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4/74)

4.

고요하기만 한 사무실에 그새 깔아 둔 사내 메신저가 깜빡거렸다.

-시현 씨. 투자 요청 메일에 따른 자료를 정리하세요.

박 실장의 업무 지시에 메일을 열었다.

외국 자본을 국내 기업에 투자하려면 꼼꼼하게 살펴야 할 게 한둘이 아니었다.

외국어 능통자가 사장 비서가 되는 것은 흔하지만, 이건 통역뿐만 아니라 번역된 서류를 한 치의 실수 없이 정리해야 했다.

‘능력 검사인가.’

아르바이트로 미국에서 통역한 적이 있지만, 번역은 처음이었다.

업무 요청 메일이어서 어려운 것은 없으나 사장에게 올라가는 서류이기에 토씨 하나라도 문제가 생기면 안 되는 것이다.

인수 합병으로 아직 믿을 만한 사람이 박 실장뿐이어서 그런지 서류는 간결하고 보안이 잘되어 있었다.

사무실 청소는 깔끔하고 사무 가구 배치는 업무 효율을 높이기에 최적화였다.

출근해서 점심시간이 될 때까지 무진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감정 따위 꾹꾹 누르며 머릿속에서도 강무진을 잊겠다고 애써 보지만, 그녀의 눈은 자꾸 그가 있을 사무실 문을 향했다.

“시현 씨는 점심 먹고 오세요. 사원증 가지고 지하에 구내식당을 이용해도 되고, 근처에 TS와 계약된 식당을 이용해도 됩니다.”

“실장님은요?”

“사장님이 외부에 있어서 오시면 식사할 겁니다.”

“아, 네.”

사무실에 없었구나.

지갑과 핸드폰을 들고 가볍게 박 실장한테 인사하고 사무실 밖으로 나왔다.

시현은 자신을 본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오전에 사장실을 힐끔거린 게 민망했다.

사무실에 있으면서 신입 비서 인사도 안 받고 거들먹거린다고 속으로 욕한 게 미안할 정도였다.

괜히 얼굴을 마주하면 서로 불편했을 거야.

건성으로 인사하면 그건 그것대로 모양새가 좋지 않으니까.

‘그런데 박 실장을 안 데리고 혼자 외부에서 일을 본다고?’

미국에서도 박 실장과 무진이 늘 붙어 다녀서 소개받은 대로 선후배라고 철석같이 믿었다.

조기 졸업해서 경영을 배우고 있을 때라는 것을 알지 못했고 돈이 조금 많은 장난꾸러기라고만 생각했다.

2년 만 그가 원하는 애인인 척해 달라는 말에 응할 생각이었지만, 라스베이거스에서 즉흥적으로 결혼까지 해 버렸다.

‘미쳤지. 단단히 미쳤어.’

스스로 욕지거리를 하며 건물 밖으로 나가서 햄버거 가게를 찾았다.

눈부신 무진의 미소에 정신이 팔려서 어느새 헤벌쭉 웃다가 결혼 서약을 했으니 누굴 탓하냐며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술과 분위기, 잘생긴 남자는 위험했다.

공부와 아르바이트하느라 남자를 사귀지 않은 탓일지도 모른다.

끼니를 때우는 게 꼭 비 맞은 강아지처럼 처량하고 왜 이곳에 있어야 하는지 꼼꼼히 생각했다.

“무슨 생각일까. 할머님이 굉장히 무서운 분이라는데.”

애인인 척만 하는데 통장에 그가 입금한 돈이 5천만 원이었지만, 재벌인지도 몰랐다.

몇 달을 부부로 살면서 바쁜 것을 빼면 소탈하고 똑똑하다는 것, 은연중에 말로 사람을 짓누르는 것을 빼면 매혹적인 남자였다.

침대에서는 뜨거워서 자주 까무러쳤지만, 그 열기가 나쁘지 않았다.

계약 기간 2년이 짧지 않다는 것을 망각한 자의 최후 같아서 시현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를 사랑하는 걸 절대로 들켜서는 안 돼.”

시현은 무진의 할머니가 어떤 식으로 나올지, 그가 거친 폭풍 속에 그녀를 밀어 넣은 것은 아닌지 걱정되었다.

*** 

평창동 왕순자의 저택.

아들들을 일찍이 보낸 무진의 할머니 순자는 성을 붙어 왕 할머니로 불렸다.

백야 그룹의 지분과 투자자금이 워낙 많아서 왕 할머니의 돈을 쓰지 않은 사업가가 없을 정도였다.

백야 그룹에 직책이 없어도 순자의 의견은 언제나 수용되었고 인사권에도 입김이 들어갔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 게 자식이라더니 아들 셋은 명이 길지 않아 사고, 질병으로 죽었다.

그래서 며느리들이 앞세우는 손자들을 관리해 왔다.

순자는 능력만 있으면 성별, 나이 따지지 않고 주요 자리에 앉히는 능력주의자로 냉철한 사고 능력을 가졌다.

조금 반항하는 손자들이 있어도 며느리를 잡으면 금세 굴복하고 순자 앞에서 머리를 조아렸다.

백야 그룹이 곧 재계 1위로 올라설 때이기에 안팎으로 완벽해지기를 바라고 있었다.

누구도 허락 없이 발을 디딜 수 없는 철옹성 같은 저택에서 심기 불편하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었다.

녹차 한 모금 마셔서 입을 축인 순자가 입을 열었다.

“정 비서는 뭐 하는 사람인가. 그 애를 단속하지 못해서 이게 뭔가.”

“죄송합니다.”

“이혼이 안 되면 어디로 치워 버려야 하지 않겠나.”

머리가 흰색으로 뒤덮이고 눈매가 부드러워서 인자한 할머니 모습이지만, 입에서는 딱딱하고 거친 말이 나왔다.

다시 녹차를 한 모금 마시고 탁 소리가 나게 내려놓고 시선은 종잇조각으로 옮기며 말을 이었다.

“치울 곳이 없으면 만들어야지. 무진이 녀석이 그런 애하고 어울린다고 생각하나?”

“죄송합니다.”

“그 녀석이 이 할미 말을 듣게 해야 하지 않겠나. 확실히 녀석 옆에 그룹을 키울 아이가 필요한데 이렇게 시간 허비를 해야겠나?”

“방도를 찾아보겠습니다.”

순자의 머릿속이 복잡했다.

2년 전만 해도 맞선도 잘 보더니 단칼에 여자가 있다고 하고는 느닷없이 결혼한 무진 때문에 두통이 생겼다.

작은며느리에게 호통치고 재산을 증여, 상속하지 않겠다고 하는데도 먹히지 않았다.

학업을 마치고 백야 그룹에 입사해서 일을 잘하고 있어서 방심했다.

느닷없이 무진이 투자 자산 운용사를 인수했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순자는 손에 든 종잇조각을 흔들었다.

“여기 명단에 있는 애들 조사도 일주일 내로 끝낼 수 있겠지?”

“네.”

“무진이를 흔들 애하고 결혼할 애로 분리해 뒀으니까 입는 속옷까지 다 알아 오게.”

“알겠습니다.”

“잘하게. 그 애는 치워 버릴 곳을 찾고. 내 손자 곁에 그런 쓰레기는 안 되네.”

순자는 아버지 없이 남동생하고 아등바등 살면서 무진을 잡은 시현의 능력을 돈으로 계산해서 건넸다.

그런데 숨지도 못하고 무진이 인수한 회사에 덜컥 출근하니 속이 뒤틀렸다.

가난해도 정도가 있지, 반반한 얼굴과 머리가 좋아 가방끈이 길다는 걸 빼면 뭐 하나 봐 줄 것이 없었다.

경제를 이끌고 갈 차세대 기업인으로 무진이 할 일이 많기에 격에 맞는 사람이 필요했다.

*** 

시현은 TS 투자 자산 운용사에 출근하면서 사장인 무진을 보지 못해도 쉴 틈 없이 바빴다.

왕 할머니의 비서는 염탐하듯 하루에 한 번 시현의 앞에 나타나고,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그의 어머니로부터는 끊임없이 전화가 걸려 왔다.

딱 한 번 얼떨결에 전화를 받고 나서는 일부러 받지 않고 피했다.

무진의 어머니는 남편 없이 백야 그룹에서 버틴다면서 그를 놓아 달라고 애원하고 있었다.

시현은 그저 죄송하다고 수십 번 나직이 말할 수밖에 없었다.

며칠 후, 사무실에서 무진을 만나게 된 시현은 깍듯이 상사로 대하고 있었다.

사적인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하지만 반나절 만에 시현은 무진을 향해 소리를 빽 질렀다.

“이런 식으로는 일 못 해요!”

“박 실장이 자리를 비우자마자 아주 노골적이네.”

“어차피 끝난 사이에 구질구질하게 왜 이래요?”

“질척이는 건 당신이지. 계약 이행할 의무도 저버리고 아내로서도 엉망이잖아.”

시현은 무진의 할머니가 비서를 통해 한 말을 떠올렸다.

‘장난감값으로 이 정도면 충분할 거다.’

무진에게는 진심이 없을 거라는 말과 함께 거액을 받았다.

한두 달만 눈에 띄지 않으면 무진과 이혼하는 게 마무리될 거라고 했지만, 예상과 다르게 그는 미국을 떠나 한국에 숨어 버린 시현을 찾아냈다.

그것도 출장을 다녀와서 몇 주 만에.

한국에 귀국한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의문이 들었다.

숨으려고 유럽으로 여행 가는 것처럼 꾸몄는데 그는 미국을 뒤지다가 한국에 온 것이다.

그러니 왕 할머니한테 돈 받은 것도 알면서 배신감은커녕 태평해 보였다.

“무진 씨 생각대로 움직일 만한 여자가 필요하다고 했죠.”

“그래서?”

“그거 이제 못한다고요. 무진 씨 할머니와 어머니의 연락을 더는 받고 싶지 않아요. 할머님께 반기 들지 말고 하라는 대로 해요. 어머니도 안타까운 분이잖아요.”

그는 어이없는지 손으로 턱을 괴고는 빤히 그녀를 쳐다보며 말했다.

“난 사탕을 준다고 배시시 웃는 아이가 아니야. 내가 하는 일은 스스로 책임을 지는 성인이지.”

“…….”

“사랑하니까 이혼 안 하겠다는 거고, 의도치 않게 넌 날 위해 TS에 입사했으니 같이 일하자는 건데 뭐가 문제야?”

사랑? 어쩜 저렇게 뻔뻔하게 거짓말을 하지.

할머니에게 대항할 명분 때문에 꼭두각시처럼 뭐든지 다 할 수 있는 애인이 필요했던 거면서.

시현은 무진의 말꼬리를 잡고 속을 뒤집고 싶었다.

하지만 벽에 걸린 시계를 본 시현은 곧 박 실장이 온다는 것이 신경 쓰였다.

물러나야 할 때라는 것을 알기에 미간을 찌푸리며 짜증이 나서 미칠 것 같았다.

그녀야말로 그에게 반격할 명분이 없었다.

한 걸음 다가오자 뒤로 물러나려는데 그의 손가락이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하, 이 남자는 순식간에 다정한 행동을 아무렇지 않게 하지.

몸을 살짝 숙여 시현의 귓가에 나직이 속삭였다.

“한 번이라도 강무진의 인형이 되어 보든가.”

한마디 하고는 그가 시현의 입술을 삼키려 더 가까이 다가왔다.

시현은 고개를 돌려 그의 입맞춤을 거부했으나 그의 손이 턱을 잡아 돌렸다.

“계약 이행이 뭔 뜻인지 몰라? 반항 같은 거 해 봐야 네 손해잖아.”

지난밤의 쾌감이 금세 몰려올 거라는 것을 느낀 듯 시현은 온몸이 욱신거렸다.

입술을 악물고 버텨 보는데 그의 다른 손이 시현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사무실에서는 참을 생각이었어.”

“참아요. 그럼 되잖아요.”

그의 손이 시현의 턱을 들어 올리며 다정하게 쓸어 올렸다.

“난 누구의 말도 안 들어. 그러니까 내 힘을 빼는 짓은 할 생각조차 하지 마.”

“할머님 말은 듣는 게 어때요?”

픽, 그의 입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그는 시현의 목덜미를 쓸면서 지난밤에 한 말을 되새기게끔 강조했다.

“날 만족시키는 아내를 왜 놓겠어.”

허리를 감싸 안은 팔에 힘이 들어가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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