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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로트의 웨딩마치-16화 (16/19)
  • 16.

    두 사람이 식당으로 들어섰을 때 시빌은 하인에게서 달걀 요리를 덜어 받고 있던 터라 그들을 거의 본체만체 했다.

    "앉아라, 맥시밀리언. 난 아침 식사자리에선 형식 같은 걸 지키지 않아. 샬로트도 잘 알고 있지"

    그녀가 예쁘장한 미소를 짓자 샬로트는 안다는 듯 예의바르게 고갯짓을 했다. 그때서야 시빌은 아들을 보고 약간 눈살을 찌푸렸다.

    "그렇다고 달걀 세례를 주고받고 놀 심산이 아니라면 좋겠구나. 난 어수선한 건 질색이거든. 사실 네가 보기엔 그런 짓거리가 뭐가 즐거운지 하나도 모르겠더구나. 하지만 흥! 넌 원래 알 수가 없는 애였지, 맥시밀리언. 그리고‥‥‥‥"

    그녀는 강조하듯 그를 힐끗 바라보았다.

    "오늘 새 카펫을 주문하고 청구서는 네 앞으로 달아 두도록 시켰다는 걸 알아둬라."

    샬로트는 웃음을 눌러 참았다. 그녀는 건너편에 앉은 남자와 앞으로 끝없이 펼쳐진 수많은 밤을 보내게 되리란 생각에 사로잡혀 어안이 벙벙해지고 말았다. 그녀는 그의 입술이 그녀의 피부에 닿아 샴페인을 핥는 광경을 상상했다. 맥시밀리언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도 같은 생각을 하는 중이라는 것을 샬로트는 자신에게 내려꽂히는 뜨거운 시선으로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전율과 동시에 수치심이 밀려들어 그를 차마 마주 보지 못하고 접시만 내려다보았다.

    "무책임하고 계획성 없던 마담의 후견인 임무가 이제 끝나게되었다는 사실을 알려 드리면 분명 기뻐하시겠지요"

    맥시밀리언은 하인이 건네는 토스트를 받아들며 말했다.

    "전 오늘로 즉시 트로브리지 양을 서식스로 돌려보낼 생각입니다. 준비가 끝나는 대로 그곳에서 우린 결혼할 겁니다. "

    어머니를 어리둥절하게 하려던 것이 목적이라면 맥시밀리언은 성공을 거둔 셈이었다. 하지만 샬로트가 보기에 시빌은 이런 돌발적인 선언을 듣고서도 전날 밤 샴페인 여흥을 즐기던 아들의 모습을 발견했을 때에 비하면 충격을 덜 받은 표정이었다. 시빌의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손에 쥐고 있던 식기를 떨어뜨렸다.

    "진담이 아니겠지?"

    그녀는 두 사람을 흘끔 번갈아 바라보며 물었다. 샬로트는 미소지었지만 맥스는 그렇지 않았다.

    "아니, 물론 진담이겠지! 넌 결코 농담을 하지 않으니까. 이거 근사한 소식이로구나!"

    살로트는 저도 모르게 참고 있던 숨을 내뿜었다. 맥스의 어머니가 기뻐해 주어서 다행이었다. 시빌은 툭하면 너무나 주위 생각을 않고 무심하게 굴었으므로 샬로트는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샬로트의 안도감도 잠시, 곧장 시빌은 자기가 흥분했던 연유를 밝혔다.

    "그럼 난 이제 파리로 돌아갈 수 있겠네!"

    백작 미망인은 기쁨에 넘쳐 양손을 맞잡으며 외쳤다. 조금 전 샬로트의 가슴에서 뿜어져 나왔던 숨결이 다시 쑥 들어가면서'헉' 하는 소리가 낮게 터져 나왔다. 그녀는 맥스가 눈치챘을까 싶어 잽싸게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는 상대를 실로 괴롭힐 정도의 미소를 지으며 어머니를 보고 있었다.

    "네, 어머니."

    그가 여태껏 시빌을 그런 호칭으로 부른 적이 없었다는 것을 샬로트는 알아챘다. 그 이유는 금세 명백해졌다. 부인은 그 말을 듣고 움찔하더니 잡아죽일 듯이 아들을 노려보았다. 그는 어머니의 반응을 무시한 채 평소와 다름없이 매끄러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우리 때문에 지체하실 생각은 조금도 마십시오"

    샬로트는 그의 말이 농담인 줄 알았다. 하지만 시빌의 표정으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맥시밀리언은 정말로 진지했다. 그는 어머니를 잘 알고 있으므로 어머니가 아들과 미래의 며느리감과 함께 지내느니 프랑스로 건너가 버리리라는 사실을 능히 짐작했던 것이다. 어리둥절한 샬로트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서 눈만 깜박였다.

    "하지만 부인께서도 당연히 결혼식에 참석하고 싶으시겠죠?"

    "뭐야? 그런 시골 행사에?"

    시빌은 당치도 않다는 듯 손사래를 치더니 다음 순간 눈을 빛냈다.

    "하지만 런던에서 식을 올리겠다면야 또 모르지."

    "그러진 않을 겁니다. 어머니"

    맥시밀리언은 그런 화려한 예식을 원하는 시빌에게 찬물을 끼얹는 것이 못내 즐겁다는 투였다. 만약 샬로트 쪽에서 그녀의 가족들에게 둘러싸인 조촐한 결혼식을 원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그에게 잔소리를 했을지도 몰랐다.

    "그렇게 부르지 말라니까! 난 다 자란 어른에게 어머니라 불릴 정도로 늙은 기분이 아니란 말이다. "

    눈을 번득이더니 냅킨을 내던진 시빌은 입을 비쭉거리며 검은 곱슬머리를 뒤로 홱 넘겼다.

    "파리로 가야지! 그곳에 가면 회춘할 수 있으니까!"

    시빌의 태도에 놀란 샬로트는 벌떡 일어났다.

    "백작 부인, 기다려 주세요"

    그녀는 그냥 내버려두라는 맥스의 충고를 무시한 채 황급히 시빌을 쫓아가 복도에서 붙들었다. 맥스의 의중이 어떻든 간에 그녀는 그들 모자가 이렇게 험악한 상태로 헤어지는 것을 방관하고 싶지 않았다.

    "전 부인께서 절 받아주신 데 대해 감사드리고 싶어요. 부인께서는 극히 친절하고 관대하게 대해 주셨고‥‥‥‥"

    샬로트는 말문을 열었다.

    "그만 해라, 얘야!"

    시빌은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날 성인 군자 취급하지 말려무나. 그런 얘기는 맥시밀리언이 들어야지. 그 애야말로 그런 말을 들을 자격이 있단다. 하지만 얘야! 네게는 빛나는 생명력이 있잖니. 정말로 그 애를 원하는 게 확실하니? 그래, 그 애는 백작이지. 하지만 후작이 마음에 있다면 계속 버틸 수도 있을 텐데. 로스는 훨씬 돈도 많고 엄청나게 매력적이니까."

    샬로트는 입이 딱 벌어졌지만 빨리 다시 다물려고 애썼다. 그리고 동시에 시빌의 말에 응수할 대답을 열심히 찾았다.

    "하지만 전 그 사람을 사랑해요. 맥스 말이에요"

    그녀는 더듬거렸다

    "그래?"

    시빌은 살짝 한숨을 쉬었다.

    "그런 게 아닐까 생각은 했었지. 하지만‥‥‥ 뭐. 됐어. 두 사람의 행복을 빌어 주마. 넌 그 애한테 어울리는 짝이 될 게야."

    그녀는 좀 전에 내뱉은 잔인한 말을 어느 정도 벌충하려는 듯 덧붙였다.

    "파리로 편지 보내 주렴. 그렇게 하겠지?"

    부인이 물었다. 다음 순간 샬로트는 고급 향수의 자욱한 향기에 둘러싸였다. 시빌이 갑자기 다가와 자신의 부드러운 볼을 그녀의 볼에 마주 비빈 것이다. 어리둥절해진 샬로트는 가만히 서서 비단 옷자락을 휘날리며 멀어져 가는 시빌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시빌은 가정의 대소사보다는 파리 사교계의 법석 쪽에 한결 마음을 빼앗기고 있었다. 어쨌든 이것은 미래의 시어머니에게서 처음으로 받은 키스였다. 그 생각에 샬로트는 고향집이 그리워졌다. 고향집에서 식사 시간이란 활기와 애정이 넘치는 일과였고 음험한 분위기가 감도는 일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말다툼은 불가피했지만 그래도 그녀의 가족들은 정말로 서로를 사랑했고 종종 주고받는 키스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특히 제니가 엄청나게 큰 쪽 소리와 함께 열심히 퍼붓는 키스야말로 압권이었다. 샬로트는 지금 당장 그 키스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탕투성이인 끈적끈적한 키스라 해도 상관없었다.

    곧장 귀향길에 접어든 그들은 우아한 위클리프 백작가의 마차 안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단 둘이 보냈다. 시빌이 없으니 샬로트의 새 하녀가 샤프롱 역할을 해야 하는 게 당연했지만 그 가엾은 여인은 맥스의 수행원단을 싣고 오는 다른 마차에 거의 갇히다시피 한 형편이었다. 샬로트는 이런 조치에 마음속 깊이 만족했다. 그녀는 항상 바쁜 백작과 많은 시간을 지낼 수 있는 이 기회를 마음껏 즐겼다. 맥스는 에우리피데스의 특징에 대해 논하다가 종종 앞좌석에 발을 올려놓았고 샬로트는 한때 소원했던 것처럼 그의 훤칠하고 탄탄한 어깨에 기대앉아 편안히 쉬었다. 그녀는 맥스야말로 최고로 근사한 여행 친구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지적이고 달변이고 침착한 유머 감각까지 갖춘 그와 있으면 오래도록 침묵이 흐를 때조차도 즐거웠다. 그의 잘생긴 용모를 마음껏 감상하면서 그를 바라보기만 해도 좋았다. 그는 변함없이 예의발랐고 자기 중심적인 사고가 뿌리박힌 사람치고는 놀랄 정도로 사려가 깊었다. 하지만 그는 그녀에게 손만은 대지 않았다. 그의 침대에서 숱한 키스를 받았던 경이로운 아침 이후 그런 일은 한 번도 없었다. 샬로트는 그의 이런 절제된 모습에 다소 당혹했다. 명예를 엄격하게 중시하는 그의 원칙 때문에 이렇게 자제하나 보다고 그녀는 짐작했다. 하지만 그가 의무감의 화신이라는 겉모습을 이렇게 쉽게 되찾을 수 있었다는 데 대해서는 실망스러웠다. 그는 다른 의무와 마찬가지로 남편의 의무 역시 성실하게 이행할까? 그녀는 기대감으로 바르르 떨었다. 물론 그 점에 있어서 는 그녀 쪽에서 적극적으로 몰아붙일 수도 있었다. 샬로트는 우아하게 차려입은 그의 몸을 끌어안고 어루만지면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가끔 상상했다. 하지만 그녀는 맥스를 잘 알고 있었기에 그의 소망을 존중했다. 물론 그가 약혼 기간을 길게 잡지 않는다는 전제하에서 였지만. 그가 정말로 그녀와 결혼한다니 샬로트는 아직도 믿기가 어려웠다. 모든 것이 너무나 갑작스럽게 진행되었으므로 그녀는 그의 동기가 무엇인지 다소 얼떨떨했다. 그가 청혼을 한 것은 그 정열적인 막간극이 있기 전이었으니 죄의식 때문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그녀를 사랑한다는 확신은 들지 않았다. 사실 샬로트는 두려웠다. 그가 청혼한 것은 단순히 그녀가 린리 자작이 싫다고 했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그 생각이 행복한 그녀의 발목을 잡았다. 그녀는 동정심이나 편의에 의해서, 혹은 다른 희생 정신 때문에 결혼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는 맥스의 애정을 원했으므로 그가 그런 행동을 한 것은 그녀에게 뭔가 감정을 갖고 있어서이기를 기원했다. 처음에 그는 그녀를 출신 배경 때문에 거부했지만 그런 그의 결심을 뒤흔들 만큼 강한 뭔가가 일어났다는 것은 확실했다. 그가 그녀의 혈통을 경멸하고 있다는 것을 샬로트는 알았다. 목사의 딸이 위클리프 백작에게 가당키나 한가? 천만에! 하지만 그래도 그는 그녀와 결혼하려 했다. 모든 것이 다소 이해하기 벅찼지만 샬로트는 자신에게 찾아든 믿을 수 없는 행운에 의구심을 품기가 꺼림칙했다. 그녀는 두 사람을 위해서 그를 더없이 사랑하겠다고 맹세했지만 자신의 감정을 거기까지는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맥스 같은 남자는 그런 낭만적인 감정에 조소를 퍼부을 것이다. 곧바로 증명되지도 않고 일정에 쉽사리 끼워 넣을 수도 없는 로맨스란 감정은 그의 이해력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서식스에 도착한 그들은 런던을 떠날 때와는 달리 한층 더 많은 관심을 불러모았다. 금빛 문장이 찬란한 백작가의 마차가 어퍼비드웰에 나타나자 사람들은 환호성으로 맞이했다. 목사의 딸이 금의환향했다는 소식에 모두가 흥분한 모양이었다. 창문마다 머리며 이리저리 흔드는 손들이 내다보였고 이웃 사람들은 한번이라도 더 보려고 문 밖에 몰려나와 서 있었다. 샬로트는 마차 창으로 고개를 내밀고 마주 손을 흔들어 주고싶었지만 맥스의 표정으로 미루어 보아 그런 행동은 그의 위엄을 깎아 내릴 것 같았다. 그녀는 이미 너무나 여러 번 그의 침착성을 시험에 들게 했던 자신의 행동을 떠올리며 가만히 참고 앉아 그에게 다정한 미소만을 보냈다. 그가 눈에 띄게 긴장을 푸는 듯 했으므로 그녀는 눈을 내리깔고 입술을 깨물며 억지로 웃음을 삼켰다. 목사관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영접은 사뭇 달랐다. 마차가 채 멎기도 전부터 샬로트는 집 안에서 터져 나오는 어린아이들의 고함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녀는 맥스의 반응을 살펴보려고 흘깃 쳐다보았지만 그는 그런 신바람이 오히려 즐거운 듯했다. 그녀는 그의 입꼬리가 치켜 올라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심장이 멎는 듯한 일순간 그녀는 그가 집에 돌아온 것을 기뻐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아. 맥스, 당신을 사랑해요. 샬로트는 큰 소리로 외치며 그의 품에 뛰어들고 싶었지만 그는 마차에서 내리는 그녀를 도와주는 중이었고 그녀의 고향집 현관문에서는 인사말이 마구 쏟아져 나오는 참이었다.

    "언니 !"

    "누나!"

    "위클리프 백작님 !"

    여동생들의 여자답고 억제된 목소리와 남동생들의 환호성이 뒤섞인 가운데 아이들은 한꺼번에 우르르 몰려나왔다. 캐리와 제인이 달려들어 언니를 껴안고 키스했으며 사내아이들은 서로 말을 끊어가며 알아듣지도 못할 질문과 얘기를 맥스에게 재잘댔다. 남동생들의 변절 행위를 무시하기로 한 샬로트는 다른 식구들 사이를 요리조리 솜씨 좋게 빠져나가던 킷을 붙들어 볼에 키스해 주었다. 아이는 그런 애정 어린 행동이 질색이라는 표정이었지만 맥스가 다정하게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었을 때는 꽤나 흡족해했다. 샬로트는 눈앞의 광경을 뿌듯한 심정으로 지켜보았다. 인기 절정을 누리는 맥스에게 전혀 샘이 나지 않았다. 아이들과 어울리는 그의 모습은 런던의 호화로운 세계에 있을 때보다 한결 인간적이었으므로 샬로트는 그들이 영원히 이곳에 살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백짱님 ! 백짱님 !"

    모두가 돌아보자 제니가 노란 곱슬머리에 못지 않게 환한 얼굴로 달려오고 있었다. 트로브리지 가의 막내는 전혀 망설임 없이 위클리프 백작의 품에 달려들었고 그는 아이를 번쩍 안아 빙글빙글 돌렸다. 제니는 자기 팔이 빠질 정도로 그의 목에 단단히 매달려 끌어안더니 소리도 요란하게 그에게 뽀뽀했다. 가족들은 웃으며 제각각 한꺼번에 얘기를 시작했고 그동안 샬로트는 동생들의 머리 위로 맥스의 시선을 포착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그의 갈색 눈을 바라보고 있자니 묘하게도 그녀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커다란 그의 눈동자에는 경이와, 그동안 너무나 깊이 묻혀 있어 그녀가 알아채지도 못했던 욕구가 서려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그녀는 놀라서 눈을 깜박이며 자책했다. 왜 전에는 그의 저런 모습을 눈치채지 못했을까? 중요한 논의와 일정. 질서정연하고 책임감으로 점철된 삶을 사는 위클리프 백작은 사실 애정을 절박하게 갈구하는 남자였다. 그 사실 앞에 그녀는 아연실색하면서도 동시에 행동을 개시했다. 그가 시선을 잠깐 돌리고 킷의 질문에 대답하는 동안 그녀는 그를 바라보며 가족들을 헤치고 곁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떨리는 손을 그의 팔에 얹고 몸을 내밀어 그의 귓전에 속삭였다.

    "사랑해요, 맥스."

    그는 깜짝 놀라 그녀를 바라보다가 뒤이어 그녀가 한 번도 본적이 없는 미소를 지었다. 그의 입술이 순수하면서도 완전한 기쁨으로 가득 찬 함박 웃음을 머금었다. 남자의 음흉한 기색도 다소 섞여 있는 표정이었다.

    "사랑해, 샬로트 언니."

    작은 목소리가 말했다. 지기를 싫어하는 제니가 맥스의 어깨 위에서 그녀를 엄숙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나도 사랑한단다. 우리 귀염둥이야."

    샬로트가 코를 살짝 비틀어 주자 제니는 새된 소리를 질러대며 맥스의 품안에서 몸부림을 쳤다. 샬로트는 쾌활하게 웃어대며 제인에게 이끌려 동생이 애써 가꾼 화단을 보러 갔다. 그녀는 한때 무성하게 드리워져 있던 잡초가 자취를 감추고 대신 들어선 장미며 인동 덩굴, 키가 껑충한 접시꽃을 보고 감탄했다.

    "정말 멋져, 제인. 기적을 불러일으켰구나!"

    그녀는 여동생을 한 번 더 안아 주었다. 다음 순간 아이들의 재잘거리는 소리를 압도하며 울려 퍼지는 맥스의 음성이 들려왔다.

    "토마스, 제임스, 입씨름은 그만 해라. 너희들에게 줄 선물을 준비했단다."

    그 말을 듣고 샬로트는 그를 향해 돌아섰다. 그녀는 집 모퉁이에 멈춰선 채로 그가 주위를 둘러싼 아이들에게 이야기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두 번째 마차를 따라오던 멋진 말 두 마리를 너희도 봤을 테지?"

    "구렁말 한 쌍이요!"

    토마스가 끼어들었다.

    "우리한테 주시는 거예요? 그럴 리가요!"

    숨가쁘게 내뱉는 제임스의 얼굴은 경외감과 놀라움이 범벅되어 있었다.

    "그래, 너희 거란다. 하지만 여기엔 마구간이 없으니까 키우는건 그레이트하우스에서 해야 한단다. "

    맥스가 대답했다. 남동생들에게 말을? 그녀에게는 사전에 일언반구도 없었다. 그의 사려 깊은 행동을 대하자 샬로트는 가슴속이 스르르 녹아들었다.

    "그렇게 실망한 표정 짓지 말렴, 킷. 너희들 모두한테 선물을 가져왔으니까. 하지만 네 차례가 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단다. "

    "샬로트!"

    꿈 같은 행복감에 취해 있던 샬로트는 아버지의 목소리를 듣고 현실로 돌아왔다. 그녀는 눈을 깜박여 눈가에 맺힌 물기를 털어내고 아버지의 품에 안겼다. 아버지는 그녀를 꼭 안아 주었다. 샬로트는 그녀에게 아낌없이 퍼부어지는 아버지의 사랑을 느꼈다.

    "아아, 아빠. 집에 돌아오니 너무 좋아요"

    그녀는 속삭였다.

    "가족들이 얼마나 그리웠는지 몰라요"

    목사는 다정하게 미소지었다

    "네가 유쾌한 런던 생활에 오염되지 않은 채 돌아와서 나야말로 반갑구나. 그리고 우리 둘째가 이렇게 가깝게 살게 됐는데 널 잃는다고 불평할 수 있겠느니냐?"

    아버지는 산마루 너머로 보이는 캐스털리 저택을 흘끔 바라보았다. 아버지는 딸과 팔짱을 낀 다음 손을 토닥여 주었다.

    "하느님께서는 실로 놀라운 방법으로 역사하신단다."

    뭐라고 꾸짖는 말씀도 없었건만 아이들은 아버지가 맥스에게 다가가실 수 있도록 길을 터 주었다.

    "위클리프 백작님."

    아버지는 친근한 미소를 띠고 말했다. 맥스는 그녀의 아버지를 정말로 좋아하게 되었는지 한결 상냥하게 대했다. 아니, 식구들 모두를 좋아하는 걸까? 샬로트는 어지러운 가운데 이렇게 생각했다. 여동생들은 모자 상자며 다른 꾸러미를 이고 지고 깔깔거리며 집 안으로 달려갔다. 맥스가 동생들의 선물을 탁월하게 선택한 게 분명했다.

    "아빠! 아빠!"

    킷은 거의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위클리프 백작님께서 나한테 망아지를 주셨어요!"

    "이런, 백작님. 애들이 응석받이가 되겠습니다."

    목사가 짐짓 꾸짖었다.

    "그런가요?"

    맥시밀리언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그거야말로 제가 뜻한 바입니다. "

    그들은 모두 쾌활하게 웃었고 아버지는 놀리는 눈으로 샬로트를 바라보았다.

    "네 정혼자가 어떤 아버지가 될지 선하구나. 샬로트."

    아버지는 경고했다.

    "위클리프 백작님께서는 아이들을 언제까지나 응석받이로 만드실 게야. 그러니 네가 아이들을 잘 다스려야겠다. "

    목사는 맥시밀리언에게 노골적으로 눈을 찡긋했다. 두 사람의 진도가 이미 아이를 만들기 직전까지 갔다는 사실을 아신다면 아버지는 이 화제를 놓고 이렇게 즐거워하실 수 없을걸, 샬로트는 속으로 생각했다. 순간 샬로트는 아버지가 맥스를 미래의 사윗감이라 칭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대체 어떻게 아셨을까? 그녀는 백작을 획 돌아보았다. 사전에 심부름꾼을 보내서 아버지께 변동 사항을 알려드렸나 보군. 하지만 아버지는 린리 자작에서 위클리프 백작으로 신랑감이 갑자기 바뀐 사실을 아시고 그냥 지나치실 분이 아니건만! 그렇지만 아버지는 그녀의 선택에 더할 나위 없이 기뻐하시는 표정이었다. 그녀의 생각에 쐐기를 박기라도 하듯 아버지가 그녀에게로 돌아섰다.

    "젊고 행복한 한 쌍에게 축하를 해야겠지 !"

    "그래요, 아빠!"

    그러고 나서 행복을 비는 인사가 합창처럼 이어졌다. 가족들은 다시금 두 사람을 에워싸더니 조촐한 축하 행사라면서 집 안으로 이끌었다. 아버지는 사라가 집에서 담근 포도주로 약혼 축배를 들었다. 샬로트가 조마조마해서 지켜보는 동안 맥스는 눈 하나 깜짝 않고 그 달콤한 술을 쭉 들이켰다. 그는 런던 생활을 저버리고 그녀의 예상보다 훨씬 더 쉽게 서식스에 적응하고 있었다. 그녀는 행복한 미소를 지으면서 그에게 매달렸고 그가 그녀의 천진난만한 꿈에 나타났다 자취도 없이 사라질 사람이라도 되는 양 그의 팔을 지그시 잡았다. 저녁 시간이 바쁘게 지나간 통에 샬로트는 아버지와 단 둘이 얘기할 틈을 찾지 못했다. 사라와 앨프도 파티에 참석했고 결혼준비 논의가 시작되었다. 식이 2주일 후로 정해진 탓에 여자들은 눈이 돌아가게 바빠질 터였다. 그리고 왠지 린리 자작 얘기를 입에 올리려 하면 항상 뭔가 방해가 생겼다. 어쨌든 그 얘기를 꼭하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맥스가 자기 선에서 자작의 청혼을 거절했으리라 짐작은 되었지만 그녀가 맥스에게 그 점을 물어 보려 할 때마다 정신을 팔 만한 다른 일이 생겼기 때문에 결국 그 문제는 잊혀지고 말았다. 결혼식 날까지 시간은 쏜살처럼 흘러갔고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바로 전날이었다. 샬로트가 동생들을 잠자리에 눕히고 아침까지 푹 자라고 타이르는 동안 사라는 낮은 목소리로 부드럽게 속삭이며 등잔불을 껐다. 두 자매는 예전에 흔히 그랬듯 좁은 계단을 한 줄로 내려왔다. 아버지와 앨프가 거실에서 기다리고 있는데도 사라는 샬로트를 부엌으로 데려갔다. 두 자매는 지하실에서 꺼내온 우유를 각자 한 잔씩 앞에 놓고 사이좋게 마주앉았다. 샬로트는 소박한 음료를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아마 맥스는 그레이트하우스의 무수한 하인들 중에서 누군가가 갖다 주는 브랜디를 마시고 있겠지.

    "샬로트"

    사라의 목소리에 샬로트는 문득 상념에서 벗어났다. 맞은편에 앉은 사라는 다소 표정이 굳어 있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샬로트는 감이 잡히지 않았다. 언니는 설마 이 시점까지 와서 맥스가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말을 하려는 것일까? 사라는 아직도 귀족 계층에 대해 시들 줄 모르는 의구심을 품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의 의견에 따르면 귀족들은 별종이요, 아예 다른 조상에서 갈라져 나온 분파였다.

    "내 걱정은 하지 마, 언니. 위클리프 백작가의 재산이 주눅들 정도로 어마어마하다는 건 나도 알아. 언니도 런던의 그 온통 번쩍이는 장식에다 위풍당당하고 드넓은 저택들을 본다면‥‥‥ 금테 두른 접시에 황금 숟가락에다가‥‥‥‥"

    그녀는 무척이나 회의적인 눈으로 바라보는 사라의 표정을 깨닫고 말을 멈췄다

    "내 말 믿어, 언니. 런던이 그렇게 번드레한 장식투성이라 해도거기 사람들은 여기 어퍼비드웰에 사는 우리 이웃들보다 더 행복하지는 않아. 이상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난 맥스가 일정에 따라 여기저기 파티에 허둥지둥 참석하는 것보다 이곳에서 우리와 함께 있는 걸 더 좋아한다는 생각이 들어."

    샬로트는 상체를 숙이고 목소리를 낮추며 속삭였다.

    "이 얘기는 아무한테도 절대 하면 안 되는데 말야, 내 생각에 맥스는 아주 외로운 사람 같아."

    사라는 동생의 특급 비밀에 어안이 벙벙한지 멍하니 바라보기만 하다가 마침내 천천히 미소를 머금었다.

    "난 네 걱정은 하지 않아, 샬로트. 백작님에 관해서는 내 생각이 틀렸다는 걸 인정하겠어. 너희 둘은 다른 점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난 도저히 불가능한 사이라고 생각했었지. 하지만 불가능이란 말이 네 사전에 없다는 걸 난 왜 진작 깨닫지 못했을까!"

    동생을 바라보는 사라의 눈길에는 사랑과 존경의 빛이 깃들여있었다. 꾸중이 될 법한 말이었지만 따끔한 어조가 느껴지지는 않았다.

    "지난 2주 동안 난 백작님이 널 지켜보시는 모습을 봤단다. 그분이 너를 정말로 열렬히 사랑하시는 건 확실하더구나."

    사라는 심호흡을 했다.

    "그분이 널 잘 돌봐 주시리라는 걸 믿어. 사실 내가 하려던 얘기는 이게 아니란다."

    그녀는 잠시 사이를 두고 우유잔을 내려다보았다. 샬로트는 그제서야 사랑스럽고 든든한 언니의 볼이 분홍색으로 물든 사실을 깨달았다. 여태껏 어느 누구도, 그 무엇도 트로브리지 가의 장녀의 기를 꺾을 수는 없었던지라 샬로트는 자세를 바로하고 언니를 가만히 살폈다.

    "샬로트"

    사라는 말을 꺼냈지만 다음 순간 헛기침을 했다.

    "엄마가 계시지 않으니까 내게 책임이 떨어졌단다. 아내로서 남편에게 다해야 할 의무에 관해서 말이지."

    샬로트는 조소했다.

    "언니, 나한테 그런 충고를 하려고 한다면 시간 낭비일 거야. 맥스도 그 문제에 있어서는 나름대로 의견이 있는 게 분명하거든. 그이는 자기 아랫사람들에게 시시콜콜 명령하기를 좋아하잖아. 언니도 알지? 내 생각에 그이는 내일이라도 내게 일정표를 짜줄걸. 하지만 그 한심하던 비서가 사라졌으니 그이도 조금은 느긋해진 것 같아."

    놀란 표정을 지은 사라는 왠지 컥컥대더니 겨우 이야기를 계속했다.

    "내 생각엔 백작님이라 해도 일정표를‥‥‥‥"

    말꼬리를 흐린 사라는 밀려드는 감정을 억지로 참는 것 같았다. 샬로트는 언니가 웃겨서 그런다는 것을 깨닫고 놀랐다.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사라는 자신을 다잡으며 우물거렸다.

    "샬로트, 내가 하려던 말은 부부의 잠자리 얘기야"

    "아, 그거 !"

    샬로트는 신이 나서 미소지었다. 지난 1주일 동안 그녀의 마음은 한도 끝도 없는 듯한 결혼식의 세부 항목들에 사로잡혀 있었지만 신혼 침상에 관한 생각을 머릿속에서 완전히 몰아내기란 영영 불가능한 것 같았다. 맥스의 런던 저택에서 일어났던 그날아침의 사건을 떠올린 그녀는 몸 안이 후끈해지는 한편 그 은밀한 행위를 되풀이하고 싶은 충동으로 손발이 욱신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맥스는 약혼 기간에는 그런 행위를 거부했다.

    "너도 여기 시골에서 동물들을 본 적이 있으니까 그 원리는 알고 있을 거야."

    사라는 후다닥 말했다. 샬로트가 끄덕이자 사라는 안심한 눈치였다

    "널 겁주고 싶지는 않지만 처음엔‥‥‥ 처음엔 아프단다. "

    이제 얼굴이 진홍색이 된 사라는 우유가 저 혼자 튕겨나와 언제 눈에 들어갈지 모른다는 듯 잔을 내려다보기만 했다. 아프다고? 맥스가 침대에서 그런 행위를 해주었을 때는 전혀 아프지 않았는데! 신혼 침상이 아니긴 했지만!

    "확실해?"

    샬로트는 물었다. 사라는 기가 막히다는 눈길로 동생을 바라보았다.

    "물론 확실하지. 난 유부녀잖니 !"

    샬로트는 사라와 앨프가 자기와 맥스처럼 그런 행위를 하는 광경을 상상해 보았다. 그녀는 결국 앞에 놓인 우유잔으로 눈을 내리깔아 버렸다. 좀더 독한 음료였으면 좋겠는데

    "언니가 담근 포도주 아직 좀 남았어?"

    사라는 순간적으로 어리둥절한 듯했다.

    "그래, 아마 있을 거야."

    마침내 언니의 대답이 떨어지자 샬로트는 즉시 찬장으로 다가갔다.

    "술에 맛들인 건 아니겠지?"

    샬로트는 언니의 질책을 무시한 채 우유잔을 치우고 포도주를 각자 한 잔씩 따랐다. 그녀는 다시 자리로 돌아와 술잔을 들고 기름 등잔의 희미한 불빛에 비춰 보았다.

    "결혼 첫날밤을 위하여 ! 하지만 말만 들어봐도 끔찍할 것 같네 !"

    "샬로트!"

    사라는 꾸짖으며 축배에 동참하지 않았다.

    "끔찍한 게 아니야, 내 말을 잘 듣기만 하면. 그래, 처음에는 어려워. 하지만 그 이후부터는 사실 아주‥‥‥ 즐겁단다."

    즐겁다고? 샬로트는 그 말을 맥스의 침대에서 벌어졌던 행위에 적용시킬 수 있는지 생각해 보았다. 그녀는 숙녀답지 못한 태도로 포도주를 벌컥 마신 다음 고개를 가로저으며 잔을 내려놓았다.

    "아프다. 그런데 즐겁다?"

    그녀는 되풀이했다.

    "언니, 그런 기분은 모두가 다 똑같이 느끼는 거야?"

    "물론이지!"

    사라는 다소 힘들게 마른침을 삼켰다.

    "하지만‥‥‥ 하지만 즐겁다니 !"

    샬로트는 흥분해서 떠들어댔다

    "정말 그게 다란 말이야?"

    "음, 글쎄다. 사실 그렇게 충분한 표현은 아닌 것 같구나."

    사라도 시인했다.

    "내가 보기엔 절대 아냐!"

    샬로트는 쏘아붙였다.

    "언니,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되는지 더 자세히 설명해 주는 게 좋을 거야. 그래야 모든 걸 완벽하게 따져볼 수 있지 않겠어?"

    사라는 대화 내내 그녀를 짓누르던 당혹감을 마침내 벗어 던진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런 변화가 술의 힘 때문인지 아니면 동생의 기탄 없는 행동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사라의 얼굴에서 홍조가 자취를 감추기 시작하더니 그 눈이 언제나처럼 침착하게 빛났다.

    "그래, 그건 말이지."

    그녀는 말을 꺼냈지만 다음 순간 우뚝 멈추고 당황한 듯 동생을 빤히 바라보았다.

    "샬로트! 너‥‥‥ 설마 아니겠지? 샬로트, 너 아직 처녀니?"

    샬로트는 자신의 탈선 행위를 목격했을 때마다 사라가 짓곤하던 낯익은 표정을 보았다. 공포와 더불어 망설이다 결국 탄복하는 기색이었다. 샬로트는 순진하게 웃었다.

    "사실 언니, 나도 잘 모르겠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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