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마법사는 불구경 중-25화 (25/90)
  • 25.

    “아, 아니요!”

    이 사람에게 미움받고 싶지 않았던 세드릭은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하지만 남자는 가만히 서서 세드릭을 탐색하듯 살펴보기만 했다.

    “…….”

    “죄, 죄송해요. 귀찮게 굴려던 건 아니었어요. 궁금해서…… 심부름 핑계로 여기 와서 죄송해요.”

    세드릭은 포악한 본성은 싹 감추고 남자 앞에서 유순한 양처럼 굴었다.

    백발의 남자는 곤란하다는 표정을 짓더니 마른세수를 몇 번이고 하며 문을 열었다.

    “……딱 한 번, 들어오는 걸 허락하겠습니다. 2황자 전하.”

    “헉!”

    ‘내 정체를 이미 알고 있었어?’

    그러자 입고 있던 시종의 옷이 너무 창피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황자를 위해 사다 놓은 휘황찬란한 의복을 입고 오는 것이었는데.

    “그 반응을 보아하니 어머니인 황비 마마께서 저에 대한 설명을 제대로 안 한 모양이군요.”

    남자가 달과 용이 새겨진, 거대한 은색의 스태프를 꺼내 들었다. 그의 손끝에서는 푸른 빛의 마력이 감돌았다.

    “설마…….”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클로드 하센티온. 황태자 전하이신 율리시즈 님의 보호자이자 스승 되는 자입니다.”

    ‘……이건 불공평해.’

    세진의 말에 세드릭은 질투라는 감정을 난생처음 자각했다.

    ‘이렇게 대단하고 멋진 데다 아름다운 분이 그 못된 녀석의 보호자라고? 이 사람이?’

    어머니인 카밀라가 제발 죽여 달라고 부탁한 건 이미 한 귀로 흘려 버렸다. 세드릭은 조금이라도 더 세진의 옆에 있고 싶었다.

    그가 너무 궁금했다.

    “아직 어리고, 궁의 돌아가는 정세도 잘 모르는 듯하니 이번만 황태자궁에 들이겠습니다. 하나, 황태자 전하나 황녀 전하에게 위해를 끼치는 즉시 당신을 적으로 간주하겠습니다.”

    높낮이가 없는 딱딱하고 무심한 발언이었다. 세드릭은 상냥하게 말해 달라고 울고 싶어졌다.

    “……알았어요.”

    ‘그런데, 황녀 전하라니? 누이가 있었던가?’

    세드릭이 알기로 1황자에게는 형제자매가 없을 터였다.

    그런데 누이라니?

    ‘설마 내 동복누이인 아멜리아……를 말하는 건가?’

    혼란스러워하는 세드릭에게 세진은 딱딱하게 말했다.

    “좋습니다. 그것만 지켜 준다면 오늘 2황자 전하와의 만남은 무사히 끝날 수 있을 겁니다.”

    ‘수틀리면 나를 해치기라도 하려는 건가?’

    마른침을 꼴깍 삼키며 세드릭은 황태자궁으로 들어섰다.

    “어, 스승님! 오셨어요!”

    세드릭과 세진이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태양과도 같은 금발의 미소년이 달려와 세진에게 안겼다.

    ‘아.’

    보석처럼 빛나는 자색의 눈동자. 자신과 비슷한 찬란한 금발.

    1황자 율리시즈와의 첫 만남이었다.

    매일 어머니 카밀라의 저주 어린 말로만 전해 들었던 이복형의 모습은 실제로 보니 복숭아만 먹고 자란 듯 사랑스러웠다.

    “응, 유리. 다녀왔어.”

    그것보다 더 눈부셨던 건…… 달려오는 황태자를 꼭 껴안아 주는 대마법사의 환한 미소였다.

    세드릭은 그것이 못내 싫어 가슴이 아렸다.

    * * *

    “어, 스승님! 오셨어요!”

    “응, 유리. 다녀왔어.”

    율리시즈가 저 멀리서 우당탕탕 달려와 내게 안겼다. 나는 언제나 그랬듯이, 아이를 안아 뱅글뱅글 돌리며 놀아 줬다. 유리가 까르륵 즐거워 보이는 웃음소리를 냈다.

    “오늘은 어딜 다녀오셨어요?”

    “음, 늘 똑같지. 나쁜 사람들을 혼내 주고 왔단다.”

    “와! 스승님께서 윈터와 함께 무찌르고 오셨겠죠!”

    “당연하지. 그렇지, 윈터?”

    “예에. 주인님께서 영웅담의 한 장면처럼 일격에 나쁜 사람들을 혼내 주었답니다.”

    주방에 있는 윈터가 성의 없이 대꾸했다. 계속 황성에만 머무르긴 심심했는지, 이 작은 페럿 집사께서는 로라에게 요리를 배워 주방장 노릇도 같이 겸하고 있었다.

    ‘시녀들을 전부 치운 영향인가 싶어 그렇게 수고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만, 윈터가 한다고 고집을 부렸지.’

    마법으로 해결하면 될 일이었지만, 윈터는 자잘한 일에 마력을 쓰지 말라며 만능 시종이 되기를 자처했다. 로라로서는 말릴 이유가 없었다. 한때 티격태격 싸움이 많던 두 사랑은 어느새 주방에서 전우가 되어 맛있는 요리를 내느라 분투하고 있었다.

    “흠? 주인님. 못 맡았던 냄새가 나는군요. 누굴 궁 안에 데려오신 거죠?”

    ‘역시 윈터. 개코…… 아니 페밀리어 코는 속일 수가 없다니까.’

    나는 안고 있던 유리를 옆에 내려놓고, 기죽지 않으려는 듯 눈을 부릅뜬 어린아이를 가리켰다.

    “2황자 세드릭이야. 시종 옷을 입고 황태자궁 앞을 얼쩡거리길래, 위험하겠다 싶어서 데려왔어.”

    내 말에 복작복작하던 분위기가 싸늘하게 식었다. 특히, 주방에서는 국자를 떨어뜨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로라였다.

    “……누가 왔다고요?”

    “2황자 전하인 세드릭.”

    “당장 내보내야 합니다!”

    로라가 요리용 앞치마를 입은 채로 후다닥 달려왔다. 그녀는 유리를 낚아채듯 감싸고는 살벌한 눈길로 세드릭을 쏘아봤다.

    “2황자 전하, 무례인 것을 아오나 황비 마마에 대한 원한이 있어 예는 보이지 않겠습니다. 여긴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나, 나는 이곳이 궁금해서 왔다!”

    로라의 무시무시한 살기에 세드릭은 말을 더듬으며 이곳에 온 이유를 거짓으로 댔다.

    하지만 로라는 절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전하의 어머니이신 황비 전하께서 황태자 전하와 대마법사님 험담을 하루도 빼먹지 않고 퍼뜨린다는 소문이 파다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태자궁까지 온 저의가 심히 의심스럽군요.”

    세드릭은 영악한 아이였지만, 그래도 자신보다 큰 어른이 무섭게 굴자 몹시 당황한 눈치였다. 평소 카밀라가 오냐오냐 돌보고 황비궁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던 황자님에겐 커다란 시련이었다.

    “감히 시녀 주제에 나를 겁박하다니, 대마법사님께서 가만두지 않으실 거야!”

    나? 여기서 내가 왜 거론되는 거지?

    의아해할 틈도 없이 세드릭은 아까 유리가 있었던 자리로 달려와 내 옷자락을 붙잡았다.

    “도와줘! 대마법사!”

    “……저는 2황자님의 보호자가 아닙니다. 로라의 무례는 인정하지만, 제게 도움을 청하셔 봤자 얻을 수 있는 건 없습니다.”

    “어, 어른이잖아……. 나를 보호해 줘야 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니야?”

    “제게 있어 그 당연함은 율리시즈 황태자 전하를 위한 것이라서요.”

    아직 어리기만 한 세드릭에겐 미안했지만, 나 역시 로라처럼 이 아이를 곱게 볼 수 없는 현실이었다.

    로라에게 안겨 있던 유리는 울먹이는 세드릭을 물끄러미 보더니, 나와 로라를 꾸짖었다.

    “떽!”

    “응?”

    “네?”

    “어른 둘이서 애기 괴롭히는 거 아니에요. 스승님께서 가르쳐 주셨잖아요. 약자를 괴롭히는 건 나쁜 놈…… 아니 나쁜 사람이라고!”

    윈터가 귀신같이 날아와 내 옆구리를 발로 찼다.

    “제가 말씀드렸죠. 주인님은 비속어를 줄이셔야 한다고요.”

    “미안…… 그런데 너 진짜 발차기 맵다.”

    “그러니까 스승님께서는 저 아이를 우리 궁의 손님으로 대해 주세요! 아, 로라도 마찬가지야!”

    황태자 전하께서 말하시는데 무시할 수가 있나. 이렇게 될 걸 예상하고 있었기에 한숨을 쉬었다.

    “그래. 유리. 그렇게 하자.”

    그때, 저 뒤에서 아멜리아가 수줍게 볼을 붉히고 세드릭을 보며 좋아했다.

    “소, 손님!”

    카밀라가 버린 첫 아이. 버림받은 1황녀. 이름도 없이 아무 데나 던져진 아이를 주워서 온 건 순전히 변덕에 불과했다.

    ‘원작에선 이렇게 진행되지 않았지만…….’

    버려진 황녀를 보니 유리가 떠올라서, 이대로 죽게 둘 수는 없었다. 로라와 윈터, 엘리엇은 카밀라의 핏줄이라 걱정스러워했지만, 나는 그 모든 불안을 내리누르고 아이를 데려왔다.

    ‘이제부터 네 이름은 아멜리아. 아멜리아 샬롯 윈프리드라고 부를게.’

    겨울에도 아름답게 꽃을 피워 내는 동백처럼 자라라고 아멜리아라고 했다. 데려올 당시의 아이는 내리 굶었는지 영양실조 직전의 상태였다. 아이를 잘 먹이고, 율리시즈만큼은 아니더라도 선생님을 붙여 배우게 하자 아멜리아는 조금 느리지만 착한 아이로 성장했다.

    아멜리아와 율리시즈, 두 아이가 이 궁 안에서 그들 이외의 또래 아이를 만나는 건 굉장히 드문 일이었기에 그들은 세드릭을 반가워했다.

    “안녕, 세드릭! 난 율리시즈야. 일곱 살이지! 내가 알기로 내가 네 형이라고 했어.”

    “안녕, 세드릭……! 나, 난 아멜리아야. 클로드 님이 말씀하시길, 나는 네 친누나라고 하셨어. 처음 만나서 기, 기뻐.”

    복숭아와 자두를 닮은 두 아이가 오동통한 손을 악수하려 내밀자, 세드릭은 저도 모르게 손을 내밀려다 흠칫했다.

    ‘저 둘이 내 형과 누나라고?’

    형이란 작자는 어머니께서 싫어하시던 황태자였다. 너무 해맑고 사랑받고 자란 티가 나서 세드릭은 싫었다. 아멜리아라는 친누이 역시 모자란 태가 나는 계집애가 기대에 찬 눈을 반짝이며 인사하니 속이 메스꺼웠다.

    “싫어. 나는 대마법사님만 만나고 싶어. 너희는 내 형과 누나 따위가 아니야!”

    세드릭의 단호한 외침에 로라와 윈터가 눈을 칼처럼 번뜩였다.

    “로라, 윈터. 가만히 있어.”

    “……흥.”

    “……칫!”

    ‘역시 아이들끼리 어울리는 건 무리였나?’

    유리와 아멜이 같이 놀 친구가 없어 외로워하는 것 같길래 원작을 바꿔 볼 겸 시도했더니, 영 꽝인 모양이었다.

    “으아앙… 클로드 님, 세드릭이 저를 싫어해요…….”

    아멜이 펑펑 울었다. 고대하던 친동생과의 만남이었을 텐데, 아이에게 미안했다.

    아멜의 옆에서 유리가 등을 토닥이며 달랬다.

    “괜찮아, 아멜. 세드릭이 아직 뭔가 잘 몰라서 그런 걸 거야.”

    “뭐라고?”

    유리는 단순히 아멜을 위로하기 위해 한 말이었는데, 그게 세드릭의 자존심을 건드린 모양이었다.

    “너 지금 뭐라고 했어!”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