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마법사는 불구경 중-36화 (36/90)
  • 36.

    유리를 영영 잃을 뻔했다.

    ‘X발.’

    돌기둥이 유리를 덮쳤을 때, 누가 심장을 잡아 뜯는 것 같은 극심한 고통을 느꼈다. 클로드 이 개X끼. 내가 약속을 못 어기게 하려고 안전장치를 설치해 둔 거면, 애가 다치기 전에 더 일찍 알렸어야지. 이 미친 새끼야.

    ‘평온하게 죽을 수 있다는 기회를 잃는 것보다 더 두려웠던 건 율리시즈를 끔찍하게 보낼 뻔했던 거라고…….’

    클로드가 자기 몸에다 무슨 짓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유리가 심하게 다치자 그게 내 몸에도 공명으로 전해졌다.

    그 애가 죽으면 나도 죽을 것 같았다. 물리적 죽음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완전히 망가질 것 같은 느낌에 미친 듯이 추적 마법으로 아이를 찾았다.

    그리고 세드릭의 함정에 걸려 숨이 꼴딱꼴딱 넘어가려던 상태의 유리를 발견한 순간, 난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박살 내 버리고 싶은 욕망에 나를 놔 버릴 뻔했다.

    율리시즈가 나를 말리지 않았다면 그랬을 것이다.

    “스승님. 집에 돌아가요…….”

    그나마 남은 정신머리라도 있어 유리를 마법으로 치료하고, 데리고 갈 수는 있어서 다행이었다.

    얘 죽으면 너희들 다 죽이고 나도 죽을 거다, 라는 어떤 대사처럼 진짜 다 죽일 뻔했다. 앞뒤 안 가리고 그때는 보이는 것 전부를 갈가리 찢어 버리고 싶었다.

    ‘세드릭. 그 녀석은 평생 모르겠지.’

    율리시즈가 집에 가자고 하지만 않았으면 내가 제 사지를 조각낼 뻔했다는 걸.

    그 소악마 같은 애가 뭐라고 지껄였는지는 기억이 안 났다. 내가 보호하던 아이를 위험에 노출시킨 이상 죽여 버려야겠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으니까.

    암살자들을 처리하는 게 너무 익숙해진 탓이었을까? 어쨌거나 사람을, 그것도 아주 악랄한 짓을 벌였다지만 어린아이를 죽일 뻔했는데도 나는 그 순간 오롯이 분노만을 느꼈다. 격정적인 분노에 나를 잃고 이성을 내던졌다. 그건 극도의 슬픔과도 맞닿아 있었다.

    한 발자국만 더 나아갔다면 난 더는 사람이 아니었겠지. 죽고, 또 죽이는 괴물이 되었을 것이다.

    “졸려요, 스승님.”

    ……그렇지만 율리시즈가, 유리가 졸린다고 했으니까. 어서 가서 아이를 폭신한 침대에 눕히고 재우는 게 우선이었다.

    내 세계는 오로지 너를 위해 돌아가고, 내 목숨은 너의 목숨 아래에 받쳐진 것이기에.

    “……알았어.”

    예민해진 감각 사이로 유리의 감정이 마나를 타고 흘러들어 왔다.

    ‘스승님께서 속상하실 일이 일어나지 않으면 좋겠어.’

    ‘많이 힘드실까? 걱정할 일 없게 한다고 나갔는데 내가 이런 꼴이 되어서…….’

    ‘아멜리아는 괜찮을까? 그 애가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야. 이런 일을 벌인 세드릭은 밉지만, 그 애의 피가 스승님의 손에 묻지 않으면 좋겠어. 스승님 마법이 아까우니까.’

    유리는 줄곧 자기 주변 사람들을 걱정하고 있었다. 대체로 폭주할 나를 염려했다.

    ‘바보같이 착해 빠졌기는…….’

    착한 유리의 심성 덕에 나는 조금씩 이성을 되찾았다. 불에 뜨겁게 달군 것처럼 부풀어 올랐던 마나가 고요한 수면처럼 조용해졌다. 유리는 무사히 숨을 쉬고, 아멜리아도 안 다쳤고, 세드릭 녀석도 죽이진 않았다.

    용서해 달라, 뭐 어쩌고저쩌고 말하는데 거의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들었다. 들어 줄 가치가 없는 말이었다. 귀찮게 들러붙는 세드릭을 옷소매 채로 잘라 떨쳐 내 버리고는 황태자궁으로 돌아왔다.

    ‘조용하네…….’

    궁 안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나를 따라나서겠다고 나간 로라와 윈터, 페른과 데이지는 아직 돌아오지 못한 듯했다.

    ‘페른이 공간이동을 쓸 수 있으니 조금 있으면 돌아오겠지.’

    그사이 율리시즈는 잠들었다. 아니, 기절했다고 보는 게 맞으려나?

    어쨌든 나는 유리를 그 아이의 침실로 데려가 눕히고, 도톰한 이불을 잘 덮어 줬다. 출혈이 있어 안색이 창백한 것 외에는 유리는 평소랑 똑같았다. 적막만 흐르는 방 안에 새근새근 잠자는 숨소리가 깔렸다.

    “[만들어져라.]”

    아이가 깰라, 나는 작게 주문을 외치고 마법을 사용해 간이침대를 만들었다. 그걸 널찍한 유리의 침대 옆에 두고, 나는 그 위에 누웠다. 불안함이 가시지 않아 새우처럼 웅크린 채 유리가 무사한지 한참을 빤히 바라봤다.

    “무사해서 다행이야.”

    “…….”

    자는 유리는 색색 숨 쉬는 소리만 냈다.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이 아니니 혼잣말로도 족했다. 유리가 무사히 숨 쉬고 있어서, 나는 그것만으로도 기뻤다.

    “저, 저어. 클로드 님…….”

    아멜리아가 쭈뼛거리며 내 쪽으로 다가오려 했다. 동시에 유리가 몸을 옆으로 돌렸다. 나는 누운 자세 그대로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가만히 있어.”

    “네, 네.”

    아멜리아는 유리가 잠들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자기 입을 두 손으로 막고 유리가 깨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했다.

    ‘죄책감을 느끼고 있네.’

    곤두선 신경은 마나를 타고 흘러오는 아멜리아의 감정마저 잡아챘다.

    ‘나 때문에…… 나 때문에 유리 오빠가 크게 다쳤어.’

    ‘클로드 님이 아니셨다면 나도, 오빠도 세드릭 때문에 죽었겠지.’

    ‘세드릭 말처럼 난 멍청한 계집애였어. 버려진 나를 거둬 주신 은혜도 모르고…… 유리 오빠를 죽일 뻔했어.’

    우울한 감정이 아멜리아를 온통 뒤덮고 있었다. 내가 유리를 치료했다지만, 극심한 고통을 느끼고 사지 문턱을 넘을 뻔한 유리에게 아멜리아는 너무나도 미안해했다.

    “……클로드 님.”

    “응.”

    나는 여전히 웅크린 채 유리만 바라봤다. 지금 계속 유리를 지켜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서였다.

    눈도 깜빡이지 않고 유리를 응시했다. 유리가 살아 있는 걸 확인해야 이성을 잃지 않을 테니까. 난 아직 불안정했다.

    내가 뒤를 돌아보지도 않았지만, 아멜리아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말을 이어 갔다.

    “죄…… 죄송해요.”

    “뭐가?”

    유리 주변에는 소음 차단 마법을 걸었다. 진작에 이렇게 했으면 애가 더 편하게 잠이 들었을 텐데. 가장 간단한 방법도 떠올리지 못할 만큼 내가 화가 나 있었구나.

    “멋대로 궁 밖으로 뛰쳐나간 것. 클로드 님을 비롯해 다들 세드릭이…… 아니, 2황자가 위험하다고 말렸는데도 무시하고 그 애를 만나러 간 거요.”

    그랬지. 아멜리아 넌 아닌 척해도 매일 네 가족을, 혈육을 그리워했으니까. 널 거둘 때 로라가 제일 걱정한 부분이 그거였는데. 그게 현실이 되어 버렸네.

    “그래서?”

    평소라면 아멜리아에게 하지 않았을 차가운 단답만이 무심하게 튀어나왔다. 시선은 오로지 유리에게 고정한 채였다.

    금실처럼 가늘고 부드러운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을 세며 나는 내 안의 남은 분노마저 가라앉히려 노력했다.

    “제가 멍청했어요. 저 때문에 유리 오빠가…… 황태자 전하께서 죽을 뻔했어요. 어떤 벌이든 내려 주세요. 제가, 제가 다 잘못했어요.”

    아멜리아는 무릎을 꿇고 내가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조아리며 울음을 삼켰다. 나는 속으로 아멜리아에게 종알거렸다.

    ‘아멜리아, 틀렸어. 넌 멍청한 애가 아니야. 네가 진짜 멍청했다면 지금 나에게 용서를 빌지 않았겠지.’

    진짜 멍청한 건 세드릭 같은 놈이다. 벌집을 쑤셔 기어코 벌들을 화내게 만드는 짓거리를 하는 미친놈들. 아멜리아는 그에 비하면 새 발의 피였다.

    “죄송해요, 죄송해요…….”

    내가 아무 말도 없이 듣고만 있자 아멜리아는 끝도 없이 용서를 빌었다.

    머릿속으로는 알았다. 이건 아멜리아의 잘못이 아니라 세드릭의 잘못임을. 그 아이를 흉악하게 기른 카밀라의 죄임을. 율리시즈는 위험함을 무릅쓰고 아멜리아를 구하려 했을 뿐이라는 것을.

    ‘하지만 분이 풀리지 않아.’

    몇 년간 보고 지낸 정이 참으로 얄팍하게도, 유리가 죽을 뻔한 순간 아멜리아에 대한 감정은 깨끗이 소각되었다.

    유리가 무사히 숨을 쉬고 있는 지금도 나는 아멜리아가 여기에 있든 말든 상관하지 않았다. 귀찮으니 저리 갔으면 했다.

    ‘안 그러면 내가 또 어떻게 될지 몰라서 짜증 나거든.’

    손을 까닥거렸다. 마나는 내 살의에 여전히 반응했다. 아멜리아를 없애 버리는 일이야 눈 감고도 할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스승님…… 아멜리아 잘 챙겨 주세요.”

    “…….”

    “제 동생이잖아요. 그렇죠? 스승님도 사실 아멜리아를 아끼시잖아요.”

    유리가 난데없이 잠꼬대를 했다. 무슨 꿈을 꾸는지 기가 막히게도 아멜리아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놨다. 아멜리아도 율리시즈가 깬 줄 알고 움찔했다가 도로 조용해졌다.

    “응. 알지. 네 동생인 거.”

    잠꼬대에 답하자 유리가 실실 웃었다.

    ‘아가, 무슨 꿈을 꾸는 거니?’

    그 꿈속은 재미있니? 아까 있었던 일을 까맣게 잊어버릴 만큼?

    “물론 저를 더 좋아하시겠지만요…….”

    “응. 이 세상에서 난 너만 중요해. 다른 사람과 비교군에 놓는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지.”

    귀여운 잠꼬대는 끊어지지 않고 이어졌다. 나는 허공에 흩어져 버릴 답변을 내뱉으며 유리의 존재가 무사히 이 세상에 남아 있음을 실감했다.

    “아멜이 너무 착해서 걱정이에요…….”

    “어. 나도 이젠 걱정돼.”

    또 이런 일이 일어날까 봐. 그럼 그때는 정말 너를 잃을까 봐.

    “그래도 옆에서 저랑 스승님이 지켜 주면 괜찮을 거예요.”

    “난 너만 지키고 싶은데.”

    억지로 깜빡임을 멈춘 눈이 따가웠다. 눈물이 흘러 시야가 뿌옇게 변하려는 걸 눈물을 말려서 다시 유리를 응시했다.

    “스승님께선 제가 존경하는 분이시니까요. 저도 스승님처럼 강해져서 제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킬 거예요.”

    “무슨 일곱 살짜리 애가 다 늙은 사람처럼 말하냐?”

    투덜거려도 잠든 유리는 웃기만 했다.

    네가 악몽을 꾸지 않아서 다행이다. 이 사건이 너를 뒤흔들 큰일이 아닌 채로 지나가서 안심이다.

    들끓던 분노가 다 식었다. 나는 간이침대를 치우고, 아멜리아에게로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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