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2. 릴리 벨모어
내 어린 시절에 대해 길게 설파하고 싶지는 않다. 자세히 기억하고 싶지도 않을뿐더러, 누구라도 장황한 불행 얘기 따위는 오래 듣고 싶어 하지 않을 테니까. 난 그냥 부모를 잘못 만난 것뿐이었다. 그게 전부다.
혹자는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고 따질 수도 있겠다. 비렁뱅이 신세를 물려받지 않은 것만으로도 행운인 판에 귀족의 딸로 태어났으면 어찌 됐든 큰 축복을 받은 거라고 말이다.
글쎄, 그건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얘기다. 귀족이라는 신분이 얼마나 쟁취하기 힘든 것인지는 나도 안다. 하지만 그건 가족과 똑같은 귀족 대접을 받으며 살 수 있을 때의 얘기다.
무릇 귀족들이란 머리에 자존심밖에 들어찬 게 없는 족속들이다. 불명예를 죽음보다도 끔찍하게 여기고, 다른 귀족들의 가십에 오르내리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하는 사람들.
하녀는 나를 임신해서는 안 됐다. 원래대로라면 그날 밤은 한 순간의 충동으로 끝나야 했다.
하지만 불행은 대문을 열고 들어올 때 노크 한 번 하지 않는 법이다. 그 하룻밤 사이에 내가 생겼고, 그게 모든 불행의 시작이었다.
귀족의 명예를 가장 치명적으로 먹칠할 수 있는 존재가 있다면 그건 바로 사생아일 것이다. 그들이 원하지 않은 사생아를 어떻게 대했을지, 내가 굳이 설명해야 할까?
나는 온종일 방에 갇혀서 생활하곤 했다. 내가 지내곤 했던 방은 저택의 가장 안쪽에 처박혀 있던 쓰지 않는 공간으로, 햇빛조차 잘 들지 않았다.
철저한 무관심 속에 나는 잡초처럼 끈질기게 자라났다. 혹여나 비스마르 가문에서 더러운 사생아가 생겼다는 소문이라도 날까 봐 아버지는 나와 어머니를 저택에서 쫓아낼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는 오히려 우리를 죽을 때까지 저택을 벗어나지 못하게 할 심산이었다.
뭐, 내 유년기에 대해서는 길게 설명할 것이 없다. 나는 햇빛을 받지 못해 창백하고 깡마른 아이였고, 내 어머니는 나에게 글자를 읽는 법이라도 가르치기 위해 버려진 신문을 앞치마 속에 숨겨 오곤 했다. 그 앞치마 속에는 가끔씩 훔친 빵이 들어 있기도 했다.
어떻게든 나를 살려 보려 애쓰던 어머니는 내가 열다섯 살이 될 즈음 종적을 감추었다. 그들이 내 어머니를 어떻게 한 건지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다. 어머니가 실종되기 전, 다락방 바깥에서 있었던 일을 통해 유추할 수 있을 뿐이다.
나는 그 당시 열다섯 살이었다. 비록 잘 먹지 못해 깡마른 건 마찬가지였지만, 그럼에도 내 신체는 하루하루 아이에서 어른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어머니는 내게 당부하곤 했다. 절대로 다락방을 나가서는 안 돼! 어찌나 귀에 못이 박히도록 일렀는지, 나는 거역할 엄두조차 못 냈다. 그건 내 삶을 지배하는 철칙 같은 거였다. 그래서 나는 15년간 얌전히 다락방 안에서만 지냈다.
하지만 열다섯 살의 여자아이들은 누구나 사춘기를 겪는다. 사춘기를 맞은 아이답게 내 가슴속에도 반항심이 자라나고 있었다.
그때부터 나는 질문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나는 왜 방 바깥으로 나갈 수 없지? 다락방은 날이 갈수록 커 가는 나에겐 너무나도 좁은 공간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다락에 갇혀 살아야 하는 것이 오로지 어머니의 결정에 의한 것인 줄로만 알았다.
어머니를 거스르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어느 날 나는 슬쩍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갔다. 문밖에는 내가 살던 방보다 훨씬 더 넓고 아름다운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였던 나는 주제도 모르고 저택의 위용에 감탄하며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기 바빴다. 웃긴 일은 내 곁을 지나친 이들 전부 내가 누군지 알아보지도 못했다는 거였다.
15년이라는 세월 동안 사생아의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관찰하려 한 이는 아무도 없었던 데다, 길다면 긴 세월이었던 만큼 사용인들도 몇 번 교체가 되었던 모양이었다.
오히려 아버지를 닮은 얼굴 때문에, 사용인들은 긴가민가하면서도 내게 고개를 숙였다. 슈미즈 차림이었던 내 모습에 기겁한 하녀들이 나를 화려한 드레스로 가득한 방으로 끌고 가 옷을 입히기도 했다.
어느 순간 나는 비스마르 가의 아가씨로 변모해 있었다. 그런 나를 아버지가 발견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 또한 15년 전의 사생아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아버지, 비스마르 백작은 생전 처음 보는 소녀의 등장에 적잖이 당황한 듯이 보였다.
귀족으로서의 예법 따위는 배운 적도 없고 관심도 없었던 나는 아버지를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백작은 더욱 혼란스러워했다.
“누군데 소식도 없이 내 저택에 들어와 있는 겁니까?”
나는 그가 내 이름을 묻고 있다고 생각했다.
“엘로이즈예요.”
그러곤 손가락을 들어 위를 가리켰다.
“맨 꼭대기에 있는 다락방에서 살고 있는데요.”
그는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것만 같았다. 15년 전에 만들었던 사생아가 아직까지 살아 있는 데다, 그를 닮은 소녀로 성장했다는 사실이 그에게 커다란 충격을 준 것 같았다.
그러나 비스마르 백작은 나를 다락방에 다시 처넣는 대신 정신을 차리고 내 얼굴을 이곳저곳 뜯어보기 시작했다. 과연 이 물건이 쓸모 있을지 감정하는 사람처럼 말이다.
내 얼굴을 보고 무언가 결심한 백작은 뒤늦게 가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아, 그래. 엘로이즈. 진작 내려와서 우리를 좀 보러 오지 그랬니. 자, 배가 고픈 것 같은데 식사를 들러 가지 않으련?”
그의 머릿속에 추악한 계획이 있으리란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열다섯 살의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멍청한 애였다. 나는 먹을 것을 준다는 말에 신나서 묻기까지 했다.
“제게 흰 빵을 주실 건가요?”
백작의 얼굴에 잠시 금이 갔다. 하지만 그것 또한 잠깐이었다.
“그래. 당연하지. 너는 내 딸아이잖니.”
그때서야 나는 내 앞을 가로막고 선 커다란 사내가 내 아버지라는 사실을 알았다. 나는 그가 좋았다. 왜냐하면 내게 훔친 빵이 아닌 ‘식사’를 주겠다고 말해 줘서였다. 그리고 어머니와는 달리 내게 따뜻하게 웃어 줬으니까.
그래서 나는 그가 좋은 사람이라고 믿었다.
나의 등장과 동시에 비스마르 가의 저택에 대격변이 일어났다. 나는 생전 가진 적도 없던 진짜 방을 갖게 되었다. 방인지 거실인지 분간조차 되지 않는 넓은 방이었다.
하인들은 어디서 났는지 모를 드레스와 실내복을 몇십 벌씩 들고 왔다. 시종들이 내 곁에 붙어 머리 모양을 손봐 주고, 내 발을 따뜻한 물에 담가 마사지했다.
그들은 명령이라도 받은 양 나를 귀족가 아가씨로 만들기 위해 적극적으로 분투했다. 마른 몸은 둘째 치고 나는 백작가 영애로서의 교양이 전무한 상태였다. 벨담에서도 알아준다는 온갖 가정 교사들이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내 교육에 대한 백작의 집착은 병적이라 할 정도로 과했다. 그는 나를 불러다가 교육의 진전이 되고 있는지 살피고는 했다. 백작의 성에 차지 않는 날이면 나는 그날 배운 것들을 완벽하게 익힐 때까지 잠도 잘 수 없었다.
하녀인 어머니에게서 자연스레 습득한 하층민 말씨를 고치기 위함이라는 명목하에, 가정 교사는 내 입에 커다란 유리구슬을 일곱 개나 밀어 넣었다.
“아가씨, 이제 제가 드린 책을 읽어 보세요. 또박또박하고 천천히! 제 시범을 따라해 보세요.”
가정 교사가 먼저 책을 읽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미칠 노릇이었다. 입 안에 구슬을 쑤셔 넣으면 상류 사회의 말씨를 익힐 수 있다는 이론은 대체 누가 먼저 생각해 낸 건지 찾아내고 싶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나는 해내야만 했다. 나를 상류 사회의 일원으로 만들기에 급급한 백작과, 내 존재 자체를 심히 못마땅해하는 백작 부인의 눈초리가 점점 내 심장을 조여 왔다. 나는 그게 전부 내 탓인 줄로만 알았다.
난 생각했다. 내가 충분히 아가씨 같지 않아서 그런 거야. 하루빨리 공부를 마쳐야 해. 그럼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올 거야.
내가 그들의 기대를 만족시키기까지는 꼬박 몇 달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그마저도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처음에 비해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배움이 느린 나 자신에게 실망하고, 또다시 시작될 내일 하루에 대한 두려움에 잠겨 매일 밤 잠을 설치느라 사라진 어머니에 대한 생각 따윈 들지도 않았다. 나는 나 자신을 챙기기에도 바빴다.
좋은 딸이 되어야 해.
내가 이 저택에 어울리는 존재가 되면 백작 부인께서도 나를 사랑해 주실 거야.
과도한 스케줄과 압박감에 짓눌린 나는 거의 혼절하기 직전이었다. 다른 영애들은 다섯 살이 되기 전부터 차근차근 배우는 과정을 나는 고작 몇 달 만에 머릿속에 쑤셔 넣어야 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다른 영애들이 어떻게 사는지는 알지도 못했다. 이 모든 것이 오로지 나의 부족함 때문인 줄로만 알았다.
가을이 찾아올 때쯤에야 그동안의 교육 과정을 대부분 마친 나는 조금이나마 숨을 쉴 수 있게 되었다. 더 이상은 하층민 말씨를 불쑥불쑥 내뱉지도 않았고, 불시에 예법을 까먹어 실수하는 일도 없었다.
슬슬 모든 것이 마무리되어 가고, 나만의 시간이 생길 무렵.
나는 작은 연주홀에서 피아노를 연주하기를 좋아했다. 나를 유일하게 괴롭히지 않았던 것이 바로 피아노였다. 피아노를 치는 일만은 고통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악보 속에 암호처럼 숨겨져 있는 아름다운 음악을 꺼내는 일은…… 무척이나 즐거웠다.
그 날에도 나는 빈 시간에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었다. 음악은 흘러가는 시간조차 느리게 만들고, 메마른 마음을 풍요롭게 일구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작곡가의 예술성에 감탄하며 그의 악보를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고 있던 그때, 그가 찾아왔다.
“아름다운 연주로군요.”
나는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낯선 남자가 문가에 서서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비스마르 가문의 일원이 될 수 있었던 이유가 그 남자 때문이었다는 사실 같은 건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요한 마이어 공작, 내 이복 언니의 약혼자가 나를 꿰뚫을 듯이 쳐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