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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는 불구경 중-37화 (37/90)
  • 37.

    내가 다가서자 아멜리아는 죽음을 예상하기라도 한 듯 두 눈을 꼭 감고 내가 내릴 처벌을 기다렸다.

    하지만 나는 아멜리아에게 어떤 폭력도 행사하지 않았다. 그러고 싶지 않아서였다.

    “일어나, 아멜리아.”

    “하지만 저는…….”

    고개를 들지 못하고 바들바들 떠는 아멜리아를 마법으로 일으켜 세웠다.

    “그렇게 찬 바닥에 무릎 꿇고 앉아 있으면 혈액 순환 안 돼서 다리 아파.”

    ‘무엇보다 유리가 싫어하겠지.’

    그 애는 자기 주변 사람들을 무척이나 사랑하니까.

    그래서 아멜리아에게 화를 낼 수 없었다.

    어머니는 달라도, 아멜리아는 율리시즈가 아끼는 동생이니까.

    내 말에 아멜리아는 물기 어린 눈을 깜빡거렸다.

    “저…… 저를 혼내지 않으세요?”

    “응.”

    “왜, 왜요? 진짜…… 진짜 많이 화나셨잖아요.”

    “그랬지.”

    부정하지 않는 내 대답에 아멜리아는 숨을 크게 들이켰다. 곧 자기 최후가 다가오는 줄 아는 사형수처럼.

    “그럼 이제 저를…….”

    “안 죽일 거야. 때리지도 않을 거야. 그런 짓은 하지 않아.”

    졸지에 애 때리는 쓰레기 새끼가 된 것 같다.

    ‘나 원래 이런 사람 아닌데.’

    뭔지는 몰라도 내가 좀 더 호전적인 성향으로 변해 가고 있다는 건 알겠다. 이게 다 클로드랑 황제랑 황비, 그리고 2황자 때문이다. 해로운 인간들이 내 인성을 망치고 있다.

    “그, 그럼요……?”

    “이번 일은 넘어가 줄게. 너도 세드릭에게 속아 넘어간 피해자니까. 객관적으로 봤을 때 너는 잘못이 없어.”

    “…….”

    딱딱한 말투로 사실만을 전했다. 아멜리아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번 일로 똑똑히 배웠을 거야. 황비와 2황자는, 너를 가족이 아니라 그저 편리한 수단쯤으로밖에 보지 않았다는 걸.”

    “……알아요.”

    “나는 네게 충분한 정보를 줬어. 그런데도 황비궁에 가고 싶다면 말리진 않을 거야.”

    손을 휘휘 저으며 가 봐도 된다고 말하자 아멜리아는 격렬하게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아니에요. 이젠 그 사람들을 가족으로 여기지 않을 거예요……. 진짜 가족은 여기 있다는 걸 깨달았으니까요.”

    애꿎은 원피스만 쥐어뜯던 아멜리아는 울음 섞인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저 여기 계속 남아 있어도 되나요?”

    “난 상관없어. 유리가 깨어나면 물어봐.”

    율리시즈는 당연히 괜찮다고, 신경 쓰지 말라고 여동생을 다독일 것이다.

    대답은 이미 나온 것이나 마찬가지였기에, 아멜리아는 주저하다 굳게 결심했는지 내게 말했다.

    “유리 오빠가 깨어나면 오빠에게도 사과할게요. 다신 안 그러겠다고. 그리고…… 오빠가 저를 구해 주었으니 앞으로는 오빠를 위해 살겠다고.”

    아멜리아의 녹색 눈이 어둠 속에서 반짝였다. 죽을 고비를 넘긴 소녀의 두 눈동자는 새파랗게 타오르는 불꽃과도 같았다.

    “클로드 님, 부디 제가 그럴 수 있도록 허락해 주세요.”

    “내가 아니라 유리한테 물어보라니까?”

    “오빠라면 스승님 허락부터 받으라고 손사래 칠 거예요. 그러니 클로드 님께 이야기해야 맞을 것 같아요.”

    아멜리아는 더는 울지 않고 씩씩하게 대꾸했다. 무엇이든 해낼 수 있다는 각오가 생생하게 전해져 나쁘진 않았다.

    율리시즈를 지키기 위한 사람들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다.

    “마음대로 해.”

    “감사합니다……!”

    “그런데 너도 한계가 온 것 같다.”

    “네? ……어어?”

    아멜리아의 가냘픈 몸이 휘청이더니, 이내 옆으로 풀썩 쓰러졌다. 지나친 긴장감으로 인해 진즉 기절했어야 할 몸이 버티고 버티다 지금에서야 정신을 놓은 것이다.

    “[아물어라.]”

    나는 쓰러진 아멜리아에게 치료 마법을 쓰고, 그 아이도 안아다 방으로 데려가 눕혔다. 이불을 덮어 주고 나오자 환해진 방 안에 로라와 윈터, 페른과 데이지가 땀을 뻘뻘 흘리며 돌아와 있었다.

    “왔어?”

    “어…… 어떻게 되었습니까? 율리시즈 전하는요? 아멜리아 황녀님은요?”

    로라가 침을 꼴깍 삼키며 물었다. 나는 두 아이의 방을 가리켰다.

    “둘 다 자. 둘 다 기절했고.”

    “네?”

    “한동안 난 유리 잃을 뻔한 충격에 시달릴 것 같으니까, 유리 방에서 간이침대 깔고 잘 거야. 아멜리아도 충격이 심할 테니 일어나면 로라가 좀 챙겨 줘.”

    “네? 네?”

    “우선 다 자고, 내일 아침에 이야기해. 그때 황비궁에 쳐들어갈지 말지도 결정할 테니까.”

    “아…… 알겠습니다. 클로드 님.”

    “다들 해산.”

    내가 피로하단 걸 눈치챈 페른과 데이지는 군말 없이 그들 방으로 향했다. 윈터는 침구를 꺼내서 내 간이침대 곁에 놨다. 저리 가라고 했는데도 말을 안 들었다. 가끔 보면 얘는 내 패밀리어가 아니라 상전 같다.

    “저도 오늘부터 여기서 잘 겁니다.”

    “……맘대로 해라.”

    불이 꺼졌다.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유리의 노오란 금발이 빛났다. 나는 그것을 뚫어지게 바라보다 새벽 늦게서야 잠이 들었다.

    그날 밤 나는 악몽을 꿨다.

    원작처럼 비참한 최후를 맞는 율리시즈를 봤기 때문이었다. 폭군으로 매도당하는 율리시즈는 반란군의 공격을 받고 쓰러졌다.

    피를 토하며 죽어 가는 율리시즈를 부여잡고 나는 오열했다. 꿈에서는 마법을 사용할 수 없어, 나는 무력하게 유리의 생명이 스러져 가는 걸 바라봐야만 했다.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절망감에 비명을 지르고 있을 때, 자색 눈이 희미하게 웃음기를 띠었다.

    “괜찮아요. 스승님. 이건 다 꿈이잖아요. 눈을 뜨면 스승님 곁에 제가 있을 거예요. 이건 스승님의 두려움이 빚어낸 환상일 뿐이에요.”

    “나는, 나는 네가 꿈에서도 죽는 게 싫어. 이런 끔찍한 건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아…….”

    “그럴 일은 없을 거예요. 스승님께서 언제나 저를 구하러 와 주실 거잖아요?”

    화살 꼬챙이가 된 꿈속의 율리시즈는 피투성이가 된 채로도 환히 태양처럼 미소 지었다.

    유리가 웃는 모습을 바라는 것 같아서, 나도 억지로라도 입가를 끌어 올리고 웃었다.

    “그래. 그게 내가 할 일이니까.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그때마다 내가 몇 번이고 너를 구할게…….”

    “믿어요.”

    아니야. 또 이런 일이 발생할지도 모르니 나만 믿지는 마.

    ‘유리를 강하게 키워야겠다.’

    그게 퀭한 눈으로 일어난 내가 첫 번째로 한 생각이었다.

    * * *

    세드릭이 벌인 ‘그’ 사건이 일어난 후로 아이들은 멍하니 시간을 때울 때가 많아졌다.

    “아무래도 마음의 병인 것 같습니다. 황태자 전하와 황녀 전하 두 분 모두 겉으로는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궁의를 불러와도 진단은 이게 다였다. 마음의 병. 심한 충격을 받아서 잠시 정신을 놓고 있다는 것.

    유리는 끼니를 때우고 화장실을 들를 때를 빼면 남은 시간을 내내 잤다. 아멜리아는 말도 하지 못하고 허공만 쳐다보며 시간을 보냈다. 로라는 두 아이가 미쳐 버린 건 아닌지 걱정했다.

    “이대로 두 분이 계속 충격받으신 채 있으면 어쩌죠?”

    “아냐, 로라. 둘 다 괜찮아질 거야. 지금은 너무 어려서, 충격을 소화할 시간이 좀 필요한 것뿐이야.”

    율리시즈와 아멜리아는 엄연히 반인반룡의 피를 이은 황족이었다. 클로드가 쌓은 지식에 의하면 반인반룡의 후손인 윈프리드 제국 황족들은 일반인보다 몸과 정신이 튼튼하다고 했다. 두 아이는 각자의 방식으로 마음을 회복하고 있었다.

    진짜 문제는 나였다. 나는 한시도 율리시즈와 떨어져 있기를 원치 않았다. 유리의 일거수일투족을 함께하며 금붕어 똥처럼 뒤를 졸졸 쫓아다녔다.

    “주인님, 뭐 하세요?”

    참다못한 윈터가 짜증스레 묻기까지 했다.

    사건 다음 날 바로 자초지종을 설명해서 모두가 내가 왜 이러는지 알고는 있었다.

    로라는 당장 황비궁을 뒤엎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페른과 데이지도 동의했다. 윈터는 우선 애들이 회복되면 그때 조지러 가자고 말했다. 나는 그러자고 했고, 그 이후 한시도 유리 곁에서 떨어지질 않았다.

    “유리를 지키고 있어.”

    “그렇게까지 따라다니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때 그 일이 얼마나 주인님께 끔찍했는지는 아주 잘 알겠어요. 그런데, 그러다 주인님이 죽을 것 같아서 하는 말이에요.”

    “내가 왜? 난 멀쩡한데.”

    “……거울은 쳐다보셨어요? 눈두덩이가 새카맣다고요.”

    윈터가 날 측은하게 쳐다보더니 손거울을 가져왔다. 로라의 것이었다. 작은 거울 속에는 백발의 남자가 충혈된 눈을 한 채 밤을 열흘 정도는 샌 듯한 창백한 낯을 하고 있었다.

    “이거 나인가?”

    “거울에 비친 게 그럼 주인님이지 누구겠어요…….”

    “폐인에 가까운데? 이상하다. 난 멀쩡한데. 아프지도 않고, 피곤하지도 않아.”

    “……마법으로 신체의 능력을 계속 끌어 올린 거겠죠. 아무리 초월자의 반열에 들었어도 그러다간 죽습니다. 죽는다고요! 제발 뭐라도 좀 드시고 주무세요!”

    “……내가 식사를 안 했던가? 잠도 안 잤어?”

    그런데 왜 배고프지도, 졸리지도 않을까.

    ‘계속 깨어 있어야 할 것 같아…….’

    그것만이 나를 지탱했다.

    * * *

    윈터는 제 가슴을 퍽퍽 치며 한탄했다. 페른과 데이지가 양옆에서 윈터를 위로했다.

    “안 되겠어. 이러다 내 주인님이 돌아가시게 생겼어. 이렇게까지 정신적으로 몰려 계실 줄 몰랐는데. 엄마를 불러야겠어.”

    윈터는 비장한 눈빛으로 연락용 수정구를 꺼내 누군가를 불렀다.

    “엄마! 들리세요? 저예요, 윈터.”

    그러자 발랄한 여성의 목소리가 수정구에서 흘러나왔다.

    “어머, 윈터니?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엄마한테 연락을 다 하니? 가족 기념일 아니면 집에 잘 오지도 않는 애가 웬일이람.”

    “엄마…… 비상이에요. 제 주인님이 많이 아프세요.”

    “어디가? 신체? 아니면 정신이?”

    “정신이요. ‘약속’ 때문에 애지중지 키우고 있는 황자님이 계신데, 그 황자님이 최근에 죽을 뻔했거든요.”

    “저런. 큰일이구나.”

    “네. 전 주인님이 멀쩡하신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요. 그 사건으로 황자님과 황녀님도 아프시지만, 제가 보기엔 주인님이 더 심각한 상태인 것 같아요.”

    “그래서, 내가 뭘 어쨌으면 좋겠니?”

    “도와주세요. 엄마. 우리 주인님 좀 살려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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