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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는 불구경 중-48화 (48/90)
  • 48.

    검은 연기가 모락모락 올라오더니, 세드릭이 그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이런, 젠장!”

    율리시즈가 급히 연기를 검으로 갈라내어 세드릭을 찾았지만, 그는 사라져 버렸다. 사술로 이동한 것인지, 대가로 바친 한쪽 손이 새카맣게 숯처럼 타서 남겨진 상태였다.

    “……죄송합니다, 스승님. 세드릭을 제 불찰로 놓쳤습니다.”

    “그걸 왜 나한테 죄송해해. 그럴 것 없어, 율리시즈. 이건 네 복수고, 나는 그저 너의 보호자였을 뿐이잖아. 너는 더는 칭찬받으려는 어린애가 아니야. 한 사람의 어른이고, 이제 황제라는 자리에 오를 사람이잖아.”

    나는 두 손을 들어 말랑말랑한 세드릭의 볼을 죽 잡아당겼다.

    “아야야야.”

    “정신 차려. 황제 폐하.”

    “……네.”

    “세드릭은 다시 잡을 수 있어. 병력을 풀고 수배령을 내리면 어디에 있든 간에 붙잡히는 건 시간문제야. 나도 있잖아.”

    “스승님의 실력은 당연히 믿죠.”

    세드릭이 다시 웃었다. 자색 눈동자가 곱게 휘어졌다. 별같이 빛나는 세드릭의 얼굴에 자색 초승달이 떠 있었다.

    “그래. 그러니까 걱정할 것 없어. 너는 최선을 다했고, 이제 행복해질 일만 남은 거니까.”

    클로드가 바란 대로 원작을 완전히 뒤틀었다.

    ‘해냈어.’

    심장의 시계 모양 문신이 짤깍, 하고 울린 것 같았다. ‘약속’을 이행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제 율리시즈가 스무 살의 생일을 맞이하면, 그때 나는 떠나야 한다.

    그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워졌다. 율리시즈의 생일은 얼마 남지 않았다.

    시간은 왜 이렇게 빠르게 흘러가는 걸까.

    우두커니 서 있는 나를 향해 율리시즈가 손을 흔들었다. 먼저 가고 있던 것을 모를 정도로 상념에 빠져 있던 것이다.

    “스승님! 같이 가요. 가서 오늘은 편안하게 마음 놓고 우리 둘 다 푹 쉬자고요.”

    쾌활하게 말하는 율리시즈를 보니 발걸음까지 묵직해져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율리시즈.”

    “네?”

    “나 좀 업어 줄래? 세드릭 때문에 다리에 힘이 풀려 못 걷겠구나.”

    급조한 핑계는 내가 들어도 멍청하기 짝이 없었다. 제길, 윈터가 있었다면 날 데리고 가라고 명령했을 텐데. 아까부터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진심으로 말씀하시는 거예요?”

    “아, 아니다. 내가 늙어서 이상한 소리를 했어.”

    “아니에요! 하고 싶어요! 제가 스승님을 업고 갈 수 있게 해 주세요!”

    율리시즈는 후다닥 나를 등에 업었다. 넓은 등 위에 업히니 새삼 아이가 다 컸다는 생각이 들어 감회가 새로웠다.

    “언젠가 해 보고 싶었어요. 스승님을 업어 드리는 일이요.”

    ‘버킷리스트인가?’

    귀여운 소망이었다. 언제 저런 걸 마음에 두고 있었을까.

    “그거 말고 더 하고 싶은 건 없어?”

    율리시즈의 고개에 대고 말하니 갑자기 애가 삐걱거렸다.

    “어, 어, 음, 스승님이랑 같이 맛있는 걸 사 먹고, 실컷 놀고 싶어요!”

    “그거면 돼?”

    “네!”

    “알겠어. 네가 약속 시간과 장소까지 알아 와라. 나는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몇 년 동안 은둔자 같은 생활을 해 왔던 터라 거리의 괜찮은 맛집 따윈 전혀 몰랐다. 그래서 말한 거였는데, 율리시즈가 자꾸 입꼬리를 실룩거렸다.

    “율리시즈, 너 표정이 이상하다.”

    “제가요? 아닐 텐데요? 제 얼굴 잘생긴 거 스승님도 아시잖아요.”

    “알지. 아는데…… 꼭 좋아 죽으려는 표정이어서 말이다. 뭐가 그렇게 기쁜 거냐?”

    “복수를 끝마쳐서 그래요. 뿌듯해서요.”

    아닌 것 같은데.

    하지만 율리시즈가 그렇다는데 내가 뭐라고 반박하겠나. 알겠다고 하고 이번에야말로 손을 잡았다.

    “가자. 너를 기다리고 있을 사람들이 많을 테니.”

    나는 공간을 열어 율리시즈를 황제궁으로 이동시켰다. 그곳에는 반역자들의 시체와, 의기양양하게 승리의 함성을 지르는 율리시즈의 병사들이 있었다.

    “와아아! 황태자 전하 만세!”

    “새로운 황제 폐하 만세!”

    “율리시즈 폐하 만세!”

    새롭게 바꾼 율리시즈의 인생 2막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 * *

    며칠 내내 정신없는 하루가 이어졌다. 황제의 즉위식이란 거대 행사 때문에 성안의 모두가 분주했다.

    “대관식이 가장 상징적이니, 그것만 화려하게 준비하고 나머진 약식으로 하죠. 어쨌거나 황비 일파 때문에 황성 안이 들쑤셔졌으니 이 시기에 지나치게 화려하게 모든 절차를 치를 필요는 없습니다.”

    율리시즈가 대관식 외의 부수적인 예식과 절차를 간단히 생략하는 수준으로 명령했어도, 새 황제의 즉위식은 준비할 것이 많았다.

    “헉…… 허억…… 이 노쇠한 시녀장은 은퇴하고 싶습니다.”

    “로라. 이제 시녀장이 아니라 황제 폐하의 수석 시녀잖아.”

    “윈터, 나 지금 힘든 거 안 보여요? 도와줄 거 아니면 조용히 있어요.”

    “끙.”

    율리시즈의 측근인 나를 포함한 사람들도 바빠졌다. 로라는 수석 시녀가 되어 새로운 시종들을 뽑고 황비 일파의 잔재를 털어 내는 데 주력했다. 페른은 웬일로 자처해서 임시로 황궁 마법사직을 맡아 반역자들의 습격으로 무너진 황성을 복구하는 데 힘을 보탰다. 데이지가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세상에! 황제 폐하 만만세야!”

    “……데이지. 좋은 건 알겠다만 너 좀 돌아 버린 것 같다.”

    아무튼, 기쁜 마음으로 데이지는 페른을 도와 일을 했다. 아멜리아도 소식을 전해 듣고는 가장 빠른 배편을 끊어 오겠다고 말했다. 단발머리가 되어 자유롭게 하고 싶은 것을 배우며 살고 있을 아멜리아가 온다니 나도 기분이 좋아졌다.

    다만…… 궁금한 점이 하나 있었다.

    “그런데 왜 나한테는 아무도 일을 주지 않는 거지?”

    정신없이 바쁘다, 바빠 하는 궁내부 사람들이 나를 보면 조용히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며 물러갔다. 감히 나를 상대로 집단 따돌림을 계획할 리는 없었으니, 이는 율리시즈의 소행이라고 봐야 했다.

    “마법사가 얼마나 쓸 데가 많은데 일을 왜 안 주는 거냐고. 이거 인력 낭비 아니야?”

    “인력 낭비라는 단어를 주인님 입에서 듣는 날이 오다니.”

    “윈터. 너도 일 안 해? 뭐야. 율리시즈가 왜 우리 둘은 빼놓는 거지?”

    나도 율리시즈를 돕고 싶었다. 무엇이든 좋으니 시키는 일이라면 다 해낼 수 있는데, 율리시즈를 의식한 것 때문인지 아무도 내게 일해 달라 하지 않고 쉬라고만 했다.

    “주인님, 진짜 모르시겠어요?”

    “모르니까 물어보지. 윈터, 너는 알아?”

    “허허…… 아닙니다. 율리시즈 폐하께서 고생이 많으시군요.”

    “무슨 의미야?”

    “별 의미 없습니다. 말 그대로 고생 중이시잖아요? 그리고 주인님, 위험했던 순간을 겪었다는 걸 설마 벌써 잊으신 건 아니시겠죠?”

    “……윽.”

    세드릭의 일을 말하는 것이었다. 이건 내가 할 말이 없었다. 윈터가 팔짱을 낀 채로 잔소리를 퍼부었다.

    “앞으로는 절대! 혼자 어디 박혀 있지 마십시오. 사술사의 부적이 결계를 뚫었을 정도라면 힘이 정말 약해졌다는 것인데……. 폐하께서 늦었다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끔찍합니다.”

    “알았어. 내가 다 잘못했어. 그러지 않을게. 윈터가 나 걱정하는 거야 내가 제일 잘 알지.”

    오랜만에 윈터를 끌어안고 갈색 털을 매만져 주자 윈터의 꼬리가 까딱거렸다. 기분이 좋은 거로군. 루나의 말을 되새기며 한참 동안 윈터를 쓰다듬었다.

    “……세드릭은 어떻게 되었을까?”

    율리시즈가 군사를 풀어 세드릭의 행방을 뒤쫓고는 있었으나, 한 손을 잃은 2황자에 대한 제보는 누구에게서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가 갈 만한 곳은 모조리 뒤졌으나 종적을 감춘 세드릭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대가로 신체를 지불하고 사술을 써 탈출하다니, 그런 건 금기입니다. 2황자는 오래 살 수 없을 겁니다.”

    “그렇다면…… 잃을 것도 없으니 조만간 다시 모습을 드러내겠네.”

    세드릭은 모든 것을 잃었다. 반역자이니 잡히면 죽음뿐이었다. 생포해서 온다면 율리시즈가 아량을 베풀어 살려 줄 수도 있겠지만, 이 사달이 난 이상 그럴 수 있겠나 싶다.

    “폐황비의 시신을 거두기 위해서라도 다시 오겠지요.”

    카밀라는 도주 중 검에 찔려 사망했다. 그녀를 죽인 건 병사도, 율리시즈도 아닌 카밀라가 학대했던 시녀였다.

    변덕스러운 카밀라의 히스테리 때문에 신체에 영구적인 장애를 입고, 원한을 가슴속 깊이 새겨두고 있다가 반란이 일어나자 복수하기 위해 칼을 들고 황비를 찾았던 것이다.

    황비의 시신은 도륙 내어 저잣거리에 묻어야 한다는 여론이 강했다. 율리시즈는 이를 나와 상의하려 했으나 내가 거부했다. 온전히 율리시즈의 선택에 맡겼다. 율리시즈는 고민하다 세드릭이 발견되면 그때 결정을 내리겠다고 말했다.

    “아니…… 카밀라보다는 나와 율리시즈를 죽이는 데 혈안이 되어서 올 거야. 그렇게 말했거든.”

    반드시 우리 둘을 찢어 죽이겠다는 악의가 세드릭의 얼굴에 넘실거렸다. 어디에 숨어 있는지는 몰라도, 세드릭은 반드시 나와 율리시즈에게 복수하러 돌아올 것이다.

    “그게 언제일지는 몰라도, 율리시즈 말고 나 하나로 끝내면 좋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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