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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사랑한 건 살아남기 위해서였다-2화 (2/93)
  • 2화

    그는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다만 릴리가 스스로의 입을 통해 그 사실을 직접 확인시켜 주기를 원할 뿐이었다.

    대답이 느려지는 걸 보니 어리석은 거짓말을 할 생각은 없는 듯싶었다. 자일스는 천천히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어차피 시간은 충분했다.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죠?”

    “대답해. 네 진짜 이름이 맞는지.”

    “내가 인정하면, 나를 죽일 건가요?”

    그녀는 반쯤 체념한 상태였다. 릴리는 이제 자일스의 허리춤에 매달린 권총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건 내가 결정할 사안이 아니야. 혁명 지도부에서 너를 어떻게 처분해야 할지 지시를 내리겠지.”

    “평생 그럴 일은 없을 줄 알았는데.”

    릴리가 혼자 중얼거렸다. 너무 마르고 볼품없어서 귀족을 앞에 둔 건지 떠돌이 부랑아를 심문하는 건지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한 번도 귀족 대접 받은 적 없었어요. 그냥 끝까지 그렇게 살다 갈 줄 알았어요. 마지막에서야 나를 그들과 동등하게 대우해 주는 사람들이 나타나는군요. 쓸쓸하게 굶어 죽는 것보단 낫겠죠.”

    자일스는 릴리의 반응에서 생소함을 느꼈다. 그가 체포한 귀족들은 전부 악을 쓰고 끝까지 자존심을 세우려 했다. 고고한 귀족의 혈통은 뭔가 다르다는 것을 보여 주려는 듯이.

    물론 그들 전부가 마지막에 가서는 자비를 갈구했지만, 이렇게 저항 없이 순순히 죽음을 받아들이는 이는 릴리가 처음이었다.

    “이곳에서 일했던 하녀들을 심문했더니 몇 가지 이야기를 해 주더군.”

    “내 이야기 말인가요?”

    “네가 피아노를 칠 줄 안다던데.”

    “사실이에요.”

    “옆방에 있던 피아노도 네가 연주하곤 했던 건가?”

    “그건…… 손님들이 계실 때만 쓸 수 있었던 거고, 내가 주로 연주했던 건 더 작은 거예요.”

    “네 가족들도 직접 심문했다.”

    릴리는 별로 슬퍼하거나 놀라지 않았다. 자일스 또한 그러한 반응을 놀랍지 않게 여겼다. 그들의 이야기를 1분만 들어도 릴리가 이곳에서 전혀 행복하지 않았다는 걸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이다.

    “너를 굶겨 죽이려고 했다는 게 사실인가?”

    “맞아요. 사실이에요. 당신도 보다시피 실패했지만.”

    “……제대로 된 음식을 먹은 지 얼마나 되었지?”

    “말해서 뭐 해요. 어차피 난 죽을 거잖아요.”

    그제야 릴리의 볼을 타고 눈물이 흘렀다. 그런 그녀를 잠시 바라보던 자일스가 부하들의 이름을 소리쳐 불렀다.

    얼마 안 가 남자의 뜀박질 소리가 텅 빈 홀을 울렸다. 제일 근처에 있던 부하 위브너가 나타났다.

    위브너는 릴리를 보자마자 큰 소리로 물었다.

    “이 여자는 대체 누구죠?”

    릴리가 푹 젖은 푸른 눈으로 자일스를 바라보았다.

    그녀를 마주 보던 자일스가 말했다.

    “그냥 떠돌이 여자다. 이 집에 숨어들었던 걸 찾아냈어.”

    “여기 뭐가 있다고 이런 곳에 침입해요? 제가 샅샅이 뒤져 봤지만 남은 건 먼지와 죽은 쥐밖에 없던데요.”

    “잘 곳이 필요했던 것 같다. 위브너, 혹시 음식 갖고 있는 거 있나?”

    “음식이요?”

    그가 어깨를 으쓱여 보이더니 대답했다.

    “귀리 빵이 있기는 하죠.”

    “갖고 와.”

    “하지만 그건 제 점심인데요.”

    “돈 줄 테니까 돌아가서 다른 거 사 먹어. 지금 이 여자 몰골이 안 보이나? 굶어 죽기 직전이다.”

    “차라리 차에 태우고 데려가는 게 어떨까요?”

    “위브너, 갖고 와.”

    그는 더 대꾸하지 않고 돌아갔다. 곧이어 뒤늦게 도착한 두 부하들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위브너와 정확히 똑같은 질문을 했다.

    “특이 사항은 없나?”

    “예, 동지들이 싹 비우고 갔더군요. 이 여자는 부랑자입니까?”

    “보는 대로다. 가구가 없어서 악기 케이스 안에서 자고 있었어.”

    “저런. 데려가실 건가요?”

    “같이 가자고 설득을 해도 들어 먹질 않는다. 현재로선 여기 놔두는 게 최선이야.”

    “하지만 여기 있다간 또 굶을 텐데요!”

    “그렇다고 가기 싫다는 사람을 억지로 끌고 가?”

    “필요하다면 그래야겠지만…….”

    “우리 임무와는 상관없는 여자야. 부랑자에겐 부랑자의 삶이 있겠지. 굳이 힘 뺄 필요 없어.”

    부하들은 더 이상 이견을 표하지 않았다.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다 보면 떠돌이들을 심심찮게 마주칠 수 있었다. 그들의 생각과는 달리 떠돌이들은 도시에 별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해야 할 건 귀족들을 잡아 처넣는 것이었지, 부랑자를 구조하는 게 아니었다.

    “시찰은 끝났다. 차로 돌아가서 대기해. 곧 가겠다.”

    “알겠습니다.”

    발소리가 멀어졌다. 다시 좁은 공간에 둘만이 남았다.

    자일스는 부하가 주고 간 귀리 빵을 건넸다. 릴리는 잠깐 주저하는 듯싶더니, 곧 그의 손에서 빵을 낚아채 가듯 받아 들었다.

    검은 머리를 어지럽게 풀어 헤친 채로 허겁지겁 빵을 뜯어 먹는 모습이 실로 부랑자와 다를 바 없었다. 한때 귀족이었던 여성이라 말해도 증거를 보기 전까지 아무도 믿지 않으려 할 것이다.

    한편 릴리의 모습을 관찰하던 자일스의 머릿속에 혼란이 슬금슬금 밀려들었다.

    방금 자일스는 릴리를 구했다.

    그녀가 누군지 알고 있으면서도, 부하들에게 단지 부랑자일 뿐이라고 거짓말을 했다.

    누구보다도 앞서서 벨담 귀족들의 머리채를 잡아 끌어내곤 했던 그였다. 예외를 둔 적은 없었다. 남자든 여자든, 심지어 성년이 채 되지 않은 소년, 소녀들까지도.

    자일스는 그들의 공포에 질린 눈동자를 똑바로 내려다보았었다.

    동정심이나 연민 따위가 끼어들 틈은 없었다. 그들은 입스윈이 증오하는 벨담 출신 귀족이었고, 이 땅에서 마땅히 사라져야 할 존재들이었다. 그 일을 돕는 것이 자일스의 임무였을 뿐이다.

    그랬던 그가 살아남은 귀족가의 막내딸을 위해 거짓말을 하고, 심지어는 부하의 음식까지 빼앗아다 주었다.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혹시 심문 내용 때문인 걸까? 취조를 통해 그녀가 끔찍한 학대에 시달리던 불쌍한 여인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인가? 그래서 뒤늦은 동정심이 일었고, 이 여자를 죽이고 싶지 않아진 건가?

    자일스는 생각에 잠겼다. 릴리는 비참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특별히 그의 마음이 움직이거나 그녀가 유달리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어째서지? 아직 늦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그는 릴리를 붙잡아 차에 태우고 감옥 앞에 대령시킬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럴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릴리를 구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를 끊임없이 움직이게 만들던 동력이 멈춰 버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는 더 이상 열정을 느낄 수 없었다. 연료가 다 떨어진 증기 기관차처럼, 그는 그저 멈춰 서 버렸다.

    사적인 감정이 개입한 게 아니었다.

    릴리를 체포하는 일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일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얼굴만 하던 빵을 순식간에 먹어 치워 버렸다. 완벽하지는 않아도 어느 정도 허기는 채운 모양이었다. 낯빛이 한층 편안해 보였다.

    부하들의 말이 맞았다. 오늘은 운이 좋아 커다란 빵을 먹을 수 있게 되었지만, 내일부터는 다시 굶게 될 것이다. 그녀가 오래 버티리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저택 안에서만 길러지던 영애가 부랑자의 거친 삶을 살아 낼 가능성은 전무했다.

    보아하니 릴리 또한 그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듯했다.

    “왜 사실대로 말하지 않았어요?”

    자일스는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다.

    대신 그는 다른 질문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최근에 피아노를 연주한 적이 있었나?”

    릴리는 고개를 저었다. 피아노는 생존에 아무런 쓸모도 없는 물건이었다. 그래서 혁명군은 피아노를 저택에 두고 갔다. 악기를 연주하며 예술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것 또한 배가 부르고 나서야 가능한 일이었다.

    그때, 릴리가 다시 물어 왔다.

    “제 연주를 듣고 싶으신가요?”

    그녀가 벽을 짚고 몸을 일으켰다. 종아리까지 오는 흰 옷이 마른 몸을 어느 정도 가려 주었다.

    “음식을 주셨으니 답례로 그 정도는 해 드릴 수 있어요. 그리고 저를 구해 주셨으니까……. 어차피 제가 할 수 있는 건 피아노를 치는 것밖에 없기도 하지만요.”

    릴리는 자일스가 무어라 반응하기도 전에 피아노가 있는 방으로 나갔다. 걸음걸이에 힘이 없어서 마치 유령을 보는 것 같았다.

    자일스는 천천히 그녀를 따라 나갔다. 릴리는 피아노 의자에 앉아 건반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피아노를 치지 않은 지 오래되었는지 그녀가 어색한 동작으로 건반 위를 쓸었다.

    창가에서 비쳐 들어오는 햇빛이 릴리의 몸 위로 쏟아졌다.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던 모습과는 사뭇 달라 보였다. 공중에 먼지가 떠다녔다. 릴리는 호흡을 갈무리했다. 빛을 받아 희게 빛나는 두 손이 이윽고 건반을 눌렀다.

    텅 비어 쓸쓸했던 공간이 풍성한 음계로 가득 찼다. 장엄하고 느린 멜로디가 천천히 말을 가다듬는다. 방금 전까지 귀리 빵을 필사적으로 쥐고 있었던 열 손가락이 다채로운 음을 발산해 냈다.

    시작을 알리는 것처럼 나직하던 악기의 음성이 곧 서정적인 선율을 자아냈다. 잔잔하고 아름다우나, 단순하지만은 않다. 전문적인 교육과 훈련을 받은 음악가만이 소화할 수 있는 야상곡이었다.

    자일스는 근처에 서서 능숙하게 피아노를 연주하는 릴리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생각 외로 훌륭한 피아니스트였다. 커다란 폐가는 순식간에 그녀를 위한 공연장으로 변모했다.

    그의 눈에 릴리는 더 이상 부랑자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벨담 귀족의 막내딸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그녀는 우연히 마주친 피아니스트였다. 자신의 진가를 드러내 보이지도 못한 채 쓸쓸히 죽음을 맞을 운명이었던, 그러나 그를 만나 스스로와 음악 모두에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게 된…….

    그가 살린 피아니스트.

    자일스가 그녀를 발견하지 못했더라면, 아니, 그녀를 끌고 나가기로 결정했더라면 릴리의 야상곡은 연주되지 못한 채 세상에서 영영 지워져야 했을 것이다.

    비록 충동적으로 저지른 일이었지만, 자일스는 이제 기뻤다. 릴리가 살아남게 되어 기뻤다. 비명 소리와 울음소리, 붉은 혈흔들……. 자일스는 내내 그런 것들 속에서 지내 왔다. 무뎌지고 무감정했던 가슴속에 옛 시절의 비옥한 감정이 되살아났다.

    생존하기 위해 발버둥 치던 끝에, 이제야 가치 있는 일을 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릴리가, 릴리의 마법 같은 음악이 살아남았다는 사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명령이 아니라 그의 의지만으로 실행한 첫 번째 일이었다.

    심연처럼 어두운 나날 끝에, 그는 한 줄기 빛을 마주했다.

    그는 릴리의 음악을 사랑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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