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자극라고? 망할. 정신병원이 따로 없었다.
아이들과 있어본 적이 없던 맥시밀리언은 이렇게 많은 아이들이 동시에 먹고 떠드는 소리가 거의 참기 어려울 지경이라는 것을 그제서야 깨달았다. 그가 사는 세계에서는 일정 나이가 안 되는 인간들이란 누구나 육아실이나 기숙 학교로 쫓겨났다. 그런 아이들은 아예 눈에 띄지도 않고 기척도 들리지 않는 것이 정상이었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가족들이 모두 식사에 참석한 데다 목사는 아이들을 조용히 시키려는 시도조차 거의 하지 않았다.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채 왁자지껄한 야단법석을 지켜보고 있는 존 트로브리지의 모습은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워 보였다. 사내아이들 중에서 가장 어린 아이는 숟가락으로 끊임없이 컵을 두들겨 댔고 손윗 사내아이 둘은 점점 더 목청을 돋워가며 입씨름을 계속했지만 그는 귀기울여 듣기만 했다. 맥시밀리언은 이런 질서 없는 난장판을 여태껏 본 적이 없었다. 샬로트가 아이들의 엄마 역할을 하리라 기대했던 그는 그녀
가 손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다소 놀랐다. 하지만 지금은 시집가 버린 장녀가 원래 있었다고 하니 아마 그녀가 이 원기왕성한 가족들을 휘어잡는 역할을 했으리라. 실망스럽게도 샬로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아직껏 어린 아가씨라서 그렇거나아니면 장난을 좋아해서 가족들을 다스릴 생각이 별로 없을 수도 있었다. 킷이 식탁을 쾅 치면서 포크를 허공에 날리자 그녀는 꾸짖기는커녕 숨죽여 깔깔댔다. 맥시밀리언에게는 충격적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남동생과 은밀한 미소를 나누는 모습이 왜 이렇게 부러운 걸까? 샬로트가 그의 시선을 피하는 것 같아 맥시밀리언은 영 불만스러웠다. 설상가상으로 목사는 그를 자신의 자리와 정반대인 식탁 끝에 앉혔으므로 교양 있는 대화를 나눈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특히 옆자리에 앉고 싶었던 샬로트도 그의 바람과는 너무나 멀리 떨어져 앉아 있었다. 맥시밀리언이 내린 결론에 따르면 이것은 어린 아가씨의 매력에 굴복한 벌을 받는 셈이었다. 그는 이름도 제대로 모르는 어린아이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정찬의 첫 코스가 나오자 그제서야 목사는 정신을 차리고 아이들을 소개했다. 맥시밀리언은 나이순대로 이름을 기억하려 애쓰며 제인, 제임스, 토마스, 캐리, 킷, 제니를 머릿속에 입력했다. 그는 애써 아이들의 이름을 잊지 않으려 했지만 정작 아이들 쪽에서는 그를 올바른 호칭으로 부르기가 상당히 어려운 모양이었다.
"이분은 위클리프 백작님이시란다. 이번에 그레이트하우스의 새 주인이 되셨지,"
목사가 아이들에게 백작을 소개했다.
"그러세요?"
토마스가 궁금한 듯 물었다. 여윈 몸에 갈색 머리를 한 아이는 제 아버지와 많이 닮은모습이었다.
"백작님이라고 불러야지."
토마스가 좀더 자란 모습을 한 제임스가 우월감을 내보이며 동생을 훈계했다. "싫어!"
토마스는 반항했다. 아이는 형이 시키는 것은 무엇이든 할 생각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디키가 그러는데 아저씨는 인도에서 떼돈을 번 벼락부자들보다도 더 돈이 많아서 저택을 궁전으로 만드실 거랬어요"
킷이 말했다.
"킷 !"
소년의 옆자리에 앉아 있던 제인이 나무랐다. 샬로트보다 몇 살 어리지만 오히려 한결 진지해 보였다. 어쩌면 안경을 쓴 데다 우중충한 빛깔의 머리카락을 가지런히 빗어 넘긴 모습 때문에 그런지도 몰랐다.
"소문을 떠벌리는 건 예의에 어긋나. 그리고 백작님이라고 불러야지."
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위협했다.
"백작님."
킷은 누나를 째려보며 따라 말했다.
"백짱님."
제니가 말했다.
"백짱님이 아냐, 백작님이지."
킷이 제동을 걸었다.
"백짱님."
제니는 고집스럽게 되풀이했다.
편두통을 앓는 체질도 아니었건만 맥시밀리언은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오기 시작했다.
"백짱님."
제니는 자기 접시를 그에게로 밀었다. 그는 멍하니 꼬마를 바라보았다.
"백작님이 고기를 잘라 주셨으면 하는 거예요"
킷이 이 빠진 잇몸을 드러내고 씩 웃으며 설명했다. 맥시밀리언은 그 말에 복종해 아이가 먹기 좋도록 고기를 잘게 썰어준 다음 금발 미녀를 곁눈질했다. 눈살을 찌푸리지 말자고 다짐하면서도 내심 그는 이런 고문을 안겨준 그녀를 책망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를 바라보고 있던 그녀와 시선이 마주친 순간 그의 기분은 요술에라도 걸린 듯 풀려 버렸다. 수줍음과 진솔함이 묘하게 뒤섞인 초록빛 눈동자가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것에 그는 알 수 없는 동요를 느꼈다. 그런 표정을 보았던 것이 과연 언제적이었던가? 맥시밀리언은 그런 생각을 털어 버렸다. 그녀 같은 젊은 아가씨들이야 도처에 널리지 않았던가. 혼인을 염두에 둔 귀부인들은 항상 딸들을 그에게 갖다 바치다시피 했고 그는 질서정연한 성격에도 불구하고, 아니 어쩌면 그런 생활 방식 때문에 더더욱 상당히 좋은 신랑감으로 일컬어졌다. 맥시밀리언은 그 여자들이 예쁘건 평범하건 못생겼건 의무적으로 한 번씩은 춤을 추어 주었지만 그 후에는 절대 거들떠보지 않았다. 그런 판에 왜 이 아가씨에게는 다른 감정을 느껴야 한단 말인가? 어쩌면 주위 환경 때문일지도 몰랐다. 그가 지금 있는 이곳은사교계 사람들이 춤을 추고 혼인을 성사시키기 위해 모여드는 올맥 사교장(18세기 중반 런던에 세워진 사교장. 처음에는 도박클럽으로 시작했다가 혼인 적령기의 상류층 남녀가 혼처를 구하는 장소로 변모했음)이 아니라 토끼굴처럼 비좁은 목사관이었다.
이 아가씨의 참신한 배경이 매력을 한층 가중시킨 데 불과하다고 맥시밀리언은 결론 내렸다. 그녀에게 쏠리는 관심은 지방의 건축물을 감상하거나 동물이나 식물군을 관찰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일시적 심정에 불과했다. 런던으로 돌아가면 이런 마음도 금세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어쨌든 저녁 식사는 거쳐가야 할 시련이었다. 그나마 하녀가 한 명이라도 있는 것이 목사관으로서는 자랑거리였고 맥시밀리언으로서는 안도 거리였다. 너무 어려서 일을 제대로 해낼성 싶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그 평범하고 통통한 소녀는 이 패거리의 일원으로 지내기가 못내 즐겁다는 듯 기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음식은 간소한 시골풍이었지만 그다지 맛이 나쁘지는 않았다. 그 점만으로도 감사할 노릇이었다. 맥시밀리언이 바둑이에 대해 장황하게 늘어놓는 킷의 이야기를 알아들어 보려고 애쓰고 있는데 제일 어린 꼬마 제니가 다 먹었다고 선언했다.
"다 없어졌어."
그러더니 아이는 미끄러지듯 의자에서 내려와 그의 무릎 위로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사내아이 둘은 샬로트의 중재 아래 또 다른 언쟁을 벌이는 중이었으므로 아무도 제니의 행동을 눈치채지 못했다. 맥시밀리언을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도. 그는 아이를 안아본 기억이라고는 없었으므로 전혀 묘한 기분이었다. 그는 식사할 생각을 아예 포기한 채 아이가 그의 가슴에 편하게 고개를 기댈 수 있도록 등받이에 기대앉았다. 아이의 숱 적은 금빛 머리카락이 볼에 곱슬져 있었다. 이 아이도 자라나면 언니처럼 숱 많고 길다란 머리카락을 갖게 될까 궁금했다. 아이의 손에 들린 지저분한 천 조각이 흠 하나 없는 그의 옷을 더럽히지 않을까 망설여졌지만 결국 그는 담요 자락을 온통 그의 몸 위에 펼쳐 놓는 아이를 말리지 않았다. 아이는 신뢰가 가득 찬 커다란 푸른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엄지손가락을 빨더니 한 손으로는 비위에 거슬리는 담요를, 나머지 손으로는 그의 조끼 자락을 움켜쥔 채 곧장 잠들어 버렸다. 아이에게서 나는 냄새는 잼 파이와 고양이를 연상시키듯 따뜻하면서도 달콤했다. 맥시밀리언은 아이가 떨어지지 않도록 팔을 둘러 끌어안았다. 고개를 들었을 때 샬로트가 그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새삼스럽게 강렬한 빛을 띠고 바라보는 눈길에 그는 완전히 당황하고 말았다. 실로 묘한 그 표정은 마치 그를 이제야 처음으로 본다는 듯했다. 하지만 그가 마주 바라보자 그녀는 얼굴을 붉히더니 눈길을 피했다.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그는 궁금해졌다. 샬로트는 그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겉으로는 제임스와 토마스가 벌이는 입씨름에 열중한 척했지만 사실은 한 번도 손님에게서 주의를 돌린 적이 없었다. 제니가 그에게 다가갔을 때 샬로트는 움찔했다. 백작 같은 신분의 남자라면 꼬마 계집아이 따위는 내칠 게 분명하다고 단단히 믿고 있던 차에 그가 제니를 안아 올리자 그녀는 깜짝 놀라 눈을 의심했다. 가만히 그 광경을 응시하노라니 샬로트는 심장이 전신으로 녹아들어 온몸 속속들이 감미로운 온기를 퍼뜨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분명하고도 피할 수 없는 인식이 그녀의 뇌리에 스며들었다. 그녀가 결혼 상대로 삼고 싶은 남자가 바로 여기 있었다. 이런 식으로 알게 되는 것일까? 이렇게 갑자기 깨닫는 것일까? 오늘 하루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시작되었지만 이제 그녀는 남편감을 찾았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차갑고 계산적이리라 여겼던 위클리프 백작은 그녀의 세 살배기 동생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안아줄 줄 아는 다정한 남자였다. 그녀는 의기양양해지는 동시에 말문이 막혀 버렸다. 그런데 이 결혼을 무슨 수로 성사시킨단 말인가? 어느 누구도 그녀에게 그 비결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가족들은 그녀가 미모 덕에 청혼을 받으리라 기대하고 있지만. 단지 예쁘게 보이면서 앉아 있는 것 이상의 비결이 뭔가 있을 것이다. 한때는 일단 시즌을 보내면서 그 과정을 습득해 나가면 될 거라고 편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때가 되기 전까지는 런던으로 떠날 수도 없었다. 런던에 가면.?백작이 가끔 살펴보러 와준다고 한 말이 떠오르자 그녀는 아찔할 정도로 신바람이 났다. 그녀는 아버지가 기대나 지나친 염원 때문에 사물을 과장하거나 잘못 해석하곤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위클리프 백작은 런던에서 그녀를 방문하겠다는 말을 부인하지 않았다. 샬로트가 평생 기다려 왔던 그 순간이 갑자기 더욱 충만한 갖가지 가능성을 안고 다가오기 시작했다. 런던 시즌‥‥‥그것도 위클리프 백작과 함께. 이야말로 꿈의 대상이었다. 샬로트는 그를 한 번 더 훔쳐보고 그 잘생긴 용모에 경탄하고 말았다. 그녀의 눈은 깔끔하게 빗어내린 그의 머리카락을 따라 움직였다. 이렇게 사방으로 뻗친 더벅머리말고 저런 머리카락을 가질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샬로트는 부러워했다. 머리카락을 뒤쪽에서 잡아 묶은 탓에 그의 이마가 대담할 정도로 드러나 있었지만 슬금슬금 후퇴하고 있는 그녀 아버지의 이마선과는 사정이 달랐다. 그녀는 저 검은 머리카락을 끈에서 풀어내면 어떤 모습이 될지 상상했다. 머리카락을 지저분하게 어깨에 흐트러뜨린 노동자들을 본 적이 있긴 했지만 위클리프의 머리카락은 깨끗하고 윤기가 흘러 천양지차였다. 그녀는 그 머리카락이 얼굴에 흘러내려 등을 덮고 손가락에 부드럽게 휘감기는 모습을 그려보았다. 그녀의 내면을 자극하던 따스한 온기는 이제 세찬 열기로 변했고 그녀의 몸은 펄펄 끓는 주전자처럼 되어 버렸다. 샬로트는 목 졸린 듯한 소리가 새어 나오자 기침으로 얼버무리며 감히 눈길을 피했다. 그녀는 소위 육체적 쾌락이라는 감정의 유혹을 받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물론 그런 쾌락이 어떤 것인지 항상 궁금하긴 했지만 말이다. 어린 시절 그녀는 다들 그 난리 법석을 떠는 키스라는 것이 대체 무엇인지 궁금해서 마을 소년들을 대상으로 시험해 보았다. 그녀는 일찍이 남동생 제임스를 매수해 자신에게 키스하도록 시켜본 뒤 그 다음에는 이웃의 모든 사내아이들로 대상을 확대해나갔지만 사라에게 들켜서 더할 나위 없이 부적절한 행동이라는 꾸중을 듣고 말았다. 사라는 샬로트가 그런 짓거리를 그만두지 않는다면 마을 끝자락에 쓰러져 가는 초가집에서 매독에 시달리는 리지 비튼 같은 매춘부 신세로 생을 마감할 것이라고 장담했다. 리지의 무시무시한 얼굴을 한 번 보기만 한 것으로도 샬로트는 그 자리에서 실험을 그만두고 말았다. 그리고 사실 그녀는 키스에서 그다지 매력적인 점을 찾지 못했다. 그녀는 축축하고 질척대는 키스, 신경질적인 키스, 세찬 키스, 가벼운 뽀뽀 등 갖가지 키스를 받아 보았지만 그 중에서 마음에 들었던 것이라고는 그녀보다 좀 나이가 많았던 미남 청년여행자의 키스뿐이었다. 그나마 한창 키스 도중에 그 남자가 혀를 들이미는 바람에 망쳐 버리고 말았지만. 그런 기억들 대신 위클리프 백작과 키스를 하면 어떨까 하는 상상이 그녀의 머릿속을 차지했다. 여태까지 체험했던 키스와는 사뭇 다른 경험이 될 것 같았다. 저 도톰한 입술이 그녀의 입술에 닿고 혀가 그녀의 입술을 건드린다는 생각을 하자 혐오감은
커녕 흥분이 솟구쳤다. 그녀는 냅킨을 덥석 집어들어 획획 부채질을 해댔다. 맥시밀리언은 기대앉아 주위의 야단법석을 묘하게 느긋한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아이가 어떻게 그의 가슴 위에서 잘 수 있는지 그로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신기했다. 하지만 제니는 그런 자세에 꽤나 익숙한 것 같았다. 곁눈질로 슬쩍 살펴보니 그의 아름다운 아가씨는 냅킨으로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더운 건가? 다음순간 그녀가 분홍빛 혀를 살짝 내밀어 입술을 축이는 광경이 눈에 들어오자 허벅지 사이가 곧장 생기차게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는 무릎 위의 아이를 의식하고 잽싸게 시선을 돌려 제임스와 토마스가 싸우고 있는 현안에 정신을 집중시키려 했다. 하지만 괘씸하게도 그의 주의는 자꾸 아이들의 누나에게로 돌아가고 있었다. 복도에서 '쾅' 하는 소리가 나더니 여자의 높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 왔다! 다들 식사 중이니?"
"사라 언니 !"
여자아이들은 두말 없이 벌떡 일어나 뛰쳐나갔고 목사는 그런 아이들을 꾸짖기는커녕 너그럽게 미소지었다.
"손님이 계셔! 누군지 알아맞혀 봐!"
맥시밀리언의 뒤편에서 꼬마 계집아이가 숨가쁘게 말했다.
"쉬잇! 들으시겠다."
아이는 제인에게 한 소리 듣고 말았다. 맥시밀리언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입술을 약간 일그러뜨리며 샬로트를 흘끔 바라보았고 순간 서로의 눈이 마주쳤다. 기쁘게도 이젠 그 녹색 눈에서 경계하는 빛이 보이지 않았다. 그 눈은 재미있다는 듯 반짝였고 그 도톰한 분홍빛 입술에는 그가 여태껏 본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미소가 천천히 깃들였다. 그 미소는 오직 그만을 위한 것이었다. 영원과도 같은 순간 맥시밀리언은 그녀의 찬란한 미소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샬로트는 가족이 부르는 바람에 고개를 돌렸다. 그는 묘하게도 뭉클한 기분이었다. 그녀가 가족들에게만 허용하는 친밀감을 황송하게도 나눠 받은 듯했다. 하지만 그의 기분은 오빠다운 감정과는 전혀 거리가 멀었다. 소곤소곤 하며 옷자락 바스락대는 소리와 함께 사라가 식당으로 들어섰다. 맥시밀리언은 그녀가 아버지에게 다가가 볼에 입맞추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녀의 뒤에 바로 붙어 따라 들어온 남자는 남편인 듯 짐을 양 팔 가득히 안고서 호기심 어린 눈초리로 맥시밀리언을 바라보았다.
"아아, 사라 내외로구나."
목사는 자랑스러운 듯 환하게 웃었다.
"이거 정말 놀랍지만 너무나 반갑구나."
"우리 때문에 방해가 된 게 아니었으면 좋겠네요"
사라가 말했다. 그녀는 샬로트와는 전혀 달랐고 쥐색 머리카락에 다소 평범한 용모와 굵고 짙은 눈썹이 오히려 제인과 비슷했다.
"무슨 소리냐."
트로브리지는 부인했다.
"의자를 가져와 함께 디저트를 들자꾸나. 몰리가 맛있는 과자를 만들어 놓았을 게야. 아, 그래, 손님을 소개해야지. 그레이트하우스의 새 주인이 되신 위클리프 백작님이시란다."
맥시밀리언은 목사의 뒤늦은 소개에도 전혀 마음쓰지 않았다. 그보다는 묘하게도 이 천방지축 대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진 느낌이 들었다.
"일어서서 인사를 해야겠지만‥‥‥"
그는 자유로운 한쪽 손으로 가슴 위의 짐을 가리켰다.
"어머나! 제가 데려가 재우겠어요"
사라는 놀란 듯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맥시밀리언은 그녀가 곤하게 자는 아이를 데려가려 하자 순간적으로 실망감을 느꼈다. 이 일가의 장녀에게 호감을 가질 수 있을지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이 여자는 지나치게 진지한 성격이 아닐까? 다음 순간 그는 문득 긴장했다. 언제부터 그가 진지한 사람을 흠잡게 되었던가? 맥시밀리언은 아이를 포기하고 권위적인 사라에게 넘겨주었다. 서식스에는 그를 괴짜로 만드는 뭔지 모를 요소가 있는 듯했다. 아이는 사라가 솜씨 좋게 안아 올려서인지 몸 한 번 뒤채지 않았다. 맥시밀리언은 이제야 좀더 체통을 세울 수 있는 자세로 꼿꼿이 앉았다. 사라의 남편은 체구가 크고 억센 젊은이로, 평범하지만 친근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가 가까이에 있는 의자에 앉자 맥시밀리언은 말상대 할 어른이 생겼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적어도 대화는 나눌 수 있겠지. 그는 안도하며 생각했지만 그 기분은 오래가지 않았다.
"이쪽은 저희 형부인 앨프 스미스랍니다. "
샬로트가 소개했다.
"뵙게 되어 기쁩니다. 백작님."
이것이 앨프가 입에 올린 유일한 말이었다. 앨프 스미스는 아내가 돌아오자 고개를 끄덕여 보이더니 잡아먹기라도 할 듯 자기 앞에 놓인 과자에 와락 달려들었다. 사라는 샬로트 곁에 앉았고 언니 쪽에서 늘어놓는 애정 섞인 불평이 맥시밀리언의 귀에 들어왔다.
"저이를 보렴. 조금 전에 고기 파이 몇 개랑 빵 한 덩이를 먹은 사람이라고는 전혀 짐작하지 못했을 거야. 남자들이란 용광로가 연료를 태우듯이 먹을 것을 마구 집어삼킨다니까."
그녀는 자랑스레 말했다. 맥시밀리언이 추측하기에 앨프의 무시무시한 폭식은 이 집에서만 장점으로 여겨지는 것 같았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사라뿐일 수도 있었다. 왜냐하면 샬로트는 웃긴 했지만 그다지 감명받은 눈치가 아니었다. 그는 이 미녀를 차지하기 위해서 추잡한 식습관을 과시할 필요가 없기를 빌었다. 앨프의 그런 모습은 보는 사람에게 불쾌감마저 안겨줄 정도였다. 샬로트를 차지해? 이제 그는 슬슬 이성마저 잃고 있었다. 구차하게 변명하자면 트로브리지 목사가 따라준 클라레 적포도주 때문이라 둘러댈 수도 있었다. 술 때문에 머리가 멍해진 거야, 맥시밀리언은 그렇게 위안을 삼았다. 이 아가씨는 목사의 딸일 뿐 그이상도 이하도 아니며 하룻밤의 가벼운 기분 전환 거리로나 적당한 상대였다. 그 점을 스스로에게 증명하기 위해 그는 일부러 계산적인 눈길로 흘끗 그녀를 살폈다. 하지만 그의 눈에 뜨인 것은 남동생에게 따스하게 미소짓는 그녀의 분홍빛 입술이었다. 맛있겠군‥‥‥‥그는 옷감이 터질 듯이 팽팽한 그녀의 상반신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아, 저 옷감이 터지기만 한다면‥‥‥‥
"백작님 !"
제임스의 끈덕진 목소리 때문에 그는 샬로트 생각에서 퍼뜩 벗어났다. 그는 제임스와 함께 말 이야기에 끼어들게 되었으며 그 바람에 아이의 동생 토마스까지 가세해 한층 더 큰 입씨름으로 번지고 말았다. 앨프는 과자를 3인분이나 먹어치운 뒤에야 잠시나마 만족한 것처럼 보였다. 늑대 못지 않은 그의 식욕 때문에 그 자리를 뜨기 전에 손가락이라도 물어뜯기는 게 아닐까 하고 걱정하던 맥시밀리언은 그제서야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그들은 모두 거실로 자리를 옮겼다. 가는 도중 맥시밀리언은 그의 주의를 계속 끌던 목표물 곁으로 접근할 수 있었다.
"아냐!"
"맞아!"
"그렇지 않아!"
"아니, 맞다니까!"
제임스와 토마스의 목소리가 복도 저 앞쪽에서 들려왔다.
"저 둘은 뭐든지 의견이 일치하는 법이 없소?"
맥시밀리언은 상반신을 그녀 쪽으로 가까이 숙이고 물었다. 샬로트는 미소지었다. 아아, 이런 미소가 다 있다니. 도톰하고 부드러운 입술 아래로 쪽 고른 하얀 치아‥‥‥ 그녀도 몸을 가까이 숙여 왔으므로 맥시밀리언은 한층 대담하게 더욱 다가갔다.
"아빠가 주먹질을 절대 금지시키고, 의견이 일치하지 않을 때는 문명인답게 대화로 풀라고 명하셨거든요"
그녀의 녹색 눈에서는 웃음기가 반짝였다. 그녀가 그 문제에 있어서 아버지에게 동조하지 않는다는 것은 맥시밀리언이 보기에도 분명했다.
"저렇게 끊임없이 토닥거릴 바엔 가끔 치고 받는 것이 훨씬 나을 텐데 말이오"
"제 생각도 바로 그래요"
그녀는 입꼬리를 틀면서 대답했다. 서로 유머 감각을 공유했다는 느낌이 들면서 그녀와 유대 관계가 형성되었다는 기분이 들었다. 즐거우면서도 묘하고 왠지 불안했다. 그들이 거실에 다다랐을 때 이미 어린아이들은 바닥에 널브러져 체커 놀이를 하고 있었다. 사라 부부는 긴 의자를, 나머지 아이들은 의자를 차지하고 앉았으므로 맥시밀리언과 샬로트에게는 소파밖에 앉을 곳이 없었다. 그 상황이 반갑기는 했지만 그는 낡아빠진 소파를 회의적인 눈길로 노려보았다. 그의 몸무게를 받쳐줄 수나 있을지. 혹은 고양이들이 아직도 그 아래 있지는 않은지 의심스러웠던 것이다. 맥시밀리언은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튼튼하고 견고한 느낌이었다. 그는 숨을 내쉬며 그레이트하우스에 대해 묻는 사라의 예의바른 질문에 대답했다. 그녀의 남편은 배를 든든히 채운 게 분명한 듯 체면 따위는 아랑곳 않고 한 쪽 팔을 아내의 뒤쪽 등받이 위에 올린 다음 고개를 젖히고 잠들어 버렸다. 모두가 모른 척하는 것으로 보아 맥시밀리언은 앨프의 이런 행동이 극히 정상인가 보다고 짐작했다. 그는 불합리하지만 한편으론 마음씀씀이가 다정한 이 집의 가풍을 대하자 껄껄거리며 웃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그의 아름다운 아가씨가 바로 가까이에 있는데도 맥시밀리언은 그녀와 거의 말을 나눌 수 없었다. 사라가 가게에서 보내는 자신의 일과를 늘어놓는 동안 그는 멀거니 눈앞의 광경을 쳐다보기만 했다. 아이들로 우글거리는 거실을 바라보던 그는 문득 묘한 결속감을 느꼈다. 평생 처음으로 그는 자기 자녀를 둔다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았다. 당연히 그는 결혼해 후계자를 낳아야 했다. 그것은 그의 의무였다. 하지만 맥시밀리언은 그 점에 대해 전혀 조급해하지 않았다. 그는 지금껏 모든 것을 예정에 맞춰 실행해 왔듯 결혼과 자녀 문제 역시 계획해 두었다. 결혼은 서른 즈음에 하는 것으로 예정해 두었으므로 앞으로 1년 동안은 신부감을 물색하기 위해 나설 필요가 없었다. 그는 아직 스물 여덟이었으므로 그 문제에 신경 쓰지 않아도 충분히 만족했고 여태까지는 전혀 심사숙고해 본 적도 없었다. 그런데 트로브리지 일가 아이들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자니 이 각양각색의 개성들이 충돌하며 빛어내는 모양새가 그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아이들은 입씨름을 하기는 했지만 거기에는 신뢰와 존경심과 엄청난 애정이 있었다. 맥시밀리언은 문득 자식을 여럿 두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대가족은 보편적인 현상이었지만 그는 외동아들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자신의 의무를 다한 뒤 다시는 아이를 갖지 않겠다고 맹세했었다. 임신을 하면 몸도 아프고 살도 찌고 인생을 마음껏 즐길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결국 어머니에겐 아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던 것이다. 맥시밀리언은 불쑥 마음속에서 솟구쳐 오르는 반감을 억눌렀다. 그래서 그는 위클리프 가문의 저택이 장난꾸러기 아이들의 웃음소리로 가득 찬 광경을 상상하려고 애썼다. 흥미롭게도 그의 마음속에 떠오른 딸아이들 모두가 사방으로 삐친 금빛 곱슬머리를 하고 있었다.
"그래, 샬로트. 린치워스 씨가 너한테 책을 전해 달라고 하셨단다. 오늘 우리 가게에 들러서 너한테 이 책을 빌려주겠다고 하시더구나."
사라의 말이 맥시밀리언의 주의를 끌었다. 사라는 짐꾸러미를 뒤져 작은 책 한 권을 여동생에게 건넸다.
"그게 뭐지요?"
맥시밀리언이 물었다. 놀랍게도 샬로트는 그 책을 보여 주려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에게 보여 주기를 주저하면서 치마폭 아래로 책을 넣어 보이지 않게 숨겼다.
"린치워스 씨는 책을 사면 종종 제게 빌려주시곤 해요"
샬로트는 팽팽해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하."
맥시밀리언은 미소지으며 말했다.
"최신 고딕 소설이오? '수수께끼의 수도원'이나 '트레블린의고통' 같은?"
놀려대는 그에게 발끈했는지 샬로트는 얼굴을 잔뜩 찡그려 보였지만 그 덕에 그녀의 사랑스런 얼굴 생김이 한층 더 귀엽게 보였다 맥시밀리언은 실로 난감해지고 말았다. 그는 소설을 읽는다는 여자들은 종종 보았지만 그 사실을 들켰다고 이렇게까지 불쾌하게 여기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대체 그녀가 숨긴 게 어떤 책이길래? 마음만 먹으면 금세 그녀의 무릎 위로 손을 내밀어 수수께끼의 물건을 꺼낼 수 있었지만 예의상 그럴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는 묻는 듯한 눈길로 바라보며 느긋이 기대앉았다. 샬로트는 당혹스러운 동시에 두려워하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한숨을 내쉬며 그에게 책을 꺼내 보였다. 맥시밀리언은 제목을 흘끗 보고 깜짝 놀랐다.
"소포클레스 희곡집?"
그가 놀라워하며 물었다. 순간 그는 그녀가 고전 문학을 애호하는 그의 취미를 미리 염탐한 게 아닌가 하는 의심까지 했다. 하지만 그런 데에 관심을 가진 척 가장해 봤자 그녀에게 무슨 이득이 있단 말인가? 그는 책장을 펼쳤다. 더욱 놀랍게도 그리스어 원서였다. 흥분이 그에게 와락 밀려들었다. 그는 고개를 한쪽으로 갸웃하고 곁에 자리잡은 사랑스런 얼굴에 시선을 맞췄다.
"그리스어를 읽을 수 있소?"
그는 뜻하지 않게 한층 더 심문하는 듯한 어조로 묻고 말았다. 샬로트는 남몰래 저지른 악행을 비호하기라도 하듯 턱을 치켜들었다.
"그래요."
그녀는 또렷한 시선으로 그를 마주 바라보았다.
"아빠는 우리 모두를 아들딸 구별 않고 열심히 가르치셨어요. 백작님도 알게 되시겠지만요."
그녀의 초록빛 눈동자는 마치 그가 그녀의 배울 권리에 제동이라도 걸었다는 듯 도전 의식으로 이글거렸다.
"그래서 아가씨는 소포클레스의 작품에 흥미를 갖고 있소?"
맥시밀리언은 애써 표정 관리를 하려 했지만 팽팽해진 목소리에는 감정이 여과 없이 묻어 나왔다. 세상의 여인네 가운데 그의 복잡다난한 서재에 관심을 가질 만한 여자가 정녕 존재한단 말인가?
"그래요"
샬로트는 전혀 기죽지 않고 대꾸했다.
"요즘은 에우리피데스의 작품 중에서 메노에케오스(테베 왕가의 왕자)의 죽음을 다룬 부분을 읽고 있어요. 그 덕에 안티고네에 대한 관심이 더욱 커졌지요"
그녀는 이제 정말로 화난 것처럼 보였다. 하얗던 볼에 홍조가 떠올라 더욱 예뻐 보였다. 맥시밀리언은 그녀의 팔을 붙들고 입술에 쪽 소리나게 입맞춰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주위에 관중들만 없었더라면 실행에 옮겼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빙그레 웃기만 했다.
"난 어느 정도 학식이 있다고 자부하고 있지요. 그래서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위클리프 플레이스 저택에 방대한 도서관을 갖고 있답니다. 당신이 찾는 책이 있다면 기꺼이 빌려 드리겠소"
샬로트는 마치 그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는 듯 신록빛 눈동자 위로 금빛 속눈썹을 깜박이며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자신이 학문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렸을 경우 그가 질색하리라 생각했던 모양이다. 상류층에는 지적인 사람을 무조건 경멸하는 바보들이 있지만 그는 그런 부류의 인간이 아니었다. 그는 학문을 사랑하고 영리한 여자를 매력적이라 생각했다.
"아우, 재미없어."
캐리가 투덜댔다.
"한 명 더 늘었네! 저녁 내내 고대 신화 이야기만 주절주절 늘어놓다니 난 안 들을래! 아빠, 절대 못 하게 말리세요"
"캐리 !"
사라가 꾸짖었다.
"하지만 백작님 말씀을 들으니 샬로트와 한통속이신걸. 그런 옛날 이야기에 반색을 하신다니까."
캐리는 툴툴댔다. 소녀는 양손으로 보란듯이 귀를 틀어막았다.
“난 안 들을 테야!"
"제 실수 같군요"
목사는 기쁜 듯 빙그레 웃었다.
"전 고대 역사에 취미가 있지요. 그래서 그 열정을 아이들에게도 전수시키려고 했답니다. 하지만 결국 저와 같은 관심사를 가진 아이는 샬로트 하나뿐인 것 같습니다."
맥시밀리언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그의 아리따운 아가씨를 바라보았다. 그런데도 그는 그녀가 회계에 재능이 없다는 이유로 멍청하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그녀는 멍청하기는커녕 그 반대였다. 그녀는 극히 보석 같은 존재였다. 맥시밀리언은 그런 생각을 떨쳐 버리려 했다. 자꾸 딴 생각에 휩쓸려 드는군. 그래, 이 아가씨는 그리스어를 읽을 줄 알고 나처럼 신화를 유달리 애호하는 취미를 갖고 있다.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목사의 딸에 불과해. 아
무리 열심히 학문을 갈고 닦았다 해도 아직 소녀 티를 채 벗지 못한 촌뜨기 아가씨일 뿐이야. 게다가‥‥‥‥
"아빠, 학문 얘기를 하기엔 시간이 늦었잖아요"
제임스가 불평했다.
"그래요"
토마스도 맞장구쳤다. 두 아이가 마침내 의견일치를 보았다는 사실에 놀란 맥시밀리언은 그들을 빤히 바라보았고 아이들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런던 얘기 좀 해주세요, 백작님. 권투 시합을 보신 적 있나요?"
"백작님도 사두마차 클럽의 회원이신가요?"
제임스가 끼어들었다.
"백작님은 최고 품종 말을 갖고 계시겠죠, 그렇죠?"
토마스가 또 물었다.
"그래, 그래, 그렇단다."
맥시밀리언은 웃으며 대답했다. 그의 아리따운 아가씨와 오붓하게 대화를 나누지 못하는 현실이 개탄스러웠지만 그는 억지로 참으며 느긋이 앉아 소년들에게 런던 생활에 대해 얘기해 주었다. 이 편이 목사관의 거실에는 한결 어울리는 화제였다. 그는 아이들에게만 눈길을 고정시키려고 애썼지만 초록빛 눈동자가 그의 모습을 훑고 있다는 것을 점점 자주 의식하게 되었다. 맥시밀리언은 장화 신은 발을 쭉 뻗으면서 샬로트의 무릎 위에 놓여 있는 두 손을 슬쩍 훔쳐보았다. 하얗고 가느다란 손이었지만 특별하게 우아한 모양새는 아니었다. 솜씨 좋은 손이지, 그는 생각했다. 어떤 솜씨일까‥‥‥‥그는 더 이상 뻗어 나가려는 상상의 날개를 잡아챘다. 다음 순간 그는 그녀에게서 살짝 풍기는 향기를 맡았다. 라일락꽃 냄새‥‥‥‥
맥시밀리언은 제임스와 토마스에게 억지로 정신을 집중시키려 했다. 어느덧 사라는 잘 시간이라면서 아이들을 불러모았다. 그는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보고 놀랐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살펴보는 방문에는 30분 정도만 할애하는 것이 보통이었지만 오늘밤에는 시간이 알지도 못하는 새 쏜살같이 흘러가 버렸다. 정말로 드문 경우였다. 사실 오늘 저녁 시간 전부가 실로드문 경험이었다. 그는 일어났다.
"즐거운 저녁 식사에 재미있는 이야기까지 참으로 감사했습니다"
그는 목사에게 말했다.
"저희야말로 감사를 드려야지요"
트로브리지는 미소지었다.
"백작님이야말로 아이들에게 몇 주 동안 갈 이야깃거리를 안겨 주셨으니까요. 저희들 모두 백작님과 말씀 나눌 수 있어 즐거웠습니다."
"저야말로 즐거웠습니다."
맥시밀리언은 정중하게 말하면서 가족들 모두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다른 가족보다 샬로트에게 시선이 좀더 오래 머무는 것만은 어쩔 수 없었다.
"언제라도 마음 편하게 들러 주십시오, 백작님."
목사가 친근한 태도로 그의 팔을 토닥였다. 목사는 자신의 이런 행동이 얼마나 희한한지 알고 있을까? 위클리프 백작에게 손을 대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하지만 이곳에서만큼은 그도 앨프처럼 따스한 환영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그의 마음은 묘하게 편안해졌다. 사라는 둔해 빠진 남편을 흔들어 깨웠다. 앨프는 벌떡 일어나더니 우물거렸다.
"안녕히 가십시오, 백작님."
맥시밀리언은 웃고 싶은 심정을 억누르며 부부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그는 샬로트의 손에 키스하고 싶었지만 오늘밤 같은 격의 없는 분위기에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 그녀를 그냥 바라보기만 했다. 그녀의 표정에서 이제 경계심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었고 그가 쳐다보아도 반짝이는 눈을 전혀 피하지 않고 마주 바라보았다.
"샬로트, 아주‥‥‥ 즐거웠소"
그녀는 얼굴을 붉혔다. 아마도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린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결국 대담하게 미소지었고 그 바람에 하마터면 그의 자제력이 고삐에서 풀려나을 뻔했다. 서로의 공통된 관심사를 논의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안타까웠다. 하지만 그의 삶에 이 참신한 미녀가 들어설 자리라곤 결코 없었다. 맥시밀리언은 마지막으로 그녀에게 오래오래 찬탄의 눈길을 던졌다. 샬로트는 사랑스러우면서도 순진무구함과 지성을 겸비한 놀라운 존재였고 두 사람의 만남은 그에게 즐거움을 안겨 주었다. 그의 관심을 단번에 잡아끄는 여인이란 드물었고 그럴 경우 그는 그 여인을 보통 정부로 삼곤 했다. 불행하게도 이번 경우에는 그럴 가능성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가 아무리 다른 방법으로 그녀를 원한다 해도 생각할 수조차 없는 일이었다. 결국 그녀는 목사의 딸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