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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청혼 (159)화 (159/164)
  • 159화. 그 후의 이야기(2)

    2021.09.09.

    "고마워요. 계속 곁에 있어줘서요."

    "……."

    "앞으로도 잘 부탁할게요."

    "부탁 안 하셔도 돼요. 카벨레누스의 옆에 있기로 결정한 건, 결국 제 선택이니까요."

    발갛게 물든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도 알리시아는 카벨레누스와 잡은 손을 내보였다. 나탈리는 두 사람의 손가락에서 반짝이는 반지를 보며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행복해 보여서 다행이에요, 정말로. 실은 그게 가장 보고 싶었거든요. 두 사람이 얼마나 행복한지요."

    나탈리는 팔찌를 손끝으로 매만졌다. 그녀의 손목에는 크기만 다른, 같은 모양의 팔찌 한 쌍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팔찌를 선물 받았던 날을 기억했다. 모든 것을 손에 넣은 후에는 꼭 황후로 만들어주겠다고 말하며 이별을 고하던 연인의 표정은 도무지 잊히지 않았으니까. 정작 그녀는 그런 거창한 건 필요 없었는데. 나탈리의 시선이 꽉 잡은 대공 부부의 손에 닿았다. 자신이 그토록 원했던 풍경이 그곳에 있었다. 하지만 질투가 나진 않았다. 오히려 과거의 망령에서 벗어난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다는 사실이 기쁠 뿐이었다.

    "이제 안심하고 떠날 수 있겠다."

    "나중이라도 좋으니 돌아오셔도 됩니다."

    "생각은 해볼게."

    아마 그러진 않겠지만. 나탈리는 뒷말은 속으로 삼키는 대신, 인사를 건넸다. 즐거운 파티를 위해선 슬슬 불청객은 빠져줄 시간이었다. 두 사람은 앞으로 나아갈 수 있지만 자신은 아니었으니까. 언젠간 멋지게 돌아와 팔찌 대신, 반지를 끼워주겠다고 말하던 이는 늘 그렇듯 약속을 지키지 않았으니까. 나탈리는 무의식적으로 손목을 주물렀다. 죄로 얼룩진 이의 것을 차고 있기 때문일까, 유난히도 손목이 욱신거렸다. 하지만 그걸 버릴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나탈리는 화려하게 장식된 천장을 가만히 바라보며 쓰게 웃었다. 그녀가 기억하는 사내는 화려한 것들을 좋아했었다.

    '그러게, 내가 하지 말라고 했을 때 그랬어야지. 바보.'

    멍청한 선택을 한 건 제르페누스였고, 그의 죄를 옹호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적어도 그의 죄를 나눠 짊어질 순 있었을 것이었다. 어리석은 건 자신도 매한가지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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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네가 미카엘, 맞지?"

    머리 위로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미카엘은 서둘러 케이크를 우물우물 삼키고는 입을 열었다. 최근 엄마에게 음식을 입에 넣고 말하지 말라는 예법을 배웠던 참이었다.

    "절 아세요?"

    "알지."

    "누구신데요?"

    엄마가 모르는 사람이랑 대화하지 말랬는데. 미카엘은 알리시아의 경고를 곱씹으면서도 자신에게 말을 건 이에게 눈을 떼지 않았다. 정장을 말끔하게 차려입은 백발의 노신사를 보니 묘하게 누군가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아! 아빠!"

    "음?"

    "아빠를 닮았어요. 할아버지."

    "방금 뭐라고 했지?"

    "아빠를 닮았다고……."

    뭔가 실수한 걸까? 미카엘은 찡그려지는 노신사의 얼굴에 애먼 눈만 데굴데굴 굴렸다.

    "아니. 그거 말고. 그다음에 말이야."

    "할아버지요?"

    "그래. 그거."

    노신사의 얼굴이 밝아졌다, 아니 정확히는 그런 것처럼 보였다.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날렵한 선으로 이루어진 노신사는 표정 자체가 많지 않았다. 미카엘이 카벨레누스에게 익숙하지 않았으면 쉽게 눈치채지 못했을 변화였다.

    "할아버지, 진짜 누구예요?"

    "내가 궁금하긴 한 거니?"

    "그야, 아빠를 닮았으니까요."

    미카엘은 눈을 꿈벅거렸다.

    "내가 그렇게 네 아빠를 많이 닮았니?"

    "네. 지금까지 본 사람들 중에서 가장 많이 닮았어요. 할아버지도 되게……."

    "되게?"

    "음. 이건 말 안 할래요."

    카벨레누스에겐 잘도 무섭게 생겼다고 말하지만, 그건 아빠에게나 할 수 있는 말이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말하면 안 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말하고 싶지 않으면 할 수 없겠지."

    "……."

    "왜?"

    "우리 아빠도 그렇게 말하거든요. 하고 싶지 않으면 하지 말라고."

    "그러니?"

    "네."

    미카엘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슬쩍 테이블에 놓인 케이크를 바라봤다. 슬슬 아빠 닮은 할아버지에 대한 흥미는 떨어지고, 아직 못 먹은 케이크가 생각할 때였다.

    "케이크를 좋아하나 보구나."

    "네. 좋아해요. 맛있잖아요."

    꼴깍-. 침 삼키는 소리에 노신사는 재빨리 테이블의 케이크를 덜어 미카엘에게 건넸다. 케이크 조각 하나에도 아이의 얼굴에는 금세 미소가 만연했다. 노신사는 미카엘이 케이크를 한 입 먹는 걸 확인한 후, 다시 말을 걸었다.

    "다른 건? 더 좋아하는 건 없고?"

    "당연히 있죠."

    "어떤 거지?"

    "엄마요."

    "엄마?"

    "우리 엄마 봤어요? 우리 엄마, 오늘 진짜 예쁜데."

    케이크를 볼 때보다 눈이 더 반짝거린다. 노신사는 포크를 쥔 채 헤실헤실 웃고 있는 미카엘을 보다가 조심스럽게 머리를 쓰다듬었다.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건지, 아이는 만져진다는 것에 별다른 거리낌이 없었다.

    "엄마가 좋나 보구나?"

    "세상에서 제일요! 우리 엄마는요-."

    "뭐 하시는 겁니까."

    뒤쪽에서 나타난 카벨레누스가 고개를 까닥거렸다. 노신사, 멜타 공작은 반사적으로 미카엘의 머리에서 손을 뗐다.

    "적당히 계시다가 가시면 될 것을."

    "아이가 참 예뻐서 말입니다."

    "언제부터 아이를 좋아하셨다고."

    카벨레누스는 시큰둥하게 말하며 미카엘을 내려다봤다. 미카엘은 눈치껏 들고 있던 접시를 등 뒤로 감췄다.

    "케이크 몇 조각 먹었어?"

    "두 조각?"

    "솔직하게 말하면, 엄마에게 이르지 않을게."

    "세 조각이요."

    미카엘은 헤실헤실 웃었다. 카벨레누스는 쯧 혀를 차며 멜타 공작을 스쳐 성큼성큼 걸어갔다.

    "엄마가 케이크는 하루에 한 조각이라고 말했을 텐데."

    "그렇지만 너무 맛있는걸요."

    "이렇게 묻히고 먹는 걸로 봐선 확실히 그래 보이긴 하네."

    카벨레누스는 미카엘의 뺨에 묻은 생크림을 손으로 닦아냈고, 미카엘은 손길이 간지러운지 키득거렸다.

    "오늘은 특별히 봐줄 테니까, 그것만 먹고 접시 내려놔."

    "알았어요."

    "엄마가 기다려."

    미련 가득한 눈으로 포크를 입에 물었던 아이는 엄마 소리에 금세 표정이 밝아졌다. 카벨레누스는 후다닥 케이크 접시를 비우고 멀어지는 미카엘의 뒷모습을 끝까지 지켜본 후에야 다시 고개를 돌렸다.

    "저번에 도움 주신 건 고마운 일이나, 딱 거기까지입니다."

    "……."

    "일평생 멜타 공작으로 사셨으니, 이후에도 그리 사셔야지요."

    카벨레누스가 멜타 공작을 응시했다. 차라리 무슨 감정이라도 있으면 나을 테지만, 자신의 조부를 바라보는 카벨레누스의 표정은 무심하기 짝이 없었다. 결국 멜타 공작은 입을 꾹 다문 채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 * *

    "어떤 사람이었어요?"

    "뭐가 말이지?"

    "멜타 공작, 그러니까 당신의 외할아버지 말이에요."

    "미카엘에게 이야기를 들었나 보군."

    자신은 케이크 이야기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치사하게. 카벨레누스는 어린 아들을 떠올리며 미간을 좁혔다.

    "미카엘에게는 외증조부가 생길 수도 있는 일이잖아요. 물론 당신이 그걸 바란다는 전제하에요."

    "다른 이야기도 들었나 보군."

    "유명한 이야기더라고요. 그게 진짜인지는 당신 이야기를 들어야 알 수 있겠지만요."

    알리시아는 카벨레누스의 어깨에 기댔다. 카벨레누스는 자연스레 그녀를 안으며 긴 숨을 뱉었다.

    "소문과 그렇게 다르진 않아. 대부분 사실이지."

    "멜타 공작이 당신을 버렸다는 것도요?"

    "그래."

    잠깐이지만, 어깨를 감싼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알리시아는 말없이 카벨레누스의 손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 카벨레누스는 또 한 번 숨을 뱉은 후, 다시금 입을 뗐다.

    "내 부모가 모두 죽은 후, 멜타 공작이 내 후견인이 되어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어. 자격 안 되는 이복형보단 차라리 든든한 뒷배가 있는 내 쪽이 황제가 되는 게 나을 거라면서 말이야."

    "그런데, 왜 당신 이복형이 황위에 오른 거죠?"

    "멜타 공작이 내 후견인이 되는 걸 거절했거든."

    "거절이요?"

    매끄러운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카벨레누스는 간지럽히듯 부드러운 손길로 알리시아의 이마에 잡힌 주름을 펴냈다.

    "멜타 공작이 내 후견인을 거절하자, 다들 내가 버려졌다고 수군거리기 시작했지."

    "……."

    "지금이야 힘이 약해지긴 했지만, 멜타 공작 가는 제국에서 손꼽히는 권세가였어. 그리고 그런 권력자가 버린 자에게 손을 뻗어줄 만한 이는 없었지."

    "신전이 개입했을지도 몰라요. 그 사건을 수습했던 건, 대신관이었잖아요."

    "그래도 한 번 정도는 목소리를 내줄 순 있었겠지. 하지만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그저 방관하고 침묵했을 뿐이지."

    어쩐지 목덜미가 뻐근해진다. 카벨레누스는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봤다.

    "만약 그대나, 미카엘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나는 모든 걸 포기할 각오로 싸울 거야. 하지만 다른 것들은 아니지."

    "……."

    "그런 거라고 생각해. 소중하다는 건, 결국 그 사람에게 우선순위가 된다는 뜻이니까. 상황에 따라 더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을 선택하고, 아닌 것은 버릴 수밖에 없겠지. 결국 멜타 공작은 나보다 중요한 것을 선택한 것일 뿐이야."

    "……원망스럽지 않아요?"

    알리시아의 목소리가 떨렸다.

    "원망하진 않아."

    "왜요?"

    "원망도 관심이 있어야 하는 거잖아."

    멜타 공작을 만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과거, 카벨레누스가 전쟁을 마치고 수도로 돌아오던 날이면, 멜타 공작은 여느 귀족들과 마찬가지로 행렬을 구경나오곤 했으니까. 그렇지만 구경꾼들 사이에 있는 멜타 공작의 모습을 보면서도 카벨레누스는 별다른 생각은 하지 않았다. 혈육의 정을 운운하기엔 제대로 된 대화는커녕, 얼굴이나 몇 번 본 게 전부였고, 복수심을 불태울 정도의 열정은 남아 있지 않았다. 이름만 외조부일 뿐, 카벨레누스에게 있어서 멜타 공작은 타인과 다를 바 없는 존재일 뿐이었다.

    "나는 이제 와서 가족 놀이를 할 생각은 없어. 내게 있어서 가족은 그대와 미카엘이면 족하거든."

    카벨레누스의 고개가 천천히 아래로 향했다. 내려다본 여자의 눈가는 젖어 있었다.

    "내가 괜한 이야기를 했나 보군."

    "제가 물어본 거잖아요."

    "그래도 좋은 날 할 이야기는 아니지."

    굵은 엄지가 알리시아의 눈꼬리를 문질렀다.

    "울적한 이야기는 여기까지만 하고 이젠 좋은 이야기를 하지."

    "어떤 이야기를 할까요?"

    "글쎄. 무슨 이야기가 좋을까."

    카벨레누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알리시아는 노골적인 사내의 시선에 반사적으로 마른 침을 삼켰다.

    "실은 오늘은 선물을 확인해보고 싶은데."

    "조금 더 이야기를 하는 건 어때요?"

    "부끄러운가 보군."

    "……어떻게 알았어요?"

    "같이 봤잖나. 어떤 디자인이었는지."

    "그, 그건 그랬죠."

    알리시아는 애꿎은 옷깃만 만지작거렸다. 옷 안쪽에 입고 있던 속옷이 어떤지는 그녀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나는 그대가 왜 이렇게 부끄러워하는지 모르겠어."

    "그게 이런 옷은 처음 입어봐서, 그리고……."

    "그리고?"

    "제 몸이 당당하게 보일 정도로 좋진 않잖아요."

    "그대 몸이 어디가 어때서."

    "당신은 몰라요."

    알리시아는 입을 삐죽거렸다. 카벨레누스야 단련된 몸을 가지고 있어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황홀했지만, 자신은 아니었다. 살이 조금 붙긴 했어도 기본적으로 비쩍 마른 몸은 자랑할만한 것이 아니었다.

    "내가 그대 몸에 대해 모르는 것이 있을 리가."

    "그 말이 아니잖아요."

    "그렇다면 그대가 알려줘."

    "네?"

    "내가 뭘 모르는지."

    부쩍 가까워진 거리에 숨이 멎었다. 어느덧 카벨레누스는 알리시아의 가운 매듭을 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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