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황후, 셀레스틴은 클로드가 된 세진의 말에 깜짝 놀랐다.
‘이리 순순히 승낙할 거란 생각은 전혀 못 했는데…….’
대륙에 단 하나뿐인 대마법사로 알려진 클로드 하센티온. 현자의 위에 오른 다른 강력한 마법사들이 그를 포함해 일곱이나, 그 중의 누구도 클로드를 이길 자는 없었다.
마법사는 여신의 축복을 받은 자들만이 임할 수 있는 영광된 일이었다. 한데 한 개인이 신에 필적할 만큼의 강력한 힘을 지녀 대마법사라는 전무후무한 칭호를 달고 다니니, 클로드를 탐내는 자들은 허다했다.
마법사란 마탑에 소속된 존재들이라, 온갖 나라에서 대마법사 클로드 하센티온을 모셔 가고 싶어 했다. 그의 출중한 마법 능력을 이용한다면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우기 쉬울 테니까.
클로드를 향해 뻗는 탐욕적인 손길이 점점 많아졌음에도 그는 그것들을 뿌리치고 태연히 중얼거렸다.
“싫은데? 내가 왜 그런 걸 해야 하는데? 응? 난 날 즐겁고 유쾌하게 만드는 일이 아니면 절대 하지 않아.”
클로드 하센티온은 괴짜였다. 그는 재미있거나 호기심을 끄는 종류의 일이 아니면 아예 받지를 않았다. 본디 고귀한 집안의 자제로 태어나 가진 재산이 넉넉하여 경제적으로도 걱정이 없었다는 것도 한몫했다.
그래서 셀레스틴은 클로드에게 편지를 보낼 때만 하더라도 아무런 기대도 품지 않았다. 읽어 주면 다행이고, 벽난로 속 땔감이나 되지는 않기를 바랐다.
그런데 이리 시원하게 승낙해 주다니.
‘아아, 운명이 나와 내 아이를 버리지 않았구나.’
그녀의 두 눈에서 주체할 수 없는 기쁨의 눈물이 흘러넘쳤다.
* * *
“……정말, 제 아이의 대부가 되어 주실 생각이십니까……?”
“음, 대부는 아니고 보호자요. 선생…… 아니, 스승님 정도가 딱 좋겠네요.”
대부가 되면 제국의 1황자라는 거물을 자기 자식처럼 보살펴야 하는 것 아닌가. 그건 너무 부담스러워 그 비슷한 자리를 제시했다.
‘약속을 위해서라지만 너무 깊게 엮이고 싶지는 않아서.’
다 키우면 죽을 목숨, 기왕이면 조금이라도 더 쉽게 연을 뗄 수 있는 자리가 좋았다.
‘……괜찮나?’
슬쩍 황후의 눈치를 봤는데, 그녀는 감복한 표정이었다.
“세상에…….”
황후 셀레스틴의 입이 가릴 생각조차 못 하고 크게 벌어졌다. 그리고 그녀의 자색 눈동자가 눈물로 얼룩져 어룽어룽했다.
“감사합니다, 대마법사님. 그렇게만 해 주시면 저는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그녀가 꼭 끌어안은 아기 포대기 위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어머니가 내리는 짧은 빗방울에 아기가 까르르 웃으며 두 손을 위로 뻗었다.
“정치적으로 엮이는 것을 싫어하시니, 대부는 생각조차도 해 본 적이 없습니다. 아예 제 제안을 거절하실 줄만 알았기에 이 상황이 너무도 기적 같습니다.”
그 정도까지야?
클로드, 그 또라이와 맺은 약속이니 이행하는 건 당연했기에 기적이라며 울먹거리는 셀레스틴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다행스럽게도 윈터가 내 궁금증을 해결해 주었다.
뒷발로 섬세하게 내 발가락 하나만 밟아 주면서.
“아야.”
“세게 안 밟았습니다. 그리고 이건 꽤 중요한 상황이라는 걸 알아 두셔야 합니다.”
“왜?”
“지금껏 제 ‘주인님’께서는 황족이고 왕족이고 귀족이고 가릴 것 없이 사람들 사이의 일에 끼어들기를 무척 싫어하셨거든요.”
“그래서?”
“이게 대마법사 클로드 하센티온의 첫 ‘온정’이 될 것입니다. 주인님께 청탁을 넣으려다 거절당한 놈들은 눈에 불을 켜고 쫓아오려고 하겠죠.”
“으…… 그건 싫은데.”
“반응은 원래 주인님과 무척 비슷하군요. 하지만 이미 판은 깔렸고, 약속은 지켜야 마땅하지요. 이왕 이렇게 된 거 1황자님을 안아 보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윈터의 말에 나는 금빛 요에 싸여 있는 아주 작고 어린 아기를 봤다. 금실 같은 머리카락이 살짝 보이고, 제비꽃보다 선명한 색의 자색 눈동자를 보아하니 장차 미인으로 자랄 것 같았다.
“그래요. 대마법사님. 한번 안아 보시지요.”
황후도 윈터의 말에 동조했다. 그녀는 이미 제 아들의 보호자가 되기로 나선 나를 신뢰하는 듯했다.
무표정하게 유지하고 있던 얼굴에 금이 가는 것이 느껴졌다.
“아기는…… 너무 연약해서 내가 안아도 될지 모르겠는데.”
“괜찮습니다. 이렇게 머리를 받쳐 주면서 아이가 편안하도록 중심을 잘 잡아 주면 됩니다.”
황후의 지도에 따라 어설프게나마 1황자를 품에 안았다.
‘따뜻하네.’
“우우아!”
사랑스러운 1황자는 우유 냄새를 풍기며 내 품에서 이리저리 손을 뻗었다. 순한 아기는 낯선 이의 품에서 울지도 않고 되레 대마법사의 뺨에 손을 올려 만지작거리는 무례를 저지르고 말았다.
“어머! 아가!”
“아우!”
“그러면 안 된단다! 대마법사님께서 곤란해하시잖니!”
서둘러 황후가 황자를 떼어 놓고자 했으나, 나는 평온했다.
“아기가 멋모르고 사람 볼 좀 잡아당길 수 있죠. 모든 게 다 신기해 보일 테니까요.”
‘클로드 하센티온’이 하기엔 지나치게 자비롭고 상냥한 말이었다. 무표정으로 말하지만 않았다면 황후는 내가 정신이 나간 것인지를 의심해 봤을지도 몰랐다.
“그……렇게 봐 주신다니 감사합니다. 대마법사님.”
“뭘요. 앞으로 계속 얼굴 마주 보며 살아야 하는 식구가 될 텐데.”
식구라니. 삭막한 황실에서 그 단어는 지나치게 다정하고 달콤해서 무작정 삼킬 수가 없었다.
‘기대도 하지 않았던 사랑을 받으며 자라겠구나, 내 하나뿐인 아드님은.’
셀레스틴은 어쩐지 눈물을 참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 * *
아름다운 황궁은 도망칠 수 없는 늪과 같은 곳이었다.
황제는 제 아비와 형인 황태자를 죽이고 황위를 차지한 패륜아였다.
황후 셀레스틴은 본래 황태자비가 되기 위해 약혼까지 치른 상태였다. 축복 속에서 연인인 그와 결혼할 예정이었으나 빈센트의 반란으로 인해 소중했던 모든 것을 잃고 황궁의 포로가 되었다.
‘선택하라, 나의 황후가 되어 쥐 죽은 듯이 목숨을 보전하고 살 것인지, 아니면 죽은 연인을 따라 저세상으로 갈 것인지.’
빈센트는 셀레스틴을 사랑하는 마음이 눈곱만치도 없었다. 이건 그가 평생을 열등감 어린 시선으로 보았던 황태자에 대한 모욕이었다.
황태자가 진심으로 사랑했던 여인에게 제 연인을 죽인 살인자의 아내가 되기를 강요하는 것. 그것에서 빈센트는 비뚤어진 희열을 느꼈다.
‘……하겠습니다. 폐하.’
‘아들을 낳는 게 좋을 거야. 아니면 황후 자리를 유지하기 힘들어질 테니.’
끔찍한 나날이 지나갔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머지않아 셀레스틴은 아들을 낳았다.
황실의 첫 아이, 첫 황자였음에도 관심을 가지는 이들은 없었다.
“귀여운 것. 카밀라, 네가 낳을 아이가 벌써 기대되는구나.”
현 황제 빈센트에게는 총애하는 후궁, 카밀라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셀레스틴의 출산 이후 곧바로 회임해, 온갖 주목을 다 받아 가며 살뜰히 대접받고 있었다.
“폐하도 참. 그러다 계집아이가 나오면 어쩌시려고 그러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뿐인 황녀로 곱게 키우며 다음번에 네가 낳아 줄 황자를 기다리면 되겠지. 너를 닮은 오누이가 눈에 선히 그려지는 것이 어서 보고 싶어지는구나.”
“신첩이 폐하의 소망을 반드시 이뤄 드리도록 하겠사옵니다.”
아이를 낳은 날 들은 것이라고는 저게 다였다. 황제와 황비는 세상에 단둘만 존재하는 듯 황후 셀레스틴이 없는 것처럼 철저히 무시했다.
‘아이의 이름을 받고 싶었는데.’
윈프리드 제국은 아비가 아이들의 이름을 지어 주는 것이 일반적인 관습이었다. 사랑하지도 않고, 증오하는 남편이지만 그래도 그의 자식이니 이름을 받고 싶었건만, 황제는 단호히 거절했다.
“나보다 황후께서 더 잘 짓지 않겠나?”
“…….”
“처녀 적 영특하기로 소문났던 황후시니 알아서 잘하리라 보겠소.”
서러웠다.
철저한 무시와 방관 속에서 내쳐진 셀레스틴은 끈 떨어진 연이었다. 궁 내의 어떤 시종이나 시녀도 황후궁에 배정되기를 거부했으며, 황후의 몫으로 지급되는 예산은 턱없이 적게 책정되어 소박하게 삶을 연명해야만 했다.
“으에엥!”
“아이고, 우리 황자님. 배고프신가요?”
황후의 곁에는 오로지 친정에서 데려온 충직한 시녀, 로라만이 존재했다. 그녀가 아니었으면 셀레스틴은 미쳐 버렸을지도 몰랐다.
‘출산 후라고 해도 뭔가 이상해. 몸이 급속도로 나빠지고 있어.’
셀레스틴은 날이 갈수록 수척해져 사라의 걱정도 점점 커져만 갔다. 음식에 이상이 없었는데도 어디서 독이 침투하는 것인지 황후의 안색은 나빠지고 살이 점점 빠졌다.
“……로라.”
“네. 황후 폐하.”
“난 얼마 지나지 않아 병사할 것 같아.”
“네?!”
“그러니까 내 아들…… 이름도 없는 불쌍한 내 아들을 지킬 강력한 지지자가 필요해.”
셀레스틴의 걱정은 오로지 아들뿐이었다. 황제는 제 피붙이임에도 아이가 죽은 황태자의 씨라고 여기는지, 호시탐탐 죽기만을 바라는 것 같았다.
“이 아이를 살려야만 해.”
황후는 절박한 마음으로 외부에 구원의 손길을 요청했다.
윈프리드 제국의 이권을 탐내지 않으면서, 성가실 일을 만들 외척도 아닌 데다가 가문의 아주 먼 옛날의 일을 핑계 삼아 부를 수 있는 대단한 인물에게 편지를 보낸 것이다.
[친애하는 대마법사 클로드 하센티온 님께.
제 아들의 신변을 맡기고 싶습니다.
뭐든 좋습니다. 아이가 내내 굶지 않고 살아만 있으면 족하니 사연을 가엾이 여기어 황성에서 나가 필부의 삶을 살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피델리움의 여식이자 윈프리드의 황후, 그리고 한 아이의 어미로서 간절히 비나이다.]
‘기대하지 않았는데.’
쿨럭거리며 마른기침을 하는 셀레스틴의 눈앞에 방긋 웃는 아기에게 어쩔 줄 모르고 뺨을 놀잇감으로 내주는 세진이 보였다.
“아야. 아가, 아, 아프다. 형은 말랑말랑 찹쌀떡이 아니에요.”
“꺄아아!”
“그래……. 네가 재밌는데 내 두 뺨 희생한다고 무슨 일이 나겠니.”
어설프게 아기를 안은 대마법사는 소문과 다르게 무척이나 인간적이었다.
‘멍청하거나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은 대놓고 발로 차고 마법으로 집어 던지고 그것도 아니면 개구리로 만들어 제 사역마의 놀잇감으로 준다는 이야기가 파다하던데.’
그런 건 순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대마법사는 1황자를 제법 신경 써 주고 있었다. 평범한 사람처럼.
“꺄우우아!”
“재밌지? 떴다 떴다 비행기는 어렸을 땐 누구라도 다 좋아하거든.”
심지어 세진은 아기를 허공에 띄워 날아갈 것처럼 마법을 부려 놀아 주고 있었다. 패밀리어인 윈터는 그 옆에서 전혀 주인님답지 않은 행보라며 언짢아했다.
이질적이면서도 평화로운 풍경에 멍하니 황후와 시녀 로라가 그들을 바라보자, 세진이 황금빛 눈을 돌리더니 이렇게 말했다.
“혹시 실례가 아니라면, 제가 이 아이의 이름을 지어도 될까요?”
“무, 물론입니다.”
세진은 이미 책을 통해 이 작은 아기의 이름이 무엇인지를 알았다.
“율리시즈. 율리시즈 미레하 윈프리드.”
곧고 올바르게 자라라는 마음이 가득 담긴 이름이었다.
‘폭군으로 크는 것만은 안 된다. 알았지?’
세진은 간절히 빌었다.
제발 이 아이가 엄친아 뺨치는 훌륭한 남자로 성장해 모든 것이 해피 엔딩으로 끝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