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마법사는 불구경 중-4화 (4/90)

4.

“율리시즈라, 좋은 이름이군요. 미들 네임도 돌아가신 제 어머님의 이름이니 의미가 있어 좋고요.”

그런 건 몰랐다.

‘책에서 그런 이름으로 등장해서 똑같은 이름을 붙인 거였는데…….’

“잘됐네요.”

하지만 내색하지 않고 넘어갔다. 속사정까지 알 필요는 없으니까.

셀레스틴은 내가 아이의 이름을 지어 준 것에 몹시 기뻐했다. 난폭하기 그지없다던 괴짜 대마법사가 의외로 무뚝뚝하면서도 상냥한 모습을 보여 주자 안심하는 듯했다.

“이미 우리 가문에 대한 조사를 끝내고 오신 거군요. 섬세한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얼떨결에 나는 황제에게 냉대받고 있는 황후의 면모를 살려 주려고 한 착한 마법사가 되었다.

뭐, 좋은 게 좋은 거겠지.

“그렇다니 다행이군요.”

‘그 또라이 같은 인상만 아니었으면 되었지.’

클로드의 기억과 지식을 흡수한 나는 황후의 착각을 내버려 두었다. 폭군으로 자랄 위험성을 배제하기 위해선 안전한 양육 환경이 절실했다.

‘그러니 저 아이의 어머니를 살려야 한다.’

많이들 나오지 않나. 원작을 비틀어서 죽었어야 할 사람들도 잘 먹고 잘 사는 해피 엔딩이.

골몰하는 내게 윈터가 밖으로 소리가 새지 않도록 하는 마법을 걸고 물었다.

“주인님, 왜 그렇게 혼자 심각해요?”

“앞으로의 20년을 어떻게 해야 잘 꾸려 나갈 수 있을지 생각하고 있어서.”

“미래는 변수가 무수히 많은걸요, 주인님. 아무리 주인님께서 엄청난 마법사라 하셔도 한 사람의 완벽한 미래를 설계하기란 어려운 일이에요.”

“머리 그만 굴리고 지금에 집중하라는 거야?”

비딱하지만 정확한 해석에 윈터가 새침하게 수염을 매만졌다.

“계획으로 해결될 일이었다면, ‘원래’ 주인님께서 이미 다 해결하시고 유람이라도 가셨겠죠.”

지독히 냉정한 평가였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건 율리시즈라는 저 황자가 최악의 폭군으로 죽을 미래를 바꿀 수 있는 게 나뿐이라는 말이기도 했다.

“……알았어. 현재에 충실하면 될 것 아냐.”

툴툴거리는 나는 내버려 둔 채로 윈터가 소리 차단 마법을 거두었다. 황실에서 마음대로 마법을 쓰는 것은 대마법사와 그의 패밀리어에게만 내려진 특권 중 하나였다. 그를 알고 있을 황후는 놀라지 않고 다만 가만히 나와 윈터를 지켜보고 있었다.

“무슨 중요한 이야기였길래 그리 신중한 태도로 밀담을 나누셨나요?”

댁의 아드님의 미래 계획을 세웠다가 도로 엎었습니다.

……라고는 죽어도 말할 수 없었다.

‘그랬다가는 십중팔구 대마법사로서 미친 면모만 한 줄 더 추가되겠지.’

심장 위에 새겨진 정교한 인이 약속을 지키라며 거칠게 박동했다. 나는 고통 아닌 고통을 참고 그림처럼 웃었다.

“괜찮다면, 제가 당분간 1황자 전하의 스승 겸 황후 폐하의 호위로 황성에 남을 수 있겠습니까?”

내 제의에 셀레스틴은 화들짝 놀랐다. 그러자 병색이 서린 야윈 얼굴이 더 애처로워졌다.

“그건 아니 될 말입니다. 제가 부탁드렸던 건 제 아들, 율리시즈의 안전이었습니다. 대마법사님께서 저까지 감싸 주려고 하신다면 황비가 가만있지 않을 것입니다.”

셀레스틴은 분노인지 두려움인지 모를 표정을 지었다.

황비, 그 여자.

윈프리드 제국 황제, 빈센트의 총애를 듬뿍 받는 애첩 카밀라.

‘이 이야기 속 주인공의 어머니이자 선역으로 포장된 악역.’

카밀라는 율리시즈의 곁에서 반드시 떼어 놓아야 할 1순위의 인물이었다.

현재 그녀는 임신한 상태로, 그 아이가 남자아이이길 간절히 원했다. 그래야 거슬리는 황후와 1황자를 치울 완벽한 명분이 생기기 때문이었다.

비천한 신분이었으나 영악하고 아름답기 그지없는 미모로 빈센트의 눈에 든 카밀라는 최고의 자리를 가지기 위해서라면 수단 방법 가리지 않았다.

‘태어날 아이는 그쪽엔 아쉽게도 여자아이겠지만.’

사술사까지 불러 남자아이가 태어날 거라 확신한 카밀라는 기어이 셀레스틴을 죽이고야 만다.

어머니를 잃는 고통은 어린 율리시즈에게 똑똑히 각인되어 평생 지워지지 않는 낙인으로 자리 잡는다.

약속을 위해서는 율리시즈의 생존 및 보호 외에도 그의 어머니인 셀레스틴을 지켜야 하는 것이 옳았다.

“가만있지 않는다면 황비가 저를 뭐 어쩌겠습니까. 해치기라도 할까요?”

다리까지 꼬며 자신 있게 말하자 셀레스틴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밖의 누가 듣기라도 했을까 두려워하면서.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황비의 눈과 귀는 어디에나 있는 법입니다.”

“아까와 같은 소음 차단 마법을 건물에 걸어 두었으니, 아무도 저희의 말을 주워듣지 못할 겁니다.”

숨을 쉬는 것처럼 마법이, 마나가 내 의지에 자연스럽게 따라 주었다.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세상이 장난감 같네.’

황비가 나를 해치려는 마음을 먹는 순간 그녀를 짜부라뜨릴 수 있을 정도라고 느낄 만큼.

“제가 아니라 황후 폐하나 1황자 전하를 노리겠죠. 저라는 패를 쥐는 걸 그 욕심 많은 분께서 어찌 두고 볼 수 있겠습니까.”

“……이미 다 아시는군요.”

“이 세상에 제가 모르는 것은 없습니다.”

사실 엄청 많지만. 이런 허세라도 부려야 불안한 마음의 황후를 안심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이때 윈터가 마법으로 텔레파시를 보냈다.

‘와. 새 주인님 뻔뻔하기가 여간내기가 아닌데요?’

‘……조용히 해.’

클로드, 그 개또라이 자식이라면 이랬을 것 같아서 연기하는 것뿐이니까.

흘러들어 온 지식을 보면 그 말이 아주 틀린 것도 아니고.

“……감사한 제안이기는 하나,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콜록거리며 마른기침을 다시 시작한 셀레스틴이 아직은 형형한 자색 눈을 들어 읊조렸다.

“대마법사께서는 사람과 인연을 맺는 것을 불편하게 여기시지 않으셨습니까.”

클로드가 그랬나. 옆에 다소곳하게 서 있는 윈터를 쳐다보자 어깨를 으쓱였다.

“괜한 욕심은 화를 부르기 마련입니다. 저는 제 아들의 목숨을 지켜 주시겠다 약조하신 것만 해도 기적이라 생각합니다.”

기침 소리가 더 커지자, 로라가 달려와 셀레스틴에게 비단 손수건을 건넸다. 새하얗던 손수건은 금세 피로 물들었다.

“……보시다시피 저는 오래 살 수 없는 몸이 되었습니다. 황비의 짓으로 추측하나, 물증이 없어 따지지도 못하는 형편입니다.”

카밀라는 저보다 잘난 것을 두고 보지 못하는 여자였고, 셀레스틴은 유서 깊은 피델리움 백작가의 고명딸이었다. 반면 카밀라는 노예로 팔릴 뻔한 것을 우연히 빈센트가 구해 줘 결국 황궁까지 올라왔다.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구는 그녀가 노리는 건 황후의 자리였다. 입 밖으로 꺼내지 않으나 황성 안의 모두가 그것을 알았다.

윈터가 쪼르르 달려와 황후의 피가 묻은 손수건의 냄새를 킁킁 맡았다. 혀로 살짝 핥아 보기도 하여 로라를 기겁하게 했다.

“이게 무슨 무례한 짓입니까?!”

분노한 로라가 빗자루를 꺼냈다. 윈터는 앞발을 들어 공격하지 말라는 의사를 취했다.

“조사입니다! 조사! 황후 폐하의 핏자국에서 독 냄새가 풀풀 나는 것이 너무나 지독하여 그랬습니다. 제가 아는 종류의 것 같아서요.”

윈터의 말에 로라는 빗자루를 힘껏 휘두르려던 자세 그대로 멈췄다.

“예……? 그 말씀인즉.”

“독을 쓴 독초의 정체를 알게 되면, 저희의 능력으로는 누가 어떻게 그것을 들여오고 뒷배가 누구인지까지도 알 수 있겠죠.”

대마법사 클로드에게 있어서 그런 것쯤이야 식은 수프 먹기에 불과했다. 세상의 마나와 소통하고 자유로이 부리는 대마법사에게서 숨길 수 있는 거짓 따위는 존재할 수 없었으므로.

황후, 셀레스틴 또한 이 말에 눈을 크게 떴다.

“로라, 너야말로 무례했다. 어서 마법사님의 패밀리어께 빗자루를 거두고 사과하거라.”

셀레스틴의 명령이 떨어지자 로라는 황급히 윈터에게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윈터 님. 제가 경솔했습니다. 무례를 용서해 주세요.”

“흠, 충실한 종복의 마음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니 괜찮습니다.”

셀레스틴은 여전히 창백한 안색으로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정말…… 정말 저희를 위해 이렇게까지 나서도 괜찮으시겠습니까?”

황후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안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역마살이 들린 것처럼 여기저기를 쏘다니던 대마법사가 돌연 윈프리드 제국의 정쟁에 관여한다는 건 큰일이었다.

‘속박되겠지.’

저 해안가 구석에 있는 소국도 아닌 거대한 땅덩어리를 짊어진 제국의 후계자를 정하는 일에 끼어드는 것이다.

아무리 강하다 한들 ‘클로드 하센티온’은 외국인이었다. 윈프리드 제국에 속한다는 맹세를 바치지 않는다면 절대 이 개입을 원치 않으리란 각오는 이미 해 뒀다.

“윈프리드 제국에는 큰 복이겠지요. 기간 한정이긴 하나, 최고의 무기를 손에 쥐게 될 테니.”

“…….”

“이게 1황자 전하와 황후 폐하 두 분 모두를 살릴 수 있는 방도라는 건 황후 폐하께서 더 잘 아시리라 봅니다.”

셀레스틴 에이렐 윈프리드. 결혼 전에는 피델리움이 오랜만에 낳은 천재라 불렸던 여자.

‘그리고 지금은 패륜아 황제의 새장에서 서서히 썩어 가고 있는 여자.’

선한 인상 너머로 셀레스틴의 두뇌는 끊임없이 계산하고 판단할 것이다. 무엇이 옳은 선택일지를.

선한 사람 아래에서 자라 선하게 자랐으나 방치된 채 병들어 마음이 썩어 가면서까지 쌓인 원한을 잊을 수 있겠나.

“……먼 조상님이 베푸신 은덕을 이렇게 갚아 주려 하시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그가 부탁했던 건 후대의 평안과 안녕이었으니까요.”

‘클로드’는 피델리움 백작가에 개인적인 빚이 있었다. 이를 갚기 위한다며 나서니 셀레스틴도 할 말이 없었다.

“……대마법사님을 곤란하게 만들 것입니다.”

이 선한 여자는 고여 있는 썩은 물속에서도 기어이 저 자신을 지켰다.

욕심을 부려 당장 황비를 죽여 달라 요청할 수도 있는 것을, 은인이 되어 줄 이에게 피를 묻힐 수 없어 고작 하는 말이 저런 것이었으니.

“그런 건 상관없습니다. 빚을 갚을 뿐인지라.”

“빚……이요.”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곤란하기 때문이니, 더는 거절하지 말고 받으시는 게 좋겠습니다.”

“저, 저도 황후 폐하께서 삶을 내려놓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뒤에서 시녀 로라가 울먹이며 황후의 치마 끝단을 잡자, 결국 셀레스틴은 백기를 들었다.

“대마법사님의 은혜를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자랑스러운 피델리움 백작 가문의 명예를 걸고, 저와 제 아들은 당신께 입은 은혜를 반드시 갚겠노라 맹세합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완벽한 왕실 예법이었다. 깊이 허리를 숙인 셀레스틴의 고개 밑으로 물방울이 떨어져 러그를 적셨다.

“꺄우아!”

이 와중에도 미래의 폭군님께서는 까르륵 웃기 바빴다. 긍정적이니 나쁘진 않았다.

* * *

셀레스틴과 로라는 우리를 위해 황후궁 내의 별채 하나를 내줬다. 개중 가장 상태가 나은 곳이었다.

클로드의 기억과 지식을 모두 삼킨 대가인지 머리가 아팠다. 그대로 침대 위에 대자로 누우니 이곳이 천국이었다.

‘은혜 같은 거, 안 갚아도 되는데.’

나도 약속한 거 대신 이행하는 처지라 그다지…….

눈만 멀뚱하게 뜬 나를 향해 윈터가 뜬금없이 내 옆구리를 찔렀다.

“황궁에서 눌러앉으실 생각으로 이러신 겁니까?”

“그런 건 아닌데.”

“아이고, 고요하고 아름다운 내 집 놔두고 이게 무슨 고생입니까. 아이고오.”

“넌 돌아가도 돼.”

“패밀리어가 어딜 간답니까?! 주인 옆에 진득하니 붙어 있는 게 사명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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