. 그래서 시간을 내라는 말이 무엇 때문인지 궁금증이 커졌다.

    남자가 시현이 통화하는 것을 들었다는 것부터.

    일을 마치고 퇴근하던 시현은 레스토랑 앞에서 남자가 차에 타라고 손짓하자 망설였다.

    저런 자동차는 누가 타나 했는데 돈 많은 사람이 타는 게 맞는 듯했다.

    조수석에 앉아도 먼지를 털어 내고 사뿐히 궁둥이를 붙여야 할 것 같은 억 소리 나는 스포츠카를 빤히 쳐다보았다.

    남자가 웃는 얼굴로 말했다.

    “이상한 짓 안 해.”

    머뭇거리니까 한 마디 툭 던지고는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받아. 마틴이 내 신원은 보증할 거야.”

    레스토랑 사장 마틴이 좋은 사람이니까 확인까지 할 필요가 없을 듯했다.

    시현은 전화는 받지 않고 조수석 문을 열고 좌석에 앉았다.

    남자는 시현을 보지 않고 차 문이 닫히자 그대로 레스토랑을 벗어났다.

    시현이 전화 통화는 어떻게 들었는지 모르고, 어떤 말을 들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정말이지 시현은 남자의 차를 타고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상상하지 못했다.

    어디로 이동할지 몰라 잔뜩 긴장했는데 그는 사람이 많은 곳에 차를 세웠다.

    말도 없이 차에서 내려 손에 커피와 도넛을 들고 돌아오더니 차 문을 열라고 눈으로 말하고 있었다.

    “일하면서 저녁은 먹었지?”

    “네.”

    이 남자 왜 반말이야.

    한국어로 말하는 거면 모르는 사람한테 존댓말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시현은 속으로 구시렁거릴 뿐 그가 주는 커피를 건네받았다.

    해코지하려고 사람을 부른 건 아닌 듯 자동차는 비싼 것이고 아르바이트하는 곳에서 한 달 새 세 번을 봐서 그런지 아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조금 친숙한 느낌이랄까.

    윽.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인상을 썼다.

    상대에게 뭘 마실지 물어보지 않고 멋대로 사 온 것을 보니, 남의 말을 징그럽게 듣지 않는 부류 같았다.

    시현은 레스토랑에서 여자들이 그에게 매달리는 것을 생각하고는 고개를 돌려 빤히 쳐다보았다.

    짙은 눈썹, 쌍꺼풀은 없지만, 턱선이 날카로운 게 잘 빚은 조각처럼 꽤 잘생긴 얼굴이었다.

    ‘아버지가 그랬지. 남자는 얼굴 뜯어 먹고 살면 안 된다고.’

    그런데 잘생긴 남자를 보니 한번 꽂힌 눈동자가 멈춘 듯 움직이지 않았다.

    시현은 아버지도 잘생겼으면서 돌아가시기 전에도 남자는 무조건 돈이라고 했던 말이 생각났다.

    하지만 이런 남자를 잡았다가는 제 명에 살지 못할 거 같은 느낌이었다.

    희한하게 잘생겼는데도 손대면 안 되는 위험이 짙은 남자로 보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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