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마법사는 불구경 중-24화 (24/90)
  • 24.

    시간은 유수와 같이 흘렀다. 엘리엇과 로라는 셀레스틴을 잃은 슬픔을 완전히는 아니어도 거의 떨쳐 냈다.

    엘리엇은 성성했던 백발이 다소 빠졌고, 로라는 새치가 보이고 주름살이 늘었다. 유리는 어엿한 일곱 살이 되었다. 아멜리아라는 여동생이 생겨 부쩍 오빠 노릇을 하려는지, 많이 의젓해졌다.

    외견상의 변화가 없는 건 나와 윈터뿐이었다.

    늙지도, 아프지도, 변하지도 않는 육체가 두려울 만도 했지만 나는 별생각이 없었다. 내가 키우는 아이의 나이가 일곱 살이니 앞으로 십삼 년 정도만 더 버티면 되겠구나, 싶었다.

    지난 칠 년간은 거의 똑같은 일상의 반복이었다. 유리를 먹이고, 재우고, 말을 할 줄 알게 되자 아이를 가르칠 스승님들을 초빙해 오고. 아직도 덧없는 욕심으로 유리를 해치려는 자들을 잡아 죽이고.

    윈터의 보조가 없이도 살수들을 혼자 피 한 방울 튀지 않고 처리할 수 있게 되었다.

    “익숙해지셨군요, 주인님.”

    “그래?”

    처음 셀레스틴에게 위스퍼를 타 먹이던 시녀를 죽일 때와 비교하면 많은 것이 달라졌다. 나는 더 이상 아이의 안전을 위협하는 무리들을 죽이는 데 쓸데없이 망설이지 않았다. 살수를 보낸 이들에게 본보기를 보여 줘야 했기 때문에 하나도 남기지 않고 숨통을 끊어 보냈다.

    “……살육은 익숙해지지 않는 게 좋습니다. 저는 주인님께서 이렇게 손에 피를 묻히시는 게 싫습니다.”

    “하지만 유리를 지키는 일이니 나름 숭고한 일이지 않을까?”

    “처음 이곳에 오셨을 때의 주인님이라면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으셨을 겁니다. 마음이…… 많이 마모되신 것 같습니다.”

    “글쎄. 정작 난 아무렇지도 않아서 잘 모르겠는걸.”

    보이지 않는 마음보다 겉으로 보이는 신체가 더 신경 쓰였다.

    ‘시계 문신의 초침이 해가 갈수록 움직이고 있지.’

    그리고 시곗바늘이 돌아가는 만큼 내 몸에도 서서히 실금이 가기 시작했다.

    아프지는 않았지만, 내 몸이 서서히 부서지고 있다는 사실을 시시각각 지켜보는 건 뭐라 형용하기 어려운 기분을 주었다.

    “또 괜찮으신 척! 저번에 허벅지나 등 쪽에 금이 간 걸 봤는데 모른 척하시기입니까!”

    “아아, 윈터가 또 화났어. 잔소리하지 마. 시끄러운 건 싫어.”

    “주인님을 위한 잔소리입니다! 좀 들으십시오!”

    우리가 한갓지게 잡담을 나누는 사이에도 암살자는 쳐들어왔다. 나는 손가락을 튕겨 마법을 발동했다.

    “[속박하라.]”

    “크윽……!”

    “[진실을 털어놔.] 배후는 누구지?”

    “카, 카, 카밀라 황비님…….”

    또다. 배후를 말한 암살자는 저주 마법이나 술식이라도 걸려 있었는지 몸의 구멍이란 구멍에서 다 피를 뿜으며 죽어 버렸다.

    “얼마나 많은 암살자를 보내도 결과는 똑같을 텐데, 왜 쓸데없는 짓을 하는지 원.”

    “이렇게라도 발악하지 않으면 밤에 잠을 못 자나 보죠.”

    “저런.”

    윈터와 나는 익숙하게 황태자궁 주위에 늘어진 시체들을 다른 공간으로 멀리 치워 버렸다. 핏자국은 비를 뿌리듯 물방울을 내려 닦아 내고, 아예 그 자리에 새로운 식물을 심어 쑥쑥 자라나게 만들어 흔적을 지웠다.

    “아침에 황자 전하께서 또 새로운 나무가 돋아났다며 신기해하시겠네요.”

    “이번엔 사과나무로 심어 봤으니까, 사과가 열리면 그 애에게 줘야지. 아, 로라가 요즘 파이를 참 잘 굽던데 애플파이를 만들어서 아이들을 위한 간식으로 주면 좋겠어.”

    “진짜 지극정성이십니다…….”

    “칭찬 고마워.”

    나는 잔혹한 면에서는 무뎌졌으나, 내가 지켜야 할 아이를 위한 마음은 더 단단해지고 커졌다.

    참, 나는 이제 유리뿐만이 아니라 다른 아이도 한 명 더 키우고 있다.

    그 아이의 이름은 아멜리아 샬롯 윈프리드.

    “아멜리아도 좋아하려나?”

    몇 년 전 황비가 낳았으나 꼴도 보기 싫다며 내다 버린 가엾은 아이였다.

    * * *

    황비는 뽑아도 계속 자라는 잡초처럼 다시 끈질기게 황제를 유혹해 총애를 되찾았다.

    비록 예전만큼 대단한 위세는 부리지 못하더라도, 총애를 받아 아이를 배기 위해 갖은 애를 썼고 그 결실로 마침내 2황자 세드릭을 출산했다.

    “아아, 사랑스러운 내 아들 세드릭. 이 어미에게 와 주어서 고마워요.”

    카밀라는 내가 있는 한 절대 황후가 될 수 없으니 아들인 세드릭이 적통으로 인정받기는 영 글렀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황제인 빈센트가 계약 때문에 나를 어찌하지 못하자 카밀라가 대신 나서서 살수를 보냈던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은 내가 황태자궁 주위에 쳐 놓은 보호 결계에 막히고, 기척을 느낀 나와 윈터가 함께 그들을 처리하면 끝이었다.

    그래서 카밀라는 날이 갈수록 예민하고 신경질적으로 변해 갔다.

    “대마법사만… 대마법사만 아니었어도 지금쯤 나는 황후가 되었을 텐데…….”

    가끔 황비궁을 감시하다 보면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리는 카밀라가 보이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머리채를 쥐어뜯다가 아들이 보이면 달려가 눈물로 호소했다.

    “아아, 세드릭! 내 귀하신 아드님!”

    “어, 어머니. 왜 이렇게 몰골이 흉해지셨나요? 설마 어머님의 시녀가 어머니를 홀대했나요?”

    세드릭은 착한 아이였다. 단, 제 어미에게만.

    그는 카밀라를 똑 닮은 성정을 타고나서, 제 뜻대로 되지 않으면 시종들의 종아리를 걷어차고 침을 뱉는 등 안하무인이었다.

    툭하면 수업도 빼먹고 땡땡이를 치기 일쑤였으나, 카밀라는 오로지 세드릭이 아들이란 점에 감사했고 또 그에 집착했다.

    “세드릭. 내 아가. 이 어미의 한을 좀 풀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물론이죠. 어머니. 저는 어머니를 위해서라면 별도 달도 다 따 올 수 있어요!”

    아이다운 천진한 대답이었다. 하지만 세드릭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자부하자마자 카밀라는 아들의 두 어깨를 붙들고 무겁게 속삭였다.

    “……그렇다면 대마법사, 그자를 죽일 수도 있나요?”

    “……네?”

    “이 어미와 황자의 미래를 위해서 그자의 목숨을 거둘 수 있냐는 말입니다.”

    첫 아이로 원하지 않았던 딸을 낳은 후, 카밀라는 조금 미쳤다. 그 딸을 제 손으로 아무 데나 내다 버렸음에도, 버린 딸을 주워 거둔 사람이 클로드 하센티온이라는 것을 알자 그녀를 조롱하기 위해 저러는 것이라는 망상을 품었다.

    “약속하세요, 황자! 우리를 위해 그자를 죽여 주겠다고요!”

    “아, 아, 알겠어요. 어머니. 그렇게 할게요…….”

    겁에 질린 세드릭이 억지로 약속해야만 카밀라는 만족하며 자리를 떴다.

    세드릭은 자신을 맹목적으로 사랑해 주는 어머니를 좋아했으나 저렇게 태도가 무섭게 돌변하면 두려워했다.

    ‘어머니께서 늘 상냥하시면 좋겠어…….’

    그럼 더 많은 사랑을 어머니께 받을 수 있을 텐데.

    평화로운 일상이 지속되길 원하는 세드릭은 용기를 내어 1황자와 대마법사가 사는 황태자궁에 몰래 숨어들기로 했다.

    ‘가장 어린 시종의 옷을 빼앗아 갈아입고 염탐한다면 쉽게 접근할 수 있을 거야!’

    황태자궁엔 1황자인 율리시즈 외에도 아이가 있었다. 바로 세드릭의 친누나인 아멜리아였다.

    이름도 받지 못하고 어머니에게 버림받은 누이를 세드릭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기에 연민 따위 가지지 않았다.

    아멜리아를 향한 세드릭의 감상은, 아예 관련이 없는 사람이지만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거슬린다, 정도였다.

    반대로 이복형인 황태자 율리시즈에 대해서는 크나큰 열등감을 품고 있었다. 사사건건 주위에서, 시녀들이, 어머니마저 둘을 같은 선상에 놓고 비교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세드릭이 대마법사 또한 싫어하게 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대마법사의 결계가 아무리 강하다지만, 어린 시종은 별로 의심하지 않겠지! 아이를 둘이나 키우는 사람이라 어린애들한테만 유한 것 아니냐는 소문이 돌던데 그렇다면 접근도 쉽겠어!’

    세드릭의 머릿속에 상상의 나래가 펼쳐졌다. 누군가를 죽인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도 모르면서, 어설프게나마 주방에 있는 디저트 나이프 하나를 주머니에 쑤셔 넣고 변장을 한 뒤 황태자궁으로 향했다.

    하지만 세드릭이 간과한 점이 있었는데, 그는 지나치리만큼 황제를 닮았다는 것이었다. 환한 금발에 푸른 눈동자. 멀리서 봐도 황가의 자손이란 걸 알 수 있었기에 옷을 바꿔 입는 것 정도로는 신분을 숨기기 어려웠다.

    그런 것도 모르고 세드릭은 모험을 떠나는 용사처럼 힘차게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어 황태자궁에 다다랐다.

    그곳에서는 맛있는 냄새가 풍겼다.

    ‘나, 이 냄새 알아! 사과파이야!’

    세드릭의 입가에 침이 고였다. 얼른 어머니의 소원을 이루어 드리고 저 맛있는 사과파이도 한 조각 가져가는 것이 좋을 듯했다.

    “저어, 심부름을 왔습니다. 안에 계신가요?”

    드넓은 포부와는 다르게 낯선 상황에 놓이자 긴장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황태자궁은 아무도 없는 것처럼 조용하다가, 안에서 누군가 문을 열었다.

    “누구지?”

    ‘와…….’

    깨끗한 눈의 결정만을 뽑아 만든 것 같은 백발에, 호박색 눈이 인상적인 미남자가 차가운 얼굴을 하고 세드릭을 바라봤다. 웃는 얼굴이 잘 어울릴 인상이지만, 무표정해도 그 미모는 바래지 않았기에 세드릭은 멍하니 그를 올려다봤다.

    “이봐, 꼬마야. 누구냐고 물었다. 네 소속이 어디인지 말해.”

    “아, 저, 그…… 소속청이 어딘지는 몰라요. 저는 매번 잡일만 맡는 막내라서요.”

    “흠…….”

    즉석으로 지어낸 거짓말 때문일까. 아니면 눈앞의 키가 크고 호리호리한 청년이 너무 아름다워서일까. 세드릭은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올까 무서웠다.

    “황태자궁에는 그 어떤 시종도 필요 없으니 아무도 보내지 말라고 했을 텐데, 이런 어린아이를 보냈다, 라…….”

    중얼거리는 목소리조차 미성이어서 세드릭은 반짝거리는 시선을 남자에게서 거둘 수가 없었다. 귀족들이 2황자 전하를 위하는 선물이라고 준 값비싼 인형보다 그가 더 예뻤다.

    ‘갖고 싶다…….’

    홀린 듯이 백발의 남자를 바라보는데, 그의 미간이 구겨졌다.

    “황비가 보냈나?”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