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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사랑한 건 살아남기 위해서였다-11화 (11/93)
  • <11화>

    상황을 설명하자면 이와 같다. 비스마르 백작가의 첫째 영애인 엘리자베트 비스마르는 아주 어릴 적부터 요한 마이어와 정략결혼을 맺은 사이였다.

    가문 간의 정략결혼은 흔한 일이었지만, 특히나 엘리자베트의 경우에는 비스마르 백작 가문의 위세를 크게 높여 준 사례였다. 그 이름도 유명한 마이어 공작과 연을 맺다니 말이다.

    하지만 그들이 처음 만난 건 고작 서너 살 때였다. 애초부터 서로에게 마음이 있었을 리가 없었다. 적어도 엘리자베트에겐 그랬던 모양이었다.

    엘리자베트가 자라 여러 파티에 참석하고, 사교계에 데뷔하면서 그녀는 스스로가 생각하는 ‘진정한 사랑’을 만났다. 하지만 엘리자베트의 혼사가 이미 아주 오래전에 결정되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가문의 위상과 본인의 사랑을 두고 갈등하던 엘리자베트는 결국 한 남작가의 셋째 아들과 도망을 가 버렸다.

    당연한 일이지만 마이어 공작가에서는 길길이 날뛰었고, 비스마르 백작가에서는 딸의 배신을 무마할 만한 또 다른 카드가 필요했다.

    한마디로 비스마르 백작이 나를 거둔 것은 내가 상품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가문의 수치라 믿고 은폐했던 갓난아이가 쑥쑥 자라 적절한 카드가 되어 주었으니 그의 눈빛에 기대감이 서린 것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었다.

    몇 달간 가족의 눈치를 보며 사는 데에 익숙해져 있었던 나는 재빨리 상황 판단을 했다. 저 남자의 마음에 들어야만 이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나는 그럴 용도로 만들어진 레이디였다. 그동안 과도한 교육과 레슨에 시달려야 했던 것도 이제 전부 이해가 갔다.

    요한 마이어가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인지 아닌지 따위는 중요하지도 않았다.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기는 싫었다. 요한이 나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면, 백작이 그 어둡고 좁은 다락방으로 나를 돌려보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락방이 내가 아는 세상의 전부였을 때야 괜찮았지만 이제 나는 푹신한 침대와 러그, 그리고 몇 접시 먹지 않아도 포만감이 들 정도로 좋은 음식들을 아는 사람이었다. 다시 예전의 삶으로 돌아간다는 건 생각만 해도 정말 끔찍했다.

    난 내가 가진 것들을 잃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요한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도록 교양 있는 아가씨 연기를 했다.

    요한은 나를 ‘지병이 있어 그동안 바깥출입을 하지 못했던 비스마르 백작가의 또 다른 영애’로 알고 있었다. 다른 영애들에 비해 마른 몸도 나름 근거를 끼워 맞춰 주는 장점 노릇을 했다.

    다행히 그는 나를 제법 마음에 들어 했고, 종종 나를 만나러 백작가를 방문하기도 했다.

    요한 마이어는 확실히 누구나 탐낼 법한 좋은 남자였다. 그는 신사적이었고, 내 말을 존중해 주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명망 높은 공작가의 후계자였다.

    이런 약혼자를 버리고 간 엘리자베트가 이해가 가지 않을 지경이었다. 도대체 그 남작가 도련님은 얼마나 더 대단한 신랑감이기에 도망을 친 거지?

    하지만 나는 곧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요한은 어느 날, 나를 자신의 저택으로 초대했다. 아직 혼삿말이 오가지도 않은 영애를 직접 초대한다는 건 아주 좋은 징조였다.

    비스마르 백작은 매우 기뻐하며 하녀들을 시켜 제일 좋은 드레스와 장신구로 나를 치장시켰다. 잘만 하면 마이어 공작도 엘리자베트의 과오를 묵인해 줄 것이고, 가문의 명예는 지켜질 것이었다.

    그 몫은 온전히 나에게 달려 있었다.

    나는 너무도 긴장한 탓에 호흡이 어려울 지경이었다. 어쩔 수 없이 계속해서 부채질을 해야만 했다. 내가 잘할 수 있을까. 과연 그가 내게 청혼하도록 만들 수 있을까…….

    요한은 화려하게 빛나는 나를 정중하게 맞았다. 값비싼 보석과 실크로 뒤덮인 나보다 간소한 정장 차림인 그는 더욱 빛나 보였다. 나는 하릴없이 주눅이 들었다.

    “레이디 엘로이즈.”

    그가 자동차에서 내린 내 손등에 입을 맞추고 나를 에스코트했다. 나는 그동안 배운 것들을 열심히 머릿속에서 되뇌고 있었다.

    요한은 명망 높은 가문의 공작이었다. 한 번이라도 그의 머릿속에 의구심을 심어 놓을 만한 행동을 했다간…… 다시는 기회가 오지 않을 수 있었다.

    요한은 나를 작은 방으로 안내했다. 티 테이블이라도 차려져 있을 법하건만 그곳엔 아무도, 아무것도 없었다.

    도무지 긴장을 풀 수가 없었던 나는 수줍은 목소리로 말했다.

    “초대해 주셔서 정말 감사드려요, 공작님. 베풀어 주신 호의에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그런 딱딱한 호칭은 안 어울리지. 내 부인이 될 사람인데.”

    놀란 내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온몸이 기쁨으로 벅차오르려던 순간이었다.

    “아니, 그 전에 오늘 내 앞에서 어떻게 구는가에 따라 결정될 사안이겠지.”

    “네?”

    “엘로이즈.”

    그가 다음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었다.

    “벗어.”

    나는 잠시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마치 외국어를 들은 것만 같았다. 방금 이 남자가 뭐라고 한 거지? 그는 말을 잃은 나에게 다시 한번 말했다.

    “잘 못 들었나?”

    “죄송하지만 무슨 말을 하신 건지…….”

    “옷을 벗으라고 했다.”

    격정처럼 차올랐던 기쁨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머리가 차게 식었다. 그의 요구를 들어줘야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나는 차마 그러지 못했다.

    그가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비릿한 미소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아니면, 내가 직접 벗겨 주는 걸 더 좋아하는 편인가?”

    그가 내 가슴팍에 달린 단추를 풀고 있었다. 단추가 톡, 소리를 내며 하나둘씩 풀리고 있었다. 작지만 강렬한 소리가 내 정신을 번쩍 깨웠다.

    “그만두세요.”

    당연하지만 그는 내 말을 듣지 않았다.

    나는 그를 거세게 뿌리쳤다.

    “손대지 마요!”

    빌어먹을 요한은 애초에 작정하고 나를 불렀던 건지 절대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가 내 몸을 붙잡고 구석으로 거칠게 몰아붙였다.

    그는 내 얼굴을 붙잡고 강제로 눈을 마주쳤다.

    “네게 날 거부할 권리가 있을 것 같아? 넌 내 약혼녀의 대체품이야. 감히 싫다고 말하지 마. 나에게 버림받아서 좋을 건 하나도 없을 텐데. 보아하니 네 가문보다 우선시할 만큼 고귀한 몸뚱어리도 아닌 것 같은데 말이야. 넌 내가 시키는 거라면 뭐든지 다 해야 해. 다른 선택지 같은 건 없어.”

    아무도 이런 건 가르쳐 준 적이 없었다. 공작가의 자제와 만나게 되었을 때 어떤 인사를 해야 하는지, 그가 춤을 청할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따위를 배운 적은 있었지만 아무도 공작이 추행을 시도할 때 대처하는 법 같은 건 알려 주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내 방식대로 행동하기로 했다. 가문의 일원이 되기 위해 요한의 눈에 들어야만 하는 건 사실이었다. 그러나 가문이 내 몸보다 우선인가? 그건 아니었다.

    그건 정말로 아닌 거였다.

    나는 온 힘을 다해 요한을 밀쳤다. 그가 바닥으로 쓰러진 틈을 타 나는 벽에 걸려 있던 거울을 내리쳐 박살을 내 버렸다.

    내가 집어 든 거울 조각이 피부를 아프게 찔렀다. 하지만 괜찮았다. 저 자식에게 내 몸을 바치는 것보다는 거울 조각에 찔리고 마는 것이 백번은 나았으니까.

    나는 날카로운 거울 조각을 들이대며 쏘아붙였다.

    “당신 약혼녀가 도망친 이유를 잘 알겠어. 알게 된 지 얼마 되지도 않는 여자에게도 이따위 짓을 하려 하는데, 약혼녀에게는 더욱 가관이었겠지! 나는 그렇게 하찮은 존재가 아니야! 나를 지킬 줄도 모르는 머저리 같은 여자가 아니라고!”

    요한은 산발이 된 채로 피를 뚝뚝 흘리며 자신을 위협하는 나를 귀신 보듯 올려다보았다. 감히 여자가 이런 짓을 할 수 있을 거라곤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달랐다. 나는 하녀의 딸이자 근본 없는 레이디였고, 그래서 이런 미친 짓도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었다.

    “완전히 미쳤군!”

    그는 하얗게 질린 와중에도 나를 협박하려 했다.

    “나에게 이런 짓을 하고도 너와 네 가문이 무사할 것 같아?”

    “고작 해 봐야 혼담을 취소하겠다는 말밖에 더 할까?”

    “네 아버지가 널 죽이려 할 거다.”

    “집어치워! 적어도 내 몸을 멋대로 다루려 하는 남자보다는 낫겠지!”

    그를 정말로 찌를 생각은 없었다. 나는 그를 충분히 위협하고 난 다음 도망치듯이 저택을 빠져나왔다. 내가 타고 왔던 승용차가 아직 떠나지 않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운전수는 내 엉망이 된 꼴과 피투성이가 된 손을 보고 기겁했다.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안 괜찮아요!”

    나는 두말할 것도 없이 승용차에 올라탔다. 저택을 벗어나고 나니 냉정이 가시면서 눈물이 터져 나왔다. 그의 말대로 백작에게 보복당할 것이 두려워서는 아니었다. 그냥…… 서러워서 눈물이 나왔다. 내가 그런 취급을 당했다는 게 서러웠다.

    “묻지 말고 다시 돌아가 주세요. 어서요.”

    이 끔찍한 저택 근처에서 한시라도 빨리 멀어지고 싶었던 내가 부탁했다. 운전수는 더 묻지 않고 차를 몰았다. 나는 서둘러 눈물을 닦으려 했지만 오히려 얼굴만 피범벅이 되었다.

    좋은 소식을 가져오리라 기대하고 보냈던 여자애가 미친 여자 꼴을 하고 돌아온 것을 본 백작 부부는 대경실색했다.

    그들은 내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캐물었지만, 나는 굳이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백작은 내가 외간 남자에게 습격이라도 당했다고 생각했는지 사용인들을 시켜 내 손부터 치료하라고 일렀다.

    그러나 내가 저지른 일이 백작의 귀에 들어가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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