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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는 불구경 중-47화 (47/90)
  • 47.

    ‘이대로 죽는 건가?’

    인생이 어떻게 굴러갈지 모른다지만 이런 식으로 죽음이 다가올 줄은 몰랐다.

    죽음을 앞둔 순간 떠오르는 건 율리시즈의 얼굴이었다. 그 애가 얼마나 슬퍼할까. 그리고 얼마나 속상할까. 가장 강하다는 마법사가 어째서 허무하게 살해당했는지를, 윈터는 알고 있으니 율리시즈에게 전달해 줄 수 있을 것이다.

    ‘화내겠지. 울지도 몰라.’

    미안하다는 생각만 들었다. 다가온 죽음에 대한 공포보다 유리를 향한 걱정이 더 먼저 와닿았고, 무서웠다. 나도 내가 미친 것 같았다.

    ‘미안해.’

    죽는 줄만 알았다.

    “스승님!”

    “주인님!”

    “……!”

    챙, 하는 소리와 함께 칼이 떨어졌다. 율리시즈였다. 옆에는 윈터가 네발로 허겁지겁 쫓아왔다. 군사를 이끌고 황비 일파와 싸우러 갔던 율리시즈가 내 앞에 서서 세드릭의 칼을 쳐 냈다.

    “윈터가 스승님께 닥친 위기를 감지하고 저를 이동시켰습니다! 이제 괜찮습니다.”

    율리시즈는 내가 왜 바닥에 늘어져 세드릭의 공격을 맞을 뻔했는지 묻지 않았다. 그저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여기에 어떻게 왔어.”

    “부사령관에게 지휘권을 맡기고 왔습니다. 황비가 이끄는 군사의 사기는 저조한 데다, 우리 군이 더 수적으로 우세하고 전략까지 파악한 상태라 걱정할 건 없습니다.”

    “걱정했어요, 주인님!”

    윈터가 엉엉 울며 내 품에 뛰어들었다. 마법사와 패밀리어를 잇는 계약의 인이 빛나는 게 보였다. 아, 이게 나를 살렸구나.

    “이제 제가 스승님을 구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율리시즈가 윈터에게 부탁했다.

    “윈터, 스승님을 데리고 멀리 떨어져. 스승님께서 많이 놀라신 것 같으니까.”

    “그렇게 하겠습니다, 황태자 전하!”

    윈터는 지체하지 않고 나를 데리고 이동했다. 패밀리어의 마법이니 아주 멀리 가지는 못했지만, 세드릭의 공격 범위 밖으로 피하기는 했다.

    “율리시즈……! 너! 네가 늘 걸림돌이었어!”

    “그런 식으로 말하면 속이 편해?”

    “닥쳐! 네가 뭘 안다고 지껄이는 거야?! 다 가진 주제에. 네가 비참한 내 마음을 알아? 아무것도 모르면서!”

    세드릭이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율리시즈에게 맨손으로 덤벼들었다. 하지만 율리시즈는 세드릭을 비웃으며 그를 가볍게 피하고 복부를 걷어찼다.

    “커억!”

    세드릭이 구토를 하며 볼썽사납게 나뒹굴었다. 그래도 아직 기운이 남았는지, 아니면 오기를 부리는 건지 핏발 선 눈으로 다시 떨어진 칼을 줍고 율리시즈에게 달려들었다.

    “너만 없었으면……! 너만 없었다면 지금 난 이렇게 바닥까지 떨어지지 않았어!”

    챙. 챙. 칼이 맞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했다. 세드릭은 잔뜩 흥분해 있었고, 율리시즈는 차분했다. 검술 실력이 더 뛰어난 데다가 이성을 잃지 않은 율리시즈가 이길 것은 자명했다. 승리의 여신은 율리시즈의 편을 들고 있었다.

    “내 탓이 아니라 네 탓이겠지. 세드릭. 너는 아멜리아를 해치려고 할 때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구나. 네 욕심으로 초래한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남 탓만 하는 게.”

    “닥쳐! 닥치라고! 넌 뭐가 잘나서 그렇게 말하는 건데?”

    “그러는 너야말로 내 앞에서 처지를 비관할 자격이 되던가? 시작은 황비, 카밀라가 했다. 네 어머니가 내 어머니를 죽이고 나까지 죽이려 한 것이 모든 일의 시발점이 되었는데. 네 논리대로라면 피해자는 네가 아니라 나겠지.”

    챙강. 율리시즈는 세드릭을 가지고 노는 것처럼 대하더니 끝을 냈다.

    “……이럴 수는 없어.”

    세드릭이 절망적인 표정을 하며 무너졌다. 율리시즈가 세드릭의 칼을 동강 내 버린 것이다. 전의를 상실한 세드릭을 향해 율리시즈가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이라도 항복해. 이미 승기는 내 쪽으로 넘어왔다. 너도 모르지 않을 텐데.”

    “……내가 항복하면, 어머니께서는 어떻게 되는 거지?”

    “카밀라는 놓아줄 수 없다. 그 여자는 내 어머니를 죽인 원수다. 황비를 죽여야 복수를 마무리 지을 수 있다. 우리의 악연은 여기서 끊어야 해. 그러니 네 어머니를 살려 달라는 부탁은 들어줄 수 없다.”

    “그러면서 나는 살려 주겠다고? 거짓말하지 마! 네가 가장 사랑하는 스승님을 죽이려 한 나를 가차 없이 죽이려고 검을 휘두른 걸 모를 줄 알아?”

    “넌 스승님을 죽이려 했으니까. 처음엔 죽이려고 했다. 하지만 스승님께서 보시는데 피를 흘리고 싶진 않아.”

    율리시즈의 말에 나는 움찔 어깨를 떨었다. 윈터는 내 귓가에 대고 조용히 속닥였다.

    “안심하세요. 주인님. 율리시즈 님께서는 자초지종을 모르십니다. 제가 적당한 변명으로 둘러댔어요. 지금 율리시즈 전하는 주인님께서 황태자 전하의 피붙이를 죽이는 걸 원치 않아 공격하지 못한 것으로 여기실 겁니다.”

    내 몸이 이상해졌다는 걸, 내가 약해졌다는 걸 모른다는 말이었다. 몸 밖으로 튀어나올 듯이 거칠게 뛰던 심장이 조금 수그러들었다.

    “……걱정시켜서 미안해.”

    “아닙니다. 아니에요! 주인님이 무사하셨다면 그것으로 되었습니다. 더는 바라지 않아요. 살아 계셔서 다행입니다.”

    오열하는 윈터를 안고서 율리시즈를 쳐다봤다. 세드릭이 율리시즈 앞에서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욕설을 지껄였다. 더러운 말도 서슴지 않았다.

    “대마법사가 원하면 뭐든 다 들어줄 것처럼 말하네. 둘이 무슨 사이라도 되나?”

    “세드릭, 입 다물어. 스승님을 모욕하는 건 참지 않을 거니까.”

    “왜. 찔려? 나는 알지. 네가 돌기둥에 깔려 죽을 뻔했던 그날, 네 스승님이 너를 구하러 왔을 때 네 표정을. 머저리라도 알 수 있어. 네가 네 스승님을 바라보던 감정은……”

    “[다물어라.]”

    내가 마법을 사용해 세드릭의 입을 막았다. 율리시즈와 윈터의 등장 덕분인지 몸을 움직이는 게 편안해졌다. 마력도 다시 운용할 수 있었다. 그러니 세드릭도, 죽음도 멀어져 더는 무섭지 않았다.

    “으으읍!”

    “어딜.”

    세드릭이 분노한 낯으로 내 쪽으로 달려들려 했으나, 율리시즈가 그의 급소를 쳐 기절시켰다. 게거품을 문 세드릭이 혀를 길게 내밀고 바닥에 축 늘어졌다.

    “……죽은 건 아니지?”

    “안 죽었습니다. 세드릭을 죽일 생각은 없었으니까요. 그게 스승님의 뜻이잖습니까.”

    율리시즈는 내게 달려와 나를 부축했다. 아까까지 매섭고 냉혹하게 싸우던 사람이라는 걸 믿기 어려울 정도로 부드러운 표정으로 율리시즈는 나를 다독였다.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너도.”

    “세드릭이 아까 미친 것처럼 중얼거리던 건 잊어버리세요. 저놈의 걸레같이 더러운 입놀림에 스승님의 귀를 더럽히는 건 안 됩니다.”

    율리시즈는 속상해하며 내게 자기 겉옷을 덮어 주었다. 제자에게 스승이 참 못난 모습만 보이고 있었다. 부끄러웠다. 내가 지켜 주겠다고 말한 아이에게 도움만 받고 있는 꼴이라니.

    “고마워. 율리시즈. 그리고 미안해.”

    “아닙니다. 스승님을 구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건 제 인생에서 가장 값진 경험이었어요.”

    해사하게 웃는 율리시즈의 얼굴은 어떤 보석보다 찬란하게 빛나서, 내 눈이 멀어 버릴 것 같았다.

    북극성처럼 언제나 나를 버티게 만들던 작은 별 같은 황자님.

    쿵쿵. 심장이 또 불규칙적으로 뛰었다.

    ‘……뭐지? 지금은 위협당하는 상황도 아닌데.’

    가슴이 쿵쿵거렸다. 율리시즈에게 목숨을 빚진 게 많이 창피했던 탓일까. 잘 익은 곡식 알갱이처럼 고개를 들지 못하는 나를 향해 율리시즈가 걱정 어린 말을 건넸다.

    “어디 아프십니까? 스승님의 안색이 붉습니다.”

    ‘윽.’

    율리시즈의 자색 눈동자를 쳐다보기 힘들었다. 나는 손바닥으로 그 애의 머리를 가볍게 밀어 냈다. 밀어 냈다고 하기도 어려운 손짓이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좀 있으면 나아져.”

    “정말요?”

    “그래……. 그러니까 좀 떨어져 줄래? 너무 가깝다.”

    내 말에 율리시즈는 황급히 몇 걸음 떨어졌다. 피와 땀, 먼지투성이로 절어 있는 갑옷 때문인 줄 알고서.

    “죄, 죄송합니다. 스승님. 제 모습이 지금 많이 더럽죠.”

    “……아니야. 그런 것 때문이 아니라…….”

    ‘뭐 때문이지?’

    스스로도 알 수 없는 감정에 생각이 막혀 우뚝 굳었다.

    “스승님?”

    “……여튼, 네가 더러워서 피한 건 아니야. 그런 이유로 사람을 피했다면 네가 갓난아기일 적에 직접 돌보지도 못했을 거다.”

    “무슨 그런 말씀을 이런 데서 하세요…….”

    율리시즈는 내 말에 부끄러워하며 헛기침을 내뱉었다. 윈터가 우리 둘을 이상하게 바라봤다.

    “주인님, 눈치 없으시죠?”

    “뭐라고?”

    “됐습니다. 무사하시니 다행이죠. 황태자 전하와의 일은 주인님께서 알아서 하시리라 믿습니다.”

    “뭐를?”

    정말 몰라서 물어본 거였는데, 윈터는 쌩하니 먼저 가 버렸다. 어처구니가 없어 멍하니 서 있는데, 율리시즈가 내게 말했다.

    “돌아가시죠. 스승님. 지금쯤 모든 것이 끝났을 겁니다.”

    율리시즈가 손을 내밀었다. 내가 그 아이의 손을 잡으려던 순간이었다.

    “……둘 다 가만두지 않을 거야. 나중에 다시 만나자.”

    기절했던 세드릭이 일어나 사술사의 부적을 뜯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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