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샬로트의 웨딩마치-3화 (3/19)
  • 3.

    샬로트는 전혀 힘들이지 않고 우아하게 움직이는 위클리프의 몸가짐에 넋을 잃은 채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서 있었다. 그처럼 남자답고도 우아한 사람은 생전 처음 보았다. 정신을 차려 보니 그녀의 시선은 그의 널따란 어깨에서 아까 자기 손으로 잼 파이 자국을 닦아냈던 남자다운 다리를 훑어내리는 중이었다. 그가 복도의 모퉁이를 돌아 사라지자 거실로 돌아온 샬로트는 소파에 풀썩 주저앉아 손바닥으로 달아오른 뺨을 감쌌다. 그녀는 아직도 문간에 서 있는 언니를 슬쩍 곁눈질하며 다소 숨가쁜 목소리로 물었다.

    "저분 근사하지 않아?"

    사라는 여동생을 세심하게 살펴보았다. 저런 표정의 샬로트를 본 적은 한두 번이 아니었다. 특히 샬로트가 어린 시절 하늘을 날수 있다면서 아버지의 우산을 들고 헛간 지붕에서 뛰어내렸을 때, 아버지가 샬로트에게 고전에 대해서라면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다고 하셨을 때, 키스란 것의 실체가 궁금하다고 샬로트가 단언했을 때 등등. 마지막 기억이 사라를 문득 현실로 다시금 끌어내렸다. 그녀는 남동생들이 자기 전에 제대로 세수를 하는지 감독해달라는 구실로 남편을 내쫓았다.

    "여자애들에겐 내가 금방 올라가 재워줄 거라고 말해 주세요"

    그녀는 다시 여동생을 바라보았다.

    "그래. 위클리프 백작님은 아주 근사한 분이구나."

    그녀는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아아, 언니."

    샬로트는 닳아빠진 소파에 기대앉아 환호성을 지르듯 양 팔을 머리 위로 들어올렸다.

    "그분만큼 멋진 남자를 본 적이 없어 !"'

    "물론 그렇겠지."

    사라는 여동생 가까이에 자리잡고 앉았다.

    "그분은 백작님이야. 그리고 잘생겼고 부자야. 그 말은 결국 그분의 세계가 우리들과는 완전히 동떨어져 있다는 얘기지."

    샬로트는 무슨 생각이라도 해낸 양 벌떡 일어나 앉았다. 사라는 불안감이 솟구쳐 올랐지만 억지로 침착한 표정을 지어 보이면서 동생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아, 언니."

    샬로트는 사랑스러운 얼굴을 빛내며 속삭였다.

    "난 평생 금년 봄을 기다려 왔어. 어렸을 때 오거스타 할머님께서 내가 클 때까지 살아 계시고 또 여건이 된다면 나도 런던시즌에 참가할 수 있을 거라고 말씀하신 게 아직까지도 똑똑히 기억나. 언니도 내가 이 순간을 얼마나 고대했는지 알잖아. 하지만 언니,"

    샬로트는 다소 어조를 낮추었다.

    "만약 그분을 차지할 수만 있다면 시즌 따윈 포기할까 하는 생각도 들어."

    사라는 문득 덮쳐 드는 공포심을 용케 감출 수 있었다. 그녀는 여동생에게 다정한 미소를 보였다.

    "깜찍한 꿈이로구나. 샬로트. 하지만 꿈일 뿐이야. 위클리프 백작 같은 남자들은 가난한 목사의 딸과 결혼하지 않는단다."

    샬로트는 그 말에 대경실색한 것 같았다. 사라는 여동생의 자신만만함이 부럽기까지 했다. 사실 샬로트는 여태껏 전혀 불가능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계획에 절대적인 자신감을 품은 채 무작정 돌진해 나갔다. 심지어 지붕에서 뛰어내린 결과 발목만 삐고 우산만 부러졌을 뿐이었는데도 전혀 기죽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언니랑 아빠는 내가 우리 모두의 생계를 맡아줄 만큼 상당히 돈이 있는 남편감을 찾아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했잖아."

    샬로트는 대들었다.

    "얘야, 상당히 돈이 있는 것과 위클리프 백작처럼 셀 수도 없을 정도의 재산을 가진 것과는 하늘과 땅 차이야."

    사라는 잠시 멈추고 말을 조심조심 아꼈다. 섣불리 굴다가 샬로트에게 반항심을 심어 주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여동생에 관해서라면 십여 년 동안 뼈아픈 교훈을 터득한 몸이었다. 샬로트는 하면 안 된다는 말을 들었을 경우 상대의 말이 틀리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더욱 나설 아이였다. 사라는 샬로트가 위클리프 백작의 관심을 끌지 못하리라는 말을 할 생각은 없었다. 그랬다간 샬로트의 눈에 단호한 표정이 번득일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런 가망 없는 일에는 아무리 동생의 미모와 결단력, 지성을 동원한다 해도 별 소용이 없을 터였다.

    그녀의 아버지와 샬로트는 꿈이며 전설을 먹고사는 부류였지만 사라는 가족 중에서도 제일 현실적인 성격이었다. 그녀는 세상의 어떤 귀족이라 하더라도 소녀 티를 벗지도 못한 무일푼에 지위도 없는 아가씨와 결혼할 리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 아가씨가 아무리 사랑스럽고 참하다 해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분명 그분은 당당한 혈통을 지닌 부유한 숙녀가 아니면 결혼하지 않을 거야. 그리고 그렇게 되는 게 당연하고"

    샬로트는 사라의 충고를 곰곰이 되새기는 듯했다. 사라는 내친 김에 아예 쐐기를 박았다.

    "그 미남 손님에 대해선 이만 잊어버리렴. 런던에 가면 네 꿈을 실현시켜 줄 남자들이 득실거릴 거야. 작위는 없을지 모르지만 선량하고 건실하고 믿음직해서 너랑 우리 가족을 기꺼이 보살펴 줄 만한 사람들일걸."

    샬로트는 언니를 올려다보았고 때마침 일그러뜨리려던 얼굴을 펼 수 있었다. 건실, 믿음직이라‥‥‥ 그녀에게는 아무런 매력도 없는 말들이었다. 그런 말은 사라의 둔해 빠진 남편에게나 어울릴 뿐 우아하고 자극적이고 말할 수 없이 매력적인 위클리프 백작과는 상관없는 말이었던 것이다. 그를 떠올리기만 해도 그녀의 심장은 가슴속에서 흥겹게 뛰어 놀았다. 언니가 대체 뭘 안다고? 언니는 자기가 경험해 보지 않은 것이라면 항상 경계하곤 했다. 그리고 귀족 계층에 대해서라면 덮어놓고 불신을 보였다. 아마도 앨프보다 한층 더 한심한 시댁 친척들로부터 옮은 버릇일 것이다. 샬로트는 사라의 판단을 대체로 믿는 편이었지만 위클리프 백작이 자신의 운명의 상대가 아니라는 말만은 믿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그의 허벅지 사이에 무릎을 꿇었던 때를, 그의 몸에 손을 댔을 때 흥분과 함께 밀려들던 전율을 떠올렸다. 그녀가 지켜보는 앞에서 그는 예기치 않게 다정한 태도로 막내 여동생을 안아주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녀는 서로 공통된 관심사를 갖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을 때 잘생긴 얼굴을 굳히던 그의 모습을 보았다. 그는 아버지와 연로하고 인자하신 린치워스 씨를 제외하고는 그녀의 학식에 질색하지 않는 유일한 남자였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이 모든 만남이 운명적이라는 예감이 꽉 들어찼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얘기를 현실적인 사라에게 할 만큼 분별 없지는 않았다.

    "아가씨들, 아직 거실에 있니?"

    아버지의 음성이 들려오자 그들은 고개를 들었다.

    "미안해, 샬로트."

    사라는 가까이 다가앉아 여동생의 손을 토닥여 주었다.

    "하지만 너도 눈을 좀 낮추는 게 좋아. 위클리프 백작님은 우리 같은 사람들의 손이 닿지 않는 세상 저편에서만 사는 사람이야."

    샬로트는 말을 아끼는 언니의 충고에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 말을 들으니 백작이 너무나 차지하기 어려운 대상으로 여겨졌다.

    "꼭 무슨 신화 속의 신 같네."

    그녀가 중얼거렸다.

    "그래, 그렇겠지. 네가 그렇게 좋아하는 이야기에 나오는 신 말이야."

    사라는 미소지으며 위클리프 백작에 대한 이야기를 마치고 아버지에게 인사했다. 샬로트 역시 미소지었지만 그녀 자신만을 위한 한층 은밀한 미소였다. 신들도 때때로 인간을 아내로 취했다는 사실을 그녀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맥시밀리언은 일정표를 점검했다. 런던으로 떠나는 것은 다음날이었다. 그리고 그는 정해진 기간 안에 계획했던 바를 모두 달성했다. 런던에서 부리던 심복 한 명을 시켜 이곳을 감독하고 예전부터 이곳에서 일하던 사람들을 돕도록 조치했다. 몇 달만 지나면 이 집은 그의 엄격한 요구에 맞춰 돌아갈 것이고 영지 역시 제대로 기름칠한 기계처럼 원활하게 경영될 터였다. 오늘 오후는 별로 중요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검토가 필요한 용무들을 보기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가 살펴본 결과 집사 혼자 처리하지 못할 일은 하나도 없었다. 그 덕에 그는 자유시간을 갖게 되었다. 미루고 있던 편지를 쓰거나‥‥‥ 외출을 해도 좋았다. 갑자기 맥시밀리언은 다시금 목사관을 방문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얼굴을 찡그린 채 그 생각을 재고하며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들겼다. 그는 샬로트를 뇌리에서 몰아내려고 내내 애썼지만 그녀는 끊임없이 그의 머릿속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그 전날 저녁 시간 내내 그녀의 아름다움에 경탄하면서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던가. 그렇게 왁자지껄한 아이들과 지겹도록 긴 식사를 하는 고문까지 견뎌내면서. 그가 다시 목사관에 가야 할 이유 따위는 전혀 없었다. 작별인사를 한다면 또 모를까‥‥‥‥목사관의 현관으로 향하는 단단한 흙길은 이제 친숙하게 여겨졌다. 하지만 이번에는 바둑이가 달려드는 일도 없었고 앞마당은 괴괴하리만치 적막했다. 그는 현관문을 노크했다. 샬로트가 나와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는 그녀가 집에 없으리라는 생각은 전혀 해보지 않았으므로 그제서야 오후를 목사와 보내야 하는 지겨운 상황이 닥칠까봐 걱정되기 시작했다. 그는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보았다. 30분, 그는 자신에게 타일렀다. 그 시간만 지나면 떠나자. 그의 걱정은 헛수고였다. 문을 열어준 것은 그의 아름다운 아가씨였다. 점점이 무늬가 놓인 소박한 모슬린 드레스 차림에 바구니를 든 그녀는 아침 이슬처럼 상큼해 보였다. 그를 본 그녀의 얼굴이 햇살처럼 밝아지자 맥시밀리언은 순수한 즐거움이 와락 밀려드는 것을 느꼈다.

    "백작님, 다시 뵙게 되어 얼마나 기쁜지요"

    그녀는 활짝 미소지었다.

    "나야말로 기쁘다오‥‥‥‥ 샬로트."

    그는 그녀의 이름을 고급 포도주처럼 음미하며 말했다. 그녀는 장밋빛으로 얼굴을 붉혔지만 그의 시선을 피하지는 않았다. 그녀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그에게 친밀한 자격이 주어졌다는 사실을 두 사람 다 강렬하게 의식했던 것이다. 다음 순간 복도가 떠들썩해졌다.

    "준비 다 됐어!"

    쏜살같이 달려오던 킷이 하마터면 샬로트의 치마폭에 달려들 뻔했다. 그 뒤에서는 캐리가 다소 침착한 태도로 따라왔다.

    "저흰 지금 막 마을에 나가려던 참이었어요"

    샬로트가 설명했다.

    "내가 태워다 주겠소"

    맥시밀리언은 새싹 빛깔의 맑은 눈동자를 지그시 들여다보며 제안했다.

    "정말 친절하시군요"

    그녀는 그의 눈길을 피하지 않고 마주 바라보며 말했다. 아이들의 존재는 저 멀리 사라지고 초록빛 눈동자와 도톰한 입술의 아름다운 아가씨만이 남아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녀는 리본을 맨 밀짚모자 안으로 머리카락을 틀어 올린 상태였다. 맥시밀리언은 그 사실에 고통스러울 정도로 실망했지만 그렇게 꽁꽁 감춘다 해도 모자챙을 조금만 움직이면 그 찬란한 금발이 풀려 나오리라는 사실을 깨닫자 다소 기분이 누그러졌다. "절름발이세요?"

    캐리가 불쑥 질문을 던졌다 놀라서 내려다본 맥시밀리언의 눈에 화려한 돋을 새김 장식이 된 은 손잡이의 지팡이를 들여다보는 아이의 모습이 들어왔다.

    "멍청하긴!"

    킷이 말했다.

    "그건 그냥 거짓 시늉일 뿐이야."

    맥시밀리언이 그 본의 아닌 모욕적 언사에 뭐라 대꾸할 틈도 없이 복도 저편에서 제임스의 고함 소리가 터져 나왔다.

    "백작님께서 태워다 주신다면 나도 가고 싶어."

    소년은 외쳤다.

    "나도!"

    토마스가 맞받았다.

    "나도!"

    캐리의 목소리는 한층 부드러웠다. 샬로트는 고개를 저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지금은 공부할 시간이잖니. 제임스, 토마스, 캐리."

    그녀는 단호하게 말하면서 염소떼를 몰듯 아이들을 집 안으로 들여보냈다.

    "들어가서 아빠한테 백작님께서 우리를 마을까지 태워다주신다고 말씀드려 주렴. 가자꾸나, 킷."

    그 순간 제니가 방에서 나와 그들을 향해 아장아장 걸어왔다.

    "백짱님."

    아이는 노래하듯 불러댔다.

    "백짱님."

    아이는 맥시밀리언의 무릎 앞에서 우뚝 멈춰 서더니 파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양팔을 치켜들었다.

    "안아 달라는 거예요"

    킷이 설명했다. 맥시밀리언은 얼굴을 찡그리며 지팡이를 세워 놓은 다음 손을 내밀어 제니를 안아올렸다. 아이는 그의 팔꿈치 안쪽에 편하게 앉더니 그에게 찰싹 달라붙었다. 그는 아이의 온기와 냄새, 조그만 팔이 목에 감기는 느낌 등을 하나하나 마음속에 새겼다. 다음순간 그는 샬로트의 반응을 가늠하기 위해 그녀 쪽을 훔쳐보았다. 왠지 맥시밀리언은 아이로 인해 기뻐하는 자신의 묘한 심정이 노골적으로 드러났으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어쩌면 비웃음을 살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샬로트는 흥겨운 기색이 아니라 놀란 눈을 깜박이며 그를 보고 있었다. 그는 빙그레 웃었다. 그녀도 미소지었다. 두 사람이 공유한 그 순간은 아이들 모두를 마차에 태울 때까지도 여전히 그에게 남아 있었다. 샬로트는 바구니를 무릎에 올려놓고 그의 곁에 앉은 다음 그사이에 제니를 앉혔다. 킷은 마구 신바람을 내며 마부석으로 올라타 뒷좌석에 앉았다. 샬로트는 마차를 모는 맥시밀리언의 모습을 곁에 앉아 언제까지나 볼 수 있도록 마을까지 가는 길이 멀었으면 하고 빌었다. 모자 덕분에 눈동자가 일부나마 가려지는 탓에 그의 널따란 가슴과 남자다운 허벅지를 티내지 않고 느긋하게 훔쳐볼 수 있었다. 그는 앨프처럼 체구가 커다란 남자는 아니었지만 훤칠하고 전체적인 균형이 완벽했다. 그녀의 심장이 줄타기를 하듯 마구 뛰놀았다. 모든 것이 너무나 순식간에 끝났다. 백작은 앨프와 사라의 가게 앞에 솜씨 좋게 마차를 세운 다음 마부용 장갑을 벗고 우아한 자태로 훌쩍 뛰어내렸다. 그러더니 그는 마차에서 내리는 샬로트를 도우려고 팔을 내밀었다. 순간 샬로트는 꼼짝도 할 수가 없었고 그가 내민 손을 넋을 잃은 듯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힘차고 여윈 손에 손가락은 길고 늘씬했다. 그 손을 보자 샬로트는 현기증마저 느꼈고 한참 뒤에야 마침내 일어나야 한다는 것을 기억해 냈지만 무릎 위에 놓인 바구니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바구니가 앞쪽으로 기울어졌을 때에야 그녀의 주의가 그쪽으로 쏠렸다. 그녀는 갓 낳은 달걀들이 위클리프 백작에게로 쏟아지려는 것을 보고 조심하라고 새된 목소리로 외쳤다. 그는 민첩한 손으로 용케 바구니를 잡았지만 달걀 하나가 그의 어깨에 떨어지면서 깨져 그의 가슴 솔기선을 타고 흘러내리고 말았다. 위클리프 백작은 경멸스럽다는 듯 달걀 껍질 조각을 노려보았다. 노른자위가 고급 바느질 솜씨를 뽐내는 그의 푸른색 최고급상의로 방울져 흘러내렸다.

    "어머나!"

    샬로트는 허겁지겁 마차에서 내려와 바구니에서 냅킨을 꺼내 엉망이 된 위클리프의 어깨춤을 닦았다. 그의 훤칠한 키 때문에그 녀는 손을 높이 들어야만 널찍한 어깨에 닿을 수 있었다. 그녀의 손 아래 잡히는 팽팽한 천 아래에는 부풀린 어깨 패드의 흔적 따윈 전혀 없이 탄탄한 근육뿐이었다. 그녀는 상반신을 그에게로 더욱 가까이 가져가면서 아무 생각 없이 다른 손을 그의 가슴에 얹고 몸의 균형을 잡았다. 자신의 그런 동작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던 그녀는 그의 숨소리가 변한 뒤에야 그의 얼굴을 살짝 올려다보았다.

    "고맙소, 샬로트. 그 정도면 충분하오"

    위클리프 백작의 은은한 미소는 왠지 그녀의 몸에 심상치 않은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그녀는 전신이 바짝 긴장되었다. 그의 수놓인 조끼에서 손을 떼고 황급히 물러난 샬로트는 일부러 그의 얼굴을 바라보지 않고 어깨의 얼룩만 쳐다보았다. 그다지 눈에 띄지는 않아 보였지만 조금만 있으면 향기롭지 못한 냄새가 번질 터였다.

    "언니 가게에서 이 옷을 빨아줄 수 있을지 알아봐야겠어요."

    샬로트는 말했다.

    "아니오, 샬로트. 그럴 필요는 없소"

    그의 미소는 아직도 아련히 남아 그녀의 감각을 계속해서 들쑤셔 놓았다.

    "하지만 백작님, 시간이 지나면 백작님 옷에서‥‥‥냄새가 날거예요"

    샬로트는 이의를 제기했다. 그녀는 그를 몰래 올려다보았다. 그는 놀란 표정이었지만 다음 순간 그윽하고 듣기 좋은 웃음소리를 냈다.

    "그림 당신은 내게 달걀 세례를 입힌 죄값으로 악취를 견디면서 나와 동행해야겠군,"

    백작의 눈빛과 말투에는 장난기가 스며 있었다.

    "원래부터 타고난 덜렁이요, 샬로트? 아니면 나만 그 희생물이  된거요?"

    "백작님만이죠."

    그녀는 별 생각 없이 말하면서 제니를 내려 주려고 손을 내밀었지만 아이를 내려놓다가 문득 동작을 멈췄다.

    "그러니까, 제 말뜻은 백작님께선 특별한‥‥‥ 영향력을 갖고 계신 것 같다는 거죠. 전 백작님과 있으면 침착성을 잃어요. 여기 어퍼비드웰에 사는 저희 같은 사람들은 백작님처럼 세련된 신사분들께 익숙지 않거든요"

    샬로트는 감히 그에게 고개를 돌리지도 못하고 설명만 줄줄 늘어놓았다.

    "나 이제 내려야 되지 않아?"

    킷이 외쳤다. 샬로트는 동생의 불평 덕분에 더 이상 난감한 상황을 겪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조심하고, 우리 옆에 꼭 붙어 있으렴."

    그녀의 말이 떨어진 순간 남동생은 일행을 남겨둔 채 쏜살같이 달려들어가고 말았다. 맥시밀리언은 고개를 갸웃하며 샬로트의 모습을 곁눈질했다. 그녀야말로 더할 나위 없이 흥미로운 존재였다. 그가 던진 질문은 정당하지도 적절하지도 않았으므로 그녀가 솔직한 대답을 하리라고는 기대하지도 않고 있었다. 그는 여자들이 얼간이처럼 선웃음이나 치면서 추파를 던지고 빙빙 돌려 말하는 버릇에 익숙해져 있었으므로 샬로트의 진솔한 면은 그에게 신선하게 다가왔다. 내가 침착성을 잃게 만든다고? 그 생각에 그는 걷잡을 수 없이 즐거워졌다. 그녀는 보기 좋은 분홍색으로 뺨을 물들인 채 살짝 미소지어 보이더니 형부가 운영하는 가게 쪽으로 향했다. 그들이 들어선 가게 안은 조명이 희미하고 온갖 물건이 널려 있어 비좁았다. 바늘꽃이 종이에서부터 베이컨에 이르기까지 시골 사람들이 쓸 법한 일상 용품이 거의 총망라되어 있는 것 같았다. 맥시밀리언은 훈제한 햄 덩어리에 하마터면 얼굴을 부딪힐 뻔했지만 유연하게 뒤로 물러났다.

    "돼지고기 맛이 떨어지게 만드는군, 그렇지 않소?"

    "어머, 그런 말씀 마세요"

    샬로트가 꾸짖었다.

    "저희 집에서 마을 최고의 식사를 할 수 있는 게 다 이것 덕분인걸요"

    그녀는 상반신을 가까이 숙이고 속살거렸다.

    "아빠도 종종 말씀하시지만 언니가 형부와 결혼한 게 우리에겐 엄청난 도움이 되고 있어요"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샬로트는 그에게 눈을 깜박여 보이더니 시선을 피했다. 그녀는 미간에 주름을 잡고 눈살을 찌푸렸다. 맥시밀리언이 불현듯 변한 그녀의 분위기를 미처 심사숙고할 틈도 없이 킷이 뭐라 중얼거리더니 카운터 뒤로 득달같이 달려갔고 사라가 그들에게로 다가왔다. 그녀의 미소는 친근했지만 그를 곁눈질하는 눈초리에는 경계심이 깃들여 있었다. 이 여자는 내가 자기의 예쁜 여동생을 더럽힐까 봐 걱정하는 것일까? 어리석은 여자 같으니, 그 반대인 줄도 모르고 그에게 오물을 덮어씌우는 것은 언제나 샬로트 쪽이었다.

    "잘 있었어, 언니? 백작님께서 친절하게도 우릴 태워다 주셨어 ."

    샬로트는 그가 서 있는 쪽으로 미소를 보내며 말했다. 사라는 반갑지 않은 기색을 역력히 내보이면서도 고개만은 까딱거렸다. 피차 마찬가지지, 맥시밀리언은 차갑게 생각했다. 그 역시 그가 부리는 소작농 소년처럼 달걀 바구니나 든 채 마을의 가게에서 어슬렁거리는 일 따위는 반갑지 않았다.

    "이건 오늘 분의 달걀이야."

    샬로트는 말하면서 맥시밀리언에게서 바구니를 받아 들었다.

    "하나 모자랄 거야. 그런데 백작님의 상의에 묻은 얼룩을 빨아줄 수 있겠어?"

    맥시밀리언의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궁금하다는 듯 쳐다보는 사라의 시선을 무시한 채 그는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샬로트의 팔을 거머쥐고 옆으로 데려갔다. 그녀가 고개를 들자 그는 딱딱하게 굳어진 얼굴로 그녀의 다정하면서도 당혹감서린 표정을 바라보았다.

    "난 상의를 벗지 않을 거요"

    샬로트는 놀라서 눈을 깜박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어머, 왜요?"

    백작이 요지부동이라는 것은 누가 보아도 명백했다.

    "그럼 천을 물에 적셔서 갖다 줘, 언니."

    그녀는 언니에게 부탁했다. 사라가 수건을 갖다 주자 샬로트는 다시 그의 어깨를 닦아냈다.

    "저한테는 그렇게 딱딱한 예의범절 같은 거 차리실 필요 없어요, 백작님."

    그녀는 얼룩을 닦아내며 타일렀다. 백작의 손가락이 그녀의 손목을 강하게 휘감았다. 너무나 순식간이라 그녀가 미처 반응을 보일 틈도 없었다. 그녀는 놀라서 고개를 들고 그의 잘생긴 얼굴을 보았다. 검은색에 가까운 그의 숱 많은 눈썹은 화난 것처럼 찌푸려져 있었다.

    "아니, 있소 그리고 난 모두가 그렇게 행동해 주길 바라오"

    그는 묘하게 위협적인 어조로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표정은 험악했다.

    "여기 어퍼비드웰에서는 그런 행동이 다반사일지 모르지만, 런던에 간다면 당신이 있는 자리에서 누군가가 상의를 벗었다는 소문이 들려오지 않기를 바라겠소. 내 말 알아들었소?"

    그는 다그쳤다. 샬로트는 눈길을 끄는 그의 갈색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뭐라 이름 붙일 수 없는 감정 때문에 빛깔이 짙어진 그 눈을 보자 그녀는 마른침을 삼켰다.

    "네, 백작님."

    그녀는 온순하게 대답했다. 그녀가 그의 어깨에서 손을 떨구자 그도 손목을 놓아주었다.

    "그게 그렇게 추문을 불러일으킬 짓인가요?"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여기선 아니겠지만 런던에선 그렇소. 당신 같은 젊은 아가씨들은 행동에 엄격한 제약을 받소. 그러지 않았다간 당신 평판이 걷잡을 수 없게 망가질 뿐더러 당신 아버지의 모든 투자도 허사가 되고 말 거요."

    그는 거칠게 말하며 물러섰다. 샬로트는 입가에 서리는 미소를 감추고 고개를 쏙 들이민 채 돌아섰다. 소유권을 주장하는 듯한 백작의 태도를 보자 그녀의혈관 속에 희망이 마구 솟아 올랐다. 어쩌면 사라의 말이 틀렸을 수도 있다. 그녀의 눈앞에 있는 이 신은 그녀처럼 비천한 인간을 아내로 맞을지도 몰랐다.

    "어머나, 그린 씨."

    사라가 불렀다.

    "외출할 만큼 거동하시는 걸 보니 기쁘네요. 다리가 아직도 아프신가요?"

    "여전하지 뭐. 안부 물어줘서 고맙구만."

    살이 통통하게 찐 마을 사람은 샬로트와 제니 쪽에 미소를 보내더니 궁금하다는 눈초리로 백작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동행한 분은 누구시냐, 샬로트?"

    그가 물었다.

    "백작님, 이분은 우리 마을에서 잡화상을 하는 그린 씨세요. 그린 씨, 이분은 위클리프 백작님이세요. 이번에 그레이트하우스의새 주인이 되셨죠"

    샬로트가 소개했다.

    "백작님이시라고?"

    그린은 반색을 했다.

    "뵙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백작님에 관해서는 좋은 소식밖에 들은 게 없습죠. 정말입니다. 런던에 친척이 사는데 그레이트하우스가 팔린다는 소문을 듣고 저한테 편지를 했더라고요. 백작님보다 더 좋은 이웃은 어딜 가도 없을 거라고 썼더군요. 위클리프 백작님은 훌륭한 청년으로 건실하고 믿음직한 분이라고 친척이 말했습죠."

    샬로트는 은근히 미소지으며 언니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사라는 입술을 앙다물고 경고하듯 눈살을 찌푸려 보였지만 샬로트는 무시해 버렸다. 그린 씨가 백작을 건실하고 믿음직하다고 했으니 이젠 사라도 백작에 대해 달리 반대할 말이 없을 터였다. 백작이 너무나 부자라고 반대할까? 아니면 너무 귀족적이라고? 샬로트는 기뻐서 방긋 웃었다.

    "감사합니다. 그린 씨. 어퍼비드웰과 기왕 인연이 맺어졌으니 서로간에 도움이 되도록 오래오래 지속되어야지요."

    "그럼요, 옳으신 말씀입니다."

    그린 씨는 활짝 웃었다.

    "다시 뵙기를 바랍니다. 백작님. 언제든지 저희 가게에 들러 주십쇼 저희 가게에 있는 물건이라면 뭐든지 좋은 값에 드릴 테니까요 어디 한번 와보십시오!"

    마침 그 순간 킷이 입 안 하나 가득 사탕을 우물거리며 가게 뒤에서 전속력으로 뛰쳐나왔다. 그들은 모두 작별 인사를 했다. 온화한 봄날의 햇살이 내려앉은 바깥으로 나오자 샬로트는 숭배하는 눈빛으로 백작을 바라보았다.

    "백작님을 뵈어서 다들 얼마나 반가워하는지 좀 보세요! 다른 사람들한테도 백작님을 소개시켜 드려야겠어요"

    "그럴 필요는 없소"

    백작은 딱 잘라 말하더니 몸을 숙여 한층 가까이 다가왔다.

    "게다가 나한테서 썩은 달걀 냄새가 난다는 말을 그 사람들이 떠들고 다니게 할 순 없잖소"

    "백짱님, 백짱님."

    제니가 백작의 손을 잡고 끌었다. 마침내 백작의 주의를 끌자 아이는 통통한 손가락으로 길 건너편의 과자 가게를 가리켰다. 샬로트는 재미있어하며 백작의 반응을 기다렸다.

    "아하! 저기 가고 싶은 거로구나?"

    그가 몸을 숙이고 묻자 꼬마 제니는 엄숙하게 끄덕였다.

    "아름다운 숙녀의 청을 거절할 수야 없지. 아가씨 뜻대로 하겠습니다. "

    샬로트는 그가 제니의 손을 잡자 비웃는 듯한 소리를 냈다. 그는 그녀를 날카롭게 곁눈질했다.

    "날 흥보는 거요, 나의 아가씨?"

    샬로트는 항변하지 못한 채 가게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백작님이 '나의 아가씨'라고 부른 게 맞지? 밝고 가벼운 분위기를 유지하려고 애쓰며 그녀는 일부러 어이없다는 듯 허공을 쳐다보았다.

    "엉터리! 저한테는 상의도 벗어 주지 못하시는 분이 그런 거짓말을 술술 늘어놓으시다니!"

    "친애하는 샬로트, 정말이지 당신 때문에 얼굴이 붉어질 지경이군!"

    백작이 놀리는 투로 말했다.

    "하지만 당신이 정말로 그렇게 셔츠 바람의 내 모습을 보고 싶다면 어떻게든 손을 써볼 수는 있겠지."

    샬로트는 몸이 화끈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의 말이 농담에 불과하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 말을 들으니 백작이 상의를 벗은 모습부터 셔츠까지 벗어 던진 모습에 이르기까지 온갖 장면이 떠올랐다. 백작의 가슴은 어떻게 생겼을까? 감촉은 어떨까? 샬로트는 얼굴을 새빨갛게 붉혔다. 이미 가게에 도착한 것이 그지없이 다행이었다.

    "안녕, 샬로트, 킷, 제니."

    혈색이 불그레한 남자가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샬로트는 기운차게 대답했다.

    "백작님, 이분은 맥그리거 씨세요. 맥그리거 씨, 이분은 위클리프 백작님이세요 그레이트하우스의 새 주인이시죠"

    "백작님, 영광입니다!"

    맥그리거가 외쳤다.

    "백작님께서 그 집을 제대로 정비하신다는 소문은 들었습니다. 예전 주인 헤스비 씨가 그곳을 그렇게 오래 방치해 두신 건 정말 유감스러운 일이었지요. 하지만 이젠 그 어느 때보다도 한결 나아질 거라고 믿습니다. 다들 그렇게 믿고 있지요"

    위클리프는 미소지으며 끄덕였다.

    "훌륭한 집이더군요"

    "백짱님, 백짱님."

    제니가 그의 팔을 잡아끌었다.

    "오호라, 백작님한테 홀딱 빠진 게로구나, 제니."

    맥그리거는 상체를 내밀고 꼬마에게 말을 걸었다.

    "너한테는 좀 나이가 많은 것 같지만 너희 예쁜 언니라면 또 모르겠구나, 안 그래?"

    맥그리거는 민망해하는 샬로트를 아랑곳 않고 눈을 찡긋해 보이더니 제니에게 조그만 케이크를 집어 주었다.

    "네가 제일 좋아하는 거다. 꼬마야. 그리고 킷, 오늘은 뭘 먹겠니?"

    "당신이 런던 사교계에서 성공할 야심이 있다면 자꾸 얼굴을 붉히는 그 버릇을 고쳐야 할 거요"

    백작이 속삭였다. 샬로트는 놀란 눈을 했고 백작이 나직이 껄껄 웃는 동안 설탕 입힌 비스킷을 주문했다. 그렇게 놀리는 법이 어디 있느냐고 그의 가슴을 주먹으로 때려 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별난 행동을 했다간 귀족 계층 사람들의 눈밖에 날 것 같았다. 그래서 그녀는 맥그리거가 보지 않는 틈을 타서 백작에게 혀를 낼름 내밀었다. 하지만 너무나 뜻밖에도 돌아온 반응은 열렬한 시선이었다. 백작은 그녀를 다시없이 기묘한 표정으로 바라보더니 눈길을 돌렸다.

    "그런데 당신들은 왜 장원 저택을 그레이트하우스라고 부르는거요?"

    그는 그녀가 과자를 다 먹자 물었다.

    "내가 알기로 그 집 이름은 캐스털리일 텐데."

    "그렇게 부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샬로트는 손가락을 털며 대답했다.

    "캐스터 가문 사람들이 그 집에 살았던 건 너무나 오래 전이에요. 게다가 어느 누구도 그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았어요. 마을사람들은 그 가문에 반감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저택을 절대 그 이름으로 부르지 않았죠"

    그녀는 허리를 굽혀 제니의 얼굴에 묻은 케이크를 닦아주었다

    "어쩌면 백작님께서 새 이름을 지어 주셔도 좋겠네요"

    그녀가 제안했다. 눈길을 들고 미소를 지은 그녀는 순간 그의 열렬한 눈길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의 크고 검은 눈동자가 그녀의 팽팽해진 상의를 주시하고 있었다. 샬로트가 벌떡 일어나자 그는 입구로 가서 그들에게 문을 열어 주었다.

    "그럴 일은 없을 거요"

    백작은 말했다.

    "왜냐하면 난 이곳에 그리 자주 오지 않을 테니까."

    샬로트는 획 돌아서서 그의 얼굴을 살폈다. 농담이겠지?

    "확실히 이곳은 아주 좋은 곳이오. 하지만 캐스털리는 내가 소유한 수많은 영지 가운데 한 곳에 불과하오 난 주로 런던이나 백작 가문의 저택에서 지내지."

    "하지만 그레이트하우스에 대한 그 모든 계획은 그럼......"

    샬로트는 이의를 제기했다.

    "이곳에 올 때마다 편안한 집에서 머무르고 싶어하는 건 당연한 심정이지. 하지만 그런 소규모 저택은 그 외에도 많이 갖고 있소"

    백작이 말했다. 제니가 뒤쳐져서 따라오자 그는 멈춰 서서 아이를 안아 을렸다. 샬로트는 여동생에게 돌연 날카로운 질투를 느꼈다. 아이의 금발을 쓰다듬는 백작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아찔해지면서 궁금증이 밀려들었다. 저 손가락이 내 머리카락을 훑어 내려가면 어떤 느낌이 들까? 그녀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억지로 시선을 돌렸다. 그레이트하우스가‥‥‥ 소규모라고?

    "백작 저택인 위클리프 플레이스는 더 큰가요?"

    그녀는 회의적인 기색을 감추지도 않고 물었다.

    "그렇소"

    백작은 무심하게 대답했다.

    "증조부께서 처음에 세우신 집이지만 그 뒤로 세월이 흐르면서 수많은 증축을 거듭했소. 물론 미적인 조화를 고려한 증축이었지."

    그는 그녀를 곁눈질하며 덧붙였다.

    "이런 시골 저택처럼 마구잡이로 지어 놓은 곳이 아니오. 지극히 아름다운 데다 침실이 서른 두 개나 되고 최신식 욕실도 여러 개 있소. 아버지께서 2층에 수도 배관을 설치하신 덕이지."

    샬로트는 듣고 있지 않았다. 단지 그의 곁에서 멍하니 보조를 맞춰 걸을 뿐이었다. 그녀는 궁전이나 그런 화려한 저택의 그림을 본 적이 있었지만 침실이 서른 두 개나 된다니 ! 그것은 그녀의 상상을 훨씬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그야말로‥‥‥ 소름끼칠 정도로 엄청났다. 사라와 얘기를 나눈 뒤 처음으로 샬로트는 언니가 제대로 상황을 지적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위클리프 백작은 그녀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에 있었다. 아니, 어느 누구의 손도 닿지 않는 곳이었다. 샬로트는 자신이 엄청나게 대단한 옹고집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아버지 말씀에 따르면 의지가 강한 성격이었다. 그녀는 뭔가 생각이 떠오르면 거기에 집착했고 항상 최고의 결과가 나오는 것도 아니건만 어쨌든 끝을 보아야 직성이 풀렸다. 하지만 이번 경우에는 방식을 좀 바꾸는 편이 좋겠다고 샬로트는 결심했다. 백작의 품에 안긴 자신의 모습은 금방 상상할 수 있었지만 위클리프 플레이스의 안주인이 된 모습은 도통 떠올리기가 힘들었다. 여태껏 한 번도 기죽어 본 적이 없는 그녀에게조차 너무나 주눅들게 하는 일이었다. 샬로트는 언니의 말이 옳다는 것을 인정했다. 자신이 위클리프 백작에게 딱 맞는 아내감이라고 착각하다니 그녀야말로 바보천치에 불과했다. 샬로트는 눈물 때문에 목이 메였고 마차에 다다랐을 때는 코를 훌쩍이고 있었다. 반짝반짝 빛나는 사두마차에 재갈을 우두둑 씹고 있는 최고 품종의 말까지도 그녀를 조롱하는 것 같았다. 위클리프 백작은 잘생기고 멋지고 그 누구보다도 뛰어난 존재였지만 그녀에게 어울리는 상대가 아니었다. 가난한 시골뜨기 처녀가 위클리프 백작에게서 기대할 수 있는 것이란 고작 우정이 다였다. 그녀가 당초 바랐던 것에 비하면 초라한 모조품 정도밖에 되지 않지만 그나마 아무것도 없는 것보단 나았다. 그녀는 모질게 마음을 다잡으며 마음속에 품고 있었던 갖가지 계획을 모두 폐기하고 말았다. 그들은 친구 사이밖에 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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