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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사랑한 건 살아남기 위해서였다-3화 (3/93)
  • 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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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때 자일스는 가족이 퍼부어 주는 사랑과 행복을 누리던 작은 도련님이었다.

    헤센 가문은 그의 할아버지 세대에 다이아몬드 탄광 개발로 커다란 부를 얻었다. 낮잡아 말하면 졸부 집안이었다. 어쨌거나 가족들은 풍요로운 나날을 만끽했고, 여느 귀족들과 비슷한 대우를 받고는 했다.

    자일스의 아버지는 사업 확장을 위해 가족들을 데리고 입스윈으로 떠났다. 그는 자식들이 새로운 땅에서 날개를 펼치기를 바랐다. 낯선 이국에서의 가능성은 무한해 보였다. 모두가 입스윈은 벨담의 제2전성기를 열 것이라 입을 모았다.

    자일스의 누이 셀레스트는 작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언제나 공상하기를 좋아하고 글쓰기에 열정을 보이던 그녀였다.

    셀레스트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며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했다. 누이는 좋은 이야기란 실제 사람들의 삶 속에서 우러나오는 경험과 생각에서 비롯한다고 믿었다.

    셀레스트가 가장 적극적이었던 대상은 다름 아닌 입스윈 사람들이었다.

    가족들은 그런 셀레스트를 만류했다. 비록 입스윈은 벨담의 그림자 아래에 있었지만, 벨담인에 대한 반감까지 정복할 수는 없었다. 혼자 다니는 벨담 여성은 타깃이 될 수도 있었다.

    “내가 다칠까 봐 걱정한다는 것 자체가 뭔가 잘못됐다는 걸 보여 주는 증거야.”

    셀레스트는 자일스와는 달리 아름다운 금발을 가졌다. 그녀는 금빛 머리카락을 질끈 묶고서 직접 쓴 원고를 검토하고 있었다.

    “그들이 나를 해칠 근거가 사적인 원한이 아니라 단지 내 혈통 때문이라면, 다른 사람인들 안전할까? 이건 비단 나만의 문제가 아니야.”

    “부모님이 걱정하셔. 그럴 만하잖아. 누나의 차림새를 봐. 누가 봐도 부유한 가문의 여식이라고 생각할 거야.”

    “차림새 때문에 해코지를 당한단 말이야?”

    “내 말은, 강도를 당할 수도 있다는 거야.”

    “다들 그런 걸 걱정하고 있진 않은 것 같던데. 다들 잘못하다간 내가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있어.”

    자일스는 가까운 곳에 앉아 스탠드 불빛을 받으며 원고를 고치는 누이를 바라보았다. 무엇에 관한 원고일까? 생각해 보니 한 번도 셀레스트의 글을 읽어 본 적이 없었다.

    “내가 벨담 사람이라서, 그 이유로 누군가 나를 죽이고 싶어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단 말이야.”

    “그게 터무니없는 주장이라고 생각해?”

    “아니, 나도 전적으로 동의해.”

    셀레스트가 만년필을 내려놓았다. 사각거리던 소리가 멎자 방 안이 아늑한 정적으로 가득했다.

    “이곳 사람들은 우릴 증오해. 할 수만 있다면 정말 우리를 죽이고도 남을 거야. 그 사람들을 만나 봐서 알아. 사실 우리도 그런 사실을 모르는 건 아니지. 그들의 증오를 권력으로 겨우 찍어 누르고 있다는 걸. 봐! 우린 남의 땅에 쳐들어와서 마치 이곳 사람인 양 살고 있어. 정작 그들을 노예처럼 부려 먹으면서 말이야.”

    “누나는 그 사람들 이야기 듣는 데에 정말 진심이구나.”

    “들어야만 해. 처음에는 소설을 위해서였지만, 점점 이게 심각한 문제라는 사실을 알게 될 수밖에 없었어.”

    그 당시 자일스는 셀레스트가 평소처럼 별나게 굴고 있다고 여기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던 것 같다. 셀레스트의 말은 허무맹랑하지 않았다. 그녀는 미래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자일스, 네가 사관 학교에 들어가면 뭘 하게 될까?”

    “군인들이 보통 하는 일을 하겠지. 국가의 명령을 따르고, 벨담의 안보를 지키고.”

    “네가 그저 벨담을 지키는 일만 하게 된다면 좋을 텐데. 너 졸업하자마자 본국으로 불려 갈지도 몰라. 신문 봤지? 큰 전쟁이 곧 터지게 될 거야. 우리가 지금껏 경험해 본 전쟁보다 훨씬 거대한.”

    자일스 또한 신문 1면을 독차지한 헤드라인을 기억했다.

    「‘세계 대전’ - 도셀베르크 총리가 명명한 미래」

    헤드라인 밑에는 작은 부제목이 붙어 있었다. ‘과장된 허풍인가? 앞날의 예견인가?’

    “만약 우리가 지게 되면…… 모든 것이 바뀔 거야. 누군가의 증오를 사게 된 걸 후회하게 될지도 몰라. 정말이야.”

    자일스는 아직도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던 셀레스트의 눈빛을 기억했다. 다른 사람들은 보지 못한 무언가를 목격한 사람처럼, 그녀는 확신에 차 있으면서도…… 우울해 보였다.

    “그때가 오면 선택을 해야만 할 거야. 도망칠지, 아니면 죽을지.”

    누군가는 그런 셀레스트더러 발이나 닦고 자라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불길한 예언은 자일스가 사관 학교를 졸업하기도 전에 현실이 되어 나타났다.

    세계적인 규모의 전쟁에서 패배한 여파는 컸다. 입스윈을 위한 기회였다. 그들에게는 입스윈 내의 상황을 통제할 만한 능력이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말 그대로, 혁명이었다.

    셀레스트의 말대로 자일스는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아버지는 실종된 지 오래였다. 본국으로 돌아가는 길이 모두 막혀 있었다. 그리고 이 땅의 주인들은 자일스와 같은 사람들을 모조리 처형하려 했다.

    더 이상 벨담 사람으로서의 미래는 없었다.

    자일스는 그가 살기를 바랐다. 또한 항상 사려 깊었던 누이가 죽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생존을 위해 국가를 배반하고, 입스윈 혁명을 도우러 나섰다. 그가 가진 막대한 재산을 혁명 지도부와 나누고, 무기를 보급했다.

    무엇보다도 연회장에서 인사를 나누거나 한 번쯤 스쳐 지나갔을지도 모를 수많은 벨담 인사들을 구렁텅이로 내모는 데에 앞장섰다.

    자일스는 그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다.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었다. 국가는 그에게 더 이상 아무것도 해 줄 수가 없었다. 자일스가 혁명을 돕지 않았더라면 그 또한 죽었을 것이다. 셀레스트를 지키지도 못했을 터였다.

    생존만으로도 그의 모든 선택은 가치가 있었다.

    국가에 대한 충성. 신의. 자존심. 그것들을 챙기느라 마지막까지 저항하던 귀족들이 결국 어떻게 되었는가?

    벨담은 힘을 잃었고, 그들을 지켜 주지 못했다. 그가 잡아들였던 귀족들은 전부 그를 향해 배신자라고 외쳤다. 제 한 몸 건사하려 동족의 등에 칼을 꽂은 배신자. 그런 비난은 자일스에게 아무런 해를 끼치지 못했다.

    결국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살아남은 자만이 내일 아침 뜨는 해를 맞이할 수 있었다.

    생존만이 최상의 가치였다.

    다른 방향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그렇게 한 방향만을 바라보며 달려왔는데…… 파란이 끝나고 혁명이 안정기에 접어들자 그에게 미래를 약속했던 지도부가 태도를 달리하기 시작했다.

    혁명을 돕기는 했지만, 그는 지주 혈통의 벨담 사람이었다. 그 사실을 바꿀 수는 없었다. 지도부는 부유한 벨담인을 요직에 앉힐 수는 없다고 설명했다.

    모든 것이 마무리되면 자일스는 운명을 스스로 책임져야 했다. 그리고 지도부는 그를 더 이상 보호하지 않겠다고 결정했다.

    격동의 시대를 겪으면서 자일스는 증오의 굴레가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배웠다. 이 땅에서 벨담 출신이 어떤 삶을 살게 될지는 뻔했다. 배신자로 낙인찍힌 이상 뒤늦게 본국으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집어삼킬 듯 무섭게 타올랐던 불꽃이 가신 뒤에는 암암한 어둠만이 남을 뿐이었다.

    그때부터였을까. 자일스는 느려지고 무던해졌다. 미래를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니 놀랍게도 마음이 착 가라앉았다.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던 때보다 훨씬 평온할 지경이었다.

    새로운 탈출구를 찾아 헤매기에 그는 그동안 너무 많은 에너지를 소모했다. 이제는 조금 쉬어야 했다.

    릴리를 체포하고 싶지 않았던 건 그런 이유 때문일지 몰랐다.

    자일스는 오히려 그녀에게 동질감을 느꼈다. 만신창이가 된 생존자. 스스로를 돌아볼 즈음엔 이미 아무것도 남지 않은.

    내가 살아남을 수 없다면, 나는 남은 시간 동안 어떤 가치를 뒤좇으며 지내야 하지?

    그는 잠시 길을 잃었다. 그에게는 길잡이별이 필요했다. 그래서 하늘을 올려다보았으나, 타오르는 불꽃에 눈이 먼 그에게 빛을 반짝일 별은 없었다.

    가만히 앉아서 마냥 기다릴 수는 없었다. 오랜 시간 쉬지 않고 달린 탓인지, 그는 가만히 있으면 불안해졌다. 잡생각이 머릿속에 들이닥치기 일쑤였다.

    뭔가 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가 아직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그는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운전석에 홀로 앉아 손가락으로 핸들을 톡톡 치던 그가 이내 시동을 걸었다. 검은 승용차가 시골길을 달렸다.

    릴리의 연주가 귓가에 들리는 듯했다.

    그가 대낮에 한가로운 나들이나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건 그만큼 평화로워졌다는 뜻이기도 했다. 적어도 체포할 사람들이 산을 이루던 때와는 달라졌다.

    자일스는 솔즈부르의 저택을 적절히 개조한다면 다양한 목적의 관공서로 사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고서를 써서 올렸다. 관청 혹은 학교…… 쓰임새는 많았다.

    보고서를 올린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곧 건물에 대한 추가 지시가 떨어질 것이다. 그때까지는 시간이 조금 있었다.

    그는 저택 안으로 들어서면서도 릴리가 이미 도망쳤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자일스는 릴리의 정체를 알고 있는 혁명군 요원이었으니까.

    그러나 릴리는 아직 저택에 있었다. 똑같이 하얀 잠옷을 입고, 정돈되지 못한 검은 머리를 늘어뜨린 채로. 당연한 사실이지만 야윈 것도 똑같았다. 저런 몸에서 어떻게 피아노를 칠 힘이 나오는 걸까?

    릴리는 그가 다시 찾아올 거라 생각하지 못했던 건지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다급히 옷매무새와 머리 모양을 정돈했다. 비록 그 효과는 미미했지만 말이다.

    그녀의 두 손이 얼룩덜룩했다. 자일스의 시선이 닿자 릴리는 얼굴을 붉혔다.

    “이건…… 방금 전에 야생 열매를 좀 땄더니 그런 거예요.”

    지금껏 그런 식으로 생존해 왔던 게 분명했다. 자일스는 가방 안에서 샌드위치를 꺼냈다. 제대로 된 음식을 본 릴리의 눈이 동그랗게 열렸다.

    “자, 먹어.”

    “날 주는 건가요?”

    “그래. 너 주려고 가져온 거다.”

    릴리는 작게 감사를 표하고는 샌드위치를 받아 들었다. 포장을 벗기자마자 텅 빈 공간에 신선한 음식 냄새가 풍겼다. 얇게 썬 햄과 삶은 계란, 그리고 각종 채소가 든 샌드위치였다.

    “혹시 알러지 같은 게 있다면…….”

    자일스가 뒤늦게 말을 꺼냈을 땐 이미 샌드위치의 절반이 사라지고 난 뒤였다. 릴리는 잠깐이나마 행복해 보였다. 그녀의 눈동자에 생기가 도는 것을 보았을 땐…… 그도 오랜만에 미소를 지었던 것 같기도 했다.

    “너무 맛있어요.”

    릴리가 말했다.

    “고기를 먹어 본 게 대체 얼마 만인지 감도 안 잡혀요.”

    “가방 안에 더 있으니까 원하는 대로 꺼내 먹어.”

    “고마워요.”

    릴리는 먹는 데에 집중하느라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샌드위치 한 개는 허기를 채우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자일스가 가져온 여분의 샌드위치가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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