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9화 (59/89)

다른 남자와 결혼해

59화

[강재만 씨, 정담은이 남자를 숨기고 있는 것 같네요.]

문자메시지를 내려다보는 눈이 희번덕거렸다.

“깜찍한 년이 감히 날 버리고 민서후랑 결혼한 거로도 모자라서 스무 살밖에 안 된 새끼랑 바람이 나셨어?”

정담은에게 사람을 붙였다.

어떻게든 꼬투리를 잡아서 그년을 무너뜨리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활활 타오를 무렵, 건수가 생겼다.

지체 없이 민서후에게 전화를 걸었다. 일단 두 연놈의 결혼부터 작살을 내야지 싶었다.

- 네, 민서후입니다.

“민서후 씨?”

- 네, 그렇습니다만.

업무 전화라고 여기는지, 민서후의 목소리가 정중했다. 재수 없는 새끼.

“내 목소리를 벌써 잊었나? 서운하게. 내가 그렇게 임팩트 없는 존재였어?”

- ……끊겠습니다.

삶이 평온한가 보지? 이제야 내 목소릴 알아듣네. 같잖은 놈이.

“마누라 관리도 못 하고.”

민서후가 전화를 끊지 않고 머뭇거리는 게 느껴졌다.

“정담은, 지금 어디서 누굴 만나서 뭘 하고 있는지 알아?”

- 그쪽이 상관할 문제는 아니야.

“나는 참 정담은이랑 결혼 안 하길 잘했다 싶어.”

둘이 죽고 못 사는 관계, 하지만 조건이 기울어진 관계에서는 이런 틈 하나가 거대한 재앙이 되곤 한다.

“정담은 남자 있는 거, 모르지?”

 - 함부로 지껄이지 마.

차게 식은 민서후의 목소리를 듣는데, 기분이 묘하게 들뜬다.

“정담은 고게 아주! 얌전하게 생겨서, 어찌나 영악한지 몰라. 그 어린놈을 데리고 뭘 하겠다고.”

말문이 막힌 모양인지, 아무런 대꾸도 들리지 않는다. 짚히는 구석이 있나 봐?

“아! 어린 게 장점이라고 정담은 남편이 나한테 말했었지, 아마? 정담은 취향을 내가 깜빡했네.”

한껏 비웃어 주고 싶은데, 또다시 끔찍한 두통이 밀려들었다.

요즘 시도 때도 없이 머리가 아파서 죽을 맛이다.

“아까 같이 그놈 집으로 가는 것 같던데. 혹시 도곡동에 아는 놈 없어?”

- 장난도 적당히 했으면 좋겠는데.

민서후가 제대로 걸려든 모양이다.

“장난인지, 사실인지, 바람인지, 외도인지는. 거기 가 보면 알겠지?”

그리고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 버렸다.

머리가 터질 듯이 아파서 목소리를 내는 것조차 힘겨웠다.

‘안녕하세요, 비서실에 새로 입사한 문선준입니다.’

또다시 낯선 목소리가 귓전을 왕왕 울렸다.

요즘 시도 때도 없이 미친놈처럼 눈앞에 이상한 잔상이 떠올랐다.

뭔데, X발!

잡생각을 떨치려면 술이 필요했다. 이제 술 없이 맨정신으로 깨어 있는 시간도 짜증이 났다.

X 같은 것들! 내가 안 되면, 니들도 다 안 되는 거야.

독주를 목구멍으로 들이붓고, 소파에 몸을 기댔다.

저주에 걸리기라도 한 듯, 죽음 같은 수마가 밀려들었다.

***

그래, 내 눈으로 확인하면 되지.

그길로 집을 박차고 나와서 문선준의 아파트로 향했다.

연애 시절 그녀를 매일 데려다준 집 앞에…….

왜 둘이 그러고 서 있는 거지?

“하!”

어이가 없어서 실소가 터져 나왔다.

‘정담은 남자 있는 거, 모르지?’

‘그 어린놈을 데리고 뭘 하겠다고.’

빈정거리는 강재만의 목소리가 귓가를 왕왕 울렸다.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해서 미간이 저절로 구겨졌다.

저 새끼가 방금 정담은한테 뭐라고 했더라?

우리 이제 어떻게 해요? 라고 했던가?

나는 거침없이 다가서 눈물로 뒤범벅이 된 문선준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와악!”

문선준이 얼굴을 감싸며 바닥에 나뒹굴었다.

구부러진 등허리에 발길질하려는데, 그녀가 막아섰다.

“비켜.”

그녀가 양팔을 넓게 벌린 채 서서 두 눈을 부릅뜨고 나를 올려다보았다.

“정담은, 비키라고.”

“내가 여기 있는지 어떻게 알고 왔어요? 혹시 기사님한테 물어봤어요?”

내가 그런 비겁한 짓을 했을 거라고 생각하는 아내가 야속했다.

그리고 어린놈을 감싸겠다고 나를 막아선 것도 서운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분노와 서글픔이 가슴속에서 폭풍우처럼 일어났다.

“비키라고, 정담은. 너는 나를 붙잡아야지, 걔를 감싸?”

“내가 힘으로 서후 씨를 붙잡을 수는 없으니까요. 그리고 쟤를 감싼 게 아니고, 서후 씨를 막아선 거예요. 내가 이렇게 막아서면, 서후 씨는 나를 보고 멈출 테니까요.”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기 시작했다.

“왜 우는데? 대체 저 녀석을 감싸면서 왜 우는 건데! 둘이 무슨 사이냐고!”

하마터면 욕지거리를 내뱉을 뻔했다.

대신 짓씹은 입술에서 비릿한 피맛이 느껴졌다.

그녀는 설명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왜 그렇게 울먹거리면서 말도 못 하는 건데!

“제가! 제가, 비서였어요! 정담은 대표님 모시던 비서였어요! 무려 18년이요. 18년 동안 모신 제 상사였어요.”

문선준이 퉁퉁 부어 터진 얼굴을 감싼 채로 몸을 일으켰다.

이게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거야?

“야, 너 몇 살이야?”

그녀가 나를 막아서려고 뻗었던 팔을 내리며 한숨을 몰아쉬었다.

“스무 살이요.”

“스무 살인데, 어떻게 18년을 비서로 일했을까? 걸음마 시작하면서 비서로 일했어?”

흉흉한 물음에도 문선준은 아랑곳하지 않고 대꾸했다.

“대학교 조기 졸업하고, 군대도 다녀오고! 스물다섯에 정웅 입사해서 18년이요.”

나는 하늘을 한번 올려다보았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문선준, 너 닥쳐라.”

그녀가 뒤를 흘끗 보며 읊조렸다.

“그래, 아무리 유부녀랑 바람을 피우다가 걸렸어도. 그런 되지도 않는 변명은 좀 그렇다. 또라이니까 건드리지 말라는 거야, 뭐야?”

나는 고개를 똑바로 하며 정담은과 문선준을 번갈아 보았다.

“흥분 가라앉혀요. 내가 미쳤다고 당신 같은 남편을 두고, 저런 놈이랑 바람을 피워요?”

아내는 자존심이 상했다는 듯이 미간을 구기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황당해서 말문이 턱 막혔다.

“내가 세상에 태어나서 사랑한 남자는 민서후, 내 남편이 유일하거든요? 갖다 붙여도 좀 멋진 놈을 갖다 붙이든가.”

정담은이 뻔뻔한 건지, 내가 멍청한 건지. 헷갈린다.

“아니지. 세상에 민서후보다 멋있는 남자가 어디 있어요? 내 남편이 제일 잘났는데?”

이 순간 이 여자가 사랑스럽다는 생각이 든다면 나는 미친 건가?

“아니, 담은아. 나는…….”

그녀가 무언가를 결심한 듯 허벅지 옆에 붙인 주먹을 불끈 쥐었다.

비장한 얼굴만 보면, 전쟁터에서 격발 명령을 내리기 직전의 장군 같았다.

“나 믿고 기다린다고 했었죠?”

병원 로비에서 했던 말을 그녀가 끄집어 왔다.

“어.”

짧게 대꾸하자, 그녀가 어깻숨을 길게 내쉬었다.

“나한테 신이 있다고 믿냐고 물었었죠?”

“그래.”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모르겠다.

둘이 혹시 사이비 종교에라도 빠진 걸까.

“나는 있다고 믿는다고 했어요.”

“기억나.”

일단은 끈기 있게 그녀의 말을 들어보기로 했다.

“내가 신이 있다고 믿는 이유는요. 나를 죽음에서 되살려 준 누군가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에요.”

세상이 멈춘 듯했다.

귓가에서 둥둥거리는 심장 소리가 들렸다.

“뭐라고?”

“나는…….”

망설이는 듯하던 그녀가 다시 숨을 크게 들이켜고는 입을 뗐다.

“쉰하나에 죽었어요. 죽는 게 너무 억울해서, 제발 살려 달라고 빌었는데……. 눈을 뜬 순간 스물여섯 살로 돌아와 있었고요.”

그녀의 눈빛과 낯빛은 거짓이 아니었다.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지금? 그래서 여기 온 이유는 뭔데? 왜 문선준 집에서 나오는 건데?”

알아듣게 설명하라는 듯이 물었다.

제발 이해할 만한 대답이 나오길 바라는 내 목소리는 퍽 애처로웠다.

“얘 집에 온 게 아니라, 그 할아버지를 찾아왔어요. 할머니 친구분이요.”

“뭐?”

뜻밖의 인물이 툭 튀어나왔다.

“그 어르신도 40년을 거슬러 왔어요. 그분이 제대로 된 삶을 살 수 있게 도와주신 분이 바로 민서후 씨 할머님이십니다.”

문선준이 한 발짝 앞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지금 이걸 나한테 믿으라는 거야?”

믿음직스러운 이야기가 하나도 없었다.

“할머니 정신이 맑게 돌아오는 순간에 물어보면 되겠네요. 그땐 더 많은 이야기를 해 줄게요.”

담대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눈빛에는 두려움이 가득했다.

눈물을 떨어뜨리지 않으려고 두 눈을 부릅뜬 그녀의 몸이 가느다랗게 떨리고 있었다.

잔뜩 겁을 먹은 모습이 안쓰러웠다.

나는 눈을 질끈 감으며 손을 뻗어서 그녀를 품에 안았다.

무엇 하나 갈피를 잡을 수 없는 가운데, 확실한 것은 단 하나였다.

정담은이 믿을 수 없는 말로 나를 속인다고 할지라도, 나는 그녀를 사랑한다는 것 말이다.

***

우리는 집으로 오는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운전석으로 상체를 완전히 돌렸다가, 바로 앉기를 수십번 반복했다.

집으로 들어서자 적막한 고요가 우리를 반겼다.

“저희 왔어요. 저녁은 좀 늦게 먹을게요.”

내가 집안에서 사람을 부리는 일에도 익숙해질 수 있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아내는 내 뒤를 조용히 따르며 침실까지 함께 들어왔다.

“정담은.”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그녀의 턱을 잡아 올렸다.

그렇게 울음을 참더니, 지금은 뺨이 흥건할 정도다.

“나는 할머니께 확인하는 것과 관계없이, 너를 내 아내로 전과 같이 대할 거야.”

“전과 같이……?”

눈을 휘둥그렇게 뜬 그녀가 나를 올려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변함없이 사랑할 거라고.”

집으로 오면서 내가 내린 결론이었다.

그녀가 울상을 짓는가 싶더니 이내 팔을 뻗어서 내 목을 꽉 끌어안았다.

“내가 이번 생에서는 남편을 정말 잘 골랐다는 생각이 들어요!”

벅차오른 그녀가 내뱉은 말 때문에 머리가 얼얼했다.

지난 삶에서는 쉰하나까지 살았다고 했지?

이번 생에서는 남편을 잘 골랐다고?

그럼, 거기선 나 말고 다른 놈이 남편이었던 건가?

그녀의 말을 온전히 믿지도 못하면서 불같은 질투심이 일었다.

“예전엔 어떤 놈을 남편으로 골랐었는데?”

생각을 거치지 않은 질문이 입 밖으로 툭 튀어나왔다.

품에 안긴 그녀의 몸이 바짝 굳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