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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에서 온 신부-1화 (1/13)

도시에서 온 신부

데비 매컴버

1

“도와줘요. 불, 불이에요.” 로리 캠벌은 조그마한 외제 스포츠카에서 미친 듯이 소리를 질러대며 뛰쳐나왔다. 시커먼 연기가 차체 앞판 구석구석에서 올라와 그을음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얼룩소 한 마리가 천천히 그녀 쪽으로 다가와서는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묻는 것처럼 큰 눈을 깜박거리고 있다.

로리는 어쩔 줄을 몰라 당황스럽게 손을 휘저으며 마치 얼룩소에게 하소연이라도 하듯 말을 꺼냈다. “이건 내 차가 아니란 말야.”

얼룩소는 한심스럽다는 듯 연기가 무럭무럭 피어오르는 그녀의 승용차를 바라보며 천천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잠시 침을 삼키는지 고개를 푸르르 떨다 자기와는 상관없는 일이라는 듯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로리는 얼룩소의 뒤꽁무니에다 대고 마치 울음이라도 터뜨릴 것처럼 고함을 질렀다. “아마 불이 붙었나봐. 이젠 어떡하지. 댄이 날 보면 죽이려 들 거야.”

이젠 그녀의 말조차 무시한 채 얼룩소는 자신의 동료들을 향해 떠나 버렸고 로리는 털썩 땅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맙소사, 이젠 진짜 어떡한담.” 근방엔 물이라곤 한 방울도 보이지 않았다. 갈증도 심했지만 무엇보다도 저 연기를 멈추게 하려면 물이라도 끼얹어야 할 텐데......

그녀는 이 답답한 심정을 하소연이라도 하듯 멀리 소 떼들을 멍청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높은 하늘과 끝없이 넓은 들판, 향그러운 풀내음, 그리고 살랑거리는 바람이 얼룩소들의 등을 살며시 간질이고 있는 풍경들...... 이 모든 것들은 도시에서만 살아온 그녀에겐 좀처럼 보기 힘든 아름답고도 멋진 광경들이지만, 지금 그녀는 그 대가치곤 너무 엄청난 곤경에 빠져 있다. 사람 한 명 지나지 않는 텅 빈 도로가에서 차가 연기를 토해내며 망가져 가고 있는 것을 빤히 바라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속수무책으로 앉아 있는 그녀에게 무기력과 무섬증이 혼란스러움을 부채질해대고 있었다. 누구라도 좀 지나가면 좋으련만......

바로 그때 고개를 무릎에 파묻고 있는 로리의 귀에 엷은 소음이 들려오자 그녀는 얼른 고개를 쳐들었다. 밤색 말을 탄 사람이 천천히 댄의 승용차 맞은편으로 다가와 귀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곤 이애 그녀가 곤경에 처했음을 알아차린 듯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안녕하세요.” 로리는 막연하게나마 친밀감이 솟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그에게 활짝 미소를 띄우고 명랑하게 인사를 했다. “사람이라곤 당신이 처음이에요. 2,3 시간을 달려오는 동안 말이에요. 사람은커녕 사람 비슷한 동물조차도 구경 못했는걸요.”

“무슨 문제가 생겼나 보군요. 왜 그러는 거죠?” 노련하게 말에서 뛰어내리면서 그가 물었다.

“글쎄, 그게..., 저도 사실 잘 모르겠어요. 이제껏 아무 탈 없이 잘 달렸거든요.”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이며 로리는 말을 더듬거렸다. 사실 그녀로서는 지금 무엇이 고장난 건지, 어디가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 건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였다. “갑자기 연기가 저렇게 미친 듯이 터져나오길래 깜짝 놀라 차를 멈췄어요. 하지만 보다시피 저렇게 시커멓게 연기가 진동하고 있고... 아마 차가 다 타버릴 것 같아요.” 이윽고 울상이 된 로리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터뜨릴 것처럼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불이 붙어서 나는 연기라기보다는 수증기 같아요. 김이오.”

“김이라구요?” 그녀는 순간 묘한 희망감을 느끼며 말했다. “그럼 차에 불이 붙은 건 아니란 말이죠?”

그는 말고삐를 천천히 잡아당겨 댄의 승용차 곁에 다가섰다. 그리곤 차체를 열어 젖혀 김이 나오는 후드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로리는 그가 어른이 아니라 16살이나, 많아야 17살을 막 넘기고 있는 사춘기 소년이란 걸 알았다.

“친구에게서 빌린 차예요. 굳이 시애틀까지 자신의 차를 몰고 가라고 해서 별다른 생각도 없이 끌고 나왔어요. 원래가 MGB는 고장이 없는 차거든요. 하지만 이렇게 긴 거리를 주행하려면 사전에 준비도 잘하고, 체크도 제대로 해보고 출발했어야 하는 건데 말예요. 가다가 무슨 일이 생기면 꼼짝없이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가 된다는 걸 미처 생각지도 못했어요.” 로리의 목소리는 어느새 짜증이 섞인 절망감에서 차차 변명으로 옮겨 갔다.

그는 로리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없이 바지 뒷주머니에서 수건을 꺼내 들었다. 그가 상체를 차체 위에 엎드리고 있었기에 대체 무엇을 건드리고, 만지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내 공포영화에서 드라큐라나 범인이 나타날 때 화면 아랫부분에서부터 뿜어져 나오는 허연 연기가 소리를 내며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이곳 경치를 보려고 일부러 이쪽 길을 택했어요.” 로리는 얼굴을 돌리며, 손으로 연신 부채질을 하며 연기를 피했다. “여기 오기 160km 전쯤에 있는 주유소에서 한 남자가 이곳을 추천하더군요. 경치가 아주 뛰어나다고 말이에요. 그래서 처음엔 고속도로를 달릴 생각이었는데 이쪽 국도로 노선을 바꿔 버린 거예요.” 자신이 공연스레 수다를 떨고 있다는 것을 느끼면서도 그녀는 말을 멈추지 않고 더 활기차게 얘길 해댔다. 이런 경우엔 공연히 입을 다물고 침울해 있는 것보다 떠들어대는 게 더 나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고, 더구나 2,3 시간  만에 처음 사람을 만남 기쁨도 그녀의 이 같은 수다에 한 몫을 하고 있었다.

“아무튼 태어나서 이렇게 평화롭고 멋있는 경치는 처음이에요.”

“이곳의 경치는 단지 여기 오리건 주에서 뿐만이 아니라 전국에서 최고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거예요. 누구나 다들 이곳을 한번 지나가면 잊지 못해 다시 한번 찾아오게 되죠. 이건 제 말이 아니라 이곳을 거쳐 간 사람들이 하는 소리예요.” 그는 후드 아래로 비스듬히 보이는 파이프같이 생긴 것을 몇 번이고 두들기면서 중얼거렸다.

로리는 자신의 손목시계를 쳐다보곤 얼굴을 찌푸렸다. 호텔 예약은 2시간이 지나면 자동적으로 취소되어 버리니 말이다. 시애틀엔 적어도 6시 이전에 도착해야만 한다. 아무튼 첫출발부터 뭔가 엉망이 돼버리는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한숨을 한번 푹 내쉬고는 그저 소년의 등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제발, 큰 고장이 아니었으면 좋으련만... 지금 저 소년이 벌떡 몸을 일으키며, <자 다 됐으니 시동을 한번 걸어 보세요>라고 말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마 물펌프에 구멍이 난 것 같아요. 하지만 이런 경우는, 특히나 이런 외제 승용차는 예측하지도 못한 고장이 많으니까 뭐라고 정확히 말을 하기가 힘들군요. 전 사실 이런 차에 대한 건 자세히 알지도 못하구요.”

그녀는 실망감으로 다시 한번 한숨을 내몰아쉬었다.

“글쎄, 제 생각이 맞긴 맞는 것 같은데 아무튼 잘 모르겠어요. 클레이 형이라면 아마 자세한 걸 알아낼 수 있을 텐데 말예요.” 그는 우물쭈물하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클레이라구요?”

“아, 우리 형이에요.”

“기술자인가 보죠? 차에 관한...” 순간 한가닥이 희망을 느끼며 그녀가 물었다.

“기술자는 아니고 차에 관해 좀 알아요.”

로리는 실망감으로 다시 혼돈스러워지는 자신을 감추기 위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어쨌든 지금 제일 먼저 그녀가 해야 할 일은 전화를 거는 일이다. 일단 자동차 수리 센터에 전화를 건 뒤 호텔에 전화를 해서 예약이 아직도 취소되지 않았나를 확인해야 한다. 이곳이 마을에서 얼마나 떨어져 있나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견인차가 이 차를 끌고 가는 데 약 1시간쯤 걸리고, 그리고 난 뒤 수리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야 몇 분이면 끝나겠지. 그깟 구멍 하나 난 것 떼우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것이다.

“저, 그럼 전화가 있는 곳은 여기서 얼마나 떨어져 있죠?” 로리는 침착을 잃지 않으려 애쓰며 또박또박 말했다.

그는 씩 웃으며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대답했다. “저기 보이는 산마루 하나만 넘으면 돼요. 기껏해야 16km나 될까요?”

“16km라구요?” 로리는 고장난 차에 몸을 털썩 기댔다. 빌어먹을! 이제 댄의 말은 절대로 믿지 않을 거야. 그리고 이런 망할 국도여행은 절대로 절대로 하지 않아야지. 그녀는 막연하게 자신의 머리칼을 뒤로 쓸어넘기며 이제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묻기라도 하듯 소년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리 염려하지 않아도 될 거예요. 벤처가 우릴 거기까지 바래다 줄 테니까요. 그리고 당신은 그렇게 무게가 많이 나가 보이지도 않는군요. 다행히도 말예요.”

“벤처라뇨?” 그녀의 목소리가 텅 빈 도로를 울렸다.

“내 말이에요.”

로리는 눈을 돌려 그의 곁에 멍청히 서 있는 말을 쳐다보았다. 6살 때 한 번 조그마한 조랑말 위에 올라탔던 기억밖에 없는 그녀는 지금 저 엄청나게 큰 말 위에 올라탈 수 있을지 없을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같이 타자는 말이에요?” 그녀는 선드레스를 입고 있었고 말을 타는 게 조금은 우스꽝스러워 보일 거라는 생각이 들어 얼굴을 찌푸렸다.

“옷이 그래서 좀 어렵겠군요.” 소년은 자신의 턱을 손으로 문지르며 걱정스러운 듯 그녀를 쳐다보았다.

“다른 사람이 지나갈 때까지 기다리겠어요.”

소년은 손가락으로 자신의 차양모자를 올리며 대꾸했다. “운이 좋으면 내일쯤이면 누군가를 만나겠죠.”

“맙소사.”

“그럼 집에 가서 차를 끌고 나오도록 하죠.” 그가 제의했다.

그의 그런 제의가 로리에겐 더할 나위 없이 고마웠다. “그래 주겠어요? 그대신 내가 시간을 뺏은 만큼 대가를 지불할께요.”

“이웃 간에 서로 돕자는 일인걸요.” 소년은 의아스럽다는 듯 그녀를 쳐다보며 말했다.

로리는 그에게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살아왔고 그곳의 모든 것을 사랑했다. 그러나 바로 옆에 사는 이웃의 이름을 불러 본 게 두어 번 있을까 말까할 정도였다. 도시 사람들이란 철저히 폐쇄적인 경향이 있는 법이다.

“그건 그렇고.” 그는 밝은 청색의 손수건으로 손을 닦으며 말했다. “내 이름은 스킵이에요. 스킵 프랭클린.”

로리는 밝은 표정을 지으며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난 로리 캠벌이라고 해요.”

“만나서 반가워요.”

“나 역시 반가워요, 스킵.”

소년은 환히 웃어 보였다. “내가 다시 당신을 데리러 올 동안 기다려요. 그런데 혼자서 여기 있어도 괜찮을까요?”

“물론이에요. 그 점은 염려 말아요, 스킵. 이래봬도 호신술을 세 개나 익혀 놨으니까요.”

스킵은 어깨를 한번 으쓱해 보이고 벤처에게로 다가가 가볍게 올라탔다. 이윽고 그의 모습이 멀리 사라졌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마치 그 시간은 로리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길고도 지루한 시간처럼 여겨졌다. 이제는 일분일초에도 온몸이 녹아 버릴 정도가 되었다.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며 스킵 프랭클린의 모습을 떠올리고 있을 때 멀리서 뭔가 땅을 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스킵이었다. 커다란, 마치 경운기처럼 보이는 조금 우스꽝스러운 낡은 트럭이 그녀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모자를 벗어 흔들었다. 비록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유달리 하얀 그의 치아가 활짝 웃는 입술 사이로 상큼하게 보였다.

하지만 이윽고 그의 트럭이 차츰 가까워오자 실망과 의혹의 당혹스러운 느낌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 괴물단지처럼 생긴 트럭은 일인승이었던 것이다. 도대체 스킵은 나를 엔진 위에다 얹어 놓을 생각이란 말인가?

그녀의 난감한 표정을 눈치챘는지, 스킵은 로리에게 활짝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클레이 형이 차를 끌고 오라는군요. 길거리에다 그냥 버려 두지 말고 말예요. 그게 낫겠죠?”

“글쎄, 지금은 그 클레이라는 분의 말을 듣는 수밖엔 달리 방법도 없죠.”

“몇 분 안 있어 형이 도착할 거예요.” 그는 차에서 가볍게 몸을 내렸다. 그리곤 익숙한 솜씨로 체인을 감아 그녀의 차를 자신이 몰고 온 그 괴물단지에다 연결시켰다. “걱정하지 마세요, 형이 다 알아서 처리해 줄 테니까요.”

한가닥 희망 같은 것이었을까. 지푸라기라도 잡은 심정으로 그녀는 그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잠시 후 멀리서 차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그건 스킵이 몰고 온 차보다도 훨씬 낡아빠진, 아예 페인트칠마저 거의 다 벗겨진 구형 트럭이었다.

“형이 오는군요.”

로리는 무심코 스커트 자락에 너절하게 붙어 있는 잡초 따위를 뜯어내고 있었다. 그리곤 고개를 들어 보니 훤칠한 키의 사나이가 그녀를 향해 서 있었다. 진 바지에 엷은 셔츠 차림의 그는 뭔지 모를 강력함을 풍기며 당당히 그녀를 내려다보고 서 있다. 그가 쓴 모자가 앞으로 기울어져 그의 눈빛을 흐릿하게 가리고 있었다. 그러나 모자챙이 만들어 놓은 그 그림자도 그의 눈동자가 이끌어내는 묘한 느낌을 감출 수는 없었다. 탄탄한, 그리고 검게 그은 그의 얼굴과 매력적이고도 당당한 그의 몸을 보는 순간,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신음소리처럼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클레이 프랭클린이란 사나이에게서 풍기는 알 수 없는 그 무엇이 단숨에 그녀를 사로잡고 말았던 것이다. 마치 그녀는 머나먼 제국의 제왕이라도 쳐다보고 있는 것 같은 환상에 사로잡혔다. 당당히 서 있는 그의 모습엔 어느 누구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위엄과 강인함이 있었고, 금속처럼 빛나는 그의 눈빛은 온몸에 짜릿한 전류를 보낼 듯 강렬했다. 그는 환히 웃고 있었고, 로리는 그의 웃음에 당황한 나머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망연히 그를 쳐다보고만 있을 뿐이다.

그의 맑은 눈빛이 그녀의 눈동자 위로 흘러내렸다. 한쪽 손을 자신의 바지에다 슬쩍 올리며 천천히, 그리고 약간은 쉰 듯한 목소리로 그가 입을 열었다. “이런, 곤경에 빠져 버리셨군요.”

그의 말에 뭔가 대답을 해야 한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로리의 입에서는 아무런 말도 새어나오지 않았다.

“스킵 말로는 아마 물 펌프에 이상이 있을 것 같대요.” 그녀는 자신이 몰고 온 스포츠카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겨우 떠듬떠듬 말을 이었다. 이상하리만큼 당황해하는 자신을 느끼며 로리는 마치 점점 바보가 되어 가는 것만 같았다. 도대체 내가 왜 이러는 걸까? 지금까지 남자를 보고 이렇게 한눈에 사로잡혀 버린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어떻게 보면 아주 잘생겼다고도 할 수 없는 평범한 얼굴일 뿐인데 왜 난 이토록 당황하는 것일까?

“소리를 들어 보니 그런 것 같아요, 형.” 스킵이 형을 쳐다보며 맑은 목소리로 말했다. 클레이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스포츠카로 다가가 몸을 굽혔다. 스킵과 마찬가지로 그는 후드와 그 뒤의 관을 찬찬히 점검했다. 그리고 스킵이 연결시켜 놓은 체인이 안전한가를 다시 한번 확인한 뒤 이윽고 몸을 일으켰다.

“스킵이 제대로 본 것 같군. 전화를 쓰고 싶어하실 것 같은데 집에 가면 전화가 있어요.” 클레이는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고마워요.” 로리의 심장은 빠르게 고동치고 있었다. 이런 일은 정말 처음이다. 그녀는 언제나 침착한 편이었고, 게다가 근사한 남자가 나타났을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조차 모르는 십대의 사춘기 소녀가 아니라 24살이나 된 제법 성숙한 여자가 아닌가. 그런데 왜 이렇게 어쩔 줄 몰라하며 자꾸 바보 같은 모습만 보이고 있는 걸까.

클레이는 자신이 타고 온 차의 문을 열고는 그녀를 기다렸다. 로리가 머뭇거리며 다가오자 팔을 뻗어 그녀가 자신의 팔을 잡고 차에 오를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하지만 이러한 사소한 동작이 계속 그녀를 들뜨게 했다.

“공연한 불편을 끼쳐 드려서 정말 미안해요.”

“천만에요.” 클레이는 운전에 열중한 듯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10여 분쯤 달리자 커브를 도는 길 한쪽에 <엘크런>이란 커다란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잔디가 듬성한 길가에서 말 몇 마리가 멍청하게 그들을 보고 있었다.

곧이어 로리의 눈길을 끈 것은 넓은 베란다가 있는 이층 짜리 집이었다. 장미덩쿨이 약간 낡은 담벼락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

“참 아름답군요.” 로리는 속삭이듯 말했다.

클레이는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그는 집을 한바퀴 돌아서는 로리가 이제껏 본 마구간 중에서 가장 큰 규모와 마구간 앞에 차를 댔다.

“말을 키우나 보죠?”

엷은 미소가 그의 눈에서 풍겨 나오고 있었다. “그런 셈이죠. <엘크런>은 경기용 말들을 사육하는 곳이요.”

“<엘크런>은 아랍 식 이름같이 들리는데요?”

“천만에. 그건 미국산 종마 계통의 이름이오.”

“난 그런 이름은 들어 보지도 못했어요.”

“그럴 리가 있나요.” 클레이는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클레이는 그녀를 내려놓고는 집의 뒤채로 들어섰다.

“메리.” 그는 로리를 위해 문을 열어 주면서 큰 목소리로 불렀다. 커다란 시골 풍의 부엌이 로리의 눈에 들어왔다. 잘 구운 사과 파이 같은 냄새가 은은히 풍겨왔다.

“메리가 어디 갔나 보군.”

“당신 부인인가요?”

“아니요, 가정부요. 난 아직 결혼하지 않았소.”

그의 짧막한 대답이 로리를 들뜨게 했다. 이런 바보 같으니. 그래, 하지만 난 이 샌프란시스코의 하늘 같은 눈동자를 가진 이 남자에게 아마 반했나 봐. 하지만 그게 무슨 소용이 있담.

“아마 이층에 올라가 있나 보죠.” 스킵이 대답했다. “저기 벽에 전화기가 있어요.” 그는 전화기를 가리키며 로리에게 말했다.

로리가 전화번호를 메모해 둔 수첩을 뒤지는 동안 클레이는 냉장고 쪽으로 걸어가 크림 빛깔의 문을 열었다.

“아이스티 마시겠소?” 그가 물었다.

“네, 고마워요.”

로리가 전화를 하고 있는 동안 클레이는 두 개의 잔을 꺼내어 얼음과 레몬 조각을 넣고는 티를 따라 부었다.

전화통화가 끝나자 그녀는 테이블로 다가와 그의 맞은 편에 털썩 주저앉아서 그가 준비해 놓은 아이스티를 단숨에 들이켰다. “시애틀에 전화했어요. 6시 이후엔 방을 줄 수가 없다는군요.”

“하지만 다른 곳엔 방이 있을 거요.”

로리는 내키진 않았지만 <그렇겠죠>라는 뜻으로 살짝 미소를 보냈다. 그녀는 작가모임에 가는 길이었고, 꽤 비싼 참가비까지 이미 지불한 상태였기에 단 일분의 시간도 지체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 근방의 호텔이란 호텔은 이미 빈방이 없다는 것이었다.

“나이팅게일의 수리소에다가 전화를 일단 해야겠군요.” 클레이가 말했다.

“여기서 가까운가요?”

“약 8km 정도 떨어져 있소.”

그녀는 나이팅게일이라는 마을은 들어 보지도 못했지만 그곳에 수리소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일단 마음이 흡족했다.

“조라는 할아버지가 아마 알아서 고쳐 주실 거요. 수십 년 동안 차만 만져 오신 분이니까.”

클레이는 얼른 몸을 일으켜 전화기로 다가가서는 몇 분간 뭐라고 얘길 나누었다. 수화기를 내려놓은 그의 낯빛이 약간 상기되어 있었다. 그녀는 그에게 어떻게 됐느냐고 묻고 싶었다. 그러나 그러기도 전에 그는 두 번째 전화를 걸고 있었다.

“좋지 않은 소식이오.”

“어떻게 됐죠?”

“그 할아버지는 지금 낚시 여행을 떠나셨고 이번 달 안엔 돌아오시질 않는다는군요. 그리고 여기서 100km쯤 떨어진 곳에 있는 정비소에서는 물펌프를 갈아 끼우려면 적어도 나흘은 걸린다는 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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